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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시조
虎景 좌곡녀
└──┬──┘
康忠 구치의
└──┬──┘
┌───────┐
이제건 ? 寶育
└─┬─┘ │
┌────┐ │
? 주덕 │
└─┬─┘
당귀인 辰義
└──┬──┘
作帝建 용 녀
└──┬──┘
龍建 한씨 부인
└──┬─┘
王 建
[질문]
고려시대의 첫 임금인 태조 왕건은 왕 씨입니다.
그렇다면 왕건의 시조는 중국 사람입니까? 중국 사람이라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요?
[답변]
고려의 건국군주인 왕건의 성은 분명 왕 씨입니다.
하지만 중국 성을 따온 것이 아니라 고려 태조의 이름이 왕건이었기 때문에
이름의 앞 자가 성으로 굳어져 개성을 본관으로 하는 개성 왕 씨가 생기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성에 대한 인식은 고려건국 이후부터입니다.
실제 왕건의 아버지 이름은 용건이었으며, 그 할아버지는 작제건 이었습니다. 왕 용건도, 왕 작제건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성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전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지배층들에게 보이는 고 씨, 부여 씨,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여러 성씨를 비롯하여
박씨, 한 씨, 손 씨들이 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지배층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중국 성을 하사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왕건의 성 왕 씨는 중국과 관련이 없습니다. 물론 왕건의 고조할아버지가 당나라 숙종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이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선조를 미화시킨 설화일 뿐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려 왕실은 왕 씨가 아니라 당 왕실의 성인 이 씨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듯이 당시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성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상 전 국민(물론 노비와 같은 천민은 성이 없었지만)이 성을 갖게 된 것은 고려 건국 이후입니다.
즉 고려의 건국 초기에는 성주라 불리던 각 호족들이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왕건은 분권적인 지방사회를 국가 지배질서 속에 편제해 중앙 권력을 공고히 하고 원활한 국가 통치와 세금 수취를 위해
태조 23년(940) 토성분정 정책을 시행하여 그 지역의 유력한 세력에게 성씨를 부여하였습니다.
이를 토대로 점차 사람들이 성과 본관을 갖게 된 것입니다.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태조 王建과 康氏 부인
이 글을 쓰신 분은 왕건이 궁예의 피붙이를 살려주신 것에 계속 비중을 두고 글을 쓰고 계신 듯 합니다.
하지만 먼저 결론을 정해놓고 자료를 모으게 되면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만 글을 쓸 소지가 크기 때문에 지양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암튼 저는 드라마에서 나왔던 것처럼 태조 왕건과 강씨 부인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데 궁예와 혼인함으로써 헤어졌다는 식의 설정은 불합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그 뿌리가 같다고까지 적고 계시는군요.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왕건은 고려의 태조라는 명성에 걸맞는 선대에 대한 기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예종대(1146~1170)에 검교군기감 '김관의(金寬毅)'라는 인물이 저술한『편년통록(編年通錄)』에 포함된 설화적인 기록만이『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전해지고 있을 뿐이죠.
그렇지만 이 기록은 흔히 그 계보의 황당함이나 내용의 설화성으로 인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왕건의 세계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 기록은 분명히 주목해서 볼만한 것이 사실입니다.
왕건 선대의 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호경(虎景) - 강충(康忠) - 보육(寶育) - 진의(辰義) - 작제건(作帝建) - 용건(龍建) - 왕건(王建)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보육과 그의 친형 이제건(伊帝建)의 딸 덕주(德周)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는 진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즉, 보육이 그의 친조카인 덕주와 근친 결혼했다는 점과 6대에 걸친 왕건 선대의 계보 중간에 부계뿐만 아니라
진의라는 모계의 인물이 끼어 있다는 점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근친결혼과 모계적 게보가 고려시대에 전혀 이상한 일만은 아니기에 이것만으로는 이 계보가 이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호경이 평나산의 호랑이로 화한 여성 산신과 결혼했다거나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과 결혼했다는 것 등,
설화적 요소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기에 설화 그대로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고려 왕실이 일찍부터 '용종설(龍種說)'을 표방하여 스스로 용의 후손임을 자부해왔다는 것과
그들이 일찍부터 해상세력으로서 성장했다는 것이 이 계보에 그대로 실려있음을 주목해야 할 겁니다.
『고려사(高麗史)』「고려세계(高麗世系)」를 보면 "고려의 선대에 관하여는 역사의 기록이 없어 상세하지 않다.
