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에 있는 아카데미 하우스호텔과 강북구청소재지
구름바다(雲海)와 老松
끝내 오르지 못하고 어렵게 내려와 우회함
영봉정상의 헬기장
산을 어디다 손대려 하느뇨,
산에 들면 가득한 영기에 감사할 지니
산의 정기 있으매 푸른 기운 솟고
산의 자연 있으매 맑은 물도 흘러
우리 생명 더불어 모든 생명 사노니
산이여 영봉이여 만고 래변 하여라.
(정상비 아래 있는글)
끼끗이 정비된 하루재
인수 대피소
낙뢰 발생시 대처요령
1, 낙뢰는 높은 물체에 떨어지기 쉬우므로 저 지대로 이동
1, 즉시 몸을 낮추고 움푹 패인곳이나 계곡, 동굴같은곳으로 대피
1, 키 큰 나무 아래는 오히려 위험하다.
1, 스틱이나 우산같은 긴 물건은 땅에 늬어놓고 멀리 떨어질것
1, 낙뢰시는 등산을 삼가는것이 제일이다.
인수암 위에서 바라본 인수봉
상당히 힘이드는 깔딱고개
시인 마을이기도 한 백운산장
위문(대한민국 사적 제 162호 북한산성)
북한산 능선을 따라 쌓은 석축산성으로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할때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위해 개루왕때(132년)처음 쌓은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신라가 백제와의동맹을 어기고 한강지역을 차지하면서
진흥왕이 북한산 순수비를 세우기도했다.
만경대로 연결된 북한산성
백운대 정상(836,5m)
통일서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조국강산
겨래도 나라도 하나 이기에
피와 사랑으로 한덩이 되어
우리손으로 통일을 이루 오리다,
(한국 산악회에서 세운비문임)
오늘은 집사람 생일이다.
해마다 늘어만 가는 케이크의 가는 초 숫자가 금년에도 하나 더 늘었다.
작은 케익이지만 저곳에 꼽을 수 없을 정도의 숫자가 늘어가길 바라는 마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은 마누라 생일날(비록 늙었지만)산에 간다고 배낭 챙기는 영감 좋게 보아줄 사람은 아마 없겠지!
딸들이 야단이다. 집에 올 때는 장미꽃 한 송이라도 꼭 사오란다. 내 생전에 꽃 사본일이 없거늘 어찌 늙어가는 나에게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시키나 하면서도 죄책감에 용기 내어 한 송이 사 들고 가는데 지나는 사람이 나만 보는 거 같아 좀 그랬다.
다음 주엔 지맥산행(팔봉.금적)이 있기에 몸 풀기 겸 미답지가 많아 북한산을 찾기로 했다.
저녁엔 생일 파티도 있다고 해서 일찍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구파발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북한산 가면 같이 가자고 따라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인천에 사는 배칠수란 사람인데 대구가 고향이며 금년 62세란다.
난 이제 다섯 번째 북한산을 가보는 사람인데 괜찮겠습니까? 하니 좋아 라 하는데 사실 초보자가 동지를 만난 셈 이다.
솔고개에 내려 세멘으로 포장된 좁은 마을길을 따라 조금 오르다가 오른쪽 큰 상수리나무 옆으로 길이 나 있다. 바로 상장능선이다.
상장능선은 북한산 국립공원의 만경대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로 영봉(604m)을 일으키고 육모정고개를 지나 북서로 방향을 바꾸면서 빚은 능선인데 그동안 9개의 봉우리를 만들면서 많은 단애와 바위봉도 만들었고 전문가가 아니면 위험해서 아무나 오를 수 없는 그런 산줄기 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회 하는 길을 택했고 더군다나 날씨가 좋지 않아 구름바다(雲海)에 갇혀있는 상장능선을 오르면서 갑갑해 한건 사실이나 그래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날씨가 좋아져 희망을 갖고 산행에 임했다,
상장능선을 기점으로 고양시와 우이령을 경계로 오봉능선과 도봉의 주능선 우이동 남 능선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것도 바라보지 못하고 구름 속을 헤치고 다닌 그런 산행이었다.
한북정맥이 도봉산을 일으키고 우이령에서 잠깐 숨을 돌리다가 북한산으로 치달아 인수봉, 백운대, 만경봉에서 절정을 이루며 북쪽으로 가지 내린 것이 상장능선인데 솔고개에서 예비군 훈련장으로 유명한 노고산(495.7m)과 일산의 고봉산(208.8m) 교하의 장명산(102m)에서 그 소임을 다 하는 그런 산줄기이다.
그동안 군부대의 강력한 단속으로 통행이 어려웠는데 지금은 단속을 하지 않는 (법적으로 완전 개방된 것 같지는 않음)지역이라 북한산의 최대 비경지대라 일컬어지고 있는 수목과 자연경관이 잘 보존된 지역이란 아름답다는 소문만 듣고 찾아 왔지만 날씨 탓으로 상면할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다음 다시 찾으리라 마음먹었는데 벨이 울린다,
부산 건건 산악회장 김태영씨의 전화다. 지난 일요일 소백산을 갔는데 회원이 낙뢰를 맞아 사고가 났는데 가족들과 얘기가 잘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예사로 알고 여태껏 산행을 해온 본인 이지만 대형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이번에 절실히 느낀 셈이다.
