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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림(外林)마을
1. 개관
계북면 소재지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솔개재를 넘어 북쪽으로 2.9km를 가면 서쪽으로 동녘의 떠오르는 해를 가득 받고 덕유산을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 입구에서 진입로를 따라 400m를 올라가면 낙이정(樂易亭)이라는 정자를 옆에 두고 마을회관이 목판서각으로 새긴 외림회관이라는 명찰을 달고 손을 맞는다. 회관 앞에서 마을 중앙으로 오르는 길이 있고 왼쪽과 오른쪽 아래에도 각각의 길이 있어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이 길들은 위에서 서로 만나 어느 쪽으로든 마을을 돌며 원하는 집에 당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마을의 집들은 나지막한 돌담을 둘렀는데 쌓은 돌들이 크지 않은 걸로 봐서 큰 돌이 흔한 마을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마을 회관 앞에서 동쪽 덕유산을 바라보면 마을로 흘러드는 힘찬 산맥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장수덕유산(長水德裕山, 서봉)에서 남쪽으로 흐르던 백두대간이 서쪽을 향해 굵직한 지류를 만드는데 이 지류는 한 번 크게 용트림을 하며 작은 삿갓봉을 우뚝 세우고 곧 세 지류로 나뉜다. 가운데 지류는 힘차게 흔들며 내려오다가 다시 분기하여 한 지류는 북서로 파곡마을을 감싸고 가운데 지류는 오른쪽에 문성마을을 앉힌 다음 곧장 병아리를 채는 솔개의 형국으로 내려뻗어 안부(鞍部)에 솔개고개(鳶峙)를 만든다. 지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는데 여기서 형성된 골짜기의 4부 능선쯤에 외림마을이 자리를 잡고 자신을 감싸는 뒷산을 내려준 동쪽에 우뚝 선 장수덕유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가장 먼저 바라보는 마을이 되었다.
외림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260여 년 전에 함안조씨(咸安趙氏)인 조백(趙柏)과 조추의 형제가 무주로부터 이주하여 살게 되면서 형성되었다. 그 뒤 약 50여년이 지난 후 광산김씨(光山金氏)가 들어오고 다시 50년이 지나서 창원황씨(昌原黃氏)가 무주에서 이사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솔고개’(松峙)는 ‘솔개고개’(鳶峙)를 잘못 부르는 이름이다. 외림마을이 솔개가 숲속을 찾아드는 지형의 밖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고, 숲의 안쪽을 내림(內林)이라고 한다.
외림마을의 역대 이장은 조준명(일제강점기 30년대 중반)씨, 조덕봉(30년대 중반 40년대 초)씨, 조판동(’43-’55)씨, 조용철(’56-’65)씨, 정인조(’66-’67)씨, 빈윤준씨, 조태용(3년)씨, 황인섭(1년)씨, 공태성씨, 박세훈씨, 공태성(’88-’89)씨, 박세훈(’90-’93)씨, 윤영섭(’94-’97)씨, 공태성(‘98-’99)씨, 최병성(’00-’03)씨에 이어 현재는 다시 공태성씨가 2004년부터 4년째 마을 이장을 맡아 다년간의 경륜과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주민들의 편에 서서 큰 마을 일을 무리 없이 잘 꾸려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외림마을은 70년대 초반에는 원촌초등학교(현재 전교생 40명)에 다니는 학생만 160명에 이를 정도로 큰 마을로서 총 132호에 800여명의 주민이 살았으나 현재는 함안 조(趙)씨 김해∙김녕∙광산 김(金)씨, 전주․연안 이(李)씨, 창원∙장수 황(黃)씨, 밀양․반남∙함양 박(朴)씨, 경주 정(鄭)씨, 경주 최(崔)씨, 곡부 공(孔)씨, 여양 진(陳)씨, 진주 강(姜)씨, ․달성 서(徐)씨, 창녕 성(成)씨, 청송 심(沈)씨, 파평 윤(尹)씨, 남양 홍(洪)씨 등 200여 주민이 63호의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아직도 큰 마을에 속하고 젊은 층이 많고 단합이 잘되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
2. 산과 골짜기
• 솔고개 : 계북면 원촌리와 계북면 어전리를 잇는 고개이다. 산줄기의 모양이 솔개가 내려앉는 듯하다 해서 솔개고개(鳶峙)라 했는데 솔고개(松峙)로 잘못 부르고 있다.
