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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라 각당복지재단 이사장, “죽음학”을 말하다
"'죽음을 이야기 하라' 그 소리가 들렸어요"
시골소녀는 평생 도전하며 살았다. 10남매의 여덟째로 태어나 '여자가 무슨 공부냐'는 편견을 딛고 성경학교, 감리교신학교를 거쳐 일본 동지사대(同志社大)까지 마쳤다. 혼돈의 시대는 배움을 향한 집념에 심술을 부렸다.
일본 군항(軍港)에 끌려간 조선인 처녀 머리 위로 미군 폭격기는 폭탄을 쏟아부었다. 광복 후 어렵사리 현해탄(玄海灘)을 건너와 천애고아 신세가 되더니 이젠 인민군이 '반동'이라고 으르렁거리며 가슴팍에 총부리를 들이댔다.
그의 신(神)은 그때마다 사도(使徒)를 보냈다. 걸스카우트 운동도,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장이 된 것도, 자원봉사와 호스피스 운동도 예정된 길이라 여겼다. 그 믿음이 한순간 굉음 속에 무너져 내렸다.
"43년을 함께한 남편이 저세상으로 떠날 때였어요." 김옥라(金玉羅·91) 각당복지재단 이사장은 '천붕(天崩)'이라고 몇 차례 되뇌었다. "평생 믿은 예수와 천당이…헛믿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때 음성이 들렸다. "죽음을 탁상(卓上) 위로 올려놓으라!" 그로부터 20년간 그는 세상에 '죽음학(學)'을 알리고 있다. 서울 신문로 자택에서 졸수(卒壽)를 넘긴 그와 마주했다. 고즈넉한 정원에 한 줄기 바람이 스쳤다.
'생사의 길은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어찌 간 겁니까/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떨어질 잎처럼…' 느닷없이 머릿속에 떠오른 제망매가(祭亡妹歌)의 여운 속에 90년 세월이 펼쳐졌다.
■보이지 않는 손
6·25 직후인 1950년 9월20일을 잊을 수 없어요. 그때 저는 아들 둘을 두고 있었어요. 그날 밤 인민군 5명이 찾아왔어요. 남편을 내놓으랍니다. 제가 대신 궁정동 파출소 지하실로 끌려갔지요.
인민군 장교가 호령했어요. "인민을 배반하고 탈주한 놈들은 반드시 극형에 처해질 것이다!" 그날 탈주사건이 일어났어요. 앙갚음을 대신하려는 것 같았어요. 효자동 전차종점 이발소에 묶여 있었습니다.
▲ 기나긴 삶이었다. 홀로된 김옥라 이사장은‘죽음을 탁상 위에서 이야기하라’는 소리를 마지막 소명(召命)으로 여기는 듯 했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인간은 생명에 물을 준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머릿속이 온통 총살(銃殺)이란 단어뿐이었어요. 적막한 새벽, 키가 훤칠한 중년 남성이 들어왔어요. 웬일인지 그 사납던 셰퍼드도 짖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 없이 제 손을 잡고 집으로 이끌었어요.
남자는 시어머니가 나올 때까지 대문 앞에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뒤를 돌아보니 그분은 사라지고 없었어요. 어깨가 넓었던 그, 아직도 저는 그의 이름을 모릅니다.
강원도 간성에서 10남매의 여덟째로 태어나 간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던 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습니다. 학교를 떠나는 것도 슬펐지만 공부가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인연이 찾아왔습니다. 간성교회 주경애 전도사께서 부모님을 설득해 함남 원산의 보혜성경학교에 입학시켜 주셨답니다. 두 번째 겨울을 원산에서 보낼 때 또 다른 인연이 찾아왔습니다.
"옥라양, 신학교에 갈 생각이 있나요. 우리 학교의 이근실 할머니가 장학금을 주겠대요." 거포계(Kate Cooper) 교장의 말씀은 복음(福音)이었습니다. 서울 감리교신학교에서 3년간 공부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2차 대전의 전운(戰雲)이 짙게 드리워진, 폭풍 전야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학교가 문을 닫아 강원도 철원 중앙감리교회에서 아이들을 씻기고 가르칠 때 세 번째 도움으로 일본 유학 길에 올랐습니다.
