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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2. 4 주일 낮 예배(‘야곱’ 연속 설교 2)
축복과 음모
창세기 27장 33-37절(450장)
지난주부터 ‘야곱’에 대한 연속 설교를 하고 있는데, 야곱은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우리의 연약함을 잘 보여줍니다. 그의 사람됨과 삶의 과정, 그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점차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자로 변화되어 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우리는 ‘변화’가 순식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그런 종류의 변화란 없습니다. 물방울 하나가 끊임없이 떨어져 바위에 구멍을 내듯이, 하나 하나 또 매일 매일의 삶이 쌓여서 그것이 어느 시점에서 폭발을 일으키듯이 변화하게 되는 경우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폭발적인 순간 배후에는 기나긴, 그리고 지루한 과정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의 삶 또한 그렇습니다. 지난주에는 야곱의 잉태와 출산, 성장과 장자의 권리를 사는 부분까지 살펴보았고, 오늘은 그가 어떻게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축복권을 취하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야곱 생애의 초반부에 대한 내용은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초반부의 삶은 야곱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야곱과 닮은 사람들인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으로 33-37절을 읽었지만, 이 시간에 살펴볼 내용은 1-40절까지의 긴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버지 이삭을 속이는 야곱의 모습뿐 아니라 남편을 속이는 리브가의 모습,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계시에도 불구하고 에서에게 축복하고자 애쓰는 이삭, 그리고 장자의 권리를 판 후에도 축복권은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에서의 모습도 발견하게 됩니다. 이들 각자의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1. 이삭의 음모(1-4v)
먼저 이삭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이삭의 음모’라고 제목을 잡았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삭이 아닌 리브가에게 주신 계시였습니다. 하지만 리브가는 이 사실을 이삭에게 전했을 것이 분명하고, 이삭은 이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에서에게 장자의 권리와 장자의 축복을 전해 주고자 합니다. 저는 지난주에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것은 에서 자신 때문이라기보다는 에서가 잡아오는 고기 때문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껏 ‘맛있는 고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어긴다는 것이 어이가 없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삭은 4명의 족장 가운데서 그래도 흠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만, 이 마지막 부분에서만큼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성경은 그가 장자권을 물려주는 문제에 있어서 야곱이 아닌 에서를 선택한 이유를 그의 ‘식탐’(食貪)에 돌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절입니다.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본문은 이삭이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그가 눈이 어두웠던 이유는 나이가 많이 들었기 때문이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볼 때 그의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단지 시력이 약해졌다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삭이 말합니다. “(2)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3)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4)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자기는 이제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니 이제 무기를 가지고 나가서 사냥해서 자기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먹고 마음껏 축복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즐기는 별미’라는 말이 ‘사랑하는 맛있는 고기 요리’*라는 이야기는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삭이나 야곱의 경우에는 죽기 전에 아들에게 축복 기도를 해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에서는 비록 쌍둥이이기는 하지만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장자의 권리’를 가지게 되었고, 이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장자의 축복’도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뒤의 36절에서 에서의 말에도 나오지만, 아마도 이삭은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았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에서를 장자로 인정하여 그를 축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 ‘별미’로 번역된 ‘마트암’(!['f]m', 또는 마트아마 hM;['f]m')는 ‘진미, 맛 좋은 고기, 진찬, 맛있는 음식, 진미’라는 뜻이다. ‘즐기는’으로 번역된 것은 ‘아하브’(bh'a;, 또는 아헤브 bhea;)는 ‘(성적으로나 다른 방법으로) 애정을 갖다, 사랑하다, 좋아하다, 친구’라는 뜻이다.
