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고 원종린 선생님께
존경하는 고 원종린 선생님 영전에 드립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어려운 굽이굽이마다 천신만고(千辛萬苦)를 극복하신 증인이셨습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셔서 일본인의 압제를 몸소 경험하셨고, 일본군 학도병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습니다. 민족 전쟁, 6.25의 혼란기에도 민주 교육의 근본을 지키시기 위하여 혼신을 다하셨습니다. 이렇게 현대사의 질곡을 슬기롭게 극복하시고, 교육입국의 페스탈로치로서 평생을 헌신하셨습니다.
존경하는 원종린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현대문학의 여명기에 대한민국 수필문학을 꽃피우기 위해, 격조 높은 수필을 창작하시어 아름다운 본을 보이셨습니다. 지역에서는 물론, 대한민국의 저명한 학자와 평론가들이 선생님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여러 상을 드렸습니다. 그때, 저희들이 상을 받는 것처럼 기쁘고 행복하였습니다.
2007년에는 훌륭한 수필가들을 격려하시기 위하여 원종린수필문학상을 제정하였습니다. 대상에는 상패와 상금 500만원을, 작품상에는 상패와 상금 100만원을 시상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 교포 수필가들에게도 시상하여 격려하기 때문에, 명실 공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정평 있는 수필문학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금년 6월 18일에 제7회 시상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시상을 2주일 앞두고, 선생님께서는 다시 뵐 수 없는 길을 가셨습니다. 2주일만 더 계셨더라면, 2주일만 더 건강하셨더라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만, 선생님께서는 서둘러, 정말 서둘러 길을 떠나셨습니다.
서둘러 가신 그곳에서, 선생님께서는 그곳에서도 먼저 가신 분들과 테니스 라켓으로 바람을 가르시겠지요. 작은 배낭을 등에 메고 다니시며 먼저 가신 분들과 산책도 하시겠지요. 먼저 가신 사모님과 만나셔서 오랜 회포를 푸시겠지요.
그러나 이 곳에서는 선생님의 인자하신 모습과 음성을 더 이상 뵐 수 없어 가슴이 먹먹합니다. 세월이 흐르면, 따님과 아드님, 손자와 손녀들이 많이 그리우시겠지요. 선생님의 높은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한 저희들도 가끔은 생각나시겠지요. 그러나 이제, 이 곳의 일은 이 곳의 저희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쉬시옵소서!
선생님, 남은 일들을 마저 마치는 날, 찾아뵙고 문후 여쭙겠습니다. 비옵나니, 평안하소서! 부디 강녕하소서!
2011년 6월 5일 9시. [대전예술인장], 장례위원장 삼가 올림.
* * *
앞의 글은 89세를 일기로 영면하신 수필가 고 원종린 선생님에 대한 대전예술인장 영결식의 조사(弔辭)입니다.
선생님께서는 1923년 7월 20일(음력) 충남 공주군 정안면 보물리에서 태어나시고, 정안보통학교 휘문중학교 일본중앙대학을 졸업하셨습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중퇴하시고, 중앙대학교와 단국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셨습니다. 1945년에는 일본군 학도병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시던 중 조국 광복으로 풀려나기도 하셨습니다.
보문중학교 공주농업중학교 봉황중학교 공주농업고등학교 공주사범학교 교사를 역임하시고 공주교육대학교 교수로 정년퇴임을 하셨습니다. 원로 수필가로서 여러 권의 수필집과 수필선집, 수필문학전집을 발간하시고, 원종린수필문학상을 제정하시어 대한민국의 수필문학 발전에 기여하셨습니다. 한국수필문학회 이사, 사단법인 대전예술단체 총연합회 고문을 맡아 연세가 높으심에도 불구하고 수필문학 발전에 사랑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국민훈장 모란장, 제1회 수필문학대상, 문학사랑 대상, 제1회 대전예술가상, 제1회 올해의 수필인상 등을 수상하셨습니다. 2011년 6월 3일 6시 50분에 을지대학교병원에서 영면하셨고, 5일 9시 30분에 발인하여 대전공원묘원에 모셨습니다. 슬하에는 2남 1녀가 있으며, 차남 원준연 수필가는 중부대학교 교수로 부친의 뒤를 이어 수필을 창작하고 있습니다. 고 원종린 선생님을 먼 곳으로 영결하면서 비통한 마음으로 명복을 빕니다.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