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과 민주국가 건설의 혼란. 남북의 사상 대립. 6·25와 가난은 사실상 우리에게 문화를 논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생활은 이어가면서도 한국인의 의식주 습관이 어떤 유래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우선 당장 필요한 것은 의식주였다. 그리고 학교와 공장을 지어 가난과 무식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게 시급했다. 수천년 이어 온 좋은 습관, 훌륭한 풍속은 모두 그늘에 가두어져 버렸다. 그런 가운데 서양문물, 특히 미국의 문화가 거침없이 거리를 활보했다. 꽃이 있어도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여유가 없던 때에 한참 쇠퇴해버린 차 마시는 양속(良俗)이 특별한 관심을 모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때는 차에 대한 상식이 사라지다시피 해서 "차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고, 커피가 다소 보편화되면서 상류계층의 인사들에게 각광을 받을 때였다.
물론 그것은 도시의 현상이요 산사(山寺)나 오지(奧地)의 농어가(農魚家)에서는 전통적인 삶을 이어갈 것이었다. 농어촌에 도시의 신문화(新文化)가 전해질 때가 아니었고, 도시 사람들은 전통이라든가 우리 것 내보이는 것을 치부로 여겼다. 도시와 농어촌으로만 구별할 일도 아니었다. 혼돈과 가난 속에서 저마다 생존에 급급했던 시대였던만큼 각자 위치에 따라 생활관 역사관 처세술이 모두 달랐다. 선말(鮮末) 이후 불어온 변혁의 바람이 수시로 바뀐 탓이기도 했다.
서풍이 문득 북풍이 되고 동풍도 되었었다. 암흑과 폭우에 시달리게 하더니 개면서는 양풍으로 바뀌었다. 멀리볼 게 없고 믿을 것 또한 없는 세상이었다. 충고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 자기 판단이 후회가 덜한, 그런 메마른 사회의 계속이었다.
특히 대일 감정이 좋지않았던 시기, 차생활의 전통을 잃어버린 우리 사회는, 일본인들이 성히 마시는 차를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하오리하까마 입은 놈과 똑같이 취급했다.
모두가 어려웠던 광복 후의 한동안, 도시인들의 사고는 그랬지만, 그러나 차 이야기는 어디선가 이어지고 있었다. 호남에서는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1∼1977), 영남에서는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1904∼1979)이 차생활을 실천하며 그 중요성을 전하는 데 앞장선 사람들이다. 그런데 다론(茶論)은 크게 달랐다. 의재의 차생활에는 아무런 격식이 없었던 반면 효당의 차생활은 엄격한 다법(茶法)을 요구했다. 의재는 차를 가르치지도 않았다. 춘설헌(春雪軒:그의 화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차를 대접하며
청담(淸談) 나누기를 즐기는 정도였다. 사람들이 차 나눠주기를 원하면 기꺼이 그렇게 했다. 춘설헌의 분위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풍류를 아는 옛 선비들의 자리가 그런 풍경이었을 것이라며 지금도 못잊어 한다.
이와는 반대로 효당은 다도용심(茶道用心)을 가르쳤다. 다도용심이란 차를 운용하는 사람의 마음자세와 차살림하는 방도를 일컫는 것이라고 하면서, 가장 중추가 되는 것을 ▲차의 맛과 멋에 관련된 문제와 ▲차를 내는 주인(烹主)과 손님(烹客)간의 용심(用心)에 관련된 문제라고 하였다. 두 분의 이러한 차이는 오늘날 영남과 호남이 다풍(茶風)을 크게 달리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재미있는 것은 의재는, 초의의 제자이자 추사로부터 수묵화를 전수받은 소치(小痴) 허련(許鍊)의 아들 허형(許瀅)에게 묵화의 기초를 익혔다는 사실이고, 효당은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열세 살에 출가(出家)하여 불가에 몸담았다는 사실로써, 두 분 다 가엄(家嚴)이나 이웃의 차생활을 보며 자랐는데, 어릴 때는 무심했던 것을 일본을 다녀온 뒤 특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의재의 차생활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냐 아니냐는, 그가 차에 대해 남긴 글이 없기에 알 수 없는 일이나, 일본을 다녀온 뒤 일본인들의 차 마시는 풍습을 좋은 느낌으로 자주 전언한 것으로 보아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없다. 전남 진도가 고향인 의재는 일찌기 신학문에 뜻을 두어 서울로 올라와 기호학교(畿湖學校)를 다니다가 스물세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토오쿄(東京)에 머무르며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법정학을 공부하기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 하고 그림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뒤를 돌봐줄 사람없는 가난한 유학생이었기에 학비며 생활 일체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는데 그것이 어려웠던 것이다. 어쩌면 이때 일본인들이 차를 성히 마시는 것은 보았지만, 격식과 세련미를 갖춘 본격적인 다도는 접할 기회가 없었던게 의재의 격식없는 차생활의 근원이 되었는지 모른다. 여섯 해 가량 머무르는 동안 때로는 막노동을 하였을 정도로 그는 서민들 사이에만 묻혀서 생활하다 돌아왔다.