** 개역 성경은 ‘팥죽’으로 번역했지만 이것이 정확하게 ‘팥’을 재료로 삼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팥’으로 번역된 ‘아다쉬’(vd;[;)는 ‘렌즈 콩, 편두(扁豆), 팥, 녹두, 얼치기완두’ 등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콩과의 일년생 풀, 또는 팥의 씨로 알려져 있다. 이것으로는 죽(창 25:34)이나 빵(겔 4:9)을 만들거나 볶아서(삼하 17:28) 먹었다. 앞의 경우는 모두 팥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삼하 23:11에서는 ‘녹두 나무’로 번역되어 있다. 렌즈 콩(lenti, Lens esculenta, Ervum lens) 나무의 줄기는 15-45cm이고 5-6월경 담남색(淡藍色)의 꽃을 피운다. 콩 꼬투리는 길이 12mm로 폭이 넓다. 직경 4mm의 볼록 렌즈(lens) 모양을 한 콩알이 두 알씩 한 꼬투리에 들어 있다. 콩알은 황색에서 짙은 갈색까지 있는데, 붉은 애굽 렌즈콩(red Egyptian lentil)이라는 종류가 가장 맛있다고 한다. 야곱이 만든 죽은 이 종류의 렌즈 콩을 쓴 것으로 보인다.
1. 3종류의 렌즈 콩 2. 렌즈 콩 요리
게다가 이삭은 에서에 대한 축복을 ‘마음껏’ 하겠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호흡, 생명, 자아,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공동번역]이 가장 잘 번역하고 있는데, “정성을 쏟아”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는 혼신을 다해서, 그의 생명과 정성을 다 쏟아서 에서를 축복하려고*** 합니다. 이 축복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족장’으로서의 복과 권위를 실제적으로 전수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장자의 권리’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더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고자 마음먹고 행동하는 이삭의 모습은 ‘음모’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경건하다 불리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고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행동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어이없는 이유들을 제시하면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고 거역하고 있습니까?
* ‘네페쉬’(vp,n<)는 원래 ‘호흡하는 (생물), 동물, 생명력, 신체, 숨, 생물, 욕망, 혼령’이라는 뜻이며, ‘영혼, 자아, 생명, 피조물, 개인, 식욕, 마음, 실존, 소망, 감정, 열정’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공동번역]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 죽기 전에 정성을 쏟아 너에게 복을 빌어 주리라. [한글 킹제임스]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혼이 너를 축복하게 하라. 하니 [표준새번역]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서, 나에게 가져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 죽기 전에 너에게 마음껏 축복하겠다." [현대인의 성경]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 죽기 전에 너에게 마지막으로 축복해 주겠다."
*** ‘바라크’(&r'B;)는 ‘무릎 꿇다, (하나님을) 송축하다, (사람을 은혜로) 복주다, 저주하다, 축하하다’라는 뜻이다.
2. 리브가의 음모(5-17v)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의 음모입니다. “(5)이삭이 그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6)리브가가 그 아들 야곱에게 일러 가로되 네 부친이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7)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마침 이삭의 이야기를 리브가가 듣고는, 에서가 사냥하러 나가자마자 야곱을 불러서 그 내용을 전해 줍니다. 그런데 여기에 ‘여호와 앞에서’라는 표현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개역은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 원문은 ‘여호와 앞에서 죽음 앞에서’*라고 해서 ‘(얼굴) 앞에서’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합니다. 이것은 이삭이 자신의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느끼고 있으며, 에서에 대한 축복을 하나님 앞에서 하고자 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리브가가 덧붙인 것일 수도 있고, 이삭이 말한 것이 앞에서 생략되었을 수도 있지만, 계속해서 나오는 이삭의 표현들을 살펴보면 이삭 자신이 이 이야기를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을 하면서도, 떳떳하게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순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일들을 계획하고 행합니까!
* 이것은 히브리어로 ‘리프네이 예호와 리프네이 모티’(yti/m ynEp]li hw:hy_ ynEp]li)라고 되어 있다. ‘리프네이’의 원형은 ‘파님’(!ynIP;) 또는 ‘파네’(hn<P;)로서 ‘얼굴, 면전, 사람, 표면, 앞뒤로, 이전에, 함께, 앞에’라는 뜻이다.
