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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특별수도원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1
불기2560(2016)년 1월 23일
1월 23일 아침 7시 30분 교수불자회 수석부회장이신 장상*교수님,
대불련 부산동문회 직전 회장인 박달*사장, 현 부회장인 박득*사장과
문경 봉암사를 참배하기 위해 덕천역에서 만나 출발하였다.
이번 참배는 대불련(대학생 불교연합회) 부산지부 동아대학교와 해양
대학교 동아리방을 법당으로 조성해주시고 한 학교당 1,500만원정도
소요되는 동아리방 법당조성 불사를 계속하여 부산지역 전체 대학
동아리방을 법당으로 조성할 계획인 스님께서 봉암사에서 동안거
중이시고, 봉암사 토굴에서 수행중이신 스님들께서도 많은 협조가
있었기에 재학생을 지도하는 교수로서 장교수님과 대불련 동문
선배로서 박사장등 저희가 스님들께 사의(謝意)를 표하고자 함이었다.
이번에도 기꺼이 동참해주시고, 연구와 강의에 바쁜중에도 귀한 시간을
내어 대불련을 지도해주시어 대불련 동문들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장상*교수님께서는 서울대와 KAIST를 거쳐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해동선원에서 20여년을 수행하셨고 불자들을 위한 불교관련
저서로「불교보감」, 「성불의 길잡이」, 「금강반야바라밀경강론」,
등 10여권을 저술하셨습니다.
장교수님 뿐 아니라 교수불자회의 수행과 교리를 겸하신 여러 교수님
들께서 불교학생회를 지도해주시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자제분이나
친지들중 대학생들이 있으면 불교학생회 가입이라는 대학생활중의
수승한 길을 알려 주신다면, 본인들의 대학생활이 보다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오던 기운이 단전(丹田)인
희양산(曦陽山)에서 크게 취기(聚氣)하여 그 기운이 바위산으로 여물어
지고 봉황(鳳凰)의 모습을 드러내더니, 취기한 기운을 다시 내려 보내
그 기운이 응집된 혈처(穴處)에 봉암사(鳳巖寺)가 자리하고 있다.
해발 999m의 거대한 바위산인 희양산(曦陽山) 남쪽에 서출동류(西出
東流)하는 30리 계곡을 끼고 있어 봉황(鳳凰)과 같은 바위산에 용(龍)과
같은 계곡이 흐르고 있다고 하여 예로부터 이곳은 ‘봉암용곡(鳳巖龍谷)’
이라 불리었다.
봉암사(鳳巖寺)는 지금부터 약 1,100년 전인 신라(新羅) 헌강왕(憲康王)
5년(881)에 도헌 지증(道憲 智證 : 824~882) 국사(國師)가 창건한 고찰로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본거지였다.
봉암사(鳳巖寺)는 조계종 종립선원으로 일반인들은 물론 신도들의
출입도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특별 수도원이다.
봉암사 선원의 역사는 신라 말 지증(智證)대사 도헌(道憲)스님이 희양
산문(曦陽山門)을 이곳에서 개창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고려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사찰의 소임을 볼때는 3천여 대중이 머물러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정진하였으며,
조선조 세종대왕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한 뒤 머물면서
원각경소를 저술하였고.
근대에 이르러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향곡스님 등 젊은
수좌들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일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법대로 한번 살아보자.”는 원을 세웠던 봉암사결사(鳳巖寺結社)가
이곳 봉암사에서 이루어졌으며 오늘날까지 그 서슬 푸른 정신이 이어져 오고 있다.
봉암사 결사는 한국 전쟁으로 인해 아쉽게도 중단되었으나, 정신적으로 오늘날
조계종의 종풍을 이루는 뿌리가 되었으며, 이때 제정된 가사, 장삼, 발우 등은
현 조계종 스님들의 의제의 바탕이 되었다.
