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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영화 (섬마을선생)(1967년)촬영지입니다. 김기덕감독이 연출하고 문희 이영일 이낙훈 김희갑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크게 유행했던 이미자의 노래 [섬마을선생]의 내용을 영화한 것입니다. 낙도에 부임한 선생이 몸담았던 학교는 이곳 계남분교였으며, 대이작도 선착장 인근에는 섬마을 처녀 문희가 선생을 태우고 떠나는 배를 바라보며 눈물짓던 소나무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조국근대화라는 60년대 말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작품이었으며 오늘날까지 애칭되는 이미자의 주제가와 함께 그 시 절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환기시키는 작품입니다. |
이 흑염소 주인이 영화 한 장면에 직접 출현했었다고 한다.
계남교회의 도로따라 띄넘어 해수욕장이 잠시 조망되며 [삼거리]에 닿고
오른쪽 도로 위 x69.7봉에 집 한 채가 있고 그 위 빈터와 철탑, 으슥한 곳에 하얀원형의 기도원같은 곳이 있었다. 다시 삼거리
로 내려서 도로를 따르게 되며
목장불해수욕장의 [목장불해수욕장, 계남마을(영화촬영지)0.5km, 큰풀안 2.0km, 장골마을 2.0km] 이정목을 지난다.
목장불해수욕장으로 발길을 돌려 고운모래사장의 해변에서 잠시 쉬어간다. 승봉도가 지척인 이곳에서 영화의 한 장면으로
쓰면 어떨까 하는 착각을 한다. 산 언덕 집 한 채가 이곳 해변을 바라다 보고 있었다.
도로 따라 걸으며 솔숲을 걷는 힐링이 된다.
[삼거리]의 이정목 '송이산(정자) 0.5km, 여객선부두 3.0km, 계남마을 1.6km'을 지나 산으로 나무계단 따라 오르게 된다.
소이작도에서 보던 원통형 시설물이 보이고
시야가 트이면서 [상공경도]가 멋드러지게 조망되었다.
등골나물꽃 피고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소라, 굴, 꽃게 등 수산자원과 저서생물이 풍부하게 서식하고 있는 바다를 보면서
송이산으로 오른다.
나무계단 밟는 소리 작은 듯 소곤소곤대도 큰소리로 들리는 2.57k㎡의
작은 섬인 대이작도는 큰마을, 장골마을, 계남마을 3개의 마을에서 바다와 함께 섬마을 사람들 200여명이 살아가고 있다는 곳.
삶의 현장에 서 있는 기분이다.
향순아 정영아. 이곳으로 올라 오렴, 목청껏 불렀다. 송이산에 올랐다.
[송이산 정상 188.7m] 작은 정상석은 정자 아래 숲에 있고
정자 위로 올라보면 멋진 해변풍광이 그대로 전해졌다.
정확한 조망도를 보면
왼쪽부터 '강화도, 영종도, 인천(팔미도, 인천대교), 무의도, 영흥도, 승봉도, 화성시, 풍도, 상공경도, 하공경도, 평택, 사승봉도
(모래섬)까지 한 눈에 조망되는 송이산 정상에 올랐다.
정영이가 소리지른다. '풀등'이다. 그렇다 풀등, 모래섬이 고래가 닮은 것 같은 끝없이 펼쳐지는 고운 모래와 탁트인
맑은 하늘은 풀등을 드러내 보였다.
가보지 못한 승봉도, 상공경도와 하공경도,사승봉도 4곳을 꼽아 보았다.
송이산 삼각점은 정자계단에 자리하고 있는데 계단에 가려져 있었다. 송이산은 대이작도 주변에서 가장 높은 해발 188m의
산으로 산 정상이 뾰족하여 남자산이라 불리기도 했단다.
송이산 정상에 '계남마을 1.5km, 부아산 1.5km, 장골마을 0.5km'의 이정목도 함께 있다.
