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시절 >
나는 1943년 7월 13일 경상북도 경산 한약방 집안의
2남 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한약방을 했다.
어릴 때부터 한자 빼곡한 약재 상자와
약봉지 틈에서 놀며 자랐다.
약도 썰고 심부름도 하고 잠도 함께 자며
특히 할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할아버지의 조기 교육 덕분에
또래보다 한문을 일찍 깨우쳤다.
초등학교 들어갈 즈음에는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줄줄 욀 수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아들없이 딸만 여섯인 큰집에 양자로 갔다.
그때만 해도 어른끼리 이야기가 되면
당연히 가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큰집도 같은 한약방인 데다 자주 왕래하던 곳이어서
덤덤하게 친부모님 품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집 떠나는 일이 특별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전쟁통에 형이 징집됐고,
누나들도 스물 전에 결혼하거나 직장을 구해 나갔다.
나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났다.
자취를 하며 포항 구룡포중학교를 다녔고,
대구에 있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1960년 전후에는
큰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세계문학전집’, ‘현대사상강좌’ 같은 전집류를 펴냈다.
대학생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선
월간지 ‘사상계’ 가 인기였다.
처음엔 그런 책들을 한 권씩 독파하는데 성취감을 느겼다.
책을 읽을수록 모르는 내용을
더 깊이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한약방을 물려받길 원했지만,
책 읽기에 심취한 나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리라 일찌감치 결심했다.
아내와 교제하던 몇 년간 나는
내내 별 볼일 없는 학생신분이었다.
성악을 전공한 손위 처남 나영수
( 前, 국립합창단 단장, 재즈 가수 나윤선이 그의 딸이다)의
서울대 몇해 후배라는 점도
처가에서 반길 만한 조건은 아니었다.
반대로 아내는 누가 보더라도
부잣집 맏며느릿감이란 말을 듣는 처지였다.
나보다 일찍 학교를 졸업한 아내에게 들어오는
중매나 구애를 물리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그대 없인 못살겠노라 승부수를 띄운끝에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는 그렇게 딸부잣집 맏며느리가 되었다.
인왕산,북한산,북악산의
사계절 풍경을 마주해 즐길 수 있는 위치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고심끝에 결국 나는 건물을 구입했다.
약 3년간의 보수 공사 끝에 지금의 외관을 갖추었다.
건물명은 '뉴퍼시픽 빌딩' 에서
'한국갤럽 빌딩' 으로 바뀌었다.
조지 갤럽 박사는
1940년 'The Pluse of Democracy' 라는 책을 냈다.
그의 표현대로 여론이 민주주의의 맥이라면
여론조사는 민주주의의 맥을 측정하는 맥박계다.
선거 여론조사는
선거의 과정을 보여주는 유일한 도구다.
공공 부문 여론 조사는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 방향 설정의 토대가 되고,
민간 기업이 의뢰하는 조사는 기업 의사 결정의 근거가 된다.
여론 조사에 대한 접근은
매출 증대를 최종 목표로 삼는 마케팅과는 달라야 한다.
새로운 마케팅 방법의 성패는
하나의 사례로 남을뿐이지만,
여론조사 결과는 시대의 기록이며 역사의 일부다.
그렇기에 무턱대고 신기술을 가져다 쓸수 없고,
질문 한개도 허투루 해선 안된다.
조사인은 자신이 세상에 내놓는 조사 결과에
언제나 무거운 책임이 뒤따름을 명심해야 한다.
첫댓글 고교 동기, 절친이었음니다 며칠 전에 떠나보고 옛 생각에 잠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