태조실록 즉위 2년조에 왕건의 삼대 조상을 추존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시조(始祖) : 원덕대왕(증조) ↔ 정화왕구(증조모)
의조(懿祖) : 경강대왕(조부) ↔ 원창왕후(조모)
세조(世祖) : 위무대왕(부친) ↔ 위숙왕후(모친)
이른바 '삼대추존(三代追尊)'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대조 왕건의 부친은 세조(威武大王)이고 조부는 의조(景康大王), 증조부는 시조(元德大王)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500년 왕업을 창건한 고려태조 왕건의 공식적인 족보 전부인 셈입니다.
족보가 지극히 간단한만큼 이런 대단한 시호를 받은 인물들의 실체는 확인할 길이 없죠.
본래 자신의 세계는 신화적인 요소를 잔뜩 집어넣어서 확대하고 부풀리는 것이 상례임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3대 이전의 계보는 지운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미추이사금의 계보를 <閼智>生<勢漢>, <勢漢>生<阿道>, <阿道>生<首留>, <首留>生<郁甫>, <郁甫>生<仇道>, <仇道>則<味鄒> 이처럼 정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알지- 세한 - 아도 - 수류 - 욱보 - 구도 - 미추'로 내려오는 7대의 계보가 정리되어 있는데 물론 이 계보에 대해서도 신빙성이 없다고 보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왕건의 계보는 관련 문헌이 없다는 것보다는 의도적으로 3대 이전의 계보는 지운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고요.
『고려사』권95「황주량전(黃周亮傳)」을 보면 제8대 현종 원년(1010), 거란군이 침입해오면서 송악이 불타고 현종이 나주로 피신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후 현종은 황주량 등을 수국사(修國史 : 역사편수관)로 임명하여 자료들을 모아서 태조로부터 목종까지의 7대 실록을 다시 찬집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전하는『고려사』의 일부이며 병란으로 인하여
'고려의 선대에 관해서는 역사의 기록이 없어 상세하지 않다'는 것이 학계의 공식적인 견해입니다.
하지만 김성호는 이에 대해 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제8대 현종은 왕건의 손자여서 어려서부터 귀가 닳도록 할아버지의 행적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한 왕건 시절 종군했던 송능, 유손 등의 인물이 현종대까지 생존해있었고
왕족과 귀족들의 사가에도 상당량의 문서와 전승이 전해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오직 삼대추존밖에 채집하지 못 했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 또한 마찬가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삼대라고 한다면 100년도 채 안 되는 시기로서 그 이전의 역사를 상고할만한 자료나 인물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다른 이유가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훈요십조」가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논란에 휘말리는 것처럼 말이죠.
현재 사학계에서는 왕건의 사찬족보인『편년통록(編年通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케우찌라든가, 이병도 선생님은 이를 황당하다고 하여 믿을 수 없고 삼대추존만이 믿을 수 있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바 있습니다. 이는 고려시대 이제현이『편년통록(編年通錄)』에 기록된 왕건의 계보를 통렬하게 비난한 것을 비롯해
이후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이를 계승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데
그렇게 봤을때 정작 고려 당대에는『편년통록(編年通錄)』이 정사(正史)로 취급되었을 가능성도 높은 셈입니다.
일단『편년통록(編年通錄)』에 기록된 왕건의 계보를 보기 위해서는 2중 계보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조로 기록된 '호경'은 백두산에서 성골장군이라 불리던 명사수로 '좌곡녀'와 결혼하여 康忠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강충'은 예성강변의 영안촌 부잣집 딸이었던 '구치의'와 결혼하여 천금의 부자가 된 뒤, 이제건과 寶育을 낳았습니다.
형인 이제건의 부인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이제건은 슬하에 딸 주덕이 있었습니다.
이후 보육이 삼한을 통일한 꿈을 꾸자 이제건은 동생이 크게 될 인물이라 여기고 자신의 딸을 동생에게 시집보냅니다.
위에서 한번 언급했지만 보육은 친조카와 결혼했고 딸을 2명 낳았습니다. 그리고 작은 딸이 바로 '진의'입니다.
그리고 753년 '당귀인(唐貴人)'이 예성강변에 상륙해 보육의 집에 머물렀고 보육은 진의를 동침하게 합니다.
당귀인이 스스로를 '대당귀성(大唐貴姓)'이라고 일컬으며 당나라로 홀연히 가버린 뒤에 진의가 아들을 출산하니
그가 바로 왕건의 조부가 되는 '작제건'입니다.
