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어회(活魚膾)와 능지처사(凌遲處死) ②
김지수 (전남대 법대 조교수)
활인회(活人膾) 능지처사(陵遲處死)
송宋나라 륙유陸游가 오대五代의 난세에 보통 사형법常法의 특별형으로 비로소 시행된 능지凌遲를 묘사한 모습은, “살점을 다 발라냈는데도 숨은 아직 끊이지 않고 헐떡거리며, 간과 염통이 이어져 팔딱이고 보고 듣는 감각이 아직 남아 있어서(肌肉已盡, 而氣息未絶;肝心聯絡, 而視聽猶存.)” 보는 사람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고 천지자연의 조화를 깨뜨리며 임금의 인정仁政을 크게 손상시키는 참혹한 것이었다.
또 조선시대 숙종肅宗 임금 때 발행된 중국어 교본인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는 ‘나모 기동에 고 가죽이’는(木椿上了) 형벌 집행을 부연 설명하기를, “사람 처형하는 장소에 큰 나무 기둥 하나를 세우고 죄인을 그 위에 묶은 뒤, 망나니(子)가 형 집행하는 칼(法刀)로 그 살을 저며 내어 개한테 먹으라고 주고 단지 그 뼈만 남겨두어 지극히 참혹스러웠다”고 묘사했다.
‘능지(凌遲)’란 ‘陵遲’로도 쓰이며, 본디 구릉처럼 기울기가 작은 완만한 경사를 뜻하는데, 사형 집행을 아주 더디게 하여 느리게 천천히 죽이는 형벌이란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고로 눈 뜨고 보기는커녕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어려운 참혹한 형벌이 참으로 많지만, 능지처사가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널리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까닭은, 물론 명청률明淸律에 기본형〔正刑〕으로 법정法定되어 가장 근래까지 공식 집행된 탓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여러 차례 칼로 저미면서 긴 시간에 걸쳐 지극히 혹심한 고통을 받으며 아주 느리게 죽어가도록 만드는 잔인한 방법이 그 어느 형벌과도 견줄 수 없기 때문이리라.
전하는 바에 따르면, 명明나라 때에 반역죄인 류근劉瑾은 4,700 차례의 칼질에 죽었고, 명말에 정만(鄭)은 3,600번의 칼질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도만과千刀萬剮’란 성어成語는 능지의 대명사로 통용될 정도였다. 명明나라 시내암施耐庵의 수호전水滸傳을 비롯해서 그 전후 시대에 걸친 많은 문학작품에서 이 성어가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원元ㆍ명明ㆍ청淸 시대에 얼마나 잔혹한 능지처사가 자주 집행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청淸나라 때는 칼질 횟수에 따라, 능지처사가 24刀ㆍ36刀ㆍ72刀ㆍ128刀의 네 등급으로 구분되었다고 전해진다.
24刀의 경우, 양 눈썹, 양 어깨쭉지, 양 젖가슴, 양 아랫팔뚝, 양 윗팔뚝, 양 허벅지, 양 장판지를 차례로 저미는데, 그 뒤 심장을 찌르고 목을 친 다음, 두 손, 두 팔, 두 발, 두 다리를 차례로 절단했다고 한다. 가장 간단하고 빠른 8刀의 경우에도, 양 눈썹, 양 어깨쭉지, 양 젖가슴을 차례로 도려낸 뒤, 심장을 찌르고 목을 쳤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몸서리쳐진다. 물론 당시에도 망나니한테 뇌물을 쓰면, 첫 칼에 심장을 찔러 목숨을 끊은 뒤 나머지 칼질을 하는 편법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지막에 목을 친다고 해서 ‘凌遲處斬’이라고도 불렀다.)
려태후(呂太后)의 잔인한 질투전(嫉妬戰)
그리고 송나라 때는 네 팔다리를 차례로 자른 뒤 목을 치는, 비교적 점잖은 능지처참凌遲處斬이 주로 행해진 모양인데, 이러한 능지처참은 비록 공식으로 명명된 것은 아니지만, 일찍이 한고조漢高祖의 아내 려태후呂太后가 (처음?) 자행한 사실이 역사에 전해진다.