출가 수행하는 스님들을 가리켜서 청정대해중(淸淨大海衆), 대해(大海)와 같이
청정한 무리라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봉암사에 모여들었던 서슬
푸른 수좌들은 당시 붉은색 비단으로 만들었던 가사와 장삼을 모두 불 지르고
누더기의 괴색 승복을 만들어 입었다. 괴색은 버리지 않으면 얻어지지 않는,
색 없는 색이다. 이 괴색이 지닌 정신이야말로 당시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는 성철스님을 중심으로 젊은 수좌들이
지키고자 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일 것이다.
현존 건물로는 대웅보전, 극락전, 금색전, 남훈루 등이 있고,
문화재로는 ‘국보 제315호 지증대사 적조탑비(智證大師 寂照塔碑),
보물 제137호 지증대사 적조탑(智證大師 寂照塔), 보물 제169호 삼층석탑,
보물 제171호 정진대사 원오탑, 보물 제172호 정진대사 원오탑비,
보물 제1574호 극락전(極樂殿), 보물 제1748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木造阿彌陀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등
7점의 국가 지정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외 경북 유형문화재 제121호 마애보살좌상(磨崖菩薩坐像)과
경북 문화재자료 제135호 석종형부도,
경북 문화재자료 제591호 일주문(一柱門)이 남아 있다.
일주문 (一柱門)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91호
봉암사 일주문은 1900년대 사진으로 보아, 적어도 18세기 초까지
소급될 수 있는 현 봉암사에서 19세기 전후까지 올려 볼 수 있는
건물로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또 일주문 특유의
건축적 특징에 따라 설치하는 받침 시설의 고졸한 모습이 돋보인다.
민흘림기둥을 한 줄로 나란히 세워 창방과 평방을 짜올린 다포계
형식인 1칸 문으로서 앞쪽에는 ‘희양산 봉암사(曦陽山 鳳巖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뒷쪽에는 ‘봉황문(鳳凰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일주문 사진은 이번에는 촬영하지 못하고 2011년 3월 31일 조계종
제8대 종정이셨던 서암(西庵)대종사 8주기 추모법회 동참시 촬영한
사진이다.)
남훈루(南薰樓)
남쪽 입구쪽에 위치한 건물로서 근래에 지은 것인데, ‘남쪽으로 부처의
향기를 내뿜는다’는 의미를 지닌 이 건물은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형태의 2층 누각으로서 현재 기본선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정면 7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치미에 용머리[龍頭]가 장식되어
있으며, 전각 앞에 4마리의 사자상(獅子像)이 수호를 하고 있다.
창호에는 화려하게 수놓아진 꽃문살로 장식되어 있고,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처리 하였다. 안에는 석가모니삼존불, 후불목각탱,
신중목각탱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모니삼존불(釋迦牟尼三尊佛)과 후불목각탱(後佛木刻幀)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의 좌우 협시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혹은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모신 경우가 많고, 수기삼존(受記三尊)이라
하여 석가모니불, 제화갈라, 미륵보살을 모신 경우도 있다.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방의 약사여래불, 서방의 아미타불 모시는 경우가
많은데, 봉암사 대웅보전은 아마타불의 협시보살로 모셔지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석가모니부처님의 협시보살로 모셨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우협시 대세지보살은 최근에 조성되었지만,
좌협시 관세음보살은 조선 전기에 조성되었으며 특이하게 나무에
흙을 붙이는 기법을 사용하였다고 하며. 이러한 양식의 불상은 그
예를 찾아보기가 힘들며, 규모 또한 상당히 큰 편이어서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한다. (아래사진 좌협시 관세음보살, 위사진에서 부분 크롭)
신중목각탱(神衆木刻幀)
露柱石(노주석)
대웅보전 앞 마당에 2기가 서 있는 露柱石(노주석)은 조성된 시대는
조선시대이나 형태로는 석등의 원초적 형태로 ‘노반지주(露盤之柱)’,
‘광명대(光明臺)’, ‘화사석(火舍石)’, ‘정료대(庭燎臺)’ 등으로도 불리어
지며, 야간법회시 불을 밝히거나, 숯을 피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기능을 가진 석물이다.