작제건 역시 명사수로서 그는 16세때 부친을 만나기 위해 당나라로 가던 중, 우여곡절 끝에 서해 용왕을 만났고
그의 딸인 '용녀'와 결혼하고 4형제를 두었다.
그 4형제 중 첫째가 바로 '용건', 바로 왕건의 부친이다.
그리고 용건은 도선대사(836~899)가 점지한 마두명당(馬頭名堂)에 집을 짓고 왕건을 낳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왕건의 계보이며 이를 잘 살펴보면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계보가 2중 구조로 이뤄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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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忠 구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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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建
자아~표로 간단하게 정리한 왕건의 세계입니다. 제가 굵은 글씨로 쓴 이름들이 있죠? 위에서 제가 정리한 왕건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제가 빨간색, 파란색으로 구분해서 표기를 했습니다. 이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흐음. 한번 생각해보세요.
얼핏 보면 계보에 진의만 여자로서 기록되어 있고 나머지는 남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중간에 진의만 이상하게 끼어든 셈입니다.
하지만 계보를 잘 살펴보면 보육은 진의의 아버지이자 왕건의 외고조입니다. 즉, 부계 혈통이 아니라는 뜻이죠.
마찬가지로 강충은 보육의 아버지로 왕건과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모계 혈통입니다. 호경 또한 마찬가지고요.
즉, 왕건의 부계 혈통은 그 시작이 당에서 왔다는 귀인으로부터 시작되는 셈이고
그 위의 선조들은 모두 외가댁에 대한 기록인 셈입니다.
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이를 간과하고 진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부계 혈통으로 이해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호경이나 작제건을 두고 백발백중의 명사수로 기록한 것은 고구려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제건을 그렇다치고 호경은 모계 혈통이기 때문에 왕건을 고구려인의 후예로 보는 견해는
모계와 부계를 혼돈한 결과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신라계이지만 정치적인 이유, 지역적인 이유 때문에 고구려계라고 표방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재 기록에는 3대 시조 원덕대왕이 당에서 왔다는 귀인이 아니라 외고조 보육으로 적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편년통록(編年通錄)』을 작성했던 김관의가 고려 왕실의 존엄성을 위하여
당에서 온 이름 모르는 상인(그가 예성강변에 내릴때 돈 꾸러미를 해안가에 늘여놓고 밟으면서 상륙했다는 것에서 그가 돈 많은 상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을 3대 시조 원덕대왕으로 추존하지 못 했기 때문으로 이해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귀인과 혼인했던 증조모 진의를 염두에 두고
그의 아버지인 보육(외고조)을 대신 3대 시조인 원덕대왕에 추존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김성호는 아마 김관의가 민간에 전승되어 오던 '당귀인 - 작제건 - 용건'의 부계 3대와 정사에 기록된 '삼대추존'을
모두 만족시키면서도 고려 왕실을 만족시켜야만 했기에 이렇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고려해볼만한 주장입니다.
그래서 결국 생각을 짜낸 것이 당나라 숙종황제(757~762)가 즉위 전에 신라에 왔다 갔던 것이라고 썼던 것입니다.
이로써 왕건의 증조부인 당귀인은 계보에서 탈락하게 된 것입니다. 분명 관련 전승이 전해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렇게 봤을때 위의 글을 쓰신 분은 이러한 계보를 이해하지 않은 채 표면적으로 확인되는 계보에만 집중하신 것 같습니다.
분명 위에 쓴 계보의 설명은 제가 설명해드린 것과 같지만 위의 분은 계보와 설명을 따로 대조해보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있지요. 고려 26대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무렵, 원나라 한림학사가 충선왕에게
"일찍이 충선왕의 선대는 당나라 숙종에서 나왔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숙종은 어려서부터 관문을 나와 본 적이 없고 안록산의 난때 영무라는 곳에서 즉위했사온데
어떻게 동유(東遊 : 신라행)하여 아들을 두었겠습니까?" 라고 했다고 합니다.
충선왕이 이를 대답하지 못 하고 머뭇거리자 왕을 보좌하던 민지(閔漬)가 곁에서
"이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잘못 쓴 것입니다. 그 분은 숙종이 아니라 선종(847~859)입니다." 라고 하였더니
한림학사가 "선종께서는 오랫동안 외지에서 고생하셨으니 혹시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했답니다.
