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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 종영한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한글의 창제보다는 한글의 반포로 인한 정치적 대결과 한글을 실제 창제한 세종의 인간적 고뇌가 스토리의 주종을 이뤘다.
드라마를 보면서 문자와 소리에 관한 단편적인 에피소드가 종종 나왔다.
그리고 세종의 열성적인 탐구심과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문자원리에 대한 음운학적인 예들도 비춰졌는데 확실히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완벽주의적인 지적 호기심과 자신의 앎을 실천하고 응용할 수 있도록 하는 마인드를 가졌다.
조선이 창건된지 얼마 안되어서 역동적인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실험정신과 개혁적인 분위기가 이를 가능케 할 수도 있었으리라.
드라마를 너무 진지하게 봤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실제 한글의 창제과정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호기심에 이 책을 사서 읽었다.
예상대로 정기준의 밀본은 허구였으며 오히려 드라마의 정기준의 실제 역할은 집현전 대제학 최만리가 맡았다.
우선 이 책의 미덕은 추리소설을 방불케하는 한글의 조음원리와 문법, 언어사, 한국사, 기호학, 일본어, 한국어, 한자원리 같은 전면적인 인문교양을 총통합하는 언어학적 전문용어를 배제하고 지적 호기심과 흥미를 끌어내는 작가의 필력이다.
그리고 한국인보다 더 한글을 사랑하며 그 사랑의 구체성을 언어학과 한글의 언어사와 문학를 통해 우리에게 고백한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대조해가면서 일본인들에게 세세하게 통사적으로 접근하고 미시적으로 설명하는 그의 섬세함이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놀랍게도 저자는 미술작가로 출발해서 인쇄, 타이포그래피, 사진을 섭렵하고 한국어는 독학한 사람이다.
나이 서른에 다시 한국어학을 배워서 지금은 일본 대학에서 한국어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일본에서 한국어학과 한국어교육학의 정수가 되는 <한국어 교육론 강좌>는 각 권 800쪽에 이르는 전 4권의 대작을 완성해낸 분이다.
주도면밀한 설득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본인의 집요함과 섬세함이 한글 반포과정에서 최만리의 상소문 전문을 이용하면서 조선 사회사와 문화사를 아우르는 최만리입장( 조선 사대부의 정체성)을 제시하면서 세종의 한글이 단지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여 창제한 것이 아닌 기존의 문자체계와 의식전반에 대한 문화혁명을 단행한 것으로 설명한다.
일제시대 한국어 말살 정책을 행한 일본인에 의해 다시 이렇게 한글은 위대한 문자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와 문해교사들에게 강력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무엇보다 한국인의 감성을 자극하는 격조있는 글들이 더더욱 읽기 자체를 행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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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정음>에크리튀르 혁명
- 한글의 탄생 -
<정음>혁명파와 한자한문 원리주의 투쟁
지식인들에게 한자한문은 삶이었으며 죽음이었다
<에크리튀르> = <쓰는 것> <쓰여진 것> <쓰여진 知>
당시 에크리튀르의 모든 것은 한자한문이었다.
知의 모든 것은 한자한문에서 성립되었다.
그것이 세계의 전부였다. 그러한 한자한문의 세계에 아무도 본 적 없는 <정음>이 우뚝 서 있는 것.
이것이 15세기 조선에서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이 출발했을 때의 구도이다.
임금은 최고 권력자이니 <혁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걸까?
아니다. 세종임금이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으로 투쟁한 상대는 왕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막강한 상대였다.
그것은 역사가 쓰여지기 시작한 이래로 오늘날까지를 꿰뚫는 <한자한문 에크리튀르>였다.
투쟁의 상대는 바로 역사이며 세계였다. 知의 모든 것이었다.
역사서, 즉 쓰여진 역사를 펴 보면 알수 있듯이 거대한 에크리튀르의 역사 앞에서 임금은 시호로 불리고 쓰여지는 몇 글자의 고유명사에 지나지 않았다.
왕조 최강의 두뇌집단 = 집현전
세종은 <정음>의 창제에 <집현전>이라는 기관을 총사령부로 삼았다.
집현전은 고려시대부터 그 이름이 보이는 학문연구기관으로 그 이름은 중국 당나라 때의 기관에서 따왔다.