** 이삭의 태도만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들의 태도는 마치 사사기 말미에 나오는 암흑 상황을 보는 듯하다. 일례로, 미가의 어머니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신상을 만들기 위해 은을 바치면서, 그것을 여호와께 거룩하게 드린다고 말한다. 미가 역시 떠돌이 레위인을 임의로 자기 가정의 제사장을 삼아 놓고서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복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행동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그 행동들은 하나님과 무관하다. 하지만 심지어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이라는 무지(無知)한 말들을 하는 것이다. 삿 17:3, 13 “(3)미가가 은 일천 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13)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8절부터 봅니다. “(8)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9)염소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10)네가 그것을 가져 네 부친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리브가는 말합니다. ‘그런즉!’ 이 말은 ‘이때에, 지금, 곧장, 이제’*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기회가 왔을 때에 그것을 놓치지 말고, 당장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모’를 꾸미자는 것입니다. 염소떼**에 가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져오면 자기가 요리를 만들 테니 그것을 가지고 가서 드시게 하고 축복 기도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버지를 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야곱이 장자권에 대한 욕심을 가지게 된 것이나, 팥죽으로 장자의 권리를 산 행동도 리브가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아타’(hT;[')는 ‘이때에, 이제부터는, 지금, 곧장, ~임에 반하여, 이제’라는 뜻이다.
** 여기에는 ‘촌’(@aOx)또는 ‘체온’(@/ax])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양이나 염소들의) 떼, (사람들의) 무리, (작은) 가축, 어린 양, 작은 소, 양과 염소, 양떼’라는 뜻이다. 이것은 체구가 작은 짐승을 구별하지 않고 지칭할 때 사용된다.
*** 여기에는 ‘에즈’(z[e)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암염소, 염소 새끼’라는 뜻이다.
**** 개역 성경에는 이것이 번역되지 않았다. ‘쉐나임’(!yIn"v]) 또는 ‘쉐타임’(!yIT'v])은 ‘둘, 두 번, 이중의, 두 배의, 둘 다, 한 쌍, 이중, 두 번째, 열둘’이라는 뜻이다.
이제 야곱이 대답합니다. “(11)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12)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그는 어떻게 아버지를 속일 수 있느냐 거나, 속였다가 저주를 받으면 어떡하냐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속이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설프게 했다가 들켜서 저주를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어머니와 아들이 짝짜꿍이 잘 맞습니까!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고 자기는 털이 없는 매끄러운** 피부를 가진 사람인데, 만약에라도*** 아버지가 만져 보기만 해도 속임수가 탄로 나서 복은커녕 저주를 받게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아버지를 속이지 않겠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탄로 나지 않을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리브가가 다시 대답합니다. “(13)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아버지를 속였다는 것이 탄로 나서 저주를 받게 된다면 그 모든 저주는 어머니인 자기가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들켜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뒤따라 나오는 이야기는 야곱이 지적한 부분에 대한 대책도 행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만, 어떠한 저주도 리브가 자신이 받을 터이니 염려 말고 아버지를 속이라는 것입니다.
* ‘사이르’(ry[ic;)는 ‘털이 많은, 수염소, 수염소 우상, 마귀, 염소, 털투성이의, 염소 새끼, 껄껄한’이라는 뜻이다.
** ‘하라크’(ql;j;)는 ‘미끄러운, 호리는, 고른, 아첨하는, 알랑거리는’이라는 뜻이다.
*** ‘만지실진대’라는 말은 ‘만진다’는 말과 ‘만약’에 대한되는 두 개의 단어가 묶여서 번역된 것이다. ‘우라이’(yl'Wa, yl'au)는 '만일 …이 아니라면, 아마, 그렇다면, 혹시, 어쩌면, 혹시나, 가정하자면‘이라는 뜻이다.
