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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건국과 발전
우리 국사는 신라의 건국을 기원전 58년이라고 가르 친다.
그러나 <수서>는 신라의 건국을 고구리의 동천왕이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토벌 당하며
말갈의 경계에 까지 도망을 하였고 그후 동천왕은 옛 땅으로 돌아 갓으나
동천왕을 따라 돌아 가지 않은 자들이 남아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신라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바로 이 시기의 신라왕이 미추왕이며 미추왕 이전 까지의 신라는
부족 국가의 틀에서 벗어 나지 못하였으니 미추왕 시기 부터 신라는 고대 국가로
기틀을 마련하고 역사에 등장 하는 것이다.
魏將관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는 옥저(沃沮)로 쫓겨 갔다.
其後復歸故國,留者遂건新羅焉。
그 뒤 다시 고국(고려)으로 돌아갔는데,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新羅)를 세웠다.
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之地。
그러므로 그 나라(신라)는 중국, 고[구]려, 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沃沮), 불내(不耐), 한(韓), 왜(?)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
그 나라의 왕(王)은 본래 백제(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傳祚至金진平,開皇十四年,遣使貢方物。
전하여 "김진평"에 이르러, "개황" 십사년에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받쳐 왔다.
高祖拜진平위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고조는 진평위 상개부, 낙랑국공, 신라왕의 벼슬을 내렸다.
신라는 고구리나 백제와는 根本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고구리와 백제는 夫餘에서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隋書>는 신라의 정체를 "新羅國,本弁韓之苗裔也。"
신라국, 본래 변한의 묘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北史>는 북위와 고구리는 부여에서 나왔다라는 기록으로도
부여는 山戎으로 보이지만 신라는 부여에서 나오지 않고 苗裔(묘예)라는 것이다.
묘예는 辰韓이며 진한은 秦韓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의 근본이 진시황의 진나라와 같다는 것을 의미 한다.
그렇다면 진나라의 근본을 알면 신라의 근본이 이디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위 지도에서 보듯이 秦나라의 위치는
지금의 티벳 일대이며 장강의 상류 지점임을 알 수 있다.
즉 신라의 근본은 묘예이며 이들은 장강을 따라서 장강의 하류쪽으로 이동을 하면서
계림에서 동천왕을 따라 돌아가지 않은 고구리 사람들과 백제
그리고 하화족 사람들과 함께 肅愼의 경계에서 신라를 건국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가 미추왕 시기인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후한서>와 <삼국지>의 기록을 보자.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예의 남쪽으로는 진한, 북은 고구려와 옥저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대해 즉 바다와 접하는데 동쪽은 모두 지금의 조선의 땅이다.
지금의 조선의 땅이 중국 동해안 모두라는 것이다.
왜는 기원전 6∼5세기 중원(中原) 북계(北界)를 비롯한 산동반도(山東半島) 및
만주 동북부 지역에 살았던 종족으로 중국의 고전인 『국어(國語)』·『좌씨전(左氏傳)』·
『일주서(逸周書)』·『사기(史記)』·『회남자(淮南子)』·『산해경(山海經)』등에
그 이름이 등장 한다.
"산동반도는 舜 임금 때 부터 조선의 땅"이라는 기록으로도 왜와 조선은
교집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왜=조선인 것이다.
즉 <後漢書>(25~220), <三國志>(後漢 末 부터 西晉 初까지)를 집필하던 이 시기의
중국 동해안은 모두 조선의 땅이면서 이때 조선이라는 이름은 존재햇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왜(진국=조선)의 위치가 한반도임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전기 신라와 후기 신라로 분류 해야 하며
전기 신라와 후기 신라의 분기 점은 味鄒王(미추왕)으로 구분 되어야 한다.
신라 法興王(법흥왕)때 모미추의 후세 일족들이 모씨 성을 버리고
경주를 本으로 하는 김씨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김알지까지 소급적용 하여 김알지를 그들의 시조로 섬기고 있다.
김부식의 <三國史記>는 신라의 건국 년도를 기원전 5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歷史書란 객관성을 갖기 위해 다른 역사서와 비교하고
대조해 보지 않으면 안되는 學文이다.