집현전은 고려말부터 긴 시간동안 실질적인 활동이 없었으나 세종이 즉위 다음다음 해인 1420년에 부활시켜 활성화를 꾀하였다.
집현전은 왕조 최강의 두뇌집단이었다. 집현전은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파의 중추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집현전이 조직적으로 혁명을 수행했던 것이라기보다 말하자면 내부적인 조직의 일부 학자가 그 임무를 수행한 듯하다.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의 이데올로그들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의 최고 지휘자는 바로 세종이었고, 세종의 밑에서 이론 투쟁을 지휘한 이데올로그는 집현전에 모인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었다.
『훈민정음』해례본에서 이들 모두의 이름을 그들의 관직명과 함께 볼 수 있다.
<정음>이 창제된 1443년 당시 그들의 나이에도 주목해 보길 바란다.
지금보다 훨씬 어린 시절에 혼인을 했던 당시 사대부들과 현대인의 연령을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모두 젊은 나이다.
정인지 - 정2품 집현전 대제학, 47세
최항 - 종4품 응교, 34세
박팽년 - 종5품 부교리, 26세
신숙주- 종5품 부교리, 26세
성삼문 - 정6품 수찬, 25세
강희안 - 정6품 돈령부 주부, 26세
이개 - 종6품 부수찬, 26세
이선로 - 종6품 부수찬, 연령 미상
이때 세종의 나이는 46세였고, 에크리튀르의 젊은 혁명가들은 모두 대단히 젊은 수재들이었다. 혁명가들은 단순한 지식인, 문인에 머물지 않았다.
강희안은 서거정이 그를 일컬어 시서화의 삼절이며 서예는 왕희지와 조맹부를 겸비하고 있다고까지 절찬했던 예술가였다.
왕립 학문연구기관이자 학술원에 지나지 않았던 집현전의 혁명가들은 세종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제각기 더 깊은 정치의 중추에서 생사를 걸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이 전하는 최만리파의 반<정음>
집현전의 정3품 부제학이라는 지도적 입장에 있었던 최만리는, 자신의 존재를 걸고 왕에게 간언한다. <정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태어난 해는 알수 없지만 세종과 동년배였을 것이다. 왕조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최만리를 비롯한 사대부들이 역설한 바는 왕조의 정사인『세종실록』에 기재된 상소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최만리의 상소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소신들 엎드려 추측하옵건대 언문의 제작이 지극히 신묘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으며, 그 새롭게 창조하여 知를 움직이게 하는 바는 실로 먼 천고의 역사에서 태어난 것이라 하옵겠나이다.
하오나 신들의 부족한 견식으로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한편으로는 심려되는 바가 있사옵니다.
송구스러운 일이오나 감히 충심으로 상소를 올려 엎드려 엄명을 받고자 하옵니다.
우리 왕조는 선조부터 지금까지 모든 성의를 다해 위대한 존재 즉 대중국을 섬기며 오직 중화의 제도를 따라 왔습니다.
지금 글을 같이하고 문물제도를 함께 하여야 할 바로 이때에 언문을 제작하면 그것을 보고 듣고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옛부터 중국 아홉 개의 주 풍토가 다르다고는 하나 그 중 방언에 의거한 다른 문자를 가졌다는 것은 본 적도 없습니다.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 같은 곳에서 각각의 문자가 있는 것은 모두 이적이나 하는 짓이며 논할 여지도 없는 것입니다.
역대로 중국은 모두 조선을 기자조선의 유풍이 남아있어 중화에 필적할 만한 나라로 예우하고 있습니다.
지금 따로 언문을 만듦은 중화를 버리고 스스로 이적이 되려 하는 것이옵니다.
이것이야말로 대누(大累)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것이 중국에 알려져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큰 것을 섬기고 중화를 받드는 마음에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음(音 )에 의거하여 글자를 합치는 것은(用音合字) 모두 옛것을 거스르는 일이옵니다.“
최만리의 상소문을 읽은 세종은 역시 이 구절에 대해서 제일 먼저 반론을 펼치고 있다.
세종 자신이 <용음합자>라는 구절을 무엇보다도 먼저 문제시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이는 문제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가르쳐 준다.
핵심은 문자의 시스템에 있다.
왕궁에서 <정음>을 둘러싼 이러한 언어학적 사상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종은 말한다.