“(14)그가 가서 취하여 어미에게로 가져왔더니 그 어미가 그 아비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15)리브가가 집안 자기 처소에 있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미고(17)그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매.” 결국 야곱은 리브가의 말대로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져왔고, 그것으로 이삭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습니다. 리브가는 이삭을 철저하게 속이기 위한 조처를 취합니다. 먼저 에서의 좋은 옷을 가져다가 야곱에게 입힙니다.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마치 옷을 입히듯, 야곱의 매끈매끈한 부분인 손과 목을 둘러쌌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모두 마친 후에 만든 별미와 떡을 야곱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어쩌면 야곱이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면서 떡을 함께 주었던 것까지 어머니 리브가를 똑 닮았는지요(25:34)!
* ‘입히고’와 ‘꾸미고’는 같은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라바쉬’(vb'l;) 혹은 ‘라베쉬(vbel;)는 ‘둘러싸다, (옷을) 입다, 무장하다, 밀려닥치다, 온통 덮다’라는 뜻이다.
3. 이삭 vs 야곱(18-29v)
드디어 야곱이 이삭 앞에 나갑니다. 이 부분은 이삭과 야곱이 어떻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지를 흥미진진하게 보여줍니다. 특별히 이삭이 자기를 찾아온 아들이 에서가 맞는지를 얼마나 여러 차례 확인하는지에 집중해서 보시기 바랍니다(빨간색 원숫자). “(18)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른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야곱이 아버지를 부릅니다. ① 그러자 이삭은 ‘누구냐’*고 묻습니다. ‘아버지’라고 불렀으니 두 아들 가운데 하나일 터인데 어느 아들인지를 확인한 것입니다.
* ‘미’(ymi)는 ‘누구든지, 어떤 (사람), 무엇, 어떤 것, 누구’라는 뜻이다.
“(19)야곱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20)이삭이 그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야곱은 자기가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이삭의 명령을 직접 들은 것처럼 명하신 대로 했다고,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축복해 달라고 말합니다. ② 그러나 이삭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이렇게 일찍 온 것이 수상하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평소에도 이런 질문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뭔가 미심쩍은 느낌을 받았기에 다시 확인한 것이지요. 야곱은 하나님께서 사냥감을 금방 만나게 해주셨다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팝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 ‘마’(hm;)는 ‘무엇?, 어찌하여?, 어떻게?, 언제?, 얼마나!’라는 뜻이다.
** 이 부분은 아래의 두 번역본이 원문에 가깝게 번역했다. [공동번역] "아버님의 하느님 야훼께서 짐승을 금방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한글 킹제임스] "주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 주셨나이다."
“(21)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22)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23)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이삭은 다시 그를 향해 가까이 오라고 말합니다. ③ 과연 에서가 맞는지 만져 봐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를 만져 본 이삭은 목소리는 야곱인데 손은 에서라고 말하며 미심쩍어 하지만, 이미 눈이 어두워진 상태여서 그것이 에서의 팔에 난 털인지 염소 털인지를 분별* 해내지 못합니다. ④ 그러자 아예 대놓고 다시 묻습니다. “(24)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 ‘나카르’(rk'n:)는 ‘세밀히 조사하다, 골똘히 쳐다보다, 인정하다, 익히 알고 있다, 돌보다, 존경하다, 숭배하다, (의심의 의미가 함축되어) 무시하다, 묵살하다, 낯설다, 거절하다, 그만두다, 동의하다, 인정하다, 알다, 존중하다, 분별하다, 간주하다’라는 뜻이다.
4번이나 확인을 한 이삭은 드디어 고기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그것을 먹습니다. “(25)이삭이 가로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포도주는 아마도 이삭의 분별력을 더 흐리게 할 목적으로 가지고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삭은 다시 말합니다. “(26)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⑤ 가까이 와서 입 맞추라는 요구는 최종적으로 ‘에서의 냄새’로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에서의 옷을 입었기에 입을 맞추면서도 이삭은 에서의 냄새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에서의 향기가 하나님께서 복 주신 들판*의 향기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 ‘사데’(hd,c;) 혹은 ‘사다이’(yd'c;)는 ‘밭, 들, 땅, 지면, 흙, 평야’라는 뜻이다. 이것은 에서가 ‘들사람’이라고 할 때에 사용된 단어이다.
