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 최부의 표해록 (현대 해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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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가 바라 본 풍경: 제주국립박물관 그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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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의 여로 (본 그림은 제주국립박물관에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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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 일행의 여로:
제주 국립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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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국립박물관 제공)
글을 펼치며
처음부터 최부의 표해록을 쓰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의 행적을 보고 다음 중국여행 때 어디를 갈지 참고나 해보자하는 딱 그 정도였다. 심심풀이 눈요기라 할까. 이에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여파가 크다. 나는 이번 글 바로 전에 "조선의 꽃 열하일기"라는 책을 냈다. 연암도 열하를 다녀온 후 청나라 풍이 들었다고 한때 곤욕을 치루는 데 나 역시 글이 끝났는데도 여진이 남아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라마승을 만나보라는 황제 말을 거역하여 연행 사절이 자칫하다가는 본국으로의 귀환은커녕 객지에서 바로 귀양을 가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를 나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연암은 이왕이면 운남이나 귀주로의 귀양살이 아니면 서촉과 강남 땅을 밟는 것이라면 하는 달콤한 상상을 하는 데 나 역시도 그런 달보드레한 꿈결을 헤매고 싶었을 뿐이다. 최부가 강남을 돌았다는 정보는 익히 입수한 터라 혹여 연암이 소망하던 귀주가 껴 있는가 하는 호기심도 작용했다.
나로서는 어찌 표류를 하다가 어찌 구출된 것인지에 대해서보다는 '어디를 거쳐서 돌아 온거야.'가 더 궁금했다. 그런데 그것은 정녕 아니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며 어느새 나는 그의 표해의 바다 속에 깊이 빠지고 말았다. 사실 그의 글은 성종의 전지를 받고 급히 쓴 글이라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참에 근거하여 짧게 쓴 글이라 느끼기에 따라서는 재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표류를 한 과정은 뭉뚱그려 쉬이 책 페이지를 넘기게도 된다. 그렇지만 그는 짧지만 명확하게 사실을 표현했고 처한 상황의 한 끄트머리도 놓치지 않았다.
절제된 글로서 격을 갖추면서도 표현 정확하고 분명하기 때문 사태를 파악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으며 오히려 글 한자에도 음미의 가치는 수북했다. 험난한 최부와 42인 그들의 여정, 어느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았다. 그 시대 이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표류가 되면 겁에 질려서도 억울해서도 사람은 누구나 달라진다. 죽는 게 더 쉬운 상황이다. 극단으로 치닫던 마구잡이 식 중구난방인 42인은 그로써 일치단결 하여 꿈에 그리던 조선 땅을 다시 밟았다.
글의 표해, 모음과 자음 그리고 받침이 마구 흩어져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과도 같이 그들 42인도 아전, 곁군, 호송군으로 나뉘어 표류를 거듭한다. 그런 그들은 모음과 자음 그리고 받침을 채워 낱말의 의미를 찾듯 종래에는 오합지졸에서 '우리는 하나다.'하는 의미를 얻으며 소생한다. 최부는 그런 과정을 짧은 단어 연결하듯 찬찬히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나타내었다. 진실이기 때문 과정은 눈에 바로 보이듯 선명하였고 결국은 모두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들로부터 내가 얻은 것은 인간 삶의 소중한 가치 그리고 삶의 신뢰에 대한 것이었다.
굳센 절의, 밝은 예절, 높은 인격은 어디서부터 발원하는 것인지 이에 대해 스스로 자득할 좋은 기회가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다. 최부가 돌아와서 청파역 근처에 머물며 단 8일 만에 쓴 글이라는데 나는 솔직히 믿기지가 않는다. 그는 조선 문화뿐만이 아니라 중국문화에도 매우 박식하였다. 관료로서 뿐 아니라 조선 선비로서 과거 급제자가 이 정도라면 하며 다시 또 놀랬다. 독후감으로 걸맞지 않을지 모르겠는데 조선의 사색당파도 똑똑하니 가능한 것이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도 된다. 이 글 집에 나오는 조선 관료들의 애국애족을 보면 다들 일가견이 있으며 맞닿는 그들 의식에 모두 놀랄 것이다.
그는 중국 남북의 문화적 차이, 즉 남방은 번창하고 문명적이고 북방은 가난하고 거친 시대상을 정확하게 기록했다. 마치 1488년 조선과 중국의 정 중앙을 관통한 화살처럼 시대를 확연하게 드러내어 실 모습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으며, 때가 또 명 황제가 바뀐 시기 인지라 섭렵이 가능했던 많은 것들, 특히 관료들과 중국의 실상에 대한 이해는 생각지도 못한 큰 수확이었다.
