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達磨)를 질서의 근거(根據)로 풀이하면, 다소 막연했던 다도(茶道)의 내면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다도에서 구하는 절대의 경지(境地)는 놀랍게도 "만능(萬能)이라는 이름의 허(虛)"이다.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같은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 모두, 차를 언제부터 마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농씨가 식경(食經)에 "차를 오래 마시면 힘이 솟고, 마음이 즐거워진다"고 적은 이래 차 이야기는 어디든 끼게 되었다. 수나라 문제는 꿈에 귀신이 머리골을 바꿔 몹시 아팠는데 문득 만난 스님이 차 있는 곳을 가르쳐주며, 차를 달여 마시라 하여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천하는 이때 차 마시기를 알게 되었다고 진인석(陳仁錫)은 잠확거류서(潛確居類書)에 적었다.
당나라 풍속사를 쓴 봉연(封演)의 봉씨견문기는 육우를 다도의 창시자로 세우고 있다.
…초나라 사람 육홍점이 다론(茶論)을 짓고, 차의 효능과 차 달이기, 차 굽는 법을 말하고, 다구 24종을 만들어 이를 모듬바구니에 담으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마음 기울여 사모하고, 호사가는 한 벌을 집에 간직하였다. 상백웅(常伯熊)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거듭하여 홍점의 이론을 널리 윤색함으로 말미암아 이에 다도가 크게 성행되어 신분이 고귀한 사람과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차를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구양수(歐陽修)도 신당서(新唐書) 육우전에 "육우는 차를 즐겨서 다경(茶經) 3편을 짓고, 차의 근원, 차의 법도, 차의 도구를 다 갖추어 서술하니 천하에서 차 마시기를 널리 알게 되었다"고 했다. 당(唐)의 다도(茶道)는 차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다도를 도교에서 말하는 선(禪)의 발전된 의식으로 보면 차의 세계는 무한 넓어진다. 이와함께 달마(達磨)를 질서의 근원(根源)으로 풀이하면 다소 막연한 다도의 내면 세계에 접근이 가능해 진다. 다도에서 구하는 절대의 경지는 놀랍게도 "만능(萬能)이라는 이름의 허(虛)"이다. 노자(老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같은 것이다.
남송(南宋)의 사상가 주자(朱子;1130-1200)가 주돈이(周敦이) 정호(程顥) 정이(程이) 계통의 우주론과, 명분을 중요시한 구양수(歐陽修) 계열의 춘추역사학을 합성하여 완성한 주자학(朱子學)에서, 우주와 인간세상의 근본원리를 도(道)라고 정의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도(道)는 곧 순리(順理)로서 순리를 알면 허(虛)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주자(朱子:朱熹)는 차의 본향(本鄕)이라는 복건성(福建省)에서 태어나 생의 대부분을 북부지방에서 보냈다. 신라의 지장이 7세기 중국에 차를 전하고, 그곳에서 수행하여 성불하였다는 구화산(九華山)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다.
중원(中原)의 문화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 시골(福建省 尤溪)에서 출생한 그가 14세때 아버지를 잃고 건안(建安)의 세 선생에게 사사하며 면학에 힘쓸때 노장(老莊)사상과 불교에 흥미를 가졌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24세에 임관하여 동안현(同安縣)의 주부(主簿)로 근무할 당시 이정(二程)의 학통을 이은 이동(李동)을 만나 사사하면서 차츰 유교로 기울어지다 급기야 신유학(新儒學)의 정수(精髓)를 계시받기에 이르는데, 그의 이기철학(理氣哲學) 곳곳에 다도(茶道)가 배어있다.
그의 학문 수양법은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것을 회복한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우선 형이하학적인 기(氣)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이(理)를 세워 양자의 보완적 관계를 명확하게 한 뒤, 이 이기(理氣)에 의하여 일관되게 생성론(生成論) 존재론(存在論) 심성론(心性論) 수양론(修養論)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주자는 거경궁리(居敬窮理)를 공부의 지표로 삼도록 했다. 거경(居敬)은 마음이 정욕에 사로잡혀 망녕된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고, 궁리(窮理)는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이치를 규명하는 것이다. 즉 격물치지(格物致知)로, 나아가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질서의 근원이 되는 하나를 이치적으로 깨닫는데 최종의 목표를 두고 있다. 이는 도(道)이자 순리(順理)이다. 결국 달마와 한 뜻이다. 모든 불교적인 것을 멀리한 주자의 신유학(新儒學)이 차만은 받아들여 가례의 중요한 일속(一俗)으로 삼았던 일이 우연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렵게 설명하지 않아도 다도(茶道)가 선(禪)의 발전된 의식(儀式)이라는 것은 일반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차가 약용(藥用)에서 우아한 놀이의 음료가 되고, 예술의 영역(領域)에 들어간 것 역시 도교(道敎)의 영향임을 부인할 수 없다.
