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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전(於田)마을
1) 개관
어전 마을은 계북면 소재지에 있는 마을이고 계북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작은 삿갓봉에서 분기한 세 개의 줄기 중 가운데 줄기가 한바탕 흔들고 내려오다가 몇 개로 나뉘는데 그 중 하나가 문성마을 뒤로 길게 뻗어 파곡과 경계를 이루며 내려와 솔개고개를 만들고, 다시 일어나 서쪽을 향해 흐르며 어전마을 북쪽을 길게 감싸며 지마재를 지나 월현을 거쳐 천천면으로 향한다. 다른 하나는 문성 당골을 만들며 힘차게 흐르다가 어전마을의 남쪽을 감싸며 나지막한 언덕을 형성하고 너른 벌판을 만드는데 문성마을의 진번덕과 진번덕 아래 갈벌을 만들고, 농소마을의 뒤를 감싸며 등거터에 이르러서야 흐름을 멈춘다. 마을의 위는 초등학교 옆 소나무독산이, 아래는 잉어산이 든든한 수구막이를 하고 있고, 전후를 큰 줄기가 받치고 있는데다가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 둑이 마을과 갈벌 사이를 북동에서 남서로 길게 흐르며 이중으로 막아주어 매우 안정된 형국을 이루고 있다.
어전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여 년 전에 조선조 현종 때 금계한씨(錦溪韓氏) 천석(天錫)이란 분이 문성마을에 살 때에 마지견(馬池見)이라는 도승을 추운 겨울에 잘 보살펴주고 보호해 주었더니 그 보답으로 이듬해 봄에 묘 자리와 집터를 잡아 주었는데 그 집터는 그 당시 느릅나무 숲이 울창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유전(느릅나무밭)이라고 마을이름을 붙였는데 1914년 지방관제 개정시 ‘느릅밭’을 ‘늘밭’으로 부르게 되어 한자로는 어전(於田)이 되었다. 이 분의 묘는 마을 북쪽 약 800m 지점 계북중학교 뒤에 있다.
어전마을은 동에서 서로 하천을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는데 그 길이는 약800m에 이른다. 마을에 진입하는 길은 초등학교에서 문성마을로 올라가는 어전 1교를 건너 웃담으로 가는 길과 면사무소 정문에서 바로 어전 2교를 건너 웃담과 아랫담의 경계가 되는 길로 들어서는 방법이 있다. 또 면사무소에서 서쪽으로 200m를 내려가다가 어전 3교를 건너 아랫담 끝으로 진입하는 길이 있다. 예전에는 어전 2교를 건너 회관 앞으로 이어지는 길을 중심으로 웃담과 아랫담으로 구분하였으나 지금은 마을 전체를 5반으로 구분하여 각 반마다 반장을 두어 마을 일을 편리하게 하고 있다. 1반은 농협아래 복개공사천을 경계로 하천 서쪽 아래 전체를 말하고, 2반은 어전 2교 아래 1반을 제외한 아랫담 전체를, 3반은 어전 2교 위와 마을 중간 골목 사이를, 4반은 마을 중간 골목에서 윗 골목 사이를 말하고, 5반은 마을 윗골목 위 전체를 말한다.
어전마을은 계북면의 대표적인 씨족취락이다. 씨족이란 동성동본(同姓同本)인 한 할아버지의 자손을 말하는 것이나 동성동본이 모여 산다고 해서 씨족집단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씨족취락이란 훌륭한 입향조(入鄕祖)가 있어야 하고 역사와 전통이 뚜렷해야 하며 가까운 선대에 모두가 알만한 현조(顯祖)가 있어 그 분이 지역이나 사회, 국가에 끼친 공덕 때문에 자손들은 긍지를 갖게 되고 세상에서도 그들을 현조와 지역을 연관시켜 높이 평가하고 좋게 인식하는 씨족집단을 말한다. 씨족 취락은 한 씨족이 한 마을에 몇 호 정도 모여 살아야 하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물론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동족집단에 관해서 1930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것을 보면 15호를 기준으로 했던 것 같으며 그때의 조사에 의하면 장수군의 동족 취락은 45개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은 절반도 못되는 상황이고 동족만 모여 사는 취락은 하나도 없다.