송이산 둘레길을 걷다보면 송이산 북쪽, 장골아래해변으로 가다 보면 왼쪽 장골습지와 오른쪽 말목장터가 있다는데 말목장터
(마성)은 400년 전 국영목장의 유일한 흔적이었으나 제대로 보존하지는 못해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곳이란다.
소사나무 군락지 속으로 들어 송이산을 내려선다.
[송이산 또는 소리산]0.5km의 푯말을 지나
[장승공원]의 송이서방과 부아각시의 장승이 이제 눈에 들어왔다. 해양생태관이 바로 뒤어 위치해 있고 장골마을의
안내도가 있는 작은풀안해수욕장이 바라다 보이는 풀등팬션 2층 집, 우리방으로 든다.
2층 우리방에서
유곶부리의 바다가 조금 보였다. 파도도 없고 바람도 없는 조용한 저녁, 더위가 물러간 여름 날은 간데 없고 방문을
열어 놓았더니 시원한 바람이 방으로 든다. 이 바람 맞으며 밤을 맞고 예약한 광어와 우럭 회에 부딪는 소리 벗삼아
소주와 맥주 곁들여 잔을 든다.
섬에서 먹는 자연 광어와 우럭이 졸깃하다고 한 잔, 기분이 좋다고 한 잔, 갓 구워 부친 호박전이 맛나다고, 더 한 사발 부탁해
흔쾌히 받아준 팬션 아줌마 였기에 굿!
어제 인천여객터미널서 받아 든 선물더미는 풀지도 못하고 바람이 나르고 시간이 빚어낸 자연의 거대한 조화에 풀등을 생각하
며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
바람이 불고 파도에 밀려 온 모래가 수 천 년을 켜켜이 쌓이고 쌓여 바다 한 가운데 풀들이 만들어졌다는 모래섬의 부푼 마음에
잠못이루다
굿잠이 든다.
다음 날,
부시시 뜬 눈으로 바다의 아침은 조용했다. 6시에 알람시간도 지나 7시가 되어서 어제 먹다 남은 매운탕과 가져온 김치류를
펼치니 한 상이 된다.
정영이의 바지런한 덕이었다.
해양생태관 앞 [대한민국 최고령암석, 25억 1천만년의 사랑]이란 암석에서 찍고 또 찍고 향순이와 두 개 찍다 ㅋㅋㅋ
ㅋㅋㅋ, 아마 정영이가 웃는 걸 알란가.
정영아 두 개 찍었다구.
해양생태관에서 풀등가는 승선표를 산다. 왕복 가격은 10,000원에 승선표와 팔목에 거는 긴 종이테이프인데 물에 풀리지
는 않는 모양이다. [인천 愛仁섬 대이작도, 해양생태자연유산 풀등보전운동]이라 쓰여 있는 길다란 테이프를 팔목에 붙
여야 했다.
'愛仁섬' 혼자 중얼거렸다. 향순이가 혼자 ~~
솔숲 야영장이 있고 인기가 많다는 작은풀안해수욕장의 모습이 펼쳐진 서해바다의 愛仁섬'에서 모래 위에 풀이 자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풀등'으로 떠나 보자 구,
해안 목조데크의 산책로 따라 팔각정 있는 곳으로 모래사장을 걷는다. 파도가 잔잔해 심심한 바다에서 선갑도가 가까이
조망된다. 가 보지 못한 선갑도이기에 선뜻 이름모를 섬으로 다가왔고 그 옆으로 어제 다녀갔을 문갑도가 바다를 채웠다.
그 위에 우리가 있었다.
'풀등2'라 쓰인 모터보트에 올랐다. 우리와 다른 분 2명, 선장과 6명이 풀등으로 작은배는 이내 출발했다. 파도를 가르는
포말도 우리의 함성도 작은배가 기웃하는 스릴도 잠시였다.
너무 짧은 시간 찰라였다. 풀등으로 무대는 옮겨졌다.
