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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
1943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 영남대 국문과를 졸업 동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2년 『현대문학』으로 데뷔했고, 1976년부터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 시집『낱말 추적』 『청산행』 『전쟁과 평화』 『우수의 이불을 덮고』 『내 사랑은 해지는 영토에』 『시민일기』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열하를 향하여』 『유리의 나날』 김수영문학상(1993), 후광문학상(1991), 대구문학상(1986), 금복문화예술상(1990), 도천문학상(1993) 등을 수상. 현재 영남대 교수와 영남어문학회 회장으로 재직중
------------------------------------------------게시된 시------------------------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 이기철 돌에 대하여 /이기철 시월의 사유 / 이기철 詩 / 이기철 청산행 / 이기철 유리(琉璃)의 길 3 / 이기철 봄밤 / 이기철 몸에 대한 질문 / 이기철 작은 이름 하나라도 / 이기철 삼동(三冬)편지 / 이기철 저녁빛에 마음 베인다 / 이기철 문학이 암보다 고통스럽다 * / 이기철 별이 뜰 때 / 이기철
들판은 시집이다 / 이기철
천천히 걷는 들길은 읽을 것이 많이 남은 시집이다 발에 밟히는 풀과 꽃들은 모두 시어다 오전의 햇살에 일찍 데워진 돌들 미리 따뜻해진 구름은 잊혀지지 않는 시행이다 잎을 흔드는 버드나무는 읽을수록 새로워지는 구절 뻐꾸기 울음은 무심코 떠오르는 명구다
벌들의 날개 소리는 시의 첫 행이다 씀바귀 잎을 적시는 물소리는 아름다운 끝 줄 넝쿨풀은 쪽을 넘기면서 읽는 행이 긴 구절 나비 날갯짓은 오래가는 여운이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혼자 남는 파밭 종달새 날아오르면 아까 읽은 구절이 되살아나는 보리밭은 표지가 푸른 시집이다 갓 봉지 맺는 제비꽃은 초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다
벅찬 약속도 아픈 이별도 해본 적 없는 논밭 물소리가 다 읽고 간 들판의 시집을 풀잎과 내가 다시 읽는다
2004년 「 시안 」여름호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 이기철
저녁이 되면 먼 들이 가까워진다 놀이 만지다 두고 간 산과 나무들을 내가 대신 만지면 추억이 종잇장 찢는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겹겹 기운 마음들을 어둠 속에 내려놓고 풀잎으로 얽은 초옥에 혼자 잠들면 발끝에 스미는 저녁의 체온이 따뜻하다 오랫동안 나는 보이는 것만 사랑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해야 하리라 내 등뒤로 사라진 어제, 나 몰래 피었다 진 들꽃 한 번도 이름 불러보지 못한 사람의 이름 눈 속에 묻힌 씀바귀 겨울 들판에 남아 있는 철새들의 영혼 오래 만지다 둔 낫지 않은 병, 추억은 어제로의 망명이다 생을 벗어버린 벌레들이 고치 속으로 들어간다 너무 가벼워서 가지조차 흔들리지 않는 집 그렇게 생각하니 내 생이 아려온다 짓밟혀서도 다시 움을 밀어 올리는 풀잎 침묵의 들판 끝에서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돌에 대하여 / 이기철
구르는 것이 일생인 삶도 있다 구르다가 마침내 가루가 되는 삶도 있다 가루가 되지 않고는 온몸으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뜨겁게 살 수 있는 길이야 알몸밖에 더 있느냐 알몸으로 굴러가서 기어코 핏빛 사랑 한 번 할 수 있는 것이야 맨살밖에 더 있느냐 맨살로 굴러가도 아프지 않은 게 돌멩이밖에 더 있느냐 이 세상 모든 것, 기다리다 지친다 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지치지 않는 게 돌밖에 더 있느냐