“그대들이 음으로써 글자를 합친다는 것은 완전히 옛것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설총의 이두 역시 한자와는 음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두는 차자표기법의 하나이다. 조선시대에는 하급관리들이 이두문을 사용하였다.
세종은 그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만리는 대답한다.
“설총의 이두는 그 음이 한자의 음과는 다르다고 하나 어디까지나 한자의 음과 훈을 빌린 것으로서, 어조사 종류와 한자는 본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모를 합쳐서 열거하여 쓴다는 것 자체가 그 음이나 훈의 개념조차 흔적도 없이 바꿔 버립니다. 그러한 것은 문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글자의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용음합자>의 사상은 한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이다.
최만리를 비롯한 사대부들의 공포와 전율은 <정음>의 <용음합자>라는 시스템에 있다.
문자는 예부터 세포와 같은 존재였다.
살아있는 세포가 知를 만든다.
살아있는 유기체인 한 글자 한 글자의 한자, 한 글자 한 글자가 의미를 이루는 한자가 知를 만든다.
그러나 <정음>은 세포여야 하는 문자를 분자단위로 해체해 버린다.
나아가 분자는 원자로 해체된다.
당연히 분자는 음절이고, 원자는 음소이다. 의미가 되는 세포를 분해해 나간다.
분자로, 원자로.
『훈민정음』은 “글자는 반드시 합쳐서 음을 이룬다”는 소리를 하고 있다.
“글자는 반드시 합쳐서 음을 이룬다”니?
<문자=한자>란 유기적으로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 자체가 음을 이룬다.
문자란 합치거나 떼어내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음>은 살아있는 유기체인 문자가 무기적인 요소로 해체되어 있지를 않은가.
그런 일이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최만리를 비롯한 사람들은 이렇게도 생각했을 것이다.
쓰여진 역사가 존재한 이래, 우리는 그러한 세포를 단위로 살아온 것이다.
<思考>란 그러한 세포를 단위로 생각하는 것이고, <쓰는 것>이란 그러한 세포를 살아 움직이는 몸으로 키우는 것이다.
문자응로 글을 써 나가는 것은 우리 사고의 세포를 커다란 신체로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쓰여진 언어>란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세포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성리학의 에크리튀르야말로 그 궁극적인 형태인 것이다.
우리는 ‘人 ’이라는 <형태>로 <사람>에 대하여 묻고, ‘山’이라는 <형태>로 <산>을 물어왔다.
이것은 해체하여 '△ㅣS'/Z-I-N/이나 ‘ㅅㅏㄴ’/S-A-N/등으로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知는 ‘人’이나 ‘山’처럼 어디까지나 <문자=한자>를 단위로 성립되어 있다.
그것을 音을 단위로 하여 쓴다고?
그것도 音이 합쳐져 문자고 된다고?
<산>을 ‘ㅅㅏㄴ’으로 해체하면 그것은 이미 知가 아니다. -형태소는 음소로 해체하면 의미를 실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知가 붕괴된다. 에크리튀르가 붕괴된다. 사대부들은 知와 에크리튀르의 근원에 대한 정음의 과격하고도 근원적인 장치에 전율하는 것이다.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이 한자한문 원리주의에 제기한 물음은 <상형>을 기원으로 한 <육서>의 사상으로부터 사분법 시스템인 <용음합자>라는 사상을 향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구도를 최만리파는 또렷하게 간파하고 있던 것이다.
한자가 잊혀질 것이라는 위기감
최만리파는 현실사회도 내다보며 말한다.
<정음>이 행해진다면 에크리튀르가 붕괴되어, 그 결과 관직에 있는 자는 <정음>만을 습득하여 학문을 돌보지 않을 것이다.
관리라는 자가 겨우 27자의 정음밖에 알지 못하고 ‘환달’한다면, 즉 관직에 들어와 벼슬이 정상에까지 오을 수 있다면 누가 고생하여 성리학 등을 배우겠는가.
그렇게 되면 수십 년 뒤에는 한자를 아는 자는 반드시 줄어들 것이고, <정음>만으로 관직의 일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성현의 문자를 모른다면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것과 같아 사리의 이치에는 어두워질 것이 뻔하다.
그리하여 知가 붕괴된다. 최만리와 사대부들의 절규이다.