이 대화를 계기로 민지는 자신이 쓴『편년강목(編年綱目)』에서 당 숙종을 당 선종으로 바꿔서 기록했고요.
그는 고려 중엽에 수국사(1299)를 제수받았고 정승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로 당대 제 1급의 정통사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숙종의 명으로 3년만에 편찬한 것이 바로『편년강목(編年綱目)』42권이었으니
이는 김관의가 편찬한『편년통록(編年通錄)』을 계승한 당시의 정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 역시 전해지지 않고 그 일부만인『고려사』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윗 글을 쓰신 분과 제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아실 겁니다. 어느 내용이 더 합리적일까는 님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 아~그리고 윗 분이 참고하신 내용은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하늘바라기'(http://blog.daum.net/phynix/7401133) 라는 블로그에 내용이 실려 있더라고요.『증보 강씨세헌』이라는 책에서 발췌한 부분이라고 하는데 제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여기에도 모계와 부계 혈통을 혼동해서 기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윗 글에 기록된 궁예의 정비 강씨 부인의 가계는 왕건의 가문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문헌에는 강충만 확인되고 있는데 어째서 진의 이전의 모든 사람들 앞에 강(康)씨가 붙어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제가 잘못 본 것인가 해서 다시 한번 확인했는데 역시나 아니더군요.
이는 단순히 康忠을 토대로 성씨를 다 맞춰 적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역사적인 신빙성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죠.
암튼 여기까지 쓰면 윗 글에 대한 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여기서는 이제 조금 다른 소리를 해 보죠.
당 귀인 이전의 기록에 외가댁 가계를 적어놓은 이유는 아무래도 왕건의 혈통이 기간이 짧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보면 알겠지만 왕건의 외가댁은 대대로 예성강변에 터를 두고 해상활동을 했던 상인집단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당에서 왔다는 상인집단과 결합하였고 이것이 용종설과 연결되면서 하나의 신화적인 계보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우리는 흔히 용건을 송악 지방의 대호족으로 보고 이들이 궁예에게 투항함으로써 궁예가 국가를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송악에 기반하고 있던 이들이 고구려를 계승하자는 의도에서 고려를 건국하였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 고려라는 국호는 궁예가 최초로 사용한 명칭입니다. 후에 마진, 태봉 등으로 개명을 해서 그렇지만요.
즉, 용건-왕건대에 그들 집안이 송악에 거주하고 있었고 그 곳의 세력들이 고구려 계승의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용건-왕건 세력은 결코 송악의 오랜 토착세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심복인 홍유,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등도 왕건의 혈족이 아닌데다가 송악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고려사』를 기반으로 고려 초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왕건의 혈족이라고는 태조 원년 9월,
평양대도호부 부사로 임명된 당제 왕식렴(王式廉)과 태조 8년 10월, 견훤에게 인질로 간 당제 왕신(王信)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혹시『삼국지』보셨습니까? 아니아니,『삼국지연의』 부터요. 아마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거길 보면 조조가 초창기 군벌로 성장하여 이후 제왕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그의 친인척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조조를 비롯해서 조홍, 조인, 하후돈, 하후연 등은 모두 친인척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조조 휘하의 가장 중요한 장수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합니다. 그에 반해 유비는 어떠했습니까? 그의 친인척들이 그러했었나요? 아닙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특정 지역의 호족으로 성장한 군벌과 그렇지 않은 군벌의 차이입니다.
그렇게 봤을때 왕건은 송악이라는 특정 지역에서 성장한 호족으로 알려져 있지만
향후 진행 과정을 보면 유비와 유사한 형태로 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모두 왕건의 혈족기반이 취약함을 드러내는 증거이며 그의 3대조 위로 외가댁 가계를 붙여넣을 수 밖에 없었던 증거라 할 수 있겠죠.
그가 29명의 왕비를 맞이해 13명의 왕비에게서 25명의 왕자와 9명의 딸을 낳아 여러 공신들과 2중 · 3중으로 혈연적 관계를 맺었던 것은(분명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말이죠) 바로 이러한 혈연적 기반의 취약성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그럼 당에서 왔다는 귀인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들은 분명 당에서 활약했던 해상집단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말여초까지 꾸준히 해상교류의 주역으로서 활약했던 사람들은 모두 재당신라인이라 불리는 상인집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훗날 재송고려인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들 해상집단이 특정 국가에 귀속된 집단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땅의 주인이 바뀜에 따라,
그리고 그들의 원 고향의 왕조가 바뀜에 따라 다르게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이치지요.