동지사(同志社)여전 영문과 3학년 때 군다 해군항(海軍港)의 공장으로 끌려갔어요. 공습경보 울리면 앞사람 옷자락 붙들고 방공호로 숨는 생활이었어요. 매일 '어제 몇십명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눈 오던 밤, 일 마치고 귀가하는 데 장구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를 의심하며 따라가 보니 늘어선 초가(草家) 사이로 아낙 2명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들이 나중에 저를 돕게 될 줄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1945년 8월15일 '무조건 항복한다'는 히로히토(裕仁)의 목소리로 광복을 맞았지만 조국으로 돌아올 길이 없었습니다. 두 달 뒤 누군가 저를 찾아왔어요. 군다항에서 만난 아낙내의 남편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어요. "아내와 세 살 난 아들을 고국으로 보내야 하는데 배멀미가 심합니다. 가족을 돌봐주시겠소." 72시간 동안 현해탄을 건너 그리던 땅을 밟았지만 서울에서 저는 천애고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연은 끊임이 없었어요. 제가 감리교회에서 가르쳤던 이화여고생 서가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경기여고교장 고황경 박사와 그의 언니 고봉경 선생님이 제게 일자리를 주셨어요.
하나님은 저를 혼자 두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모양, 어떤 방법으로든 저를 도울 천사(天使)들을 보내주셨어요. 전 생애를 통해 계속됐습니다. 저는 무조건적 사랑을 받았습니다.
■만남, 그리고 이별
미 군정청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어요. 미 UCLA에 합격해 비자가 나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통의 편지를 받았어요. 앞에는 '문교부 편수국 김옥라 귀하(貴下)', 뒤에는 '경무대(景武臺) 나익진'.
10장 가득한 만년필 글씨였어요.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지 않고 글을 올리는 실례를 범합니다. 몇번 주저하다 붓을 들었나이다….' 31세였던 그는 연희전문 상과 출신으로 한국무역협회 조사부장이었습니다.
―그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얼른 편지를 서랍 속에 넣었어요. 아무 일 없다는 듯 시치미를 뚝 뗐지만 가슴에선 방망이질 소리가 들렸지요."
―편지를 보낸 주인공을 알고 있었나요.
"군정청 내에 '굿라이트 소사이어티'라는 클럽에서 편지 받기 2주 전 북한산 등반을 했는데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건넨 적이 있어요. 그 남자였던 것 같았어요."
―유학을 포기할 때 후회되지 않던가요.
"떨치려 해도 떨칠 수 없는 게 인연이잖아요. '내가 이 사람을 포기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해보면 그렇게 못하겠는 거예요. 혼자 태평양을 건너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어요."
―남녀의 세계는 묘하군요.
"삶에는 '열린 문'과 '닫힌 문'이 있어요. 그분이 제겐 열린 문이었어요. 1947년 결혼 후 행복했어요. 그 길을 가도록 예정돼 있었던 건지도 몰라요."
―43년의 결혼 생활이 1990년 끝났지요.
"당시 73세였어요. 돌아가신다는 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일본여자의과대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어요. 황달이 조금씩 약해지기에 낫는 줄만 알았지요. 갑자기 식도정맥류가 파열됐고 24시간도 안 돼…."
―왜 한국에서 치료하지 않고.
"감리교에서 같이 일하던 총무가 용하다고 추천해 간 거지요. 이방자(李方子) 여사도 치료받은 유명한 병원이었어요."
―임종(臨終) 때 어떤 생각이.
"한마디 유언(遺言)도 남기지 않고 갔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명인사들은 부부 싸움을 하지 않습니까.
"하지요. 오래 하지는 않지만요. 저희는 주로 아이들 진로(進路) 때문에 다퉜어요."
―가까운 이의 죽음은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까요.
"심장이 멈추니 사람이 물건(物件)이 되더군요. 비행기를 타고 오는 데 저는 좌석에, 남편은 화물칸에 실려올 때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명상(瞑想)을 했습니다. 장례 치르고 집에 혼자 앉아 있으면 땅속으로 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신앙을 가진 분들도 죽음 앞에서는 그리됩니까?
