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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OTS(등산화)
글 : 이영준 기자 / 사진 : 양계탁 기자
호모 에렉투스. 걷는 인간.
등산화를 줄지어 놓고 보면 인간을 나타내는 여러 라틴어 표현들이 떠오른다.
인류에게 신발의 역사는 가히 10만년 전으로 거슬러갈 만큼 오래됐지만
정작 지금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신발을 신게 된 건 불과 수백 년도 안 된 일이다.
특히 등산화의 개량은 채 100여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호모 하빌리스(손을 쓰는 인간)는 호모 파베르(도구를 쓰는 인간)로서
거친 환경에서 그들의 발을 보다 편하고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첨단 기능을 덧붙이고 개량을 해왔으며,
모두에게 고루 이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널리 보급해왔다.
그들은 곧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요,
등산을 통해 기쁨을 얻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이었으니까.
prologue
너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
글 : 이영준 기자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하다.
신영복 선생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관계의 최고형태’라는 글에 나오는 이 문장은 꼭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말 같다.
‘등산은 발로 오르는 것’이라는 대전제는 누구에게나 산에 처음 오르던 순간부터 현재까지 유효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마음의 행위이기 전에 ‘발의 행위’인 등산, 그 오름짓의 원초성은 곧 등산화의 중요성과 맞닿는다.
본격적으로 등산을 처음 시작하려고 했을 때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열 중 아홉은 “처음엔 등산화만 있으면 돼”라고 이야기했었다.
배낭은 책가방을 메고 옷은 트레이닝복을 입어도 신발은 꼭 등산화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등산화는 다른 어떤 장비에 앞서 내가 산을 오르고자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식의 표상으로서 인식되었던 것 같다.
신발의 진보, 10만년 간의 발걸음
인간이 신발이라는 도구를 사용한 역사는 무려 10만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아프리카 남쪽 해안에 살던 인류의 흔적에서 샌들이 출토된 것이 지금까지 발견된 최고(最古)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발바닥을 철사장으로 단련해 두껍게 만들지 않는 한 야생에서 발은 늘 혹사당할 수밖에 없었고,
혹시라도 상처를 입는다면 곧 생존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중요한 신체부위가 발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 또 활동 무대의 기후와 자연조건에 따라 그에 맞게 발을 보호하는 방법을 고안했으며,
동물의 가죽이나 나무껍질 등을 발에 덧대 보호도구로 사용해왔다.
<신발의 역사>(저자 로리 롤러)에 따르면
“신발은 우리 삶의 방식과 노동 양태 그리고 여가 생활에 대해 다른 어떤 개인 소유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밝히고 있는데, 단순히 실용적 용도로 시작한 신발은 나아가 인간의 계급과 역사를 내포하게 되며,
그들이 부여한 사회적 무게를 지닌 발자국을 남겨왔다는 것이다.
△ 두껍게 가죽을 덧댄 바닥창에 쇠징을 박아 만든 20세기 초반 등산화의 모습.
이는 ‘등산화’로 대변되는 산악에서도 마찬가지며,
이 지구상의 산에 남긴 등산화의 발자국들은 곧 알피니즘의 역사가 되어왔다.
근대등산의 시작이었던 1786년 몽블랑 등정 때 사람들이 신었던 신발은 등산화가 아니었다.
알프스 목동들이 신던, 발목까지 올라오는 가죽으로 된 앵클부츠나 말을 탈 때 신는 장화였다.
그러나 곧 이런 신발들이 일상을 벗어난 거친 산악환경에서 적당하지 않다는 걸 수 차례의 산행을 통해 알게 되고
보다 개량된 형태의 ‘등산화’를 고안해나가게 된다.
알프스에서 일반적인 산악환경이란 숲과 초원을 지나 거친 너덜, 눈과 얼음까지 고루 뒤섞인 것이었다.
때문에 모든 조건에서 고루 사용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기능이 필요했고,
특히 안전과 직결되는 눈과 얼음, 바위에서의 사용에 주목하게 된다.
등산 전용 신발이 나오기 시작한 건 19세기 초 무렵부터이다.