이제 더 이상의 의심은 없습니다. 이삭은 곧바로 야곱을 축복하기 시작합니다. “(28)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먼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진 수확,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축복합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축복을 모두 포함한 이야기입니다. “(29)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 두 번째 부분에서 이삭은 야곱을 만민과 열국, 형제들과 어미의 아들들을 다스리는 지위를 줍니다.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축복하는 자는 복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축복을 모두 포함하는 매우 포괄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이삭은 자기도 축복해 달라고 하는 에서에게 더 이상 축복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4. 이삭과 에서(30-40v)
“(30)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이삭의 축복이 끝나자 야곱은 곧 거기서 빠져나옵니다. 야곱이 확실히* 아버지의 처소에서 빠져나온 후에야 에서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31)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비에게로 가지고 가서 가로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그가 직접 별미를 만들었다는 것은 어머니인 리브가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에서의 소리를 들은 이삭은 묻습니다. “(32)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 개역 성경은 이 단어의 의미를 잘 살리지 못하고 있다. ‘아크’(&a')는 ‘정말로, 확실히(강조 용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라는 뜻이다.
에서의 답변을 들은 이삭은 매우 강렬하게 반응합니다. “(33)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개역 성경은 그냥 ‘심히 크게 떨며’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원문은 훨씬 더 강조적으로 써 놓았는데* 그것은 ‘그러자 이삭은 매우 심할 정도의 극도의 불안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정도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왜 이렇게 심하게 떨고 있습니까? 무엇이 이삭을 이렇게 두렵게,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습니까? 드디어 이삭은 자기가 하나님을 향해서 음모를 꾸며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여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고, 수차례에 걸쳐 확인하고 또 확인했건만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그 두려우신 하나님, 그 뜻을 확실하게 이루어 내신 하나님 앞에서 떨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는 다시금 두려운 확신 가운데서 선언합니다. 먼저 번에 축복한 그 사람이 정녕, 확실히***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 원문은 ‘와예헤라드 이츠하크 하라다 그돌라 아드-메오드’(daom]Ad[' hl;doG_ hd;r;j} qj;x]yI dr'j>Y<w")라고 되어 있다. ‘와’는 접속사(and)이고, ‘예헤라드’(원형 하라드, dr'j;)는 ‘(공포에) 떨다, 두려워하다, 당황하다, 깜짝 놀라다, 흔들다, 전율하다, 움직이다’라는 뜻이다. ‘이츠하크’는 ‘이삭’을 가리키는 것이고, ‘하라다’는 ‘두려움, 걱정, 근심, 흔들림, 떨림, 전율, (극도의) 불안, 근심스러운 염려’라는 뜻이다. ‘그돌라’(원형 가돌, l/dG:)은 ‘큰, 더 늙은, 건방진, 높음, 긴, 힘센, 더욱, 많은, 고상한, 거만한 것, 심히, 매우’라는 뜻이다. ‘아드’는 ‘~하는 한, ~하는 만큼의, ~까지’라는 뜻이고, ‘메오드’는 ‘열렬함, 열렬하게, 전적으로, 급속히, 부지런히, 특히, 대단히, 멀리, 빨리, 큰(크게), 힘 있게, 빠르게, 매우, 대단히’라는 뜻이다. 이것을 단어의 순서대로 나열하면‘그러자(와) 전율했다(예헤라드) 이삭은(이츠하크) 극도의 불안으로(하라다) 매우(그돌라) 심한(메오드) 정도로(아드).’가 된다.
