전교의 여정에서
김홍섭이 전주지방법원장으로 부임하고 석 달이 지났을 무렵인 1959년 4월 20일 그의 수첩에 적힌 메모이다.
‘오전 치명산과 치명터 숲정이, 오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집터 완주군 이서면 초남 부락 답사.’
전주 지역 순교 유적지 답사 일정이었다. 일행은 김홍섭과 교구 본당의 김 신부, 그리고 교우 박씨, 세 사람이었다. 박해시대 전주 지역의 역사적 고증을 위해 시간을 내어 나선 걸음이었다.
치명산은 김홍섭이 전주로 부임하면서부터 자주 찾아간 곳이다. 전주시에서 남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 산은 첫 대규모 박해인 신유박해(1801년) 때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유항검과 그의 가족들 묘가 있는 곳이다.
해발 500m의 꽤 가파른 산길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거의 매일 치명자 묘소를 찾아 참배하였다.
김홍섭은 전주에서 지내는 동안 순교자들의 역사적 고증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전주와 인근 김제 지역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청년기 꿈을 키우며 지냈던 고향이었다.
지법원장으로 금의환향한 곳에서 김홍섭은 박해 시대의 역사를 짚어 가면서 가톨릭 신자로서 자신을 새롭게 다져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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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이 루갈다 묘 |
특히 그는 이 루갈다(1782-1802)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순이 루갈다는 남편 유중철(요한)과 동정 부부로 살다 순교하여 그 아름다운 사연이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널리 기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홍섭은 가톨릭 교계 일부 이외에는 루갈다에 대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당시의 정황을 두루 섭렵하여 루갈다의 생애와 사적을 널리 소개하고자 애썼다.
서울 왕손의 집안인 이 루갈다는 열다섯에 전주 지방 토호 유요한과 결혼하였다. 일찍이 천주교를 안 이들은 동정 부부로 살기를 맹세하고 오누이 같이 지내다가 박해의 칼날 아래 서슴없이 목을 내놓았다.
김홍섭은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치명한 이 루갈다의 행적을 ‘순교의 정열과 초인적인 극기순의의 정신’이라고 표현했다.
신앙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컸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길에서 천주를 우러르는 기쁨을 가지게 할 수 있었는지, 그는 못내 부러워하였다.
그는 순교 정신은 가톨릭 신자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표본으로 여기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본시 진격하려는 교도에게 있어 순교자의 정신과 그의 사적이란 훌륭한 하나의 도표요 봉화이며 위안이요 격려이기도 한 것이다.
지신, 수계, 수덕, 전교에 있어 순교자의 정신을 상기하고 그를 본뜨기를 바란다는 것은 얼마나 효과적인 방법일 것인가! 천만 사랑이 하나의 행—실천만 못하기 때문이다.’
순교는 가장 높은 경지에 있는 믿음의 실행이라고 그는 여겼다. 김홍섭이 가톨릭에 귀의한 연유 중 하나가 가톨릭 구원이 신앙 외에 선행도 겸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김홍섭은 1953년 영세 이후 특히 이 점에 유념하여 선을 실천하는 신앙인의 삶에 투신해왔다. 기도와 일상생활 속에서의 개인적 신심 활동을 넘어 당시 복지사업을 시작하고 있던 윤을수 신부를 도와 한국 최초의 사회사업 전문학교인 후생학교 건립에도 꾸준히 참여해 오던 터였다.
‘그는 왜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김홍섭은 이 루갈다에 대한 숭앙과 동경의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루갈다 무덤 앞에 자비를 들여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 새길 문구와 문양도 직접 디자인하는 등 정성을 다했다.
비석 앞면에는 루갈다가 남긴 구절을 넣었다. ‘모든 도덕을 구함이 좋으나 그중에 으뜸은 신ㆍ망ㆍ애 삼덕이니 이 세 덕이 영혼에 참으로 들어가면 다른 모든 도덕이 절로 따르리라.’
그리고 비석 뒷면에는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대신 ‘무명 후인’이라고만 써두었다. 자신도 ‘동교후생’으로서 그 길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김홍섭은 전주에서 재임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1960년 1월 26일에 서울 대법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 루갈다를 기리고자 하는 마음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 있었다.
‘루갈다 무덤을 일순하고 그 위의 잔디 두서너 잎을 뜯어서 수첩에 끼워 넣었다. 그러자 나는 다시 그것들을 좀 더 넉넉히 뜯어 원근 지우에게 선사하고 싶은 생각도 가져보았다.’