의재는 그런 가운데 일본 화단의 활발한 움직임을 눈여겨 보게 되었고 자신의 소질을 시험해 보자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1918년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온 그는 허형(許瀅)에게 묵화의 기초를 익히면서 부지런히 화필을 연마했다. 그리고 22년, 그러니까 서른두 살에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전통적인 산수화를 출품하여 입상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선전 중심으로 할동했던 3, 4년 외에는 평생을 전라남도 광주에 정착하여 독자적 화필생활과 문하생 지도에 전념하면서 살았다. 차가 화필생활에 함께 하였음은 물론이다. 같은 세대의 신예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근대적 작품을 추구한 것과는 달리 오로지 옛법에 충실한 화격을 자신의 세계로 심화시켰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의재는 오자끼(尾崎)의 무등산 다원을 인수하여 삼애다원(三愛茶園)이라 이름 짓고 이를 경영했다. 그리고 다원 근처에 조촐한 산장 - 춘설헌(春雪軒) - 을 마련해서 그곳에서 나날을 보냈다. 춘설(春雪)이란 예부터 있어온 차 이름의 하나인데, 의재는 삼애다원에서 만들어지는 차에도 춘설차(春雪茶)란 이름을 붙였다. 이외에 그는 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여 가난한 집 청소년들에게 농사기술이며 학업을 닦게 하는 등 사회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조주선사 못지않게 찾아오는 사람에게 "차 한 잔 마시고 가시오" 소리를 했으나, 이렇다할 꾸밈도 격식도 거론하지 않았다. 편안한 차생활을 즐겼던 옛날이 아닌 이 시대의 우뚝한 다인(茶人)이었다.
반면 효당(曉堂)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열네 살(1916년)에 부모님 뜻에 따라 입산하여, 이듬해 환경(幻鏡)선사에게 계(戒)를 받았다. 입문한 지 두세 해만에 그는 어린 천재로 널리 알려졌고 노스님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 누구의 영향인지 모르지만 - 어려서부터 남다른 조국애와 투철한 민족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등사·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통을 받았다.
효당의 재능을 아낀 노스님들은 그가 감옥에서 풀려나자 불교재단 후원으로 일본에 유학을 보냈다. 1922년에 건너 가 33년 다이쇼대학(大正大學)불교학과를 졸업하였는데, 그는 이때 일본 다도의 진수를 눈에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용히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에서는 다도를 기웃거리는 공부벌레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말릴 수 없는 독립운동가였다. 23년에는 박렬(朴烈), 박흥곤(朴興坤), 육홍균(陸洪均) 등과 불령선인사(不逞鮮人社)를 조직하여 "불령선인지"를 간행하였고, 또 박렬의 일본천황암살
계획을 돕고자 상해에 잠입, 폭탄을 운반하여 왔으며, 대역사건(大逆事件)에 연루되어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풀려나서도 3년 동안 매년 29일씩 피검(被檢)될 정도로 주의받는 인물이었었다. 32년에는 김법린(金法麟) 등과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조직하였고 33년에는 조선불교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외에도 그는 많은 활동을 하였다. 명성여자학교 설립, 다솔사 불교전수강원 설립에 이어 국민대학과 해인대학을 차례로 창설했고, 해인사 주지를 맡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또 미소공동위원회 대한불교단체대표로 활동하다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960년, 그는 일선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진주 다솔사(多率寺) 조실로 들어앉아 조용히 원효교학 및 다도연구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광복 후 진주에서 차생활 운동이 먼저 일어난 것은 효당의 영향이었다.