극락전 (極樂殿) - 보물 제1574호
신라 경순왕이 피난시 원당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건물로 전하고, 현재
극락전 내부에는 어필각(御筆閣)이란 편액(扁額)이 걸려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 옥개보수가 있은 듯 망와에 소화16년(1941년)이란
기록이 남아 있다.
봉암사에서 극락전은 가장 오래되고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전각이다.
그 형태나 위치로 보아 조선 중후기에 세워진 왕실 원당일 가능성이
높으며, 기단과 초석은 고려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모지붕 높은 단층 몸체에 차양칸을 둘러 마치 중층건물 같은 외관을
구성하고 있으며, 기단 바닥에 장방형 판석을 깔고 그 위에 중층 목탑을
건립한 형태이고, 상층 중앙에는 ‘절병(切餠)’이라 하여 탑의 상륜부처럼
보이는 석조노반(石造露盤)과 보륜(寶輪)을 가설하여 전체적으로 탑의
형식을 채용한 특이한 형태인데, 무엇보다도 건물의 구조가 특이하여
법주사 팔상전(捌相殿:국보 제55호)과 더불어 국내에 현존하는 단 2개의
목탑형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수차례에 걸친 봉암사(鳳巖寺)의 대화재 속에서도 소실을 면하고,
다른 전각들이 모두 불타버린 임진왜란의 병화(兵禍) 속에서도 이
건물만이 건재한 데에는 다른 전각들을 다 태운 왜병(倭兵)들이
극락전(極樂殿)에 불을 붙이기 위하여 불타는 장작개비를 지붕 위에
올려놓았더니 장작개비만 타버릴 뿐 신기하게도 극락전(極樂殿)에는
불이 붙지 않아 왜병(倭兵)들이 극락전 소각을 단념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극락전에 봉안된 아마타여래좌불과
극락의 모습이 잔잔하게 표현된 1904년에 조성한 극락회상탱
지증대사탑비(智證大師塔碑) - 국보 제315호
이 석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인
도헌국사(道憲國師) 곧 지증대사(智證大師)의 탑비로서,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쌍봉(雙峰)
-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도헌국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하대의 불교사
특히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1차 사료가 된다.
이 비는 당대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그가 비문을 지은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제47호)와 함께 4산비문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탑비로서, 그 학술적 가치가 일찍부터 높이 평가되어온 것이다.
이 비에는 탑비를 세운 연대가 밝혀져 있을뿐 아니라, 비문을 쓰고 각자(刻字)한
사람이 분황사의 승려 혜강(慧江)임이 밝혀져 있어서 한국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저자 최치원은 여타 전기자료와는 달리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여섯 가지의 신이(神異)한 사실[육이(六異)]과 여섯 가지의 훌륭한
행적[육시(六是)]으로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전기 서술의 한 특징이다.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왕토
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이 비문 중에 밝혀져 있고 비 건립의 후원자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것도 이 비가 갖는 의의를 높여 준다.
또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이 탑비는 고비(古碑)로, 지증대사의 전기자료적
가치는 물론이고,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선종사·서예사·한문학사 등 한국
고대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갖는 탑비로 평가된다.
***사산 비문(四山碑文) :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도 하는데 최치원이 당대
고승의 행적이나 신라왕가의 능원(陵園)과 사찰에 관해 기록한 것이다.
기록한 시기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앞설 뿐 아니라 다른 전적에서 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많아 한국학 연구의 필수적인 금석문이다.
4개의 비문 모두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으로 구성돼 있는데, 내용이 쉽지 않아
예로부터 많은 해설서가 나왔는데, 유명한 것으로는 철면노인과 박한영의
주석본이 있다. 광해군 때 철면노인이 ‘사산비명’이란 이름으로 낸 주석서는
현존하는 최고의 해설서이자 가장 정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 ; 중국의 육조(六朝)와 당나라 때 성행한 한문
문체로 4자와 6자로 다듬어진 구를 대구(對句)의 방식으로 쓴다.
당나라에서는 공문서에도 이 문체를 사용하였다.