풍속과 습관의 기원을 다루고 있는 중국 학교의 교과서는,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예의가 관윤(關尹:노자의 제자)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는 함곡관(函谷關)에서 철인(哲人:老子)을 맞을 때 언제나 한 잔의 불로장수약을 먼저 드렸다.
도교의 수행자들이 어떻게, 얼마나 차를 생활화 했는지는 잘 짐작되지 않지만, 그러나 도교에서 가르치는 인생관과 예술관이 다도에서 말하는 그것과 많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다도로써 진리(眞理)에 접근하려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면 "도(道)"는 어떻게 해석이 되어야 하나.
자전(字典)에 의하면 도(道)의 훈(訓)은, 길 도(路), 이치 도(理), 순할 도(順), 도 도(仁義忠孝之德義), 말할 도(言), 말미암을 도(由), 쫒을 도(從), 행정구역 이름 도(行政區域) 등으로 나타난다. 행정구역 이름에 도(道)를 붙인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올바른 길을 찾으라는 암시가 담겨있다.
한국방송공사의 이규임(李揆任) 박사(政治學)는 다담(茶談)에 기고한 글에서 도(道)의 자리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매김했다. …옛 성현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무형의 위계질서(位階秩序)를 기(技) 정(政) 의(義) 덕(德) 도(道)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했다. 기(技)란 기술이나 지식이다. 이것만 있으면 살아가는데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기(技)는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정(政)의 지배를 받는다. 정은 관리(管理), 즉 정치(政治)를 말한다. 정은 다시 의(義)의 지배를 받는다.
정치는 바르고 의로워야 한다는 뜻이다. 의(義)를 지배하는 것은 덕(德)이다. 아무리 바르고 의롭다 해도 덕(德)이 없으면 천운도, 민심도 따르지 않는다. 아랫사람의 잘못으로 웃사람이 물러날 때 "덕이 없어서"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나오는 말이다. 덕 위에 도(道)가 있다. 도는 질서(秩序)이자 순리(順理)이다. 그 모든 것을 이룸에 있어 순리를 따라야지, 억지를 부리면 안된다는 말이다. 법(法)으로 여길 수도 있다. 법을 존중하는 것 역시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도(道)는 절대의 자리요 완전한 자리이지만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쉽게 이를 수 있는 자리도 되는 셈이다. 이 도가 자라서 다음 단계의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이르는 것이 인간사회 질서이다…
여기 무위자연에 대해서는 노자의 도덕경이 설명한다.
…무위(無爲)는 "도는 언제나 무위이지만 하지않는 일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의 무위이고, 자연은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天法道都法自然)"의 자연을 의미한다…
도덕경의 사상은 모든 거짓됨과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도교가 언어(言語)에 대해서 강한 부정을 보이는 것은 언어가 상대적 개념의 집합체라는데 있다. 좋다 나쁘다 크다 작다 높다 낮다 등의 판단은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상대적 개념이며 이런 개념들로는 도에 이를수도 없고, 도를 밝혀낼 수도 없다고 했다.
이는 다도에서 이야기하는 암시의 가치, 중복의 금지와 같은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은 채 그냥 놓아둠으로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으로 완성하게 하는 게 암시의 가치이다.