차생활에 비상한 관심이 본격화된 것은 효당이 "한국의 다도(茶道)"를 발표한 1973년이었다. 이 때의 반향은 매우 큰 것이었다. 그야말로 "생활문화의 재발견(發見)"이었다. 효당은 이 책에서 다도(茶道)란 일상생활의 도(道)를 끽다(喫茶)에 붙여 강조하는 말이라고 정의했다.
…다성 초의는 동다송에서 "중정(中正)의 도(道)"를 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에서 보면 다도(茶道)는 일상생활의 기호인 차를 다루는 것으로써, 생활에서 중정의 대도(大道)를 실천할 것을 그 본지(本旨)로 하고 있다. 다인(茶人) 생활의 본회(本懷)라는 것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양식으로 삼고, 묵묵한 대자대비의 행원(行願)을 목표로 삼는 것이니, 다성 초의가 산천도인 김명희(추사의 아우)에게 보낸 시에 "옛부터 성현들이 모두 차를 사랑하였으니, 차는 군자와 같아 그 성질에 사기(邪氣)가 없기 때문이다(古來聖賢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라고 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다도는 각성(覺醒)의 참된 생활을 목표로 한다. 다도에서 각성의 생활을 강조하고, 또한 차생활을 통해 각성의 생활로 나아간다는 것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즉, 일상적인 생활이나 체험 속에서 온전함을 자각하고 터득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먼저 우리는 차가 지닌 물리적 성질에 주목하게 된다. 술은 우리 의식을 몽롱하고 혼미하게 만드는 데 반해, 차는 두뇌를 맑게하고 몸을 상쾌하게 하여주는 것이다……
효당은 한국의 차에 대하여 사적고찰(史的考察)을 마친 상태였고, 따라서 나름대로 신념으로 정리된 이론을 펴 나갔다. 간혹 그의 글 중에 일본 다도의 영향으로 보이는 표현이 섞인 것을 탓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오히려 아집에 사로잡힌 곡견(曲見)을 몹쓸 짓이라 했고, 지나친 편견이나 사심으로 상대가 납득하지 못할 주장을 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우리 것을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처지에서 남을 알아야 하며, 남의 것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해와 노력과 경이가 바탕이 된 경건한 태도를 보이는 공정성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특히 선인들이 영위하였던 살림살이의 예속과 규모를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우리 규구(規矩)나 예법(禮法)을 외람스럽게 낮게 여겨 버리거나, 부셔버리는 일을 하여 불충(不忠)·불효(不孝)스러운 불초(不肖)의 후손이 되는 것을 두려움으로 여기는 자세만 견지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정당하고 정통적인 문화 상속의 적자(適者)임을 자처해도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같은 신념에서 효당은 일본 유학 당시 일본인들의 차예절을 흥미롭게 보았다는 이야기도 서슴없이 서문에 적고 있다.
…가엄(家嚴)이 즐겨 마시던 차에서 비롯된 나의 차생활은 어버이 뜻을 따라 부처님 곳을 찾게 되면서부터 더불어 육십여 년간 맺어지게 되었다. 다솔사(多率寺)였는데 절 주변에는 작설(雀舌)나무가 숨겨져 자라고 있었다. 당시 늙은 스님들의 구전(口傳)에 의하면 다솔사 작설차의 풍미가 하동 화개차보다도, 구례 화엄사차보다도 낫다고 하였다 … 3·1 기미 독립운동의 대오(隊伍)에 참여케 된 것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영향을 받은 바 였다. 그 일을 겪고 난 삼년쯤 후에는 일본 동경에 가서 뛰어난 동포 친지들과 교유(交遊)하기도 했고, 그 나라의 진신(縉紳)과 명망높은 불승(佛僧)들과 사귀는 좋은 기회도 갖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내가 어릴 적부터 즐겨온 기호품(嗜好品)인 차를 그네들이 성(盛)히 마시며 즐기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것이 마냥 나에게는 흥미롭게 여겨졌으며 차에 관한 그들의 아름답고 귀한 예속도 알게 되었다. … 이를 계기로 그들이 행사하는 음차(飮茶)의 예절과 우리나라에 전래하는 예속과를 비교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고, 차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도 되었다. 이것이 발전하여 겨레며 조국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인생의 나아갈 방향도 다듬게 되었다 … 고락(苦樂)간에 차와 더불어 평생을 지내는 동안 생각되던 바 있어 "차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썼으니 바로 "한국의 다도"이다…
가엄(家嚴)이 즐겨 마시던 시절은 1900년대이고, 늙은 스님들이 하동 화개차와 구례 화엄사차와 진주 다솔사차로 겨루기를 한 결과 다솔사차가 제일 낫었다는 이야기는 1910년대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진주 ·사천은 물론 하동·구례 등지에는 일제강점기에도 차를 상음하는 풍속이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효당(曉堂)은 "차로 가는 길(韓國의 茶道)"을 발표할 때만해도 행차의 격식을 크게 강조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74년, 독서신문(讀書新聞)에 연재한 "한국의 차·다론(茶論)"에서는 다도용심(茶道用心)을 한층 격식화시키고 있다.