흉노匈奴에 투항한 리릉李陵을 위해 변론한 죄로 투옥되어 사형 대신 거세(去勢:宮刑ㆍ腐刑, 영구불임형) 당한 뒤 풀려난 사마천司馬遷이 중국 정사正史의 효시嚆矢가 된 명작 사기史記를 쓰면서, 한고조본기漢高祖本紀 뒤에 효혜제본기孝惠帝本紀 대신 쓴 려태후본기呂太后本紀의 앞머리에서, 고조의 조강지처糟糠之妻인 려태후와, 한왕漢王이 된 뒤 얻어 총애한 척희戚姬 사이에 벌어진 질투전의 시말을 대략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려태후가 낳은 효혜제孝惠帝는 사람됨이 어질고 물러 고조를 닮지 않고, 척희가 낳은 여의如意는 고조를 많이 닮아서, 고조가 항상 태자를 폐위시키고 여의를 대신 책봉하려 했다. 게다가 려태후는 나이가 들어 항상 본거지를 지키느라 고조를 가까이할 기회가 더욱 드물었고, 척희는 고조의 총애를 받아 늘 따라 다니며 밤낮 훌쩍거리며 자기 아들을 태자로 세워달라고 보챘다. 특히 여의가 조왕趙王에 봉해진 뒤에는 하마터면 태자에 책봉될 뻔한 기회가 여러 번이나 있었는데, 대신들의 간쟁과 류후(留侯:張良)의 책략策略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러다가 고조가 한왕漢王이 된 지 12년, 항우項羽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평정平定한 지 7년만에 세상을 뜨고, 려태후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효혜제孝惠帝에 즉위하자, 려태후는 곧바로 가장 원한을 품어왔던 척부인戚夫人과 그 아들 조왕趙王한테 손을 썼다. 고조가 천하를 평정할 때 려태후는 강인하고 억센 기질로 여러 대신을 제거하는 데 막강한 실력을 발휘할 정도였다. 그런 려태후가 남편이 죽은 뒤 자신의 연적戀敵을 처치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으리라.
먼저 척부인을 별궁別宮에 감금하고 그 아들 조왕을 불렀다. 사신이 세 번이나 왕래했으나, 조왕의 승상 건평후建平侯 주창周昌은 려태후가 원한으로 조왕 모자母子를 함께 죽이려는 줄 알고 고조의 유명遺命을 내세워 사신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려태후는 노하여 다시 사신을 보내 먼저 조왕의 승상을 부르고, 그가 장안長安에 이르자 또다시 사신을 보내 조왕을 불러 조왕이 한참 오고 있었다. 그때 인자한 효혜제가 그 사실을 알고, 조왕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패상覇上까지 마중 나가, 함께 입궁入宮한 뒤 자신과 함께 거처하도록 했다. 그토록 황제가 이복동생을 감싸 안자, 려태후도 어떻게 죽일 틈을 얻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효혜제 원년元年 12월 어느 날, 황제가 새벽 일찍 활 쏘러 나가는데, 나이 어린 조왕은 함께 일찍 일어나지 못해 혼자 궁궐에 남았다. 조왕이 혼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려태후는 바로 이 때를 놓칠세라, 곧장 사람을 시켜 짐독毒을 마시게 했다. 날이 샐 무렵 효혜제가 돌아와 보니, 그 사이 조왕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런 다음 려태후는 척부인의 팔다리를 자르고 두 눈알을 빼낸 뒤, 두 귀를 불 태우고, 말 못하는 약을 먹여 측간(厠間:변소) 속에 집어 넣고는, ‘사람 돼지(人彘:인체)’라고 불렀다. (제주도에는 돼지를 변소 속에 집어 넣어 사람 똥 먹고 살게 한다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필자) 그리고는 며칠이 지나 효혜제한테 그 ‘사람 돼지’를 구경시켰다. 측간에서 기이한 광경을 본 효혜제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 ‘사람 돼지’가 자기 서모庶母인 척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내 대성통곡을 한 뒤 곧바로 병이 들어 한해 남짓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자기 어머니 려태후한테 이렇게 여쭈었다.
“이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신臣은 태후의 아들로서, 이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효혜제는 이때부터 매일 먹고 마시는 향락에 빠져, 더 이상 정치를 돌보지 않고 폐인廢人 생활로 세월을 보내다가, 7년 8월 가을에 마침내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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