한편으로는 중국인들의 인식 속에 해상집단은 전통적인 한족(漢族)이 아니었음도 이 명칭에서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렀을리가 없을테니까요. 차후 해양사 연구에 있어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이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즉, 특정 국가에서 활약하던 해상집단이 있다 해서 그 집단이 그 국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양자는 강한 민족성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섣부른 결론을 내리는 것 말입니다.
마치 장보고가 신랑 영토 내에서 활약했다고 해서 장보고가 활약하던 시기, 신라의 해상교역력이 대단했다고 해석하는 것처럼 말이죠. 당시 해상교역을 주도한 것은 장보고지 신라 정부가 아니었습니다.
신라는 고려처럼 강력한 해상력을 구비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결론을 내려볼까요? 윗 글을 쓰신 분은 강씨 부인의 혈통과 왕건의 혈통을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이는 분명 잘못입니다. 전해지는 문헌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봐도 모계 혈통과 부계 혈통이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으니까요.
즉, 태조 왕건과 강씨 부인은 혈연적으로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같은 패서 지역의 해상세력으로서 어떤 정치적인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그리고 강씨 부인은 실제 패서 지역 호족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만큼 양자가 정치적 이해를 같이 했다고 보는 것도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유대감일 뿐이지, 혈연적인 유대감이 아닙니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말이죠.
게다가 궁예는 915년 절정기에 달하는 황제권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궁예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왕건의 눈부신 군사작전에 힘입은 탓이지만 말이죠.
그런 상황에서 궁예가 외척을 의심하고 자신의 황권이 위협받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오히려 정비인 康氏 부인(궁예부인)과 태자를 비롯한 두 아들을 죽이는 미친 짓(?)을 막 할 정도로 거칠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무엇을 믿고 그렇게 했을까요? 저는 이것이 모두 그의 강력한 황권 확립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너무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왕건의 측근들이 반역을 준비한 것도 그의 정신분열적인 증상이 심해지면서 부터였을 겁니다.
고로 왕건과 그 측근들이 이러한 궁예를 쫓아내고 그의 피붙이를 살려뒀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궁예의 피붙이는 친 궁예세력의 도움으로 타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고
그 타국이란 고려에 필적할만한 강국, 후백제였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강씨 부인과 태조 왕건이 혈족이기에 이를 감안하여 왕건이 궁예의 피붙이를 살려줬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가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패서 지역 호족들은 이미 그들의 대변인인 강씨 부인과 두 왕자가 죽었을 때 궁예와 결별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생각해 보십쇼. 궁예의 손자들이 살아나 과연 패서 지역 호족들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주 간단하죠?
※ 참고문헌
강봉룡, 2006,『바다에 새겨진 한국사 : 한국사의 잊혀진 무대, 한국 해양의 역사』, 한얼미디어.
김성호, 1996,『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1, 맑은소리.
申瀅植, 1990,『統一新羅硏九』, 三知院.
또한가지 태조 王建과 궁예의 황후 康氏부인과의 관계
또 한가지 태조가 궁예의 후손들을 살려줬을거라고 생각되는 이유중 하나가 더 있다.
몇년전 방영한 드라마 태조왕건에서는 강씨부인을 일명 연화라 하여 왕건과의 관계를 연모하던 관계로 설정하였는데
실제로도 信川의 康氏가문과 송악의 王씨 가문은 굉장히 가까운 피로 맺어진 사이이기도 하다.
무슨소린가 하면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
일단 고려사 세계에 기록된 왕건의 조상들을 살펴보면
1. 강호경(康虎景)
2. 강충(康忠)
3. 강보육(康寶育)
======================
4. 강보육의 딸 진의(辰義)+당 선종(宣宗)
<당 선종이 황위에 오르기 전에 바다를 건너 신라에 왔다고 고려사 세계(세종의 명을 받은 정인지鄭麟趾 편찬)에 적혀 있음>
5. 작제건(作帝建)
6. 용건(龍建)/용륭(龍隆)
=======================
7. 왕건(王建)
1~3번까지는 信川康氏이다. 康虎景은 信川康氏의 시조이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선조들을 추존하였는데
3.康寶育은 국조 원덕 대왕(國祖元德大王)으로 추존되었고
5.작제건은 의조 경강 대왕(懿祖景康大王)으로 추존되었고
6.용건/용륭은 세조 위무 대왕(世祖威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4. 증조모 진의(辰義)는 정화 왕후(貞和王后)로 추존되었다.