지증대사탑(智證大師塔) - 보물 제137호
지증대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봉암사 대웅전 왼쪽에 서 있다.
지증대사(824∼882)는 이 절을 창건한 승려로, 17세에 승려가 되어 헌강왕
7년(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이듬해인
882년에 입적하였다. 왕은 ‘지증’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적조’라
하도록 하였다.
이 탑은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다.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모양은 8각이다. 밑 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를 도드라지게 조각하였으며, 윗단을 괴는 테두리 부분을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 두툼하게 하였다. 윗단은 각 모서리 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조각을
세우고, 사이 사이에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는데 그 모습이 우아하다. 가릉빈가는
불교에서의 상상의 새로, 상반신은 사람 모습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이다.
가운데받침돌의 각 면에는 여러 형태의 조각을 새겨 넣었는데,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다. 윗받침돌은 윗면에 탑신을 괴기 위한 굄대를 두었으며,
모서리마다 작고 둥근 기둥 조각을 세워 입체감 있는 난간을 표현하였다.
탑신은 8각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고, 앞뒤 2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다. 그 양 옆으로는 불교의 법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나머지 두 면에는 보살의 모습을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 역시 8각이며, 아래에는 서까래가 두 겹으로 표현되어 겹처마집을 보고
있는 듯하다. 처마는 살짝 들려 있으며, 낙수면의 각 모서리선은 굵직하고 끝에
꽃장식이 알맞게 돌출되어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연꽃받침 위로 머리장식이
차례로 얹혀 있다. 지붕돌의 일부분이 부서져 있으나 각 부분의 꾸밈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품격이 느껴진다.
이 탑은 전체적인 비례가 잘 어우러져 있으며, 지붕돌이 조금 넓어 보이기는
하지만 안정감이 있다. 탑 옆에는 탑비가 나란히 서 있어서 지증 대사의 생애와
행적을 알 수 있으며, 비문의 기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헌강왕 9년(883)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대석의 8면에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보개(寶蓋), 보주(寶珠), 영락이
장식된 탁자 위의 사리합(舍利盒)을 비롯하여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합장공양상,
악기를 연주하는 공양상 등을 조각했다. 위 사진에선 합장공양상과 사리합부분이
보인다.
▲지증대사적조탑의 보주 등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금색전(金色殿)
정면 3칸, 측면 3칸에 다포계 양식을 하고 있으며, 둥근 서까래가 네모난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겹처마 팔작지붕 형태를 하고 있는데, 용(龍)마루
끝의 치미를 용머리[용두(龍頭)]로 장식한 화려하고 웅장하다.
지증대사가 봉암사의 화롱점정(畵龍點睛)으로 정한 곳이 이 금색전의
자리라고 한다. 도적의 소굴이 될만큼 기가 센 터에 지증대사는 비보책으로
네개의 처마기둥을 세워 지기를 누르고 2기의 철불을 모셨다고 하는데,
그 중 한 기는 지금도 지하 어딘가에 묻혀있다고 한다.
지금의 금색전은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955년도 다시 건립한 것이며,
전면에 삼층석탑이 있는 것과 금색전 건물의 뒷쪽에 대웅전이라는 편액이
달려있는 것으로 미루어 지금의 대웅보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대웅전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금색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삼층석탑(三層石塔) - 보물 제169호
통일신라시대 탑으로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은 기단이 2단이나,
현재 땅 위로 드러나 있는 이 탑의 기단은 1단이다.
보림사 남ㆍ북 삼층석탑,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과 함께 신라시대
탑으로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에 한국 석탑 중에서 매우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삼층석탑에서 훼손이 심한 보륜을 보존하기위해 상륜부를 복제하여
훼손되고 있는 보륜 4개를 복제한 상륜부에 설치하여 금색전에 보존하고 있다.
조사전(祖師殿)
금색전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형식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한 전각인데, 용마루의 양끝에는 용두(龍頭)가 치미(鴟尾)로
조각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조사(祖師)들의 진영(眞影)을 모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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