"내가 예수 믿고 천당 믿고 그렇게 하면서도 지금까지 헛믿었는가 하는 반성까지 했어요. '믿음이 신실(信實)하지 못했구나' 하고 자책도 들고요. 그렇게 6개월쯤 보냈을 때 비몽사몽 간에 어떤 소리를 들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
그때 들린 소리는 이랬다. '생명 가진 사람은 다 죽는다, 그분도 죽었지만 너도 죽는다. 죽음을 탁상(卓上) 위에 올려놓고 토론하라!' 김옥라는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김옥라는 공덕귀(孔德貴) 여사에게 연락했다. 6개월 전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을 떠나 보낸 공 여사는 '죽음에 대해 같이 얘기 좀 해볼까요'라는 김옥라의 말에 대번 반색했다고 한다.
―여러분이 동참했지요.
"상처(喪妻)한 박대선(朴大善) 전 연세대 총장, 정일형(鄭一亨) 박사의 부인 이태영(李兌榮) 박사, 1983년 아웅산 사태 때 이범석(李範錫) 장관을 비명에 보낸 이정숙 여사와 김자경(金慈璟) 단장에게도 연락했어요."
―첫 모임이 1991년 3월19일 자택에서 있었지요.
"점심 먹으며 죽음을 이야기했어요. 그리도 고통스러워 했던 사람들이 즐겁게 죽음을 말하는 걸 보고 모임을 정례화하기로 했습니다."
―미망인이나 과부(寡婦), 홀아비 같은 단어가 듣기 싫습니까?
"느낌이 안 좋잖아요. 미망인만 해도 '따라 죽지 못했다'는 뜻이거든요. 제가 새 말을 만들었어요. '홀로된 이'라고."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이란 말은 어떻게 만든 겁니까.
"일본에 독일인이 만든 같은 이름의 모임이 있어요. 그해 6월 13일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에서 창립 기념강연회를 열었는데 놀랐어요. 700명 좌석에 1000명이 넘게 왔거든요."
―왜 그렇게 많이 왔을까요.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가 그만큼 강했던 거죠. 누가 이야기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게 필요했지만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죽음이 뭡니까.
"사람들은 몇백명 죽는 사고가 나도 별로 슬퍼하지 않아요. 삼인칭 죽음이기 때문이에요. 일가친척이 사망하면 눈물 흘리며 슬퍼하죠. 이인칭 죽음이에요. 제일 모르는 게 자신의 죽음입니다. 일인칭 죽음인데, 아직도 알 수 없는 거지요."
―모임이 20년이 다 돼가는데 아직도?
"죽음은 이거다라는 정답은 없어요. 다만 우리는 살면서 죽음의 일부분을 맛봅니다. 이혼, 낙제, 해고 같은 게 '작은 죽음'에 해당합니다. 그때 처신에 따라 자기가 죽을 때 올바른 처신을 하게 되지요."
―죽음에 대해 어떻게 알립니까.
"정기적으로 강연과 세미나를 합니다. 노인뿐 아니라 성인, 청소년들에게도 죽음에 대한 준비의 필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설립한 각당복지재단에서 자원봉사 교육의 일환으로 호스피스 봉사를 가르쳤어요. 나중에 보니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과 다 연관이 있었어요."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강원용(姜元龍) 목사, 이병주 성균관 이사장, 이능가 스님 등 각 종교의 지도자급들에게 죽음을 공개적으로 질문했지요.
"설문을 보냈어요.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고 계십니까'라는 내용으로요. 추기경은 이렇게 답했어요. '죽음은 관문(關門)을 넘어 또 다른 삶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죽은 후의 삶은 덮어놓은 책과 같아 열어보지 않으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 그걸 열어보면 하느님의 충만한 은혜와 사랑과 놀라운 신비가 들어있을 것이다.'"
―강원용 목사는요.
"인간적인 답을 보내주셨어요. 11살 된 아들을 잃은 적이 있는데 너무 슬펐다고…. 죽어서 만나면 그 아이가 11살 그대로일지 중년이 돼 있을지 궁금하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죽음은 사랑 같다. 우리가 장례식에 가면 많이 우는 사람이 있고 적게 우는 사람이 있다. 많이 우는 사람일수록 사람을 많이 사랑한 것이다. 현재 삶에서 잘 지내는 것이 곧 죽음 준비 아니겠느냐'고요."
