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가 왜 필요한가 / R.C. 스프로울
앞에서 세 가지 기본적인 신학사상이 존재한다고 말했듯이, 속죄의 필요성에 관해서도 역시 세 가지 기본적인 견해가 존재한다. 소시니우스주의자와 펠라기우스주의자는 속죄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이들은 속죄가 "가설적으로" 필요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해 보자. 속죄의 "가설적" 필요성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많은 방법 가운데서 십자가를 선택하셨다는 견해를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구원 방법으로 속죄를 선택하셨지만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그냥 간과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극적인 일을 행하기로 결정하시고 그 일을 위해 스스로를 헌신하셨다. 속죄가 필요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속죄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결국 속죄는 하나님이 만드신 언약, 곧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에 따라 어떤 일을 이루시겠다는 언약 때문에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약속은 단순히 하나님의 호의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런 약속을 하신 것뿐이다. 하나님은 일단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정하신 대로 이행하셔야 했다. 이것이 바로 속죄의 가설적 필요성에 함축된 내용이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의 견해는 다르다. 정통 기독교에 따르면 속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가설적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면 속죄가 왜 절대적으로 필요한가? 이 문제는 4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펠라기우스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한 하나님의 성품과 죄의 본성을 잘못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한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죄의 본성을 잘못 이해하면, 속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죄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첫째, 죄는 빚이다. 곧 주어진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것을 뜻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부과하셨다. 주어진 책임을 이행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빚진 상태가 된다. 둘째, 죄는 반목이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을 때,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파괴된다. 죄를 지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헌신하는 대신 그분과 반목 관계에 놓이는 것이다. 셋째, 죄는 하나님에 대한 범죄다. 다시 말해 그분의 거룩하심과 율법을 거스르는 범죄 행위다.
죄의 세 가지 기본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 지 알 수 있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고, 반목으로 관계가 파괴되었을 경우에는 관계 회복이 필요하며, 범죄에는 마땅히 형벌이 주어진다.
R.C. 스프로울의 '구원' 60~62p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