산이 아닌 바다. 바다건너 모래섬의 풀등
밀물 때 바닷물에 잠겼다가 물이 빠지면 바다 한가운데 신비로운 모래섬, '풀등'으로 내려선다. 풀등의 크기는 동서로 약 3.6km,
남북으로 약 1.2km에 이르며 면적은 약 47만평 정도에 달하는 드넓은 모래섬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바다의 물결과 바람에 따라
날마다 다른 모양과 넓이를 드러낸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풀등은 '고래등', '풀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고 고래의 등을 닮았다고 해서 '고래등', 갈치 새끼인 '풀치' 떼들이
푸른 바다를 길게 휘저어가는 모양새라고 해서 '풀치'라고도 불린단다.
이름도 많다.
무대는 우리의 놀이터로 하벌천퇴를 누볐다.
정영이 벌리고 파랑새가 되어 보고
향순이 뛰려고 폼잡고, 난 맘껏 올라
또 올라 못 올라 안되네~~ 그러다 뒹굴어 또 한 장~~
셋이서 활짝
둘
둘이서 샷~
맘껏 놀다 고운모래를 발자욱 그리며 선갑도와 문갑도가 보이는 발을 딛고
그림자 만들어 추억을 담는다.
대이작도를 배경으로 백조가 된 향순이, 메롱찍는 정영,
이게 실화냐??
명옥, 정영, 향순의 셋 서명은 풀등에 두고 우리 셋이 모트보트를 타고 부웅~~ 선장님, 내친 김에 우리 이작도 한 번 구경시켜
주이소, 선장님이 웃는다.
팔각정 앞에 내렸다. 아쉬운 시간, 즐겁게 뛰어 놀던 모래섬 우리의 놀이터는 바다 한 가운데 새들에게는 쉬어가는 휴식처였던
곳,
또, 갯벌이 육지의 방파제 역할을 하듯 풀등은 섬의 방파제 역할를 한다고 했다. 파랑에너지를 감소시켜 태풍이나 해일 같은 외
부의 힘을 차단하고 육지의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천연방파제 풀등의 사진은 신났다.
하루에 두 번 고래등 같은 모래언덕이 뜨고 지는 풀등의 면적과 높이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고 하는 아쉬움도 잠시 25억 1천만년
의 대한민국최고령암석을 보면서 작은풀등해수욕장을 걸었다.
[대한민국 최고령암석]
장골마을 도로에 닿아 부아산과 송이산이 해변을 가운데 두고 솟아 있었다. 아침 팬션에서 보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장골마을]
x98봉으로 오르려 했으나 집 마당과 뒤로 오를 수 있는 것 같기에 도로를 따랐다.
[약350년된 적송으로 섬마을에서 숫나무]라고 불리는 보호수와
[약250년 된 적송으로 섬마을에서 암나무]라고 불리는 보호수는 삼신할미의 약수물 덕분에 득남한 부부가 아들의 다복, 다산, 장수
를 기원하기 위해 암수 다수를 심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고 한다.
소나무 위 도로에 삼신할미가 아기를 안고 있는 조형물이 있다.
[삼신할미약수터]가 있다.
약수터는 부아산(159m)을 등반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물을 제공하는 약수터로 고려 때부터 병을 치유하고
소원을 이어져주는 정한수 와, 아기를 점지하고 보호해주는 생명수로 여겨져 왔다고 물맛이 좋다고 하니 부아산을 내
려오다 꼭 들려보아야 할 곳이다.
절개지 철망이 막은 장골고개 못 올라가 희미한 산길로 들었다.
잡목과 숲이 헤쳐 밟아 너른 길과 만나 x98봉으로 오르는 희미한 길이 있다 없다를 잠시 반복하여 길은 x98봉에서 되돌아 나
와야 했다.
너른 길에서 가져온 맥주 한 병으로 셋이 나누어 마시고 장골고개로 내려섰다.
[장골고개]의 이정목은 부아산 0.9km의 거리를 알려 주었고 큰말의 선착장으로 가는 포장도로와 부아산 오르는 포장도로
로 삼거리를 지나
부아산으로 가는 산줄기 위 본릉을 밟았다.