거기에 때 마침 열하일기를 독파한 터라 강남과 강북, 명과 청, 조선 전기와 후기에 대한 대비 또한 순조로웠다. 열하일기에 나오는 피서산장에서 썼다는 ‘피서록’ 과 장성 밖에서 들었다는 신기한 이야기를 모아 놓은 ‘구외이문’, 동란재에서 썼다는 ‘동란섭필’의 일부 내용은 달필의 그답게 풍속이나 인물, 역사 가릴 것 없이 무진장이라 최부의 말을 뒷받침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유효 적절 했다. 나로선 채광의 기쁨에 본 글 집 또한 도드라지고 다복하여 글 가치나 신뢰적인 측면도 한껏 발휘되어 출중해졌다.
그의 글을 읽다가 보니 사실 항주도 소주도 다 다녀온 곳인데 내가 본 것은 본 것이 아니라는 아득한 생각도 들었다. 왕에게 올리는 글인데다가 그가 상중이라 최대한 감정을 참고 기술한 것이라 사실 글이 딱딱하고 수필가가 접근 하기는 용이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껴들 소지가 있다는 역발상이 생겨났다. 어디까지나 상상은 자유니까 그의 빈 공간을 내가 대신 채운다는 그런, 아무튼 매끄럽지는 않지만 올 곧고 정확한 그의 기술 덕분에 여정의 주제가 되는 키를 바로 찾고 그의 남겨 놓은 여지를 찾고 쫓아 나름 재미도 본 셈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참 세상 희한한 일도 다 있다. 일일이 독수리 타법으로 좌판을 구타하듯 하면서 쓰려니 갈증이 꽤 일었었다, 떠오르는 착상이 순식간에 망가지기도 하고 손도 아프고 짜증도 나고 그러다 보니 훼방꾼이 수시로 마중을 나오곤 했다. 이문이 안 남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요즘 세상 이 늙수그레한 글을 누가 읽겠나 싶은 생각이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 포기의 유혹이 만만하지 않았으며 나의 아주 고질적인 병폐, 하나에 빠져 들면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는 조급증내지 자폐증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이것저것 다 챙겨하려니 글 내용이 어떠하든 역사를 다루는 글은 이래저래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던 차에 이글을 모처에 잘 번역해 놓은 기관(한국 콘텐츠 진흥원)이 있어서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해서 내가 이 글을 가져다 역사수필로 엮어 책을 만드는 데 이용을 하고 싶은데 복사가 안 되어 그러니 도와줄 수 없겠냐고 했더니 자기네들도 그 파일을 만든 업체가 도산을 해서 없는데 뜻이 그러하다니 이번만은 타이프를 쳐서 무료로 제공을 해주겠다고 했다.
원 세상에나. 처음에는 비싼 값을 달라고 할까 봐 '그냥 보기만 되어 있는 거군요.'하면서 끊으려 했던 것인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2`3일내 해 준다니.와우! 그들은 타이프가 밥 먹는 것보다 쉬운가보다 했다. 그런데 단 이용을 한 결과물을 내야 한다고 하기에 그런다고 했다. 그 바람에 어쩔 수없이 '1488년 명과 조선을 관통한 최부의 표해' 란 의미를 담은 책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족쇄가 채워지고 말았다.
결국 일이 커졌다. 아무튼 독수리 타법이 그때부터선 한 숨 돌려 2016년 2월4일부터 시작한 글이 두 달도 채 안되어 초안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최부 선생이 내게 마술을 부린 것만 같다. 우연히 들여다보다 우여곡절 끝 어느 참 필연이 되었고 이제는 운명처럼 그의 글에 매달려 미소를 짓고 있다. 왜 이렇게 좋은 글을 여직 몰랐을까 하는 미안함도 곁에 있다. 여러분도 어느 날 우연히 이 책을 마주하기 바란다. 그러다보면 삶은 왜 성실하여야 하고 공자의 인과 예가 우리의 삶 속에서 어찌 진득하니 살아서 번성하며 삶의 신뢰는 어디서 발원하여 또 어떻게 꽃을 피우는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와우! 고전 책이 밥 먹는 것보다 훨씬 쉽네 하면서 말이다.
**최부의 표해록 번역본은 한국 콘텐츠 진흥원이 제공한 파일을 이용하였지만 글의 바탕은 어디까지나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원호 교수가 발간한 책을 활용한 것임을 밝혀둔다. 나는 간곡히 청하여 박원호 교수의 번역본 사용을 득하였다. **
대덕연구단지에서 조 성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