5. 조모 민의(旻義)/용녀(龍女)는 원창 왕후(元昌王后)로 추존되었다.
6. 모 몽부인(夢夫人)/한씨(韓氏)는 위숙 왕후(威肅王后)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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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고려사의 첫머리 세계世系 에 실린글이다. 이제현은 고려, 특히 고려 왕조를 강하게 비판한 사람이었다.>
고려왕조의 잘못를 조목조목 지적하던 조선의 사관(史官) 이제현이 찬하길
"강보육은 태조의 외증조부가 되는데 추존하는것은 잘못된 것이다"
"의조,세조,태조 모두 끝자가 건자로 끝나니 예가 아니다"
"당시에 삼대가 같은 이름을 가지면 삼한의 왕이 된다는 말이 있었다는 것은 후대에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
"궁예가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는데 홀로 왕씨 성을 삼았다면 어찌 화를 피했겠는가? 용건이 도선의 말을 듣고 아들의 성을 왕씨로 삼았다는 말은 천하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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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히 1~6번까지 세계도를 설명해 보면
1. 강호경은 신천강씨(信川康氏)의 시조로 진원(晉原) 경양리(景陽里)에서 출생하였다. 출생한지 6개월만에 장사괴(張士魁)의 난이 일어나 경황중에 부모가 아기를 숲속에 버리고 도망하였는데, 고향에 돌아와 보니 백호랑이 한쌍이 아기에게 젖을 먹혀 기르고 있어, 경양리에서 나서 호랑이(虎)의 보호가 있었다 하여 이름을 호경(虎景)이라 지었다. 호경은 커서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 칭하였다...(중략하고) 후에 과부를 만나 강충을 낳았다.
2. 강충(康忠)은 외모가 단정근엄(端正謹嚴)하고 재주가 많았는데 서강(西江) 영안촌(永安村)의 부자집 딸, 구치의(具置義)라고 하는 처녀에게 장가를 들어 오관산(五冠山) 마가갑(摩訶岬)에서 살고 있었다. 그 때 신라의 감간(監干) 팔원(八元)이 풍수술(風水術)을 잘하여 부소군(扶蘇郡)에 왔다가 군(郡)이 부소산(扶蘇山) 북쪽에 자리잡고 있어 산의 형세는 좋으나 초목(草木)이 없음[童]을 보고 강충(康忠)에게 말하기를, <만약에 군(郡)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三韓)을 통합하는 자가 태어나리라.>고 하였다. 이에 강충(康忠)이 군(郡)의 사람들과 함께 산의 남쪽으로 옮겨 살며 소나무를 온 산에다 심고 또한 송악군(松嶽郡)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드디어 군(郡)의 상사찬(上沙粲)이 되었으며 또 마가갑(摩訶岬)의 저택을 영업지(永業地)로 삼아 왕래하였다.
집에 천금(千金)을 쌓아두고 두 아들을 낳아 막내아들을 손호술(損乎述)이라 하였다가 이름을 고쳐 강보육(康寶育)이라고 하였다.
P.S 첫째아들은 강보전(康寶甸)인데 신천강씨는 <강호경→강충→강보전→강순산→강만루→강연창→강태주→강억→강돈순→강참욱→강유→강만성→강시필→강지연>으로 이어진다.
3. 강보육
보육(寶育)은 성품이 인자하였으며 출가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도를 닦고 평나산(平那山)의 북갑(北岬)에 돌아와 살다가 또 마가갑(摩訶岬)으로 옮겼다. 일찍이 곡령(鵠嶺)에 올라가 남쪽을 향하여 소변(小便)을 보았더니 삼한(三韓)의 산천에 오줌이 넘쳐 흘러 문득 은빛 바다[銀海]로 변한 꿈을 꾸었는데
이튿날 이제건(伊帝建)에게 말하였더니 이제건(伊帝建)이 말하기를, <그대는 반드시 큰 인물이 될 사람을 낳으리라.>
하고 그의 딸 덕주(德周)를 아내로 삼게 하니 드디어 거사(居士)가 되어 마가갑(摩訶岬)에 목암(木菴)을 지었다.
신라의 술사(術士)가 이를 보고 말하기를, <이곳에서 살면 반드시 당(唐) 나라 천자(天子)가 와서 사위가 될 것이다.>
고 하였다. 후에 두 딸을 낳으니 막내딸을 진의(辰義)라 하였는데 아름답고 지혜롭고 재주가 많았다.