上長峯은 능선이 길고 서울을 향한 산이라 산중에서도 으뜸이 된다하며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오봉능선 버금가는 암봉이 곳곳에 솟아 9봉을 이루는데 릿지하는 사람은 신바람이 나겠지만 나로서는 엄두도 못 낼 형편이라 얌전히 우회하기로 했다.
북한산을 三角山이라 했으니 백운대(836.5m) 인수봉(810.5m) 만경대(국망봉.799,5m)의 위용을 한눈에 바라보며 산행을 할 수 있어 마음 흐뭇했고 하늘로 치솟은 백운대 암봉에 펄럭이는 태극기가 한없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政治하는 사람들아 그렇게 理念싸움만 하지 말고 한번쯤 북한산에라도 올라 보아라.
막힌 가슴도 트이고 상대방을 이해하게 될 여유도 생기도 政局을 이끌고 가야할 길도 보일 것이다.
육모정을 지나 영봉(604m)에 오르니 강열한 햇볕에 얼굴이 따가울 정도지만 인수봉은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질 않는다, 정비가 잘 되어 있는 하루재를 거쳐 인수산장과 인수암을 지나니 그때서야 구름이 걷힌 인수봉이 제 모습은 선보인다.
계곡엔 제법 많은 물이 흐른다,
이 아름다운 곳에 맑은 물 까지 흐르니 어찌 서울 사람들이 북한산을 그냥 두고 바라만 보고 있겠는 가 !,
바위가 닳아 발자국이 생기고 손에 닿는 나무는 옻칠을 한 가구 이상으로 반질반질하다.
위문에 도착하니 공단직원이 만경대와 용암봉 쪽은 못 가게 지키고 있었다.
백운대 오름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집사람과 같이 눈길을 오를 때 고생했던 記憶만 새록새록 날 따름이다,
정상에서 점심을 먹고 내려오면서 두 사람은 작당을 했다. 저 아래 보이는 숨은벽 길로 하산하여 효자동으로 가자고 인수봉(5~6명이 바위에 붙어있는) 아래로 해서 서로 잡아주며 위험한 길을 가려고 했으나 결국엔 마음을 돌렸다. 10여m의 자일만 있어도 한번 시도 하겠지만 엄두를 낼 수없는 아찔함에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결국 아까운 시간 90여분만 날려버린 셈이다.
결국 만경대 암릉길을 거쳐 용암문에 도착 아래 약수터에서 실컷 마시고 보충하여 동장대가 있는 시단봉(607m)산성길을 따르니 대동문이 나온다,
진달래 능선으로 가려다 저녁행사가 염려되어 구천폭포가 있는 계곡 길로 내려갔다.
비가 많이 올 때도 그렇지만 경사가 심한 계단길이라 우리같이 무릎이 염려되는 사람에겐
부담을 많이 주는 길이라 권할 길이 못된다.
폭포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이고 마지막 계곡을 건널 땐 물도 좋고 해서 바지에 묻은 흙을 수건에 물을 묻혀 닦아내니 깨끗했다,
매표소와 아카데미 하우스 호텔 앞에 내려오니 마을버스가 도착한다.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그냥 타는데 옆 사람에게 조금 미안했다.
7시 20분에 시작한 산행이 4시 49분에 마쳤으니 오늘도 9시간정도 산행을 한 셈이다.
수유역에서 4호선을 타고 사당동 큰딸 집에 오니 6시다.
샤워를 빨리 끝내고 63빌딩에 있는 뷔페식당 카빌리온에서 푸짐한 저녁식사를 하고 일산으로 돌아오니 11시 30분이다.
산에 갔다 온 사람이 맛있고 좋은 음식 앞에 사양할 사람 있겠는가.
먹성 좋은 나는 실컷 먹고 카푸치노 커피한잔으로 마무리를 하니 슬슬 졸음이 오기 시작한다. 좋은날 좋은 음식 마누라 생일 덕을 톡톡히 본 하루였다.
아름다운강산
훼손이 심해 글을 알아볼수 없는 3,1운동 암각문
(글의 내용을 소개하는 안내문이 있었으면)
백운대에서 바라본 인수봉(아래쪽으로 바위꾼이 4명이 붙어 있었다)
북한산의 우이령을 경계로 그 북동편에 우뚝 솟은 자운봉(740m) 만장봉(718m) 선인봉(708m)일대를
도봉산이라 하며 이 봉우리 일대는 산세가 웅대.험준하나 그 형상이 준수하고 기품이 있어 특출한 경관을 이룬다,
백운대를 향하여 오름짓하고있는 오리와 노적봉
숨은벽 암릉 능선길
원효봉 암릉에 있는 염초봉
용암문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뺏고 빼앗기던
쟁탈 대상지로 백제시대에 쌓은 토축산성이다,
고려 고종 19년(1232)몽고군의 격전이 있었고
거란이 침입 했을때에는
이곳에 고려 태조의재궁(관)을 옮겨온 적도 있었다.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을 당하여
도성 외각의 축성론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에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했다.
동장대
북한산성 3대 장대중의 하나이다,
장대는 장수의 지휘소로 성안의 지형이 높은곳에 설치한 건물이다,
성 안에는 각 국문별로 적정 장소를 선정하여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를 두었는데
그중 동장대의 규모가 제일크며 행궁을 비롯한
성의 안밖을 모두 살필수 있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대동문
이 성은 원래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을때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던 성이다,
삼국 사기에는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이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