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우리는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끌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색시 싸구려 분냄새나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밥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뛰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건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신경림<겨울밤>-
한 겨울의 밤은 문종이에 먹물 번지듯이 퍼뜩 찾아와 집집마다 설거지 서두는 소리와 꾸정물 버리는 소리로 요란하고 남정네들은 호롱불에 석유를 붓고 그을음을 죽인다고 심지를 조정하고 짐승을 키우는 집에는 바람막이 가마니를 서둘러 내리고 까치밥 하나 달랑 매달려 말라 비틀어진 감나무 가지에 제법 찬바람이 일면 한 순간에 고요가 밀려온다.
긴 겨울밤의 권태는 봄부터 가을걷이까지 죽어라고 일만 하고 살아온 우리네 일상에서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벌써부터 아버지 또래들이 모이는 마을 회관으로 나갔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저녁 먹고 마실 나온 사람들로 붐비는데 말이 회관이지 공동창고 옆에 어슬프게 넣은 방 한 칸이라 약간이라도 늦으면 아랫목을 뺏기기에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몸져눕거나 집안에 무슨 일이 없는 한 저녁 먹고 해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왔다.
맨날 하는 소리요 누구가 어디에 점 있는 것까지 다 아는 꼬치친구들이지만 그렇게들 모이면 장난치고 씨름하고 새로운 소식이 뭐가 없을까 하고 귀를 쫑긋 세우는 모양들이 애들하고 똑같다.
“야 오늘은 누구 집에 제사 없나”
“동네에 꼬신네가 안 나는걸 보모 제사는 없는 것 같고 아까 읍내 갔다 오다 새동네를 지나오다 보니 굿하는 집은 하나 있더라”
“그라모 돼지대가리 특공대를 조직하자”
“이번에는 내가 안뽑힌다 다리 끼워라”
한 낱대 두 낱대
은단지 꽃단지
바람의 새앙쥐
영남거지 팥대장군
고르레 뿡
하나 은나
매와 때와
메기 삼촌
어디 갔니
기장밭에
삼따로갔다
요꼼조꼼
두더지 총
남정네들이 이런 애들 짓을 꾸미고 있을 때 입담 좋은 화전댁 안방에는 동네 아낙들이 한 방이다. 저마다 일거리 하나씩과 화전댁 입담값으로 감홍시와 삶은 고구마 몇 개씩을 손에 들고 모인 아낙들은 화전댁의 고담책 읽는 소리에 바느질을 멈추고 넋을 잃었다.
고담책은 주로 장끼전, 박씨전, 춘향전, 숙영낭자전, 흥부전, 임경업전, 홍길동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등인데 특히 박씨부인이 나중에 도술이 풀려 예쁜 여자로 되는 장면에는 바느질 거리를 집어 던지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다고 이 아낙들이 박씨전의 내용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화전댁이 읽을 때마다 약간씩 다르게 어찌나 구성지게 책을 읽든지 숫제 심청전은 듣다가 초상집이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 때쯤이면 누군가가 쌈짓돈을 내어 마을 구판장에 막걸리 심부름을 가고 감홍시와 타박고구마와 동치미 국물에 거기다가 남정네들 모임 마을회관에서 가져온 돼지고기 몇 점을 합해서 텁텁한 막걸리 한 잔을 하다보면 겨울밤이 이보다 더 할 수가 없다.
“화전띠 행님은 우찌 저리 고담책을 구수하니 잘 읽을꼬”
“너그는 신랑도 있고 자석도 있고하니 내 속을 우찌 알것노 대동아 전쟁때 영감 잃고 마음 둘 데가 없어 맨날 밤이고 낮이고 읽은게 고담책 아이가 맨날 읽으니 한숨 섞고 눈물 섞고 그리 되더라”
건너방에 맏딸애기 스물다섯 먹은나이
과부될줄 알았으면 시집갈년 내아니다.
삼십살이 넘어가도 시집갈년 내아니다.
헌신짝도 짝이있고 미물짐생도 쌍이있고
어화낭군 우리님아 이런일이 또있는가
천상배필 아니걸랑 만내지나 안했지만
어화낭군 우리님아 이런일이 또있는가
사촌동생 육촌동생 일심으로 연애하네
시운천왕 궂은비에 우장없이 못오니껴
황천같이 무슨일고 이내일신 다려가소
어화낭군 우리님아 집처실게 불이붙어
산초목에 불이내려 불꺼줄이 누구신고
어화낭군 우리님아 이런일이 또있는가
기왕지사 왔거들랑 죽지나 말아야지
열아홉살 먹은 천상과부가
스물아홉살 먹은 전취 딸을 잃고
단발령서 머리깍고 바랑망태 둘러메고
백팔염주 목에걸고 구절죽장 손에들고
짚신감발 졸라신고 소매자락 눈물씻고
강원도라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유점사 법당으로 들어간다
<경북 문경 향토사료10편>
이름 모를 밤새가 화전댁의 청성 맞게 구슬픈 소릿자락 따라 울고 멀리 새동네 굿판의 무당의 징소리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에 함박눈이 소리없이 내린다.
첫댓글 혹시 이걸 다 외우는건 아니겠지? 그럼 천재지??
참으로 답답하긴, 어디서 주어서 붙인것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