역사서가 갖는 특성중의 하나가
편찬한 국가나 개인의 주관적 생각이 반영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174년(명종 4년) 고려 사신이 ≪三國史記≫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玉海>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이 이미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일본서기>와 <舊唐書>를 motive로 구성된 역사서이며,
<삼국사기>는 <욀본서기>와 <구당서>가 原本이라는 말이 된다.
<일본서기>는 8세기에 완성이 되고
<구당서>는 940년에 편찬을 시작해서 945년에 완성된 역사서다.
<일본서기>의 신라에 대한 기록은 400년대 이전의 기록이고
<구당서>의 신라에 대한 기록은 600년대 이후의 기록만을 알수가 있다.
물론 조공과 唐 황제가 신라왕을 책봉했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신라에 대한 최초 기록은 <隋書>에 처음 등장한다.
<隋書>는 唐高祖 이연 때인 621년에 편찬 사업을 시작해서
唐 高宗 때인 656년에 완성된 역사서로서
唐의 지배민족인 탁발 선비가 북방민족의 특성을 잃지 않은
시각으로 씌여진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655년이라면 고구리와 백제, 신라가 함께 존재하던 時期이기에
비교적 정확하게 이 당시의 동아시아 역사를 기록했을 것이다.
그런데 <隋書>에 등장하는 백제와 신라의 건국은 <三國史記>와는 전혀 다르다.
<수서>의 신라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정확할수 있다고 판단되는 근거는
<수서>가 편찬되는 시기가 고구리 백제 신라 당이 모두 존재한던 시기에
편찬된 當代의 記錄이라는 점과 신라는 <수서>를 편찬한 당나라와
밀접한 나라 였기에 당나라가 고의적으로 신라를 폄하 하거나
실제와 다른 역사의 기록은 하지 않았을 것이며 역사서를 편찬한 후
<隋書>를 신라에도 보내어 읽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隋書>에 기록된 新羅에 대한 기록을 살펴 보자.
新羅國,在高麗東南,居漢時樂浪之地,或稱斯羅。
신라국(新羅國)은 고려(高句麗)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대(漢代)의 낙랑(樂浪) 땅으로서 사라(斯羅)라고도 한다.
이 기록의 시점은 594년으로 보인다.
이 기록의 싯점은 신라가 眞興王의 손자인 진평왕 때인 594년 전후로 보니다.
즉 진평왕 때의 신라는 낙랑을 확정적으로 차지 하고 있엇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우리 고대사의 진정한 키워드는 樂浪과 遼東의 위치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다.
신라의 역사는 전기 신라와 후기 신라로 구분해야 한다.
왜냐 하면 신라의 종족적 정체성은 묘예이다.
신라왕이 낙랑군공이라는 호칭을 받는 때가 565년,
진흥왕을 使持節 東夷校尉) 樂浪郡公 新羅王으로 삼았다
라는 기록으로 진흥왕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낙랑군공이라는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 하면 고구리의 건흥제는 낙랑을 차지 하면서 낙랑국공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진흥왕은 고구리의 영토를 5백여리를 침공한 때가 진흥왕이며 침탈을 받은 고구리의 군주는
使持節 侍中 驃騎大將軍 領護東夷校尉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이라는 칭호가 붙는 양원왕 이다.
건흥제에게 붙었던 "낙랑국공"이라는 타이틀이 陽原王(545~559)에게는 없다.
아마도 양원왕 때에는 낙랑을 실효적으로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양원왕과 평원왕 시기의 낙랑은 어떤 상태 엿을까?
565년,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眞興王을 使持節 東夷校尉 樂浪郡公 新羅王으로 삼았다.
이때의 일을 <수서>는 신라가 고구리의 영토를 5백여리를 차지 햇다고 기록 하고 있는데
우리 국사가 가르치는 대로라면 이때 신라는 원산만 까지 진출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수서>는 新羅는 고구리의 東南쪽에 있다고 한다.
즉 진흥왕 시기에 신라는 중흥기를 맞이 하는 것이며 바로 이 시기에
신라는 <수서>의 고구리 동남쪽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진흥왕(540~576)은 신라왕 최초로 북제에 의해 "樂浪郡公"이라는
타이틀을 얻는 것으로 진흥왕 시기에 신라는 낙랑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이다.