최만리가 말했듯이 학문이나 이치 등은 둘째 치더라도 <정음>밖에 몰라도, ‘환달한다’.
그렇다. 현대에는 거의 그렇게 되었다.
한자를 아는 사람도 매우 줄어들고 있다.
한국에서는 대학의 국어학이나 고전 교재조차도 팔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자가 섞인 문자을 한글만으로 고쳐 달라고 출판사가 집필자에게 부탁하는 시대가 되었다.
한국의 국가 인장인 국새도 한글이다.
북한에서는 이미 1955년부터 한자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한글만 사용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인명에마저도 한글만을 사용하고 있다.
최만리를 비롯한 한자한문 원리주의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세종을 비롯한 정음 에크리튀르의 압도적인 제압이라는 오늘날의 사태까지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최만리파를 파면했다.
강신항에 의하면 함께 상소를 한 학자들 7명 중 최만리를 포함해 대부분이 다음날 용서받았고 4개월후에는 모두가 복직되었다.
무너뜨릴 것인가, 무너질 것인가 하는 거침없는 정치권력의 투쟁이었다면 이렇게는 안되었을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파와 한자한문 원리주의 투쟁은 정치권력 투쟁의 <이데올로기적인 외피>였던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知를 둘러싼 투쟁이었던 것이다.
<정음>이여 <나랏말씀>을 - 에크리튀르 혁명 선언
『훈민정음』해례본의 첫 부분인 서序에 세종은 스스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나라 말은 중국과 달라 한자한문과 서로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자한문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은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끝내 그 마음을 말하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나는 이것을 딱하게 여겨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다.
이는 오직 사람들이 배우기 쉽고 날마다 사용함에 도움이 되도록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절제된 필치이나 그 뜻은 드높은 선언이다.
그리고 정음의 창제자들은 이『훈민정음』해례본의 한자한문 에크리튀르를 조선어로 표기한다.
이것은 오늘날『훈민정음』‘언해본’으로 불리우는 책이다.
학자들은 1447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왕조를 찬양하는『용비어천가』-<정음>에크리튀르의 탄생
이『용비어천가』는 한문의 번역이 아니라 조선어로 쓰고, 그 조선어에 한문으로 된 번역문과 주를 붙였다.
한문이 ‘주’이고 조선어가 ‘종’이 아니라 반대로 조선어를 ‘주’로 하고 한문을 ‘종’으로 한 것이다.
대중화의 한문을 ‘종’으로 하다니 역사상 유례없는 전면적<정음>에크리튀르의 탄생이다.
“해동의 여섯용이 하늘을 날아다니시어 행해지는 일마다 하늘이 돕는 기쁨이 차 있었다.
옛 성인들이 바로 이러하시었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꽃이 아름다우며 열매도 많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아니하므로 강이 되어 바다로 흐른다“
한자를 한 글자도 포함하지 않은 텍스트.
한자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왕조의 송가를 소리 높여 부르는 서사시의 한 장.
단어의 리스트가 아니라 내적인 연결과 동적인 전개를 가지는 문장이자 글인 <쓰여진 언어>.
그곳에는 나랏말씀이 약동한다. “소리에 따랐기에 음은 칠조에 맞는다.”
방점으로 나타나는 선율과 함께 조선어로 연주되는, <바람에 흔들림없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깊은 물>이라는 음양의 암유는 우리 누구나가 지금 처음으로 체험하는, 한국어의 청초하고도 힘이 넘치는 선율이다.
천년의 시간을 겪으며 한자한문에 가려졌던 이 땅의 말인 것이다.
우리의 눈앞에 시각적으로 형상화된 <쓰여진 언어>로부터, 거룩한 왕조가 이 땅의 말만이 그려 낼 수 있는, 이 땅의 그윽함이자 웅혼함이다.
이와 같은 <정음 에크리튀르>를 앞에 둔 정음의 창제자들,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의 전위들이 느낀 자랑스러움은 어떠하였을까.
이것은 역사속에서 일찍이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한국어의 <쓰여진 언어>였다.
어떤가. 한자문으로 이것을 쓸 수 있는가.
이리하여 모어는 에크리튀르가 되고 知가 되었다.
정인지의『훈민정음』후서 마지막 부분에는 이러한 말이 보인다.
“바라건데 <정음>을 보는 자가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치게 되기를.