** [공동번역] 이사악은 그만 기가 막혀 부들부들 떨며 [한글 킹제임스] 이삭이 아주 심하게 떨며 [표준새번역] 이삭이 크게 충격을 받고서, 부들부들 떨면서 [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이삭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 ‘감’(!G")은 ‘역시, 까지도, 게다가, 비록, (그것 역시) 그렇다, ~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더구나, ~조차, 정말로, 더욱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에서는 그 말을 그대로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34)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그는 방성대곡합니다. 이것 역시 이삭의 태도와 대조되어 강조적으로 써 놓았는데,* ‘그러자 매우 심한 정도의 쓰라린 절규로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삭에게 자신에게도 축복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이삭도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지 “(35)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삭의 음모가 깨어지고 야곱에게 복이 넘어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야곱이 ‘속임수’***로 에서의 몫인 복을 ‘취하여’ ****갔다고 말합니다.
* 이 표현은 이삭의 떠는 행동과 비교되듯 강한 표현들이 나열되고 있다. 원문은 ‘와이츠아크 츠아카 그돌라 우마라 아드-메오드’(daom]Ad[' hr;m;W hl;doG_ hq;[;x] q['x]YIw")라고 되어 있다. ‘와’는 접속사(and)이고, ‘이츠아크’(원형 차아크, q['x;)는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다, 부르짖다, 소리치다, 외치다, 부르다, 도움을 청하다’라는 뜻이며, ‘츠아카’(원형 차아카, hq;[}x')는 ‘비명, 울음, 부르짖음, 외침, 절규’라는 뜻이다. ‘그돌라’(원형 가돌, l/dG:)은 ‘큰, 더 늙은, 건방진, 높음, 긴, 힘센, 더욱, 많은, 고상한, 거만한 것, 심히, 매우’라는 뜻이다. ‘우마라’(원형 마르, rm' 혹은 마라, hr;m;)는 ‘쓴, 쓴 맛, 괴로움, 몹시, 쓰라린, 불만스러운, 고통, 몹시, 심하게’라는 뜻이다. ‘아드’는 ‘~하는 한, ~하는 만큼의, ~까지’라는 뜻이고, ‘메오드’는 ‘열렬함, 열렬하게, 전적으로, 급속히, 부지런히, 특히, 대단히, 멀리, 빨리, 큰(크게), 힘 있게, 빠르게, 매우, 대단히’라는 뜻이다. 이것을 단어의 순서대로 나열하면‘그러자(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이츠아크) 절규로(츠아카) 매우(그돌라) 쓰라린(우마리) 심한(메오드) 정도로(아드).’가 된다.
이삭의 반응과 에서의 반응은 의도적으로 대조되어 나타난다.
‘와예헤라드 이츠하크 하라다 그돌라 아드-메오드’(daom]Ad[' hl;doG_ hd;r;j} qj;x]yI dr'j>Y<w")
‘와이츠아크 츠아카 그돌라 우마라 아드-메오드’(daom]Ad[' hr;m;W hl;doG_ hq;[;x ] q['x]YIw")
