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초봄에 귀양살이로 떠났던 정약전·정약용 형제는 흑산도와 강진에서 만날 수 없는 형님과 아우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절대고독을 참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1816년은 두 사람의 귀양살이 16년째, 그렇게도 보고 싶고 만나고 싶던 두 형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극도의 불행을 당하고 맙니다. 그해 음력으로 6월 6일 손암 정약전은 아우가 보고 싶어 눈을 감지 못한 채로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6월 6일은 바로 어지신 둘째 형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날이다. 슬프도다! 어지신 분이 이렇게 곤궁하게 세상을 떠나시다니. 원통한 그분의 죽음 앞에 나무와 돌멩이도 눈물을 흘릴 일인데 무슨 말을 더하랴. 외롭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다만 손암(巽庵) 선생만이 나의 지기(知己)였는데 이제는 그분마저 잃고 말았구나. 지금부터는 학문연구에서 비록 얻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누구와 상의를 해보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가 없다면 죽은 목숨보다 못한 것이다.…” 「두 아들에게 보냄」
형님의 죽음에 눈물 흘리며 탄식하던 다산의 아픈 마음을 간절하게 표현했던 대목입니다. “네 어머니가 나를 제대로 알아주랴. 자식들이 이 아비를 제대로 알아주랴. 나를 알아주는 분이 돌아가셨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같은 편지) 사람에게서 서로를 알아주는 지기(知己)란, 마음과 정(情)만으로는 안 되며, 사상과 철학에 대한 서로의 이해가 전제되어야하고, 학문적 수준이 동급에 이르지 아니하고는 ‘지기’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내와 아들들이 자신의 학문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던 다산은 오직 손암 형님만이 사상과 철학에 대한 이해를 해줄 뿐만 아니라 동포형제로서 동급의 학문 수준, 동급의 개혁의지 때문에 진정한 지기라고 믿었습니다.
다산이 그렇게도 존경하고 사모했던 손암 정약전, 흑산도와 강진이라는 서로 다른 땅에서 귀양 사느라, 16년 동안 만나지도 못하고 영영 이별하고 말았으니, 그 원통함을 누구인들 참을 수 있었겠습니까. 뒤에 다산은 해배되어 고향에 돌아오자 「선중씨 묘지명(先仲氏 墓誌銘)」이라는 제목으로 형님의 일대기를 눈물을 흘리며 기록해놓았습니다. 손암의 인품과 학문, 그분의 뛰어난 재주와 해박한 지식에 대해서도 유감없이 서술해놓았습니다. 정약전에 대한 유일한 자료이자 가장 정확한 일생에 대한 기록입니다.
2016년, 내년은 손암 선생 서세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저희 다산연구소와 실학박물관은 손암 서세 20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움을 열기로 논의를 마쳤습니다. 손암의 탁월한 저서 『현산어보(玆山魚譜)』에 대한 내용과 가치도 자세히 밝히고, 손암의 일생에 대하여도 더 정밀하고 자세히 밝혀 잊혀진 조선의 실학자에 대한 재조명을 하려는 의도입니다. 손암·다산 두 형제의 형제애를 밝혀 야박한 오늘의 파괴된 가정윤리에 대한 일침을 가하려는 뜻도 담겨있습니다. 그렇게 곤궁했던 유배살이, 그런 극한의 고통과 고독 속에서 이룩된 그의 학문, 그런 실학자를 추모하고 존숭하는 국민들의 마음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희망할 뿐입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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