…차생활을 통해 익혀가야 할 자각(自覺)의 생활은 다실의 분위기, 옷차림, 다기, 꽃꽂이, 청소 등 모든 일상적인 생활 하나하나에도 요구된다. 또 알뜰한 마음으로 차를 행하면, 행하는 사람 자신이 은연중에 그 각성의 알뜰한 생활에 계합하게 되는 것이다…
효당은 점점 차에 애착을 가졌던 것이다. 한국의 다도에 대한 세간의 반응에 힘을 얻은 그는 다도로써 혼탁한 사회, 땅에 떨어진 예절, 흐릿해진 정신까지를 계도하겠다는 의욕까지 보였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이해심 부족으로 역부족인 부분이 있었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서 좋은 것은 다 뽑아가 만든, 일본 다도의 정리된 이론을 피해서 다론을 펼쳐나갈 방법은 없었다. 급기야 그는 일본 다도의 종주인 센리큐(千利休)의 차정신 화경청적(和敬淸寂)을 순서만 바꿔 차생활의 정신으로 소개하기에 이르른다. 고요하고(寂) 깨끗하며(淸) 평화롭고(和) 경건함(敬)이 차생활에서 추구하는 정신세계라고 한국의 차·다론에 소개하자 세상을 일시에 시끄러워졌다. 그의 글을 좀 더 인용해 보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실에 꽃을 꽂을 경우 그 꽃은 자연스러워야 하겠고, 다실 내 옷차림에 있어서도 여름에는 시원한 인상을, 겨울에는 따뜻한 느낌을, 봄 가을에는 경쾌하고 산뜻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계절 감각을 잃지않기 위해서, 또는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서는 높은 안목이 크게 문제되는 것이다. 우리말에 "철이 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계절 감각을 잃지않으면서, 높고 자유로운 안목으로 매사를 잘 처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잠시도 머무르지않는 시간 속에서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 없는 인생 생활을 잘 처리하고 임하는 것이 "잘난 사람" "각성(覺醒)한 사람"으로서의 알뜰한 생활인 것이다. 화로에 불 피우고, 물 끓이고, 찻잔을 씻고, 다실을 청소하는 등의 하잘 것 없는 일을 통해서 현실생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물 끓는 소리에서 송풍성을 느끼며, 달과 백운(白雲)을 벗 삼아 고요히 사색에 잠기며, 다기(茶器)나 서화나 정원 등에서 예술의 멋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름대로 고심한 흔적은 있으나 위에 인용한 글은 일본 다도의 기본적인 주장들을 그대로 옮기는 것에 불과했다. 물론 거슬러 올라가 연원(淵源)을 밝히면 상당수 일본의 다도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일본인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질 일이지만, 그러나 70년대 중반 신선한 충격을 주며 효당에 의해 재조명된 "다도(茶道)"는 피할 수 없이 왜색 시비에 휘말렸고, 차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크게 둘로 갈라놓았다.