• 가장골 : 마을 북쪽 400m 지점의 작은 골짜기이다. 양지 새청너머에 있다.
• 각골 : 마을에서 남서쪽 약 1km 지점에 있는 작은 골짜기 5개를 묶어 부르는 말이다. 외림마을에서 내림마을로 넘어가는 곳에 있다.
• 방애밭골 : 마을에서 북쪽으로 2km 쯤 떨어진 원골 오른쪽 골짜기이다. 골이 깊어 예전에 나무꾼들이 호랑이를 봤다는 얘기가 묻어나오던 곳이다.
• 미녀골 : 마을에서 남쪽 1.5km 지점의 골짜기로 기안 위에 있는 골짜기이다.
• 산지골 : 마을 서쪽의 가장 큰 골짜기로 마을에서 바로 골짜기가 시작된다. 산지골의 물을 받아 물방골 등 빨래터가 형성되고 기안과 조탐거리 등의 논에 물을 공급했다.
• 대밭골 : 외림에서 각골을 지나 내림으로 넘어가는 고개 부근을 이르는 말이다. 산죽(山竹)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부지방골 : 각골 오른쪽 골짜기로 마을에서 남서쪽 1km 지점에 있다. 옛날에는 어린 아이가 죽으면 땅에 묻지 않고 나무에 매달거나 옹기에 넣어 돌로 쌓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를 아장이라 한다. 부지방골에는 돌이 많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골짜기라서 자연히 아장을 많이 하던 곳이다. 지금도 날 궂은 날 부지방골에 가면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린다 하여 가기를 꺼려하는 곳이다.
• 원골 : 마을에서 북쪽으로 황새목아지를 넘어가거나, 돌고지로 내려가는 초입에서 시작되는 골짜기로서 비교적 큰 골짜기이다. 울창한 밤나무 숲이 있고 전에 원천사라는 절이 있었다. 마을에서 북쪽으로 500여m 지점에서 골짜기가 시작된다.
• 도치목아지 : 마을 뒤 서쪽 500여m 지점에 있는 고개이다. 산지골 오른쪽에서 회뜩백이로 올라가는 곳에 있는데 산줄기가 날카로워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무꾼들이 즐겨 쉬던 곳이다.
• 회뜩백이 : 마을에서 서쪽으로 2km 지점에 있는 골짜기이다. 도치목아지 위에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주로 땔감을 채취하던 곳이다.
• 양지골 : 회뜩백이 너머에 있는 골짜기이다. 마을에서 서쪽으로 3km가량 떨어져 있는데 참나무, 싸리나무 등 양질의 땔감을 얻기 위해 다니던 골짜기이다.
• 뒷동산 : 마을 북서쪽에 마을과 접해 있는 나지막한 산이다. 마을과 가깝고 험하지 않아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 구실을 하던 산이다.
• 두루봉 : 마을 뒤 서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로 마을의 배산이 된다. 봉우리의 곡선이 매우 부드럽다.
3. 하천과 들
• 하천 : 질마재와 솔개고개, 산지골과 원골 등에서 발원한 가는 물줄기가 모여 외림마을 앞을 흐르고, 돌고지를 지나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 주고마을 앞에서 양악천과 합류하여 새실 위에서 대량천과 만나 구량천으로 흘러 용담에 이른다.
• 도리미 : 마을 입구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북동쪽으로 700m 지점에 있는 들이다. 모퉁이를 돌아가서 있는 들판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 구릉고개 : 마을에서 남쪽으로 600여m 지점에 있는 들이다. 외림마을에서 농로를 따라 솔나무거리를 지나서 내림으로 넘어가는 곳에 있다. 주로 수렁논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솔고개 : 구릉고개를 지나 솔개고개 넘어가기 전에 있는 밭과 임야 등을 이르는 말이다.
• 원닷발 : 재밭너머와 솔나무거리 부근의 논을 일컫는 말이다.
• 각바우 : 고속도로가 개설되기 전 각바우 방죽이 있었는데 각바우 방죽에서 솔고개 아래까지의 들판을 이르는 말이다.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2km 쯤 떨어져 있다. 뿔처럼 생긴 바위나 모난 바위가 있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 방죽골 : 마을에서 남동쪽 500m 지점에 있는 들이다. 국도 건너 옹기점촌 앞에 있는 70여 마지기의 논이 있는 들판인데 방죽처럼 빠지는 논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돌고지 : 마을에서 북동쪽 1km 지점의 하천을 따라 형성된 들판의 이름이다. 주로 다랑이 논이 형성되어 있다. 돌고지는 원골과 방애밭골의 입구가 된다.