빛나는 생이란 높은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치열한 삶은 가장 낮은 데 있다고 깨어져서야 비로소 삶을 완성하는 돌은 말한다 구르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삶이, 작아질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삶이 뿌리 가까이 있다고 깨어지면서 더욱 뭉쳐지는 돌은 말한다
시월의 사유 / 이기철
텅 빈 자리가 그리워 낙엽들은 쏟아져 내린다 극한을 견디려면 나무들은 제 껍질을 튼튼히 쌓아야 한다 저마다 최후의 생을 간직하고 싶어 나뭇잎들은 흙을 향하여 떨어진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들이 가장 그리워했던 부분을 기억하려고 나무를 만진다 차가움에서 따스함으로 다가오는 나무들 모든 감각들은 너무 향기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엽록일까 물관일까, 향기를 버리지 않으면 나무들은 삭풍을 이기지 못한다 어두워야 읽혀지는 가을의 문장들, 그 상형문자들은 난해하다 더러 덜컹거리는 문짝들도 제자리에 머물며 더 깊은 가을의 심방을 기다린다 나뭇잎들, 저렇게 생을 마구 내버릴 수 있다니, 그러니까 너희에게도 생은 무거운 것이었구나 나는 면사무소 정문으로 한 노인이 자전거를 끌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이 나뭇잎보다 더 가벼워질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염소들이 지나간 길을 골라 걷는다 가벼운 것들, 뽕나무잎 누에고치 거미줄 잠자리 제비집 종이컵 볼펜 다 읽은 시집들 그러나 나를 짓누르는 것들, 무거운 것들 불면증 월급봉투 서문시장 팔공산 조지 부시 아프간 전쟁 매리어트 호텔 비자금 영변 경수로 대북송금 김정일 트로츠키 조정래 천리안 이회창 인천공항 유에스 달러
면사무소 은행나무 위에도 가을이 오고 이제 무들이 더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병든 새들과 거지들은 어서 집을 지어야 한다 이 주식의 가을에 사람들은 끝없이 회의를 하고 쫓겨난 염소처럼 나는 혼자 면사무소 옆길을 걷는다 나뭇잎은 아무것도 추억하지 않는다 은행나무가 그렇듯이. 염소가 그렇듯이
詩 / 이기철
성공하려고 시를 쓴 건 아니다 물살같이 가슴에 아려오는 것 있어 시를 썼다 출세하려고 시를 쓴 건 아니다 슬픔이 가슴을 에일 때 그 슬픔 달래려고 시를 썼다 내 이제 시를 쓴 지 삼십 년 돌아보면 돌밭과 자갈밭에 뿌린 눈물 흔적 지워지지 않고 있지만 나는 눈물을 이슬처럼 맑게 헹구고 아픈 발을 보료처럼 쓰다듬으며 걸어왔다 발등에 찬 눈 흩날려도 잃어버린 것의 이름 불러 등을 토닥이며 걸어왔다 읽은 책이 모두 별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식이란 부스럼 투성이의 노인에 다가가는 것 앎은 오히려 저문 들판처럼 나를 어둠으로 몰고 갔으니
그러나 노래처럼 나를 불러주는 것 이기는 일보다 지는 일이 더 아름다움을 깨우쳐준 것은 시뿐이다 나무처럼 내 물음에 손 흔들어주는 것은 시뿐이다 고요의 힘인, 삶의 탕약인
청산행 / 이기철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人家를 내려다 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 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들 서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 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으로 피어오르고 生木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유리(琉璃)의 길 3 / 이기철
개미를 보면 나는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비를 보면 나는 너무 많은 약에 길들였다라는 생각이 든다 잔디를 보면 냉이꽃을 보면 나는 너무 많은 봄을 놓쳐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생이 둥굴레풀 꽃다지 민들레 고사리 우엉잎 도꼬마리 이질풀 아, 나는 너무 많은 이름들을 놓쳐버렸다