눈에서의 방수와 보온을 위해 전체를 두꺼운 소가죽으로 만들었고,
바닥창도 가죽을 여러 겹 덧대 바닥을 보호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매끈한 가죽만으로는 바위나 눈에서 마찰력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용도에 따라 각기 다른 종류의 쇠징을 박아 사용했다.
가죽창에 쇠징을 박은 등산화를 총칭해 네일드(nailed) 부츠,
또는 독일어로 나겔(nagel)이라고 불렀는데, 바닥창에 박힌 쇠징들이 ‘손톱’과 같은 역할을 해 붙은 이름이다.
쇠징의 종류와 용도는 암빙벽등반용과 일반등산용으로 구분돼
크게 트리코니(tricouni)와 무거(mugger)라는 두 종류가 사용됐다.
스위스 제네바의 트리코니라는 등산화점에서 만든 트리코니 쇠징은 강도가 바위보다 강해
일종의 크램폰 일체형 등산화와 같은 역할을 했는데,
눈이나 얼음, 바위 등을 세게 디디면 쇠징이 그 속을 파고들며 지지력을 얻는 구조였다.
무거는 암빙벽등반보다는 주로 일반 등산에서 사용되었으며, 쇠징이 트리코니보다 약한 연철로 되어있었다.
두 가지 모두 쇠징의 강도와 박는 배열에 따라 워킹용, 빙설벽용, 암벽등반용 등으로 구분돼 사용됐지만,
모두 지금의 등산화처럼 바닥창의 마찰력을 이용하는 구조는 아니었다.
알피니즘 철의 시대가 열리며 1910~20년대에는 보다 어려운 암벽을 오르기 위해 삼을 꼬아 가죽창에 덧대 붙여
마찰력을 높인 신발이 사용되기도 했으나 곧 비브람 창의 등장으로 묻혀버렸다.
‘비브람’, 고유명사가 일반명사화 되다
현대 등산화 바닥창의 원형으로 불리는 비브람 창의 등장으로 등산용 신발은 진일보하게 된다.
비브람(Vivram)은 1935년 이탈리아의 산악인 주스토 제르바수티가 기존 네일드 부츠에 한계를 느끼고
바이탈레 브라마니(Vitale Bramani)라는 구두공에게 새로운 바닥창이 달린 등산화 제작을 요청한 끝에 탄생했는데,
당시 브라마니가 세운 회사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비브람’이었다.
네일드 부츠에 장착했던 쇠징의 여러 형태를 조합해 틀을 만들고
고무를 부어 만들었던 비브람의 등산화 창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발명으로 각광받았다.
상용화된 비브람 등산화를 신고
시험 삼아 알프스 에크랭 산군의 에일프르아(3949m) 북서벽을 초등했던 제르바수티는 등반 후
“비브람 창을 댄 등산화는 쇠징을 박은 등산화보다 훨씬 가벼워서 빨리 오르다 보니 지쳐버릴 지경이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후 리카르도 캐신의 그랑드조라스 북벽 등반과
이탈리아 K2원정대의 초등 등 역사적인 등반에서 비브람 창을 덧댄 등산화가 사용되며 차츰 그 명성을 날렸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바닥창이 두껍고 발목을 덮는 형태의 중등산화를 ‘비브람’ 또는 ‘비브람화’라고 부르기까지 했으니
일개 브랜드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일반명사화될 정도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등산화의 용도에 따른 세분화와 외형, 소재에 따른 분류도 몇 차례의 전기를 겪었다.
초창기 알프스의 등반에서도 쇠징을 박는 위치와 소재에 따라 용도가 구분됐듯,
보다 가파른 암벽을 오르기 위해, 보다 높은 설산을 오르기 위해 등산화는 분류되고 발전되어왔다.
이런 구분들은 알피니즘 철의 시대와 히말라야 탐험시대를 거치며 20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스키부츠에서 나와 1970년대 중반 등장한 플라스틱 등산화는
1990년대 말까지 동계, 고산등반에서 폭넓게 사용됐다.