나이 겨우 15세 때에 그의 언니가 오관산(五冠山) 꼭대기에 올라가 소변을 보니 소변이 흘러 천하에 넘치는 것을 꿈꾸었다.
깨어서 진의(辰義)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니 진의(辰義)가 말하기를, <청컨대 비단 치마로써 이 꿈을 사게 하여 주오.>하거늘
언니가 이를 허락하였다.
진의(辰義)는 언니에게 다시 꿈 이야기를 하라고 하고 이것을 잡는 시늉을 하여 품에 안기를 세 번 하니 이윽고 몸이 무엇을 얻은 것처럼 움쭉거리고 마음이 자못 든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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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의+ 당(唐) 나라 선종(宣宗)
당(唐) 나라 선종(宣宗)의 나이 13세 때는 목종(穆宗)의 재위 때인데 장난 삼아 황제의 용상에 올라가 신하들에게 절[揖]하는 자세를 짓거늘 목종(穆宗)의 아들 무종(武宗)은 마음으로 그를 꺼려하더니 무종(武宗)이 즉위하매 선종(宣宗)이 궁중에서 해(害)를 만나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여 몰래 빠져 나와 멀리 도망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고루 세상의 험난함을 맛보았다.
염관(鹽官)의 안선사(安禪師)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대우가 특히 각별하였으므로 염관(鹽官)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또 선종은 일찍이 광왕(光王)이 되었는데 광군(光郡)은 곧 양주(楊州)의 속군(屬郡)이요 염관(鹽官)은 항주(抗州)의 속현(屬縣)이니 다 동해에 접하여 있어 상선이 왕래하는 지방이었으므로 화를 무서워하여 항상 깊이 숨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산수를 유람하는 것으로 명목 삼아 상선을 따라 바다를 건넜다. 선종이 마가갑(摩訶岬) 양자동(養子洞)에 이르러 보육(寶育)의 집에 머무를 때 두 딸을 보고 기뻐하며 옷이 따진 곳을 꿰매 주기를 청하였다. 보육(寶育)은 중국에서 온 귀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마음 속에 "과연 술사(術士)의 말과 부합된다."고 생각하고 곧 큰딸로 하여금 명에 응하게 하였더니 문턱을 넘다가 코에 피가 흘러나오므로 진의(辰義)를 대신으로 드디어 천침(薦枕)하게 되었다. 기월(期月) 동안 머무르다가 임신하였음을 깨닫고 작별할 때 말하기를, <나는 당(唐) 나라의 귀성(貴姓)이라.> 하고 활과 화살을 주며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라.>고 하였다. 곧 아들이 태어나니 작제건(作帝建)이다.
5. 작제건+민의(旻義/혹은 용녀龍女)
고려사 세계의 내용은 굉장히 길어서 대충 요약하자면, 작제건이 아버지를 찾아 중국으로 항해도중 바다에 빠져,
어느 사람에게 구해졌는데, 그사람이 <동쪽 땅에서 왕이 되려면 반드시 그대의 자손 삼건(三建)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고 말하고
자신의 딸 저민의를 주었다. 민의(旻義)/혹은 서해의 용녀(龍女)는 원창왕후(元昌王后)로 추존되었다.
원창 왕후(元昌王后)가 남자아이 넷을 낳았는데 장남을 용건(龍建)이라 하였다가 후에 융(隆)이라 고쳤다.
6. 용건,용융/왕융+몽부인(夢夫人)/한씨(韓氏)
자(字)는 문명(文明)이라 하였으니 이가 세조(世祖)이다. 체격이 건장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도량이 넓고 커서 삼한(三韓)을 합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 꿈에 한 미인을 보고 배필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뒤에 송악(松嶽)에서 영안성(永安城)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여인을 만나니 용모가 같은지라, 드디어 혼인을 하였으나 온 곳을 알지 못하므로 세상에서는 이름을 몽부인(夢夫人)이라 하였으며 혹은 이르기를,<그 여인이 삼한(三韓)의 어머니가 되었으므로 드디어 성(姓)을 한씨(韓氏)라 하였다.>고 하니 이가 위숙 왕후(威肅王后)이다.