구름을 보면 나는 아직도 내 앞에 걸어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강물을 보면 파도를 보면 나는 아직도 내 앞에 출렁거릴 것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봄밤 / 이기철
가난도 지나고 보면 즐거운 친구라고
배춧국 김 오르는 양은그릇들이 날을 부딪치며 속삭인다
쌀과 채소가 내 안에 타올라 목숨이 되는 것을
나무의 무언(無言)으로는 전할 수 없어 시로 써보는 봄밤
어느 집 눈썹 여린 처녀가 삼십 촉 전등 아래
이별이 긴 소설을 읽는가보다
땅 위에는 내가 아는 이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서까래 아래 제 이름 가꾸듯 제 아이를 다독여 잠재운다
여기에 우리는 한 生을 살러 왔다
누가 푸른 밤이면 오리나무 숲에서 비둘기를 울리는지
동정 다는 아낙의 바느질 소리에 비둘기 울음이 기워지는 봄밤
잊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띠고 있다
숟가락으로 되질해온 생이 나이테 없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 낫에
잘린 봄풀이 작년의 그루터기 위에
또 푸르게 돋는다
여기에 우리는 잠시 주소를 적어두려 왔다
어느 집인들 한 오리 근심 없는 집이 있으랴
군불 때는 연기들은 한 가정의 고통을 태우며 타오르고
근심이 쌓여 추녀가 낮아지는 집들
여기에 우리는 한줌의 삶을 기탁하러 왔다
몸에 대한 질문 / 이기철
입은 왜 먹고 말하고 사랑하는 일을 함께 하면서도 피곤하다고, 이젠 그만두겠다고 항의하지 않는가 항문과 고환은 가장 누추한 일을 하면서도 왜 파업하지 않는가 심장은 뛰고 손가락은 집고 식도는 삼키고 위는 움직인다 피는 돌고 위는 저작하고 침은 삭힌다 눈과 코, 입술과 성기는 충실한 일꾼이면서 왜 쾌락을 위한 대가를 원치 않는가 새의 부리는 닦지 않는데 눈부신가 발은 머리가 되지 못했다고 불평하지 않고 손톱은 손이 되지 못했다고 화낸 일 없다 속이 어둡다고 구두를 거부한 발가락은 없다
몸은 언어를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일한다 일은 그들의 밥이고 빵이다.
작은 이름 하나라도 / 이기철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어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삼동(三冬)편지 / 이기철
아무에게도 편지 않고 석 달을 지냈습니다 내 디딘 발자국이 나를 버리고 저 혼자 적멸에 들었나 봅니다 그간 마음에 서까래를 걸고 춘풍루 한 채를 지었다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세간이라 이른다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그 깊은 골짜기에 내려서지 않으면 어찌 먼지 낀 세간이 보이겠습니까 전화가 울릴 때마다 귀는 함박꽃 같이 열렬했지만 마음의 회초리 열 번 쳐 세상의 풍문에 등 돌렸습니다 법어(法語)를 읽다 주장자(柱杖子)를 부러뜨린 선승이 계신다구요 물소리를 가르고 그 속에 뼈를 세우기가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기와 같다구요 세상이 날려보내는 말들이 비수가 되어 꽂힐 때마다 자갈돌 쌓아 올려 석탑을 이루는 석공의 인고를 생각했습니다 오래 소식 주지 마셔요 깊을 대로 깊은 병이 암을 지나 보석이 될 때가 오면 햇빛같이 사실적인 편지 드리겠습니다 자꾸만 인생무상이라고 쓰려는 마음을 꾸짖으며 추운 가지에 둥지 튼 새를 쳐다봅니다 또 소식 드리지요
저녁빛에 마음 베인다 / 이기철