그 연원과 정밀하고 깊은 뜻의 묘미는 소신들이 감히 말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정음>은 ‘간이요’, 즉 간결하면서도 요점을 갖추고 있는 것인 만큼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정인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인다.
“정음은 깊다”
제 5 장 <정음> 에크리튀르의 창출
과인이 아니면 누가 바로 잡겠는가?
한자음에 대한 세종의 관심은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세종은 상소문을 올린 최만리에게 이렇게 힐문한다.
“그대가 운서韻書를 아는가?”
<운서>란 한자음을 정리한 자전이다. 예부터 중국에는 여러 운서가 전해져 왔다.
세종은 놀랍게도 운서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묻는다.
“그대는 사성四聲, 칠음七音을 아는가? 자모字母는 몇인가? 이를 알고 정음을 비판하는 것인가?”
동양에서 가장 앞선 음운학을 만들어낸 세종의 자부심이다.
당시 세종의 춘추 46세.
그는 그리고 천하에 이렇게 선언한다.
내가 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를 바로 잡는다는 것인가!
그 옛날 진시황제는 문자를 통일했고, 일본의 간무천황은 오음을 배척하고 漢音한을 쓰도록 선언하였다.
제왕들은 문자를 통일하여 음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다.
『동국정운』- 조선왕조의 운서
이렇게 해서 전6권의 운서 『동국정운』이 편찬되어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듬해에 완성하여 2년 뒤인 1448년에 반포된 것이다.
이러한 책을 연이어 편찬, 간행한 시간적인 밀도를 생각해보더라도 조선왕조가 언어와 문자를 얼마나 중히 여겼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동국정운』서문은 『예기』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소리를 살피어 음을 알고, 음을 살피어 음악을 알고, 음악을 살피어 정사政事를 알게 된다”
책의 이름도 동국 즉 조선의 바른 운韻이다. 그렇다. 운을 바로 잡은 것이다.
이러한 제목은 명나라 홍무제대의 중국 운서 『홍무정운』을 본뜬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국정운』의 편찬자는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현로, 조변안, 김중이었다.
훈민정음 편찬에 임했던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파의 핵심 인물들이『동국정운』의 편찬에도 관여한 것이다.
위의 서문은 신숙주가 쓴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가 『해동제국기』를 저술한 그 신숙주이다.
서문에는 글자의 음이 변화한다는 것, 그리고 전래 한자음이 본래 한자음과 어떻게 달라졌는지까지 언급하며, ‘성운지변聲韻地變, 극의極矣’하기에 즉 성운의 변화가 극에 달하였기에 세종의 명에 따라 이를 편찬한다고 쓰여져 있다.
편찬에 있어서는 그 상세한 분류에 이르기까지 개품신단皆稟宸斷하였다고, 즉 모두 세종의 재가를 얻었다고 굳이 적고 있다.
이 분류를 이렇게 하면 되는지 하는 것까지 일일이 임금 세종을 번거롭게 해 드렸다고 적은 것으로 최만리에 대한 세종의 힐문과 더불어 생각해 보면 세종의 음운학에 대한 조예가 범상치 않은 것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정음>반혁명을 넘어서
정음 에크리튀르의 위치
<정음>은 ‘언문’이라 비하되고 ‘암클’이라 불리며 근대로 들어서기까지 실제로는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견해가 끊이지 않는다.
여기서 확인하고 넘어가자.
<정음>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정치와 권력, 역사의무대 정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러한 성력의 에크리튀르는 아니었다는 점에서이다.
여기서 살펴본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정음>은 적어도 문자를 사용하는 계층의 언어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 소극적으로 보아도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살펴본 다양한 서적의 존재가 말해주고 있다.
가끔 언급되는 식자율 운운과 정음이 사용되었는가 여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정음이 근대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는 거의 오해에 가깝다.
물론 세종이 꿈꾼것처럼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정음이 널리 파고들지는 못했다.
그와 같이 되기까지는 근대로 들어와서야 가능했다.
모든 이가 정음을 알게 하는 것은 문자가 담당해야 할 일이라기보다 교육이 담당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문자를 다루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음이 사용되었던 모습을 직시한다면 분명 정음은 에크리튀르로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에크리튀르에서 정음이 어떠한 위치를 차지했는가 하는 점이다.