세조(世祖)가 송악(松嶽)의 옛집에서 여러 해 살다가 또 새 저택을 그 남쪽에다 짓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곧 연경궁(延慶宮) 봉원전(奉元殿)의 터였다. 그 때에 동리산(桐裏山)의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당(唐)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알아 가지고 돌아와 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러 세조(世祖)가 새로이 이룩한 저택을 보고 말하기를,<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하여 삼[麻]을 심었는가.>하고 말을 마치고는 가버리기에 부인이 듣고 알리니 세조(世祖)가 신발을 거꾸로 신고 그를 쫓아가 만나 보니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와 같았다.
드디어 함께 곡령(鵠嶺)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추려보며 위로는 천문을 보고 아래로는 시수(時數)를 살피어 말하기를,
<이 지맥(地脈)이 임방(壬方 북방(北方) )의 백두산 수모목간(水母木幹)에서 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에 떨어졌는데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마땅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66(六六)으로 지어 36구(區)로 하면 천지의 대수(大數)에 부응하여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왕건(王建)이라고 이름하라.>고 하면서 봉투를 만들어 그 표지에 제(題)하기를,
<삼가 글월을 받들어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三韓)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당신께 올리나이다.>라고 하였다.
때는 당(唐) 희종(僖宗) 건부(乾符) 3년 4월이었다. 세조(世祖)가 그 말대로 집을 짓고서 살았는데 이 달에 위숙 왕후(威肅王后)가 임신하여 태조(太祖)를 낳았다.
태조(太祖)가 나이 17세 때 도선(道詵)이 다시 와서 뵈옵기를 청하고 말하기를, <당신께서는 백륙(百六)의 운(運)에 응하여 천부(天府)의 명허(名墟)에 탄생하였으니 3계(季)의 창생(蒼生)이 그대의 널리 구제함을 기다립니다.>하고는 인하여 출사치진(出師置陣) 지리(地利)와 천시(天時)의 법과 망질(望秩) 산천과 감통(感通)하고 보우(保祐)하는 이치를 말하여 주었다. 건녕(乾寧) 4년 5월에 세조(世祖)가 금성군(金城郡)에서 훙(薨)하니 영안성(永安城) 강변의 석굴에 장사지내고 능을 창릉(昌陵)이라 이름하였는데, 위숙 왕후(威肅王后)를 합장(合葬)하였다. 실록(實錄)에는 현종(顯宗) 18년에 세조(世祖)의 시호(諡號)에 원열(元烈)을 더하고 위숙 왕후(威肅王后)는 혜사(惠思)라 하였으며 고종(高宗) 40년에 세조(世祖)에게 민혜(敏惠)를 위숙 왕후(威肅王后)에게는 인평(仁平)의 시호를 더하였다.
굉장히 길었는데. 요약하면
王 建의 가문은 康虎景→康忠→康寶育→진의(증조모)→작제건→용융→왕건으로 이어졌고
康氏황후의 가문은 康虎景→康忠→ 康寶甸 → 강순산→강만루→강연창→강태주등으로 이어졌다.
즉 康氏황후의 부가 왕용과 비슷한 또래라면 康氏황후의 부는 康衍昌 이라 추측된다.
또한 王씨와 康씨는 같은 피를 나눈 사이고, 게다가 패서지역의 호족임으로 강력한 유대관계에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914년 왕건이 나주에서 철원으로 소환되어 죽기 일보직전까지 같던 사건하고, 915년 康氏가 궁예에게 간하다 죽은 사건하고는 혹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궁예의 의심이 외척에게로 향했다면, 궁예를 지지하던 철원의 주축세력이던 청주세력과 적대적이던
패서세력이 군부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왕건을 앞세워 같은 핏줄이자 동향인 태자 청광과 신광을 옹립할수도 있다고 판단한 궁예였다면 915년의 비극은 충분히 설명 가능한 사건이 되고 말것이다.
맨 앞으로 돌아가서 왕건이 만약 궁예의 후손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다면, 혹 같은 가문의 핏줄이라, 궁예의 핍박을 받은 핏줄이라 살려둔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망상일수도 있다. -길공구-
☆덧붙임☆ - 康東信씀
궁예의 부인 康氏황후는 청광(靑光),신광(神光) 두 아들을 두었다.
청광의 아들 김총(金摠)은“순천김씨” 시조가 되었으며, 신광의 아들 김경(金敬)은 궁구(弓球)를 낳고 금구는
이종금(李綜金) 낳았는데 이분이 광산이씨”시조이다. 이종금은 고려때 공훈으로 현종으로부터 이씨로 사성되었다.
주소창
가져온 곳 : 블로그 >마중물|글쓴이 : 세발까마|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