저 하루살이 떼들의 반란으로 하루는 저문다 나는 자줏빛으로 물든 이런 저녁을 걸어본 적 있다 강물이 잃어버린 만큼의 추억의 책장 속으로 내가 그 저녁을 데리고 지날 때마다 낮은 음색의 고동을 불며 청춘의 몇 악장이 넘겨졌다 누가 맨 처음 고독의 이름을 불렀을까 적막 한 겹으로도 달빛은 화사하고 건강한 소와 말들을 놓쳐버린 언덕으로 불만의 구름 떼들이 급히 몰려갔다 위기만큼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은 없다 깨어진 약속의 길들이 향수병을 터뜨리고 넘어진 빈 술병에는 싸구려 달빛이 담겼다 저 집들에는 몇 개의 일락과 몇 개의 고뇌와 몇 겹의 희망과 몇 겹의 비탄이 섞여 있다 거실에서는 덧없는 연속극들이 주부들의 시간을 빼앗고 이제 어디에도 고민하며 살았던 시인의 생애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시간은 언제나 뭉텅뭉텅 가슴속의 추억을 베어낸다 그것마저 이제는 아무도 슬픔이라 말하지 않는다 어린 새가 공포로 잠드는 도시의 나뭇가지 위로 놀은 어제의 옷을 입고 몰려오고 나는 자줏빛으로 물든 이런 저녁을 걸어본 적 있다 어둠 속에서도 끝없이 고개 드는 사금파리들 그 빛 한 움큼만으로도 언덕의 길들은 빛나고 그런 헐값의 밤 속에서 호주머니 속 수첩에 기록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결코 길들일 수 없었던 통증의 저녁도 순한 아이처럼 길든다 아픈 시대처럼, 말을 담고도 침묵하는 책장처럼
문학이 암보다 고통스럽다 * / 이기철
어떤 사소한 글이라도 그에겐 혈흔이다 어떤 글은 병이 되어 그의 생을 쉬이 저물게 한다 아무리 작가는 말을 만드는 사람이라 해도 문학이 암보다 고통스럽다는 말은 만든 말이 아니다 가슴으로 한 말이다, 피 뱉듯 한 말이다 동서고금의 시인 작가들이 다 생을 채색하며 살다 갔지만 그들이 남긴 수천수만의 미사여구도 읽고 난 뒤 수삼일 안에 캄캄한 페이지 안에 갇힌다 그러나 어제 암으로 죽은 작가의 말 한 마디는 나의 뇌리에 정으로 박혀 있다 손잡아 길 인도할 사람 없는 칠흑의 밤길을 등불도 없이 걸어간 사람의 말이 또 불면을 데리고 온다 어디 뻘과 진창 구렁텅이 물웅덩이가 있는지도 모르고 별의 말을 캐며 가는 사람 사람들이 시장으로 달려갈 때 그들은 문장 속으로 걸어간다 사람들이 황금을 암보다 무서워할 때 그들은 문학을 암보다 고통스러워한다 멋지게 잘 사는 꿈 한번 꾸지 않은 사람 있으랴 미식과 숙면과 향연을 마다할 사람 있으랴 그러나 스스로 고통을 수저질하며 사는 사람 있다
먼저 간 작가여 바람이 잎사귀를 흔드는 지상에서 오늘 밤에도 그대 남긴 말 다섯번째 베껴 쓰는 사람 여기 있다
* 문학이 암보다 고통스럽다: 작고한 소설가 박영한이 죽기 전에 한 말.
별이 뜰 때 / 이기철
나는 별이 뜨는 풍경을 삼천 번은 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별이 무슨 말을 국수처럼 입에 물고 이 세상 뒤란으로 살금살금 걸어오는지를 말한 적이 없다
별이 뜨기 전에 저녁쌀을 안쳐놓고 상추 뜯으러 나간 누이에 대해 나는 쓴 일이 없다
상추 뜯어 소쿠리에 담아 돌아오는 누이의 발목에 벌레들의 울음이 거미줄처럼 감기는 것을 말한 일이 없다
딸랑딸랑 방울을 흔들며 따라오던 강아지가 옆집 강아지를 만나 어디론가 놀러 가버린 그 고요함을 말한 일이 없다
바삐 갈아 넘긴 머슴의 쟁기에 찢겨 아직도 아파하는 산그늘에 대해,
어서 가야 하는데, 노오란 새끼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벌레를 잡지 못해 가슴을 할딱이는 딱새가 제 부리로 가슴 털을 파고 있는 이른 저녁을 말한 일이 없다
곧 서성이던 풀밭들은 침묵할 것이고 나뭇잎들은 다소곳해질 것이다
부엌에는 접시들이 달그락거리며 입 닫은 딱새의 말을 대신 해줄 것이다
별이 뜨면 사방이 어두워져 그때 막내별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문간으로 나올 거라는 내 생각은 틀림없을 것이다
별이 뜨면 너무 오래 써 너덜너덜해진 천 원짜리 지폐 같은 반달이 느리게 느리게 남쪽 산 위로 돋을 것이라는 내 생각은 틀림없을 것이다
별이 뜨면 벌들과 딱정벌레들이 둥치에서 안 떨어지려고 있는 힘을 다해 나무를 거머쥐고 있는 것을 어둠 속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별이 뜨면 귀뚜라미가 찢긴 쌀 포대에서 쌀 쏟아지는 소리로 운다고 터무니없는 말을 나는 한 마디만 더 붙이려고 한다.
이것들이 다 별이 뜰 때, 별이 뜨면 생기는 일들이다
<문예중앙> 200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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