진흥왕 시기의 백제왕은 성왕이며 성왕때에 熊津에서
사비성으로 천도를 햇다고 하며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고 한다.
백제 역시 도읍지를 천도를 하지 않으면 안되엇을 만큼 위축 되었음을 의미 하는 것이다
신라가 세워지는 동기는 245년 조조의 魏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리를 공격하자
고구리 동천왕은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더 가서 말갈의 경계 까지 도망을 친다.
이 후 말갈의 경계까지 도망갔던 고구리 사람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 왔는데
그들의 일부가 남아 신라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 대로라면 최초의 신라는 말갈의 경계에 존재 했다는 말이며,
신라의 건국 시기는 245년 이후 라는 말이 된다.
백제는 고이왕 234년 최초로 건국된다.
그리고 신라를 구성하고 있던 신라인들의 면면은
華夏, 백제 고구리등의 사람들이 뒤섞여 살았다는 것이다.
옥저, 불내, 한, 왜란 한반도에 존재하던 부족들이다.
어쨋든 지금의 경주에서 시작했고 그후 1천년을 경주와 함께 햇어야 할 신라가
기원전에 건국되었다고 김부식이 천년 신라를 만들기 위해 뻥치는 것이다.
신라가 중국 사료에 구체적인 기록으로 나타나는 것은 眞興王(526~576) 때이다.
즉 6세기 중엽에서야 신라라는 이름이 국제 무대에 등장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다만 진흥왕 이후 1백여년 후의 신라의 국왕의 신분이엇던 무열왕 김춘추가
당나라 左武衛大將軍 神丘道行軍大摠管 蘇定方과 함께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總管)이라는 직함의 당나라 장수로
백제와의 전쟁에 참전하는 기록이 나타 난다,
顯慶五年,命左武衛大將軍蘇定方?熊津道大總管,統水陸十萬。
顯慶 5년(A.D.660; 신라 武烈王 7)에 左武衛大將軍 蘇定方을
熊津道大總管에 임명하여 水軍과 陸軍 10만을 통솔하게 했다.
총사령관으로는 소정방으로서 소정방의 직책은 웅진도대총관이며
이 관직은 웅진을 정벌하기 위한 임시 직책이라는 말이다.
仍令春秋??夷道行軍總管,與定方討平百濟,?其王扶餘義慈,獻于闕下。
이어서 春秋를 ?夷道行軍總管에 임명하여 定方과 함께
百濟를 討平하게 하니, 그 나라의 王 扶餘義慈를 사로 잡아다 임금 앞에 무릅 꿇렸다.
더불어 김춘추는 소정방의 군대를 웅진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군대라는 뜻의
우이도행군총관이라는 직책을 받는다.
自是新羅漸有高麗、百濟之地,其界益大,西至于海。
이로부터 新羅가 점차 고려, 백제의 땅을 차지하게 되니,
그 땅은 더욱 넓어져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唐朝를 도와서 백제와 고구리를 정벌하는 과정을 통해서
신라의 영토는 급격하게 커져 갔던 것이다.
三年,詔以其國??林州都督府,授法敏??林州都督。
용삭 3년(A.D.663; 신라 文武王 3)에 조서를 내려 그 나라를 ?林州都督府로 삼고,
法敏에게 ?林州都督을 除授하였다.
그런데 이때 부터 신라왕의 직위가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 김추추 까지의 신라왕에게 반드시 낙랑국공이라는 칭호가 붙는 것을 볼 수 잇다.
우리가 익히 배워온 낙랑은 지금의 평양 일대로 비정한다.
우리 국사는 고구리가 수와 전쟁 기간중에 고구리 영토를 500리나 침공했다는
한반도 신라를 아래 지도 처럼 비정을 한다.
그러나 통일신라 이후 평양 일대를 포함하게 된다.
신라 전성기의 영토 였던 지금의 함흥 일대를 통일된 신라에서는 잃어 버리게 된다.
그런데 통일된 신라의 영역은 오히려 그 영토가 줄어 든다.
唐朝는 백제를 멸망 시킨 3년 후 김춘추에게는 없었던 계림주도독이라는 직책 하나가
김춘추의 아들 법민에게 계림주도독이라는 직책을 하나를 더 부여해 준다.
