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조광조 선생 謫廬 유허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모셔져있는 정암 조광조선생 적려유허비와 애우당 그리고 아래는 능주의 천변에있는 영벽정)
● 비운의 개혁주의자, 조광조
주초위왕이 왕이 된다.' 궁중에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이 발견되었다.
한 궁녀가 해괴하다고 여겨 벌레 먹은 이 나뭇잎을 왕에게 바쳤는데,
주(走)와 초(肖)를 합하면 조(趙)자가 되니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세력이 조작한 사건이었지만,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조광조는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유배된 후 사사된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기묘사화는 사림파의 위훈삭제에 대한 훈구파의 반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피로감을 느낀 중종의 등돌림이기도 했다.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성종 13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7세 때에
어천(魚川, 평안도 연변) 찰방(지금의 역장)으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갔다가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중종 10년(1515) 알성시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사간원 좌정언,
홍문관 수찬,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종 2품)을 역임하였다.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였고, 천거제인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그는 훈구파를 몰아내는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정국공신
103명 중 4분의 3에 해당하는 78명의 훈작을 삭탈한다. 78명의 훈작을 삭탈한 위훈삭제가
부메랑이 되어 비운의 개혁주의자 조광조는 38세의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는다.
● 하늘이 맺어준 친구, 조광조와 양팽손
1519년 11월 18일 조광조에게 능성(綾城, 지금의 능주) 유배의 명이 내렸다. 유배지에서
조광조의 속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다음의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다.
"누가 이 몸을 마치 활 맞은 새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나 스스로만은 말 잃은 늙은이
마음같이 웃고만 있네. 원숭이가 짖고 학들이 울어대지만 나는 돌아가지 못하리.
엎어진 독안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으리."
조광조는 자신의 처지를 '활 맞은 한 마리 새'로 비유하고, 마음은 '말 잃은 마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종이 자기를 다시 부를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지만 축 처진 조광조에게 위안이 되었던 유일한 친구는 능성현 출신의
학포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이었다.
양팽손은 중종 5년(1510) 사마시에 합격한 후 사간원 정원, 홍문관 교리에 있으면서 조광조 등
사림과 함께 개혁 정치를 펼쳤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양팽손 역시 기묘사화로 파직당한 후 고향에
내려와 있던 참이었다. 화순 능주로 유배지가 정해지면서 둘은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 서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 위로는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
조광조를 찾아온 의금부 도사 유엄의 손에 사약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은 후 양팽손을 찾았다. "양공 어찌 이토록 늦게야 오시오."
덥석 두 손을 잡고 "양공, 신이 먼저 갑니다"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조광조의 마지막 임종을 양팽손이 지킨 셈이다.
양팽손은 조광조를 손수 염하여 자신이 사는 쌍봉사 근처의 중조산에 가묘를 만들었다.
양팽손이 없었다면 조광조의 시신은 들판에 버려졌을지도 모른다.
양팽손, 그는 조광조에게 하늘이 맺어준 친구였다.
● 적려유허 추모비와 죽수서원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는 정암 조광조의 적려유허지다.
처음 유허비가 세워진 후 근래에 적중거가, 영정각, 애우당 등이 만들어져 제법 형태를 갖추고 있다.
담장 안의 첫 건물인 애우당(愛憂堂)은 그의 절명시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의 첫 글자인 애(愛)와 우(憂)에서 취했다.
애우당 안쪽에는 적중거가로 사용된 초가집과 영정각이 있다. 복원된 적중거가는 방 두칸,
부엌 한 칸의 초라한 3칸 집으로 조광조의 귀양살이 형편을 잘 보여준다.
적려유허비 앞면에는 '정암조선생 적려유허추모비'라고 새겨진 총12자의 해서체 글씨가
세로 두 줄로 6자씩 적혀 있고, 뒷면에는 추모내역이 한문으로 적혀 있다.
이 비는 조광조 사후 150여년 후인 1667년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웠고,
글은 우암 송시열이,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에는 조광조와 양팽손의 위패를 모신 죽수서원이 있다. 조광조와 양팽손,
둘은 죽어서도 영원한 친구가 되었다. 후일 조광조는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수많은 유림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자료출처, 국제고교사ㆍ빛고을역사교사모임회장 )
2010년 8월13일 모처럼 휴가차 고향을 찾아준 보성출신의 선사장과 화순 능주출신의
한사장과함께 조선조 거유로 비운의 개혁주의자 조광조 선생님의 적려 유적지요
사약을받고 38년의 생을 마친 애우당을 찾았다,
간헐적으로 내리는 빗줄기속에 영정이 모셔진 영정각을 참배하고
적려 유허비각을 둘러보는 심정은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자신의 소회를 읊은 시들이 편액으로 애우당에 걸리어있고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어
150년후 능주목사 민여로에 의해 건립되어 이어져 오고있다는 적려 유허비는
우암 송시열선생이 비문을 지으시고 글씨는 송준길선생이 쓰셨다는데
유적지 내에서는 그 의리의 선비요 죽어서도 친구가 되었을 양팽손의 흔적은 찾을길이 없고
나그네 눈에비친 유적지 보존 모습은 왠지 쓸쓸하고 황량하게만 느껴 졌음은
과연 나만의 심정 이었을까?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도 죽수서원은 아는이가 없었고 바쁜 일정때문에
죽수서원을 찾는일을 다음으로 미룰수밖에 없었음은
추후 쌍봉사 근처에 있다는 묘터와 함께 꼭 찾아보기로 마음속 다짐을 하면서
아쉬움을 달랠수밖에 없었다,..
(사진 및 기사편집 기산이장)
♬..........................그 저녁 무렵부터 새벽이 오기까지<해금독주곡>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