특히 비판의 목소리가 컸던 것은 호남이었다. 당시는 효당의 발길이 호남에도 미치기 시작한 때였다. 자연스런 차생활에 익숙한 호남인들이었으나, 전국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은 "효당의 격식있는 다도(茶道) 바람"이었기에, 광주의 여학사회(女學士會) 같은 모임이 효당을 초청, 특별강연회를 갖는 등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시비가 일자 호남은 곧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들은 원감국사의 시 …차 마시는 것도 선(禪)이니, 선에 있어 격식은 초월하는 법… 을 상기시키면서, 차생활의 목적은 자기 수양으로 인격도야(人格陶冶)에 있는 것이지 절차나 행위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미 전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효당 지지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차를 마시는 것 만으로 어찌 인격이 도야될 것인가. 다례가 예법이라면, 예법에는 격식이 따라야 한다. 격식이 없이는 내용이 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런 격식도 없이 그저 차를 마시기로만 말한다면 굳이 차생활 운동을 제창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들은 이렇게 반문하며 오히려 예의와 절차의 중요성에 더욱 견고한 체계를 세우고 역사와 이론의 받침을 보강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후 영남의 다풍과 호남의 다풍은, 그 색깔을 더욱 달리하게 되었는데, 격식(格式)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서로 견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호남지방의 차생활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광주를 중심으로 그 이남에서는 음차 풍습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는 인상을 준다. 호남의 차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인 화개·하동까지를 그 영역으로 보아야 한다.
일례로 강진·해남·나주 등지의 민간에서는 돈차(錢茶)라는 것이 있었다. 민간에 전승된 전통적인 방법으로 차잎을 쪄서 둥글 납작하게 만든 뒤 엽전처럼 가운데 구멍을 뚫어 실에 꿰어 말린 것인데 이를 청태전(靑台錢)이라 불렀다. 마을에 따라 만드는 방법이나 필요할 때 달이는 법이 조금씩 차이를 보였으나 큰 줄기는 대체로 같았다. 야생 차나무에서 어린 잎을 따 끓는 물에 데친 뒤 절구에 찧고, 다음 송편을 빚듯이 손으로 엽전 모양을 만들어 그늘에서 말리는 방법이었다.
만드는 방법은 옛 그대로이나 보관·용법(用法)은 옛같지 않았다. 처음에는 대나무 꼬챙이에 꽂아 말리고, 다 말린 후엔 실에 엽전꿰듯 꿰어 대들보나 실내 기둥에 매달아 보관했고, 필요할 때 한두 개씩 꺼내 펄펄 끓는 물에 한참 넣어 그 물을 마셨다.
이것은 음용이기보다 약용으로 쓰인 경향이어서 청태전을 달일 때 생강이나 오가피를 함께 넣기도 하였는데, 두통이나 소화불량, 변비, 어지럼증, 고혈압 등에 상당한 효험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의 차와 선"의 저자들은 이 청태전을 보고, 말로만 듣던 당송대(唐宋代) 단차문화의 일단을 알게 되었다고 쾌재를 부른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의 단차(團茶)이며 선조들은 이 단차를 다연(茶 ), 즉 차맷돌에 갈아 말차로 즐겼던 것이었다. 이 청태전은 지금은 보기 힘들어졌지만, 팔십년대 초까지만 해도 호남지역 옛 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비슷한 이야기로 쌍계사가 있는 하동의 화개장에 가면 야생 차나무 잎을 따다 그늘에서 말려 파는 것이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한약 달이듯이 정성들여 달여마시면 여러가지 속병에 그만이라는 말을 하면서 팔았다. 이 풍습 역시 80년대 초까지 있었다.
이와같은 장터 사례는 차가 최근까지 약용으로 민간에 전래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민중의 생활에 깊이 뿌리를 박고있는 토속적인 "우리 것"임을 보다 다시한번 확고하게 해 준다. 동시에 격식이나 예절과는 거리가 먼 민약으로 전승된 사례이기도 할 것이다.
다성(茶聖) 초의(艸衣)를 낳은 해남지방의 음차풍도 유별난 것은 없었다. 초의의 법손(法孫)으로 일지암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응송(應松)도 차생활에 대해서는 …우리의 예의법도가 주자가례를 기본으로 삼는다면, 주자가례는 백장청규(百丈淸規)가 그 근본이다. 백장청규는 어떤 것이냐. 계율에만 한정되지않는 자유로운 입장에서 일상생활의 기본을 수도의 장(場)으로 삼고, 서로 책무를 다하는 가운데 참된 자기를 지켜 나가는 방법들이 아니냐. 그렇다면 차생활 역시 자연스러워야 한다… 면서 격식을 따지지않는 차를 즐겼다.
따라서 호남인들의 눈에는, 차를 마시는 데 있어 예법을 강조하거나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며 특수계층의 놀이화 하는 것을 "전래적인 우리 풍토"로 여기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잎을 취하고 차를 만드는 데 있어서만 엄격함을 지키면서, 그것으로 다도가 이루어지고 차정신(茶精神)도 지켜진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