벡제는 3년여간 부흥운동을 벌였고 그 부흥 운동이 소멸되는 시기가 663년 이다.
이 시기는 백제 멸망 후 百濟의 영토를 新羅가 확정적으로 확보한 시기로 보인다.
필자는 백제와 고구리를 멸망시킨 당이 신라마져 완전히 멸망시키려 했고
이에 따라서 당과 신라의 분쟁이 시작 되엇고 이것을 羅唐 戰爭이 아니였을까?라는 생각과
이에 견디지 못한 신라가 평양을 포함한 지금의 한반도 남부를 경계로 한 것으로 보인다.
<舊唐書>에서 新羅의 흔적을 더듬어 보자
法敏以開耀元年卒,其子政明嗣位。
法敏이 開耀 원년(A.D.681; 신라 神文王 1)에 卒하니, 그의 아들 政明이 位를 이어 받았다.
貞元元年,授良相檢校太尉、都督?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
785년 수량상검교위와 도독계림주자사와 영해군사 신라왕에 임명햇다.
都督이란 단순히 그 지역 총책임자라는 의미가 있지만 刺史라는 것은 각 州와 國과 都督을
감독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직책인 것이다.
<隋書> 이전의 기록에는 신라의 그림자를 어느 기록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결국 신라는 245년 이후에 세워진 나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첫댓글 신라 건국 AD8년임.
밝혀 졌으니, 많이 배우고 가요...
주사기 이론으로 신라의 기년을 늘였다 줄였다 하는 모양인뎨 님의 이론은 뭔지 모르게 신뢰가 안되요. 마치 사이비 종교랄까?
어떻게 AD8년이 건국입니까? AD14년이 건국이고, 신라본기에도 혁거세 5년에 알영과 결혼하는데, 바로 이때가 AD18년이고, 남당유고 광명대제기에는 7월에 황룡왕 오이가 죽은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알영은 오이의 딸입니다.
'신라 건국=AD8년'..
라디오님께서...아마, 남당유고로 밝히신 것으로 봅니다,....어쨋든 카오스도 '실제에 가장 가깝다'고 봅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해 주시면 좋겠네요..]
[참고] 카오스는 현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기반으로해서 '신라건국=AD4년(2남해차차웅즉위)'을 '잠정결론'으로
하고 있는데,...아무래도 'AD4년(2남해차차웅즉위)'에도 약간의 '시차가 있는 것' 같아서... 라디오님의 남당유고측 기록에 관심이 갑니다...
지금 중국사람들은 한국역사엔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옛날에도 비슷했을 겁니다. 지금 시진핑 주석도 엉터리 얘기를 하고 있는데, 옛날 중국이 황제를 칭하고 천하의 중심을 차지했을 때는 어땠을까요? 일부분의 주장일 뿐이고, 제대로 알기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중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변방에 관한 이야기이고, 왜곡할 가능성이 적지만, 또 그만큼 깊이있게 알려고 하는 사람도 많지 않고, 그 당시 그들이 무슨재주로 고구려사나 백제사 신라사 역사책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접한 사실은 진실의 일부라고 생각해야 맞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중국사서라고 다 믿을 건 못되죠. 일부 맞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하지만 일본서기 삼국사기 또한 중국사서를 참조로 역사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그 일부분 만이라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사서는 우리나 일본을 굳이 조작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조이 '중국사서는 우리나 일본을 굳이 조작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 과연 그럴까요?.... 중국측(현,중국의 고대국가들)이 '더 많은 조작(왜곡)의 필요성'을 가지고 '조작과 왜곡을 주도했다'라고 보아야 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인간들은 역사를 왜 기록하는가?'..'누가 역사기록을 남기고 싶어하는가?'..라는 등등의 '가장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한번 생각해 보시면,.조금 더 실상에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만일,'지금의 역사기록들이 왜곡(조작)되었다'고 확신한다면, 한번 '왜곡해야만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과연 어떻게했었을까?'를 가정해서 깊이 심사숙고해 보면, 비로소 '조작(왜곡)의 방법'이 보일 것입니다
@카오스 문제는 그러한 역사책을 바탕으로 김부식은 12세기에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는 것이죠.
왜곡된 역사책으로 편찬한 삼국사기는 그 자체가 왜곡되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