순교자 무덤가에 핀 풀 이파리를 세상에 나눠주고 싶어 한 마음은 순교 정신을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바람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김홍섭의 그런 희망이 그대로 이어져 후대 전주지역의 교우들에게 전해진 것이 틀림없다.
2000년부터 해마다 9월 순교자 성월에 ‘요안 루갈다제’ 신앙축제를 열어 순교정신 현양 운동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그 분명한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더욱 자랑스러운 일은 김홍섭이 깊이 경애한 이 루갈다가 2014년 마침내 124위 복자 명단에 남편 유 요한과 시부 유항검 그리고 시제들과 함께 그 영광스런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미 반세기 전에 박해 유적지를 돌보고 순교 정신을 기리는 일에 앞섰던 김홍섭은 가톨릭 평신도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일찍이 깨달았던 진정한 선각자였다.
평신도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현양하는 일이야말로 후배 평신도들의 몫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김홍섭은 개인 차원의 구령에만 몰두한 신앙인이 아니었다.
교회 안에서 신자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실행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전교 활동에서 그는 매우 적극적인 실천가요 행동가였다. 천주교회 앞을 지날 때면 응당 가슴에 십자성호를 긋는 김홍섭이 천주를 모르는 이를 찾아다니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강원도 깊은 산골 마을을 방문하고 돌아와 김홍섭은 지인에게 자신의 전교 활동 소감을 이렇게 전한 적이 있다.
‘촌민들이 마음의 의지할 바를 몰라서 미신을 숭상하는 것을 보고 천주 계심과 영혼 불멸 등 천주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네. 그들이 기꺼이 마음을 드러내니 내가 자주 찾아가서 교리를 설명해 주고 있네. 신자들이 많은 곳이 내게는 노다지나 다름없다네.’
김홍섭의 전교 여행은 먼 도서 지역까지 망라했다. 왕복 뱃길로 꼬박 열흘 걸리는 백령도 인근 역시 그의 전교지에 포함되었다. 대청도와 소청도 등 당시 도서 지역에는 상주 신부가 있을 리 없었다.
여름철에 서울교구의 윤을수 신부가 의과 대학생들과 순회진료팀을 이끌고 그곳을 방문할 때 김홍섭은 기꺼이 동행했다. 그는 소청도 공소에서 수십 년 만에 나오는 첫 영세자의 대부를 서는 감동의 순간을 맛보기도 하였다.
소청도의 첫 교우로 김홍섭의 대자인 김준수(베드로)씨는 현재 대구에 살고 있다. 자상하고 다정했던 대부의 모습을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그때 대부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옛날 우리 군인들이 입던 사지 쓰봉, 사실은 모직 바지예요. 여름인데 두툼한 그 바지에 꺼먼 물,
그것도 옳게 물이 들지 않아 얼룩얼룩하게 된 것에다 검은 고무신을 신고, 위에는 하얀 남방, 축 처지는 상의를 입고서 그렇게 다니셨어요.
다음 해 여름방학 때 또 저를 찾아 소청도에 오셨지요. 그때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양복 같은 건 없으시더군요.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 형수님이 해주는 칼국수를 저하고 맞상으로 한 그릇을 다 자시면서 아주 고맙다 하고서는 떠나신 적이 있어요.”
김홍섭의 검소한 옷차림은 주변에서 걱정할 정도였다. 전주 부임할 때도 제대로 입을 외투 하나 없는 그를 걱정해 지인들이 남대문시장 골목에서 한 벌을 사 입혀 보냈을 정도였다.
검소하다 못해 초라할 정도의 행색은 웃지 못할 해프닝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불심검문 중에 순경이 김홍섭에게 누구냐고 물어 판사라고 대답하면 아무도 곧이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른 경찰이 결국 대법원 판사라는 것을 알고 백배사죄했다는 일화도 있다.
출장길에 열차 이등칸을 타고 가노라면 역무원이 김홍섭의 부하직원들에게는 예를 갖추면서 정작 ‘영감님’인 그에게만 의심의 눈초리로 검사를 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럴 때마다 김홍섭은 언제나 공손한 자세로 자신의 신분증이나 기차표를 꺼내 보여주었다. 지위가 높다고 으스대는 모습은 그에게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명함에도 판사라는 직함을 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다 같이 존귀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