어전마을의 금계한씨(錦溪韓氏)는 문충공(文忠公) ‘교(皦)’의 후예이며 선무랑사옹원주부(宣務郞司饔院主簿) 벼슬을 지낸 한사우(韓思佑)공이 17세기 중엽에 금산(錦山)으로부터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동족취락을 형성했는데 해방 전만해도 150여 호 되는 어전마을에 다른 성씨는 거의 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금계한씨를 느랏한씨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18호가 살고 있다.
어전 마을을 대표해서 마을 일에 앞장서던 역대 이장을 살펴보면 한병섭(’54, 구장)씨, 한규상(’54-’62, 리장)씨, 한병대(’62-65, 리장)씨, 한경훈(’65-’66, 리장)씨, 한병창(’67-’71)씨, 한규동(’72-’74)씨, 박영석(’75-’77)씨, 한규동(’78)씨, 한기훈(’79-’80)씨, 한규표(’81-’83)씨, 이춘재(’84-’87)씨, 한규진(’88-’91)씨, 한천규(’92-’93)씨, 이춘재(’94-’96)씨, 강만석(’97-’01)씨, 안영석(’02-’03)씨, 강만석(’04-’05)씨에 이어서 2006년부터 박상정씨가 이장을 맡아 특유의 성실함과 상하를 막론하고 최선을 다하는 대인관이 몸에 배어 가장 큰 어전마을을 잡음 없이 잘 이끌어간다는 평을 듣고 있다.
어전마을은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50여 호에 700여 명의 주민이 살았으나 지금은 금계 한(韓)씨를 비롯하여 경주․안동․김녕․용궁 김(金)씨, 밀양․충주 박(朴)씨, 달성 서(徐)씨, 밀양 손(孫)씨, 남원 양(梁)씨, 연안․전주․경주 이(李)씨, 동내․진주․경주․영일 정(鄭)씨, 전주 최(崔)씨, 진주 하(河)씨, 제주 고(高)씨, 은진 송(宋)씨, 죽산 안(安)씨, 단양 우(禹)씨, 묘금도 유(劉)씨, 파평 윤(尹)씨, 여양 진(陳)씨 등 107호에 253명이 살고 있다.
2) 산과 골짜기
• 잉어산(붕어산, 독뫼) : 마을 서쪽 800m 지점에 있는 작은 동산이다. 효자문 거리 맞은 편 하천 가운데 있는 산인데 좌우로 물이 흘러 마치 잉어가 마을 쪽으로 헤엄쳐 오르는 형국을 하고 있다. 어전마을의 수구(水口)막이 산이다. 6.25 한국전쟁 당시에는 국군들의 야전 병원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잉어산과 관련하여 전설이 전해진다.
• 좁은매골 : 마을 남서쪽 700m 지점 효자문 거리에서 북서로 뻗은 골짜기이다. 좁은 매골 가운데 산줄기가 매계리와 어전리의 경계가 된다. 매계마을에서는 효자문골이라고 한다.
• 지마재 : 마을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남서쪽 400m지점 작은 사거리에서 북서쪽으로 900m 지점에 있는 고개이다. 고개의 형국이 소의 길마를 닮았다 하여 길마재가 구개음화 되어 질마재로 부르다가 다시 음운 변화로 지마재로 부른다. 어전리 어전마을과 임평리 백암마을의 경계가 되는 고개로서 예전에 경상도에서 육십령을 넘어 소비재-연동-어전-지마재(지마재)-백암-고돔티-용담-금산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지마재에 오르다보면 오른쪽으로 아랫도도골, 가운데도도골, 웃도도골이 있고 왼쪽으로 아랫소나무골, 가운데소나무골, 웃소나무골이 차례대로 이어진다.
• 아랫도도골 : 19번 국도 지마재골 입구 400m 지점에서 북쪽으로 S자 형태로 뻗어오른 골짜기이다. 아랫도도골 정상이 635고지 매봉이다.