―유교(儒敎)나 불교(佛敎)는요.
"이병주 성균관 이사장께서는 '내가 죽은 뒤에는 자손에게 생명이 이어진다고 생각한다'고 했어요. 이능가 스님은 인생은 고(苦)인데 고를 어떻게 탈피하느냐에 따라 극락세계에 가는 것이라고 했어요. 해탈(解脫)이 곧 낙원에 가는 것이라고요."
■영원한 미로(迷路)
종교 지도자들이 낸 답의 공통점이 뭐냐고 묻자 김옥라는 말했다. "어려서부터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그 준비는 선하게 사는 것이다, 죽고나서 '그 사람 잘 죽었다'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이 계속되면서 초기 멤버 가운데 상당수가 자신들이 탐구하던 길로 들어섰다. 이태영 박사와 김자경 오페라단 단장이다. 그들은 과연 최후에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종교 지도자 중 누구의 이야기가 가장 가슴에….
"김수환 추기경 말씀이 가장…."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이 죽을 때 도움이 됐을까요.
"제가 이태영 박사님 임종을 지켰어요. 아무 말씀 안 하고 숨을 멈추셨습니다. 돌아가기 3년 전부터 치매를 앓았는데 '오직 한 길' 같은 그분의 책을 봐도 인생관은 나오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말해놓은 게 없어요."
―김자경 오페라단장 같은 경우는 달랐습니까?
"이대(梨大) 교수였던 남편이 강원도 화진포에서 학생들과 수영하다 사망했지요. 남편 사진을 놓고 매일 힘들어서 더 이상 못 살겠다고 했대요. 그때 그분도 저처럼 음성을 들었답니다."
―왜 그리 음성을 들은 분이 많습니까? 저는 한 번도 못 들었는데.
"그때 들려온 음성은 '너 겨우 28살이야. 왜 못살겠다고 그래?'라는 소리였대요. 그때부터 그이는 70, 80이 돼도 자기가 늘 스물여덟이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김 단장은 뭔가 특별한 이야기를 남겼겠군요.
"그분 역시 당뇨합병증으로 돌아가셨는데 미처 죽음에 대해서 물어볼 시간이 없었지요."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이 별 도움이 안 된 거 아닙니까.
"죽음은 곧 삶과 연결됩니다. 생전에 남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게 죽음 준비지요. 그분들은 말은 안 했지만 죽음을 행복하게 준비하고 맞이했을 거예요."
―죽음에 대해 토론하니 남편이 잊혀지던가요.
"오히려 더 생각났어요. 제가 외국출장을 많이 다녔잖아요. 그게 제일 미안합니다. 옆에서 잘 챙겨주지 못한 게요."
―저 같으면 버럭 화를 냈을 텐데.
"제가 미안하다고 하면 잠자코 계셨어요. '당신이 그런 일을 맡았으니 어쩌겠소'라고 하면서요."
―김 이사장께서는 어떤 준비를 했습니까.
"올 4월에 유언장을 썼어요. 각당(覺堂)복지재단의 각당이 남편의 호입니다. 정원 저쪽으로 재단건물을 지으려 해요. 이 집은 막내아들에게 주고…."
―4남을 뒀는데 왜 막내에게 집을 줍니까?
"첫째, 셋째는 미국에 있고 제가 막내와 살아요. 형편에 따라 그리됐어요. 아이들과 이야기는 다 했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돕는 일
1986년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 회장직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이었다. 김옥라는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회' 창립을 생각하게 된다. 어둠을 밝히지만 홀로 힘은 미약한, 뭉치면 강한 반딧불에서 자원봉사의 저력을 본 것이다.
아내의 뜻을 들은 남편은 3억원을 건넸다. 그렇게 만들어진 단체에서 6000명이 자원봉사교육을 마쳤다. 김옥라는 "600명 정도가 지금 활동하고 있는데 활동비율이 10%면 기적에 가깝다"고 했다.
―호스피스 교육은 그 1년 뒤 시작했지요.