** 여기에는 ‘바라케니’(ynIker}B;)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축복한다는 뜻의 ‘바라크’의 명령형이다.
*** ‘미르마’(hm;r]mi)는 ‘사기, 재간, 속이다, 거짓의, 꾸민, 간사, 교묘하게, 배반, 속임수’라는 뜻이다.
**** ‘라카흐’(jq'l;)는 ‘취하다, 받아들이다, 데리고 오다, 사다, 빼낸, 가져오다, 얻다, 접다, 빼앗다, 탈취하는 것, 사용하다, 얻다, 획득하다, 잡아채다, 소유하다, 지도하다’라는 뜻이다.
그러자 에서는 그 말에 힘을 얻어서 말합니다. “(36)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야곱’이라는 이름처럼 두 번이나 자기를 속여서 장자의 명분과 장자의 복을 빼앗아 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상 장자의 축복은 장자의 명분에 포함된 것이기에, 이미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은 그가 장자의 축복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복’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러면서 남은 복이 없느냐고, 그것이라도 빌어달라고 다시 요청합니다. “(37)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이삭은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에서에게 줄 작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몫은 하나도 남지 않게 할 작정이었는데, 그것이 뒤집어져서 에서에게는 아무 것도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38)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39)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40)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그래도 에서가 계속 통곡하면서* 빌어 줄 복이 그것 하나뿐이겠느냐고 요청하자, 이삭은 마지못해서 한 마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축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공동번역]이 가장 잘 번역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39)아버지 이사악이 아들에게 대답하였다. ‘네가 살 땅은 기름지지 않은 땅, 하늘에서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땅이다. 칼만이 너의 밥줄이 되리라.(40)너는 아우를 섬겨야 할 몸, 너 스스로 힘을 길러 그가 씌워 준 멍에를 떨쳐 버려야 하리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 ‘바카’(hk;B;)는 ‘울다, 통곡하다, 불평하다, 애통하다, 한탄하다, 비탄하다, 소리 지르다, 눈물을 흘리다’라는 뜻이다.
** [한글 킹제임스] (39)그의 아비 이삭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하기를 "보라, 너의 처소는 땅의 기름진 곳과 위로부터 하늘의 이슬이 내리는 기름진 곳이 되리라.(40)너의 칼로 네가 살 것이며 네 아우를 섬기리라. 네가 다스릴 때에 네가 네 목에서 그의 멍에를 끊어 버릴 것이라." 하더라. [표준새번역] (39)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는 곳이다.(40)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애써 힘을 기르면 너는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부술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39)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네가 사는 땅은 기름지지 않고 하늘의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이며 (40)네가 칼을 믿고 살 것이나 네 동생을 섬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끊임없이 몸부림치게 될 때 그의 지배하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삭 가정의 비극적인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삭은 에서와, 리브가는 야곱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삭은 어떻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것과는 반대로 에서를 축복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그가 사랑하는 맛있는 고기 요리를 빌미로 하나님 앞에서 혼신을 다해서 복을 빌어 주겠다고 말합니다. 혹시라도 야곱에게 축복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용의주도하게 확인하고 또 확인합니다. 그리고는 야곱에게는 아무 것도 남겨 주지 않을 작정으로 에서에게 모든 복을 쏟아 붇듯이 빌어 줍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자신이 야곱에게 축복했음을 안 뒤에도 두려움으로 부들부들 떨면서도, 이미 빈 축복을 돌이킬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에서는 어떻습니까? 그는 이미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가 장자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장자의 권리는 없지만 장자의 축복은 자기 것이어야 한다고 우깁니다. 야곱이 속임수로 자기 장자의 권리를 빼앗아 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불공정하기는 하지만 분명 거래였습니다. 그것이 속임수였다면 에서 자신이 그것에 응하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는 장자의 명분을 우습게 여겨 팔아넘기고는 야곱 탓만 합니다. 반면에 눈에 보이는 ‘복’의 문제에는 결사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리브가는 어떻습니까? 그녀는 아들 야곱에게 이삭을 속여야 하는 존재로 제시합니다. 어떻게 하면 철저하고 치밀하게 속일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실행합니다. 장자의 축복은 속임수를 써서라도 차지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저주 따위는 아들의 성공을 위해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 아들을 그 이름에 걸맞는 자리로 밀어 넣습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그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는 그저 속이고 또 속입니다. 취하고 또 취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복’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속이는 사람입니까, 속는 사람입니까? 속이는 야곱만 나쁘고 속은 이삭은 좋은 사람입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지만, 이들 가운데 누구 하나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로 서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자기 유익, 자기편의 유익만을 추구할 뿐입니다. 속임수도, 음모도 성공과 유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이삭입니까? 에서입니까? 리브가입니까? 야곱입니까?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일터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또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축복’이 ‘음모’로 얼룩진 모습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을 구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음모는 꾸미지 마십시오. 정당하게 하십시오! 정당하게 사십시오!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바르게, 의롭게, 선하게, 참되게 사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면서 하나님을 들먹이지 마셔야 합니다. 정말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늘 분별하고 그 뜻 가운데 있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계십니까?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