• 외기기 : 각바우 방죽과 19번 국도사이에 있는 논 70여 마지기의 들이다. 마을에서 남동쪽 500m 지점에 있다.
• 마당말 : 마을에서 남동쪽 800m 지점에 있는 들판이다. 19번 국도를 따라 계북면 소재지로 가다보면 왼쪽은 외기기 오른쪽은 방성지기와 마당말이다. 약 60여 마지기의 논이 있다.
• 방성지기 : 마당말 아래 들판이다.
• 기안 : 마을에서 남쪽 600m 지점에 있다. 음지새청 너머에 있는 들판인데 약 50여 마지기의 논이 있다.
5. 기타
• 재밭너미 : 마을에서 남쪽으로 농로를 따라 500여m 지점에 있는 지명으로 솔나무거리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언덕을 말한다.
• 물방골 : 마을 뒤 남서쪽 산지골 입구에 있는 큰 빨래터이다. 상수도가 개설되기 전에는 대부분의 빨래를 원골과 이곳에서 했다.
• 삼곶거리 : 마을 남쪽에 있는 지명이다. 전에 삼(대마)을 쪄내던 삼곶터가 있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각바우방죽 : 마을 남동쪽 2km 지점에 있던 방죽이다. 지금은 고속도로 공사로 매립되었으나 질마재와 솔개고개에서 내려오는 물을 저장했다가 방죽아래 외기기 들과 방성지기 들 논 150여 마지기에 물을 공급했던 저수지이다. 붕어와 우렁이 많고 저수지 뒤쪽으로는 왕골도 많이 자라던 방죽이다. 가끔 익사사고가 나는 곳이기도 했다.
• 대포거리 : 외림마을 입구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100m 쯤 가면 큰 모퉁이가 나온다. 모퉁이를 돌면 파곡에서 내려오는 하천에 놓여진 다리의 옛 이름이다. 6.25 한국전쟁 당시에 이 다리는 나무로 놓여진 목교였는데 큰 탱크(대포)가 지나가다가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대포가 쳐박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포거리하면 그 다리 근방의 논까지 포함된다.
• 양지새청 : 19번 국도에서 마을로 진입하는 도로의 오른쪽 긴 구릉을 말한다. 노송 2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 음지새청 : 조탐거리 건너 양지새청 맞은편에 있는 구릉이다. 역시 노송 10여 그루가 있고 아래에는 달집 놀이터가 있다.
• 방성지기다리 : 각바우와 질마재에서 내려오는 도랑을 건너기 위해 외기기와 방성지기 들판 사이의 19번 국도에 놓여진 다리인데 교각과 난간이 없는 작은 다리이다.
• 솔나무거리 : 마을에서 농로를 따라 남쪽으로 600여m 가면 전에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어 좋은 그늘을 만들어주던 곳이다. 원닷말, 구릉 고개 등에서 일하던 일꾼들이 새참이나 점심을 먹거나 초산꾼들이 지게를 받쳐두고 쉬던 곳이다. 지금은 소나무가 베어지고 대형관정이 개발되어 있다.
• 시암거리 : 마을 회관 앞 광장 가운데 모정 앞에 있다. 상수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의 식수를 공급하던 샘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 건너시암거리 : 마을 남서쪽 50m 거리 함안 조씨 제각 옆에 있다. 마을 윗담 사람들의 식수를 공급하던 샘인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 황새목아지 : 마을 북쪽에 마을과 접해있다. 마을에서 원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둥굴배미 : 아이를 가진 산모의 배처럼 논이 둥글게 생겼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안들에 있었으나 지금은 경지정리가 되었다.
• 왕골배미 : 시암거리 옆에 있는 논인데 공동 샘에서 흘러가는 음식찌꺼기 등 거름이 걸어서 벼를 심으면 웃자라거나 쓰러지는 바람에 왕골을 심을 수밖에 없던 논인데 지금은 없다.
• 조탐거리 : 마을 입구에는 작은 연못과 연못가에 하늘을 찌를 듯한 미루나무 7-8그루가 있었다. 그 옆에 조탑(造塔)이 있었고 이곳에서 산제를 지냈다. 조탑이 있었던 마을 입구를 조탐거리라 하고 그 아래로 펼쳐지는 논까지 포함해서 부른다.