원래 문자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한자한문과 함께 정음을 사용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제 6 장 <정음>-게슈탈트의 변혁
정음은 왜 붓을 거부했는가
그렇다면 정음은 왜 <붓으로 종이에 쓰여지기>를 거부한 것일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붓을 쥔 사대부가 아닌 백성의<에크리튀르>를 상정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훈민정음』해례본에서 “한자한문을 모르는 어리석을 백성들은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끝내 그 마음을 말하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나는 이것을 딱하게 여겨 스물여덟자를 만들었다. 이는 오직 사람들이 배우기 쉽고 날마다 사용함에 도움이 되도록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라고 한 세종의 사상에서 그 방향을 읽을 수 있다.
‘어리석은 백성’이 한자한문을 모른다는 것은 붓도 필법도 모르다는 뜻이다.
역학의 효를 떠올리게 하는 그 자획이라면 ‘어리석은 백성’일지라도 흉내내고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박병천은 창제기의 정음은 ‘쓴’문자가 아니라 ‘그린’문자였다고 말한다.
붓, 종이, 벼루, 먹 등 문방사우로 상징되는, 문자를 문자로서 성립되게 만드는 <쓰기>의 수련과정과 기법이라는 신체성을 거부한다는 것은 거기에 담겨있는 정신성까지도 거부하는 일이다.
정음은 붓을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뭇가지로 땅에 끄적이기에 결코 부적합한 문자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로지컬한 <형태>를 과시하는 <게슈탈트>의 변혁
정음이 뭇의 자획을 거부하고 붓으로 쓰여지는 <형태>를 거부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인쇄술과 관련된 문자의 의장, 곧 문자의 미학을 혁신하려 한 시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은 목판본이지만, 뒤이어 출간된 『동국정운』이 활자로 인쇄되었다는 점으로 보아 정음의 창제자들은 처음부터 활자인쇄를 염두해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참고로 후지모토 유키오는 조선의 금속활자 인쇄에 대해 “정교하기 이를 데 없고, 중국이나 일본은 이에 훨씬 못미친다”고 하면서 금속활자는 민간이 아니라 주로 관에서 주조되었고, 그 종류가 50종 가까이에 이른다고 했다.
『훈민정음』해례본에 보이는 정음의 모양과 형태는 한자의 전서나 다른 서체와 비교해도 이미 알 수 있듯이 한국, 나아가 동양의 문자형태사에서는 결코 도출될수 없는 모양이며 형태이다.
그렇다면 그 모양과 형태는 명백하게 목적의식적인 것이다.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 수천년의 동양문자에서 자신의 <형태>를 각인하는 것, 정음의 <형태>가 한자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당당히 과시하는 <형태=게슈탈트>가 되는 것.
신체성을 거부하고 정신성을 거부한 끝에 정음은 로지컬한 논리의 <형태>를 각인한다.
물론 이러한 논리적인 <형태>를 뒷받침하는 것은 바로 <용음합자>라는 사상임에 틀림없다.
정음은 그 등장 자체가 동양<게슈탈트>변혁의 기치였다.
로지컬한 知의 산물로서의 <형태>
붓에 의한 선은 정신성과 知, 끊임없는 수련 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형태>역시 정신성이나 끊임없는 수련 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것이 한반도의 문자사를 관통하는 원리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한자는 마치 살아있는 세포와 같은 존재였다.
한자의 형태 역시 살아 있는 정신성을 묻는 것이었으며, 인간의 눈과 손에 의한 수련을 묻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인간의 삶과 죽음을 묻는 <형태>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정음은 그 세포를 음절이라는 분자로, 그리고 음소라는 원자로 해체하였다.
정음의 구조 자체가 그런 로지컬한 지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논리적인 지에 걸맞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가 요구된 것이다.
정음의 知는 원자인 자모를 조합하여 완성되는 분자구조로서, 나아가 텍스트 속에서 움직이는 동적인 분자구조로서 출현하였다.
그것은 한자의 정신성과 결별하고 정음<형태>자체에 새로운 知를 당당히 각인하는 일이었다.
해례본에 보이는 정음의 <형태>가 지향하는 것은, 눈과 손의 수련을 통해 성립된 <형태>가 아니라 논리적이고 언어적인 知였다.