• 가운데도도골 : 19번 국도에서 지마재쪽 약 600m 지점에서 북쪽으로 뻗어 오른 골짜기이다. 을유년 수해로 피해를 입어 북구 후 골짜기가 넓어 보인다고 한다. 아랫도도골 다음 골짜기인데 역시 골짜기의 끝은 635고지 매봉으로 이어진다.
• 웃도도골 : 19번 국도에서 지마재쪽 약 800m 지점, 즉 지마재에서 아래쪽으로 100m 쯤 내려와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이다. 골짜기의 입구는 좁아 보이나 들어서면 넓어진다. 골짜기의 끝은 635고지 매봉으로 이어진다.
• 아랫솔나무골 : 19번 국도에서 지마재 쪽 약 400m 지점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이다. 아랫도도골 맞은편인데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로서 전쟁 후에 묻히지 못한 유골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 가운데솔나무골 : 19번 국도에서 지마재쪽 약 700m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진 골짜기이다. 골짜기에 들어서면 다시 작은 두 개의 골짜기로 나뉜다.
• 웃솔나무골 : 가운데도도골 맞은편 골짜기이다. 지마재를 넘는 길이 2차선으로 포장되기 전에 지마재가 있던 골짜기이다. 다랑이 논이 약간 있으나 묵어 있다. 골짜기 초입에 700평가량의 방죽이 있으나 을유년 수해로 둑이 붕괴되어 있다. 복구의 필요가 없어 그대로 묵었다.
• 솔개재 : 어전리 어전마을과 원촌리 외림마을의 경계가 되는 해발 530m의 고개이다. 작은 삿갓봉에서 흘러내린 줄기가 천천면 쪽으로 흐르며 생긴 고개인데 지형이 마치 솔개가 날개를 편친 모습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연치(鳶峙)라고도 하는데 근래에 솔고개(松峙)로 잘못 부르고 있다. 원촌리와 어전리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이다.
• 큰골 : 마을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북동쪽으로 약 1.2㎞ 지점, 솔개재를 넘기 직전 왼쪽 골짜기이다. 초입은 좁으나 들어서면 꽤 넓은 골짜기이다.
• 좁은골 : 큰골 아래 두 개의 작은 골짜기를 아우르는 말이다. 입구에 1,000여평의 전답이 있다.
• 학교림 : 마을에서 북동쪽 약 700m 지점 19번 국도변 왼쪽에 있는 산이다. 좁은골과 가게골 사이에 있는데 계북초등학교 학교림이다. 리기다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 가게골 : 마을 북동쪽 600m 지점 학교림 아래에 있는 펑퍼짐하고 너른 골짜기를 이르는 말이다. 약 4,000여 평의 밭이 있다.
• 부산밭골 : 가게골과 신사장터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 큰재 : 어전마을에서 큰재안을 거쳐 내림과 백암으로 넘어가던 고개이다. 큰재안아랫골짜기 오른쪽 능선이다.
• 큰재안 : 마을 북쪽 약 900m 지점 중학교 뒤 골짜기 전체를 말한다. 내림과 백암으로 넘어가던 큰재가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큰재안은 다시 큰재안아랫골짝, 큰재안가운데 골짝, 큰재안웃골짝으로 나뉜다.
• 큰재안아랫골짝 : 마을에서 보아 큰재안 가운데 산줄기를 중심으로 볼 때 왼쪽큰 골짜기를 이르는 말이다.
• 큰재안가운데골짝 : 마을에서 보아 큰재안오른쪽 아래 골짜기를 이르는 말이다.
• 큰재안웃골짝 : 마을에서 보아 큰재안 오른쪽 위 골짜기를 이르는 말이다.
• 제각골 : 마을 회관에서 북쪽 약 500m 지점에서 골짜기 초입이 시작되는데 전에 제각이 있었던 골짜기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19번 국도에서 보면 중학교 아래 골짜기이다.
• 붓송골 : 붓송골 정상의 산모양이 붓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농협 맞은 편 골짜기인데 작은 개울이 흐른다. 매봉 정상으로 이어진다.