• 다리목기 : 19번 국도에서 마을로 진입하려면 각바우에서 내려오는 하천을 건너야 하는데 목교는 약간의 큰물에도 떠내려가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직접 목도를 하여 원골 입구에서 길이 2m 정도의 큰 바위를 옮겨와 다리를 놓아 사용했다. 이 다리와 그 근처를 포함해서 다리목기라고 한다.
• 낙이정(樂易亭) : 2000년에 마을 회관 앞 광장에 세운 모정이다. 낙이정 앞에는 권선회기념비(勸善會紀念碑)가 세워져 있다. 뒤에는 권선회 회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고 앞에는 낙이정 건립과 권선회 조직 취지가 새겨져 있다.
• 함안조씨(咸安趙氏) 제각(祭閣) : 마을의 남서쪽 어귀 건너 시암거리 옆에 있다. 본채 4칸, 행랑채 3칸의 한옥으로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는데 해마다 음력 10월 첫 주에 함안조씨 종친 60여명이 모여 시제를 지낸다.
4. 민족과 종교
■민속
• 산제
외림마을은 오래전부터 동구(洞口)의 조탐거리에서 매년 정월 초사흗날 새벽에 산제를 모셨다. 그러나 새마을사업이 시작되면서 작은 연못이 매립되고 미루나무는 베어졌다. 미루나무 옆의 조탑도 사라지면서 모든 민속적 제의(祭儀)의 형태가 미신으로 치부되면서 정성을 다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산제 풍습도 사라졌다. 기억에 남아있는 외림마을 산제의 제주(祭主)는 이기팔씨, 이희도씨, 조남수씨로 이어지다가 끊겼다. 산제의 제의 과정과 내용은 인근 마을과 비슷하다. 제주는 섣달그믐부터 궂은 데를 가지 않고 몸을 정갈히 하며 초이튿날 산제 거리를 깨끗이 청소하고 왼새끼줄에 한지를 꽂아 금줄을 둘러 잡인의 접근을 막는다. 자정이 가까워 오면 목욕재계하고 제수를 짊어지고 산제당에 가서 진설한다. 돼지머리, 삼실과, 어포, 밥을 차리고 잔을 올렸다. 산제의 경비는 밭 400평, 논 100평의 마을 전답의 도조로 충당했고, 제주는 산제를 모시고 초사흗날 낮에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여 돼지를 잡고 음식을 차려 나눠먹으며 새해 덕담을 나눴다.
• 귀일제
자손 없이 죽은 박과부 할머니와 오할머니, 황달성씨를 위해 이장 주관으로 음력 10월 보름에 지내는 제사이다. 박과부 할머니와 오할머니, 그리고 황달성씨는 죽으면서 마을에 전답과 대지를 마을 공동 토지로 희사했는데 박과부 할머니는 대지 500평과 밭 400평을, 오할머니는 논 300평을, 황달성씨는 논 400평을 각각 남겼다. 마을에서는 두 할머니와 황달성씨를 위해 음력 9월 9일에 귀일제로 지내주었으나 이때가 한창 추수철로 바쁜 때라 시제를 모시는 때인 10월 보름에 지내고 제의 형태도 시제와 비슷하게 한다.
경비는 두 할머니와 황달성씨가 남겨 놓고 간 토지를 빌려주고 받은 도조로 쓰고 제수 준비는 돼지를 잡는 등 마을 공동으로 한다. 지방 세벌을 붙이고 제수를 진설하는데 밥 6그릇, 국 6그릇, 삼실과, 건포, 조기 3마리, 삼탕, 도라지나물, 고사리나물, 무나물 등 외림마을 가정 설 차례상과 같이 차린다. 제의 순서는 노인회장이 먼저 분향하고 이장이 초헌을 한다. 이장 초헌이 끝나면 개발위원장 등 절 하고 싶은 사람 모두 한다. 제사가 끝나고 나면 마을사람 모두 모여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눠 먹으며 하루를 즐긴다.