정신성과 결별하고 신체성마저 거부하면서 형태 그 자체가 말해주고 있는 美, 아름다움이었다.
정음의 등장은 완전히 새로운 미를 창조하는 게슈탈트의 변혁이었다.
해례본에 나타난 정음의 형태는 이리하여 왕희지를 정점으로 하여 동양을 지배하던 서예의 본질, 서예의 미학에 대한 근원적인 <반역의 게슈탈트>가 되었다.
산수화의 세계에 컴퓨커 그래픽이 출현한 것과 같은 충격인 것이다.
제 7 장 <정음>에서 한글로
鬪爭하는 <正音>, 투쟁하는 <한글>
정음 에크리튀르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의 근대 한국에서 화려하게 꽃피었다.
사전이 있고, 문법서가 있고, 신문이 있고, 잡지가 있고, 교과서가 있었다.
사상이 있고, 소설이 있고, 시가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까지 개화하리라고는 세종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33년에는 김윤경, 이병기 등 포스트-주시경학파라고 불러도 될 사람들에 의해 ‘한글맞춤법통일안’이 공개되었다.
오늘날 남북의 정서법에 그다지 큰 차이가 없는 것은 바로 이 통일안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1938년에는 10여만 개의 단어를 수록한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이 간행되었다.
500년이 지나 부활한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을 가로막는 것은 이제 한국어 안에는 없었다.
근대를 맞아 정음이 투쟁하고 한글이 싸워야 했던 것은, 1910년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제국의 언어 <일본어>였기 때문이다.
정음 에크리튀르는 한국어라는 언어와 한글이라는 문자의 총체를 지키고 키우는 싸움, 즉 일본어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겪게 된다.
1919년의 3.1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시인 한용운은 ‘님은 갔습니다’하고 잃어버린 것에 대해 노래했고, 시인 이상화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봅은 오는가’라며 신음했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 회원 16명이 기소, 투옥된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앞의 시대구분을 제기한 학자 이윤재도 옥사한다.
한국어 사전 편찬에 힘쓴 학자였다.
최현배 등도 1945년 해방을 맞을때까지 옥중에서 투쟁했다.
근대 한국에서 꽃핀 정음 에크리튀르는 이처럼 장절한 투쟁을 통해해 쟁취한 것이었다.
에크리튀르란 단순히 문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앎>과 감성의 모든 세부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의 도정을 보고 있으면 언어와 문자, 그 길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생명까지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음 에크리튀르는 그 길을 가려는 사람에게 단순히 기호론적인 세계의 사건 따위가 아니다.
때로는 사상이 되고, 사람이 살아 숨쉬게도 하고, 종종 생과 사를 오가게 하는 그런 투쟁이었다.
증언하는 에크리튀르
해방후에도 한반도 전역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쟁에 휩싸인다.
사람이 숨지고, 에크리튀르가 증언한다.
여기서 만나게 되는 시 「목숨」은 한국의 시인 신동집이 1954년에 발표한 시집 『서정의 유형』에 실린 작품이다.
목숨
목숨은 때묻었나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광년의 현암을 거쳐
나의 목숨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달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의 추억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하라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 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 많은 시공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는 살아서 돌아오라
남북의 단일사전을 향해 - 공통의 에크리튀르를 꿈꾸며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분단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에크리튀르도 서로 조금씩 다르게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날 남북한 모두 40만~50만의 단어를 수록한 훌륭한 대형 사전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남북 양측의 학자들에 의해 남북 공통의 단일사전을 편찬하려는 멀고도 장대한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학장 주의 한명인 서울대학교 권재일 교수는 말한다.
“남북의 단일사전, 표기도 말도 조금씩 다른 두 개의 언어권에서 하나의 단일사전을 완성시킨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사람들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표기와 말이 다르기 때문에 사전으로서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닌가 라고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마련된 덕분에 남북의 정서법은 오늘날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성격을 갖게 된 것이라고.
만약 1933년 시점에서 그 통일안이 없었다면. 남북의 정서법은 아마도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간의 거리도 더욱 멀어져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 우리가 편찬하고 있는 사전도 그 통일안과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믿는다.
언젠가 남북이 통일되었을 때, -남북은 꼭 통일된다 - 새로운 사전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기초로서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한글학회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맹우들과 재회했을때 주시경 선생이 잠든 묘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그는 조용히 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