깨잎밭이 있어 한참을 그곳에서 축내고 큰마을을 오가는 차들이 고개를 넘나든다. 하늘에 가을태양을 맞을 듯 쾌청하여
드없이 맑고 하얀구름이 뭉실뭉실 떠 간다.
섬의 맑고 공기 좋다는 실감이 절절로 들고 무거운 응덩이를 치켜 올랐다.
길은 잡풀로 가득 산언덕 잡목이 길을 막았다. 정글이 좋아 , 좋다 해도 가는 길은 못마땅하듯 진행이 되지 않았다. 나야
늘 하는 짓꺼리로 알고 가련만,
멈칫하고 서 있는 모습이 안스러운 친구 둘을 데리고 부아산 정상에 올랐다. 부아산 표지석이 있는 부아산,
[부아산 정상 해발 162.8m]의 정상석앞에 섰다. .
중국과 교역하던 배들이 피항지로 이용했을 정도로 천혜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고 전하는 부아산이었다. 부아산은 부아負兒
아기를 짊어 배다란 뜻으로 수태受胎로 아이배기란다. 사내아이를 잉태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고 지명 또한 그런 뜻으
로 되어 있단다.
대이작도와 소이작도가 둘러 싼 하트모양의 항구가 펼쳐지는 산정, 부아산~~~
[부아산 전망대]에서도 보이는 소이작도와 대이작도의 하트모양이 발아래 있고 선갑도와 문갑도가 지척에 보이는 곳,
전망대였다.
송곳같은 바위가 무더기를 만들어 부아산을 부추키고 있는 것 같았다. 장의자에 나란히 앉아 물 한 잔에 잠시 쉬어 갔다.
산객들이 부아산을 찾아 북적인다.
[봉화대]에는 봉수3개와 부아산의 설명이 기록되어 있고 팔각정이 있다. 다시 복원된 봉화대 모습이어서 옛날 봉화대를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정상 전망데크0.1km, 여갯선부두 2.0km, 송이산 1.5km]의 이정목의 부아산을 내려
[구름다리]를 건넌다.
구름다리는 대이작도 팔경 중 하나인 신선들이 걷는 다리란다.
[공원주차장]
나무데크를 내려서며 전망대가 있는 산봉우리를 보면서 공원주차장으로 내려선다. 산객들의 모습이 보이는 포장도로를
따라
전망데크가 있는 도로를 따라 오른다. 나무그늘이 하늘을 막고 있는 너른 길에 운치가 있어 보였다.
[전망대]에 올라 보았다.
부아산에서 보이던 전망이 아닌 또 다른 섬이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으나 산객은 그 자리를
비워 잠시 머물러 있었다.
부아산과 구름다리가 능선가까이 병풍을 치고 있었다. 아이를 품은 산이라는 뜻과 사내아이를 잉태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부아산이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넓고 푸른 품어 줄 것같은 인심좋은 산으로 다가왔다.
부아산 정상 0.3km, 전망데크(아기업은재) 50m, 송이산 정상 1.3km의 이정목을 지나 내려가는 길은 배타고 선착장으로
향하던 그 정자각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평의자가 있어 편히 쉬어갈 수 있는 산릉에서 끝나는 마루금도 끝인가 보다. 이곳에서 대이작도의 산행이 끝이났다.
삼신할매약수터에 들러 건강하길 바라는 감로수를 마시고 한 병 채웠다.
도로따라 걸어 장골마을의 팬션으로 왔다.
있는 밥과 반찬으로 점심을 먹고 팬션주인의 택배로 선착장으로 왔다. 아마도 섬마을 선생님 영화를 찍었던 시절에 문
희씨가 선생님을 보내면서 숨어서 선생님을 떠나보내야 하는 장면에 나온 문희소나무가 여객선 부두에서 보고 있을께다.
'문희소나무'
15시 30분 대부해운의 배가 대이작도를 출항했는가 보다. 대이작도의 '풀등'에 밑줄을 긋고 있었다. 얘들아 그렇
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