"우리가 인식하려고만 한다면 완전은 어디든지 있다"
위대한 걸작품들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도 관객을 끌어들여 매혹시키고, 나아가 관객을 그 작품의 부분이 되게 한다. 예술가들의 언어는 작품이어야 하는 것이지 해설이나 평론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도가 "불완전"을 숭배하는 종교(?)로 발전하고 다실(茶室)에서 중복이나 비교를 금기로 삼는 것도 모두 도교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일본인으로 미국 보스톤박물관의 동양학부장을 지낸 오가꾸라 덴싱(岡倉天心)은 1900년에 발표한 "북 오브 티(The Book of Tea)"에서 그 부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다실에는 중복이 있어서는 안된다. 장식을 위한 대상물은 빛깔이나 의장에서 비교되지 않도록 선택되어야 한다. 살아있는 꽃이 있다면 그림의 꽃은 허용되지 않는다. 탕관이 둥글다면 물주전자는 모난 것이어야 한다. 향로나 꽃병을 도꼬노마(床 間:聖壇)에 놓는데 있어서도 그 공간을 2등분하면 안되니까 한복판에 놓지 말아야 한다. 실내가 단조롭다는 느낌을 주지않게 하기위해서 도꼬노마의 기둥은 다른 종류의 나무를 써야한다. 서양의 응접실에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소용없는 중복이 많다. 옆에서 혹은 맞
은 편에서 낯선 전신상(全身像)이 뚫어지게 보고있는 가운데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참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조각이나 그림의 인물과 살아있는 인물 중 어느쪽이 진짜인지, 때론 말없는 쪽이 진짜로 보이기도 한다. 나는 성찬(盛饌)의 식탁에 앉았음에도 벽에 걸린 물고기나 과일의 정교한 그림 때문에 남몰래 소화장애를 일으킨 적이 여러번 있었다. 이런 마음의 교란이 무엇때문에 필요한 것일까. 다실은 이런 비속적(卑俗的)인 중복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빈(虛)자리이어야 한다…
"암시의 공간"이란 도교에서 말하는 무(無), 즉 빈공간(虛)이다. 현혹(眩惑)이 아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라도, 정말로 필요한 것은 허(虛)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방의 본질은, 빈 공간이지 벽이나 지붕이 아니다. 주전자의 효용성은 물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지 모양이나 만듦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허는 모든 것을 포함하기에 만능이며, 모든 것은 허일 때만이 운동이 가능해 진다. 자기를 허하게 하여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한다면 그는 지배자일 수 있다. 전체는 언제나 부분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다도(茶道)가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기에 차(茶)와 선(禪)과 자연(自然)과 허(虛)는 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곧 모든 질서의 근원인 달마(dharma)이며, 최종 깨달음의 단계인 도(道)이고 순리(順理)이다. 이는 생각하는 생활을 통해서 민중에게 "불완전한 삶을 사랑하게 하는 가르침"으로 숨쉬게 된다. 근세 중국의 사상가 임어당(林語堂)이 말이다.
…차는 음미하는 음료이다. 사람을 고요하게 만들고 사색(思索)의 숲으로 인도하는 마력이 있다…
사색(思索), 즉 사유(思惟)는 도(道)의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이다. 차는 사유의 반려가 됨으로써 지성인의 이상(理想)이 되는 것이다. 이는 혼자 차를 마실 때 가능하다. 초의(艸衣)는 다신전(茶神傳) 음다(飮茶) 절에서 차를 마실 때는 사람 수에 따라 마음가짐을 달리하도록 했다.
…차를 마실 때는 사람 수가 적어야 분위기까지 잘 어울린다. 혼자 마시는 것은 신기(神氣)요, 둘이면 승(勝)이다. 서넛이면 취미(趣味)가 되고 오륙이면 그저 범범(泛泛)할 뿐이다. 칠팔 이상이면 시(施)일 뿐이다…
다도(茶道)는 존재(存在)에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성품(性品)에서 출발한다. 어쩌면 그것은 기 잠재되어 있는 회귀성(回歸性)에 의해 무위(無爲)에 합일하려는, 자연스런 심성의 발현(發顯)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인가 깨닫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수단이거나, 보다 아름다워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염원을 담고있기 때문이다. 덴싱의 "차의 책"에서 다음 구절을 음미해 보자.
…종교에서는 미래가 우리들의 배후에 있다고 하지만, 예술에서는 현재가 곧 영원이다. 참다운 예술의 감상은 오직 그 예술로부터 살아있는 힘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다인(茶人)은 다실(茶室)에서 얻은 높고 순화된 규범으로 일상생활을 조절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하며, 대화는 주위와의 조화를 망쳐놓지 않도록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옷의 모양과 빛깔, 바른 자세와 행동, 심지어 걸음걸이까지도 인품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 스스로 아름답지 않으면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인(茶人)은 그렇게 스스로를 가꾸고 다듬으며 무엇인가 예술가 이상의 것, 아니 예술 자체가 되어야 한다. 완전은 어디에도 없지만 노력 속에는 있다. 결국 다도가 지향하는 심미주의(審美主義)의 선(禪)이란, 늘 부족하기만한 인생에서 그 부족한 것을 사랑하고, 나아가 그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노력과 같은 것이다…
다도에서 정리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새로울 것 없는 동양사상의 핵심 이론이다. 그렇다면 다도는 어느 특정 국가나 민족의 것이 아닌 "동양의 것"일 수도 있다. 형식이나 과정에 차이는 있겠으나 "시작과 나중"은 동양적이어야 한다. 아름다움의 추구와 함께 "마음에 빈공간(虛)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택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고려 충렬왕 때 산중재상으로 불리던 원감국사의 노래 한 줄을 음미해 보는 것도 매우 의미가 클 것이다.
…차마시는 것도 선(禪)이니, 선에 있어 격식은 초월하는 법…
그는 계절에 구애없이, 경치가 아름다울 때면 서둘러 물을 끓이고 친구들을 불러모았다. 자료는 빈곤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풍류(風流)이다. 우리의 다도가 이웃 나라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가늠케 하는 정겨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