지금과 같은, 마치 발레 슈즈 같은 형태의 암벽화는
1960년대 초 프랑스 클라이머이자 장비 개발자였던 피에르 알랭이 개발했다.
바위에 닿는 면적을 넓히고, 부틸고무를 사용해 마찰력을 극대화 한 암벽등반용 신발은
이후 비브람과 함께 등산화의 양대 축을 형성했다.
바닥창뿐 아니라 외피의 소재도 70년대 중반부터 새롭게 혁신됐다.
제르바수티는 쇠징을 대체한 등산화를 신고 그 가벼움을 극찬했지만,
통가죽으로 된 이 등산화는 여전히 한짝에 3kg에 육박하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으며,
눈밭에서 하루만 신고 나면 축축이 젖어 늘 방수를 위해 왁스를 발라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만년설에서 신는 등산화의 소재를 가죽이 아닌 플라스틱으로 대체해야겠다는 고안은 스키부츠에서부터 나왔다.
국내에서 인기를 끌며 플라스틱화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오스트리아의 코플라치를 비롯,
살로몬, 스카르파, 트레제타, 아솔로, 돌로미테 등 유럽 업체들에서 만든 플라스틱 등산화는
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국내에도 보급되기 시작해 90년대 말까지 폭넓게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등반기량의 발달과 부수적인 장비의 발달로 인해
빙벽등반용으로 전용되던 플라스틱화는 다시 가죽을 사용한 형태로 돌아오게 되며,
대신 기존과 같은 투박함에서 벗어나 보다 가볍고 정교하게 디자인되기에 이른다.
한편 일반 등산화도 보다 세분되어 기존 경등산화 또는 중등산화로 분류되던 것에서
어프로치 슈즈, 마운틴러닝 슈즈, 하이킹 부츠, 트레킹 부츠, 알파인 부츠 등으로 나뉜다.
이들 각각의 등산화들은 지역적 특성과 기후에 맞게 디자인되었다.
특히 산에 암릉이 발달한 국내에서는 기존 어프로치 슈즈로 출시되었던 것들이 개량돼
‘리지화’라는 이름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운동화와 같은 형태에 바닥에는 암벽화 창을 댄 신발이다.
이밖에 외피 소재도 인조가죽, 고어텍스, 나일론 메쉬 등 기능성을 덧대 계절별, 용도별로 다양한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국산 등산화
국산 등산화는 현재 세계 유수 브랜드에 OEM으로 납품되는 등 품질 면에서 높은 수준을 자랑하지만
그 역사는 국산 서양식 수제화의 역사와 비슷하다.
초창기 자료사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등산화는 일제 네일드(nailed) 부츠,
또는 암벽에서 바닥창에 삼을 꼬아 만든 것을 덧댄 단화가 대부분이었다.
해방과 전쟁 이후 미군수품들이 일반에 유입되며 군화가 등산용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기도 했다.
발목을 잘라 신고 벗기 편하게 만든 군화는 1970년대 초반까지 산악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국산 등산화의 1세대는
1936년 문을 열고 1960년대 초반부터 등산화를 제작해 3대를 이어오고 있는 송림제화,
1966년 문을 연 RF상사(현 레드페이스),
1972년부터 산업용 안전화를 만들기 시작해 1980년대부터 등산화 제작에 뛰어든 K2 등이 손에 꼽는다.
이후 등산 붐이 일며 수많은 등산화 제조업체가 생겨났고,
특히 7~80년대 노동집약적 산업의 비중이 높아지며 등산화 업체들은 노하우를 쌓아와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등산화는 신체의 가장 끝부분,
늘 쳐다보지도 않는 그곳에서 묵묵히 진흙탕을 밟고 돌부리에 채이고 얼음에 머리를 박아가며 낡아간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게 구두란 지키고 싶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등산화는 산쟁이에게 어떤 표상으로 남아 있는가.
그래서 너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 낡은 등산화에 묻는다.
△ 1960년대부터 등산화 제작을 해온 송림제화 등산화의 1980년대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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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끝에서 두번째 빨간색 알프스빌라배낭과 하얀색 코플라치 신발사진이 저를 산악계로 입문하게 만든 계기가 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