"세계감리교연합회 명예회장 자격으로 외국에 갔다 귀국하는 기내(機內) 잡지에서 데임 시슬리 손더스에 관한 인터뷰 기사를 봤어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옥스퍼드대 정치경제학부 학생이었어요. 2차대전이 일어나 군인들이 피를 흘리는 걸 보면서 간호사가 되려 했어요. 면허를 받고 나니 전쟁은 끝났는데 이번에는 외국인 말기 암 환자와 사랑에 빠졌던 것 같아요. 그들을 본격적으로 돕기 위해 39세에 의사 면허를 받지요. 공부하면서 야간에 조셉 호스피스라는 곳에서 말기 암 환자 간호를 했습니다."
―그때 뭔가를 깨달았겠군요.
"환자가 몇백 파운드를 손에 쥐여주더래요. '당신이 내게 했던 것처럼 다른 환자들에게 해주는 데 이 돈이 필요하면 쓰라'면서요. 그 돈이 호스피스 설립하는 종자돈이 된 겁니다. 손더스는 이런 말도 했어요."
―뭐라고요.
"'호스피스 일은 자원봉사 없이는 안 된다'고요. 그 말이 귀국해 호스피스 교육의 계기가 됐습니다."
―듣다 보니 선생의 일생이 전부 죽음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10명 낳았는데 셋을 일찍 잃었어요. 대학 1학년 때 '어머니가 입원했다'는 엽서가 왔어요. 귀국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간호했어요.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마음속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았습니다."
―무슨 이야기였습니까.
"시집살이 이야기, 뒷바라지해준 숙부가 나중에 고맙다고 '깍신'을 선물했는데 부뚜막에 뒀다 오그라져 마음 아팠다는 이야기…. 통증이 심했는데도요. 나중에 아버지께 어머니가 그랬대요. '옥라는 이제 내게 신세 다 갚았다'고."
―행복하게 죽음을 준비하려면 뭘 해야 합니까.
"순수하고 거룩하게 살아야죠."
―왜요.
"사후세계는 이승보다 깨끗하고 거룩할 겁니다. 그곳에 맞는 자신을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게 순수하고 거룩한 겁니까.
"자원봉사를 하세요. 호스피스 봉사면 더 좋지요."
―인간은 왜 젊었을 때는 이런 생각을 못할까요. 서로 잡아먹을 듯 싸우기만 하고.
"그러니 인생이지요."
아래 주소에서 관련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09/2009100901294.html?srchCol=news&srchUrl=news1
인터뷰 기자의 ‘제작노트’ 중에서
“세로쓰기 시절, 일본신문은 한국의 모델이었습니다. 종합면, 정치면으로 시작돼 사회면으로 끝나는 페이지 순서도 일본식이지요. 게이오(慶應)대에서 1년간 공부할 때 전 신문이 89세로 사망한 영화해설가 요도가와의 일대기를 사회면 톱으로 다루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명화극장 시절 짧은 해설을 한 정영일씨를 올드팬들은 기억할 겁니다. 마지막을 항상 '사요나라'로 마무리하는 요도가와가 그런 존재였지요.
▶한국인의 죽음관(觀)은 독특합니다. 아침에 장의차 보면 "재수 있겠다"고 좋아하다 조간신문의 사망기사는 외면합니다. 인간의 죽음으로 한 시대를 정리하려는 자세가 없지요. 이번 주 '죽음학(學)'을 20년째 해온 김옥라 각당복지재단이사장과 말기 암환자를 돌봐온 능행 스님의 공통점이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두 기사를 놓고 고심했습니다. '죽음'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을까, 두 인물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고민 끝에 결정했습니다. 역경을 딛고 일군 업적 못지않게 인생의 화두(話頭), 즉 삶과 죽음을 정면으로 다룰 때가 왔다, 유명인의 내면에 감춰진 사생관(死生觀)자체가 뉴스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잘못 판단했다면 그건 전적으로 제 책임입니다.“ (문갑식 기자)
091010 조선일보
첫댓글 감사합니다. 절절히 가슴에 와 닿네요. 글 올려주셔 감사드리며 수고하셨습니다.
이사장님 말씀 중에 있는 '깍신'이 무엇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