• 달집태우기
외림마을의 달집태우기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민속이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회관 앞 시암거리 광장에서 했으나 주택과 너무 가까워 화재의 위험이 있다 하여 음지새청으로 옮겨서 하고 있다. 음지새청 하단에 30여 평의 터를 닦아 매년 달집태우기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음력 정월 열 나흗날이 되면 마을 주민 모두가 나서 트럭을 이용하여 인근 산에 가서 생솔가지를 해온다. 멀고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고 가서 생솔가지를 해 오는데 간벌한 곳이나 산판한 곳, 혹은 일반 산이라도 산주의 허가를 얻어 가지치기를 해오기도 한다. 이렇게 모아온 생솔가지들을 음지새청 터에 높이 쌓아 달집을 만든다.
하루가 지나 보름이 되어 달이 떠오르기 전에 미리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제의상을 차린다. 돼지머리, 삼실과, 밥 3그릇, 전, 떡, 탕, 나물, 술 등 일반 가정의 명절 차례상처럼 진설한다.
보름달이 막 떠오르기 시작하면 점화하고 외림마을 복천사 주지가 축원을 시작한다. 천지신명과 팔도명산 산신령께 고하고, 산신용왕과 당산 할아버지께 마을에 큰 탈 없고 이웃간에 화목하며 모든 가정의 행복과 풍요를 축원한다. 이때 마을 노인 회장을 비롯하여, 이장, 개발위원장, 마을 사람들을 위해 소지를 올리는데 소지 2권(40매)정도가 사용된다. 축원이 끝나면 상쇠 박귀열(남, 78세)씨를 필두로 마을 풍물패들이 신명나는 굿을 치며 달집 주위를 돌고 마을 사람들은 술과 고기 등 음식을 나눠먹고 그 뒤를 따라 돌며 가족들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기원하며 춤추고 논다. 이 때 헌옷 등을 가져와 태우며 제액(除厄)하는 사람도 있다.
• 외림풍물 : 60년대 후반까지는 각 마을의 풍물이 성행하여 마을마다 정초 마당밟이를 흔히 볼 수 있었으나 근래에는 쇠(衰)하여 상쇠의 손에 남아있는 서너 가락을 치며 즐기는 정도이다. 그나마 외림마을 풍물은 박귀열 상쇠의 생존으로 근동에서는 풍물이 가장 성(盛)한 마을이다. 외림마을의 풍물을 보면 상쇠는 70년대 후반까지는 유복씨가 주도 하다가 현재의 박귀열씨로 이어졌고, 장구는 김판식씨, 황일구씨에 이어서 현재는 김용암씨, 박원석씨로 이어져 내려온다. 박영철씨는 벅구와 상모놀이가 뛰어나다.
■ 종교
외림마을에는 복천사라는 절이 있어 다른 종교에 비해 불교가 약간 우세하다. 한 분이 교회를 다니고 몇이 마을 위에 자리 잡은 복천사에 다닌다.
• 복천사 : 주지 최금옥씨는 본래 신을 받아 신당을 차리고 몸주신을 모시던 무속인(巫俗人)이었다. 신을 모시면서 불교대학을 수료하는 등 꾸준히 경전을 익혀 20여 년 전에 원골에 원천사를 설립하여 운영해 왔다. 그러다가 복천사로 개명하고 현재의 마을의 북서쪽 어귀 뒷동산 아래에 터를 잡았다. 마을의 대소사에 앞장서 주민들의 신망을 얻고 있고 지금은 정월이나 초파일에 인근에서 찾아오는 신도수가 200여명 쯤 된다.
제보자
공태성(남, 67세) 현 이장, 4회 이장역임 / 마을역사, 역대이장, 지명유래, 민속
정인조(남, 73세) 전 이장 / 지명유래, 역대이장
박귀열(남, 78세) 외림마을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거주 상쇠 / 민속
조후제(남, 78세) 외림마을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거주 / 지명
윤영섭(남, 51세) 전 이장 / 역대이장, 산과 들의 지명
이광진(남, 50세) 외림마을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거주 / 지명
첫댓글 좋은 자료 퍼 가겟습니다. 날도 추운데 방학에 쉬시도 못 하시고~수고가 많으시네요
며칠 출석을 하지않아 궁금 했습니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으셨네요 학교일도 많으리라 생각하는데 이렇게 까지 열심히 하시는 모습을 보니 대단하시다는 말 밖에 ..계속 끝날때까지 지켜보는 계북인들이 있다는거 잊지 마시길...화이팅
고아산방님과 나사랑님의 숙제 검사가 철저하셔서 게으름을 필수가 없군요. 무언의 채찍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