• 매봉(635고지) : 붓송골 정상을 말한다. 봉화터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635(해발635m)고지는 주변의 주봉이었고 동서남북 능선을 따라 방어선이 있었다. 지금도 숲을 헤치고 보면 흔적을 찾을 수가 있고, 635고지에서 소재지쪽으로 내려오는 산줄기 하단부에(현 농협 건너편) 당시의 지서가 있었는데 지서에서 635고지로 이어지는 참호가 있었고 그것 또한 지금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곳에서 박영석 대장(현 계북면노인회장)을 비롯하여 200여 명의 군번 없는 향토방위대 용사들이 계북을 지켰는데 지금도 감호소로 추정되는 지하시설물의 흔적이 남아있다.
• 장승백이 : 마을 북쪽 약400m 지점. 면사무소 뒤 골짜기이다. 약 4,000여평의 밭이 있다. 전에 장승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 독뫼산 : 마을 동쪽 초등학교 옆 소나무 동산이다. 30여 그루의 노송 숲으로 덮여 있어 옆 초등학교 학생들의 좋은 놀이 공간이다. 잉어산과 더불어 마을의 위, 아래를 막아주는 산이다.
• 가장골 : 마을 남동쪽 400m 지점. 고속도로 굴다리 지나 문성마을로 가는 길 따라 오르다가 문성마을 들어서기 전 오른쪽 작은 골짜기이다.
3) 하천과 들
• 하천
문성에서 내려온 물이 마을과 19번 국도 사이를 지나며 마을의 생활용수를 공급하는데 마을 이름을 붙여 어전천이라 한다. 어전천은 마을을 벗어나 잉어산을 감돌아 마리들을 적시고 매계마을 앞에서 농소천과 합수하여 월현으로 흐른다. 월현천은 천천면 오봉리에서 장계천과 합수하여 구량천을 지나 용담에 이른다.
• 마루들 : 면사무소에서 서쪽 500m 지점 어전에서 남쪽으로 연동 가는 길 아래 하천과 고속도로 사이에 있는 들이다. 약 10,000여 평의 논이 있다.
• 뒷들 : 마을 뒤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남쪽 고속도로와 마을 사이에 있다.
• 갈벌 : 마을 남동쪽 300m 지점. 고속도로 너머에 있는 너른 들이다. 예전에 군사 훈련장으로 쓰려고 했을 만큼 넓다. 문성마을과 어전마을의 경작 비율은 각각 50%가량 된다.
• 가는장골 : 면사무소에서 남서쪽 연동 가는 길 약 800m 지점 고속도로 굴다리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들판이다. 약 12,000여 평의 들판이 있다.
• 큰장골 : 고속도로 굴다리 건너자마자 왼쪽은 가는장골이고 큰장골은 오른쪽으로 100여m 가다가 남동쪽으로 넓게 펼쳐지는 들판을 큰장골이라 한다. 약 12,00여 평의 논과 작은 축산단지가 있다.
• 독점들 : 고속도로 굴다리 지나 왼쪽의 가는장골을 지나 언덕을 올라 300여 m를 가면 어전마을과 연동마을의 경계가 되는 언덕을 만나는데 독점들은 이 언덕과 가는장골 사이 들판을 이르는 말이다. 20,000여 평의 밭이 있다.
4) 민속과 종교, 전설
■ 민속
• 달집놀이
어전마을의 달집태우기 풍습도 인근마을과 비슷하다. 정월보름날 태우는데 열나흗날 달집을 만든다. 마을사람 모두가 나와 청솔가지를 해 나르는데 소나무가 있는 학교림이나 각게골 혹은 개인 산에 가서 옆가지를 쳐오거나, 트럭을 가지고 산판을 한 곳이나 간벌을 한 산에 가서 싣고 오기도 한다. 오전에 해 나르고 오후에는 초등학교 교문 옆에 있는 논에 높이 4m 가량의 달집을 만든다. 이튿날 보름이 되면 달집 앞에 돼지머리와 삼실과 술 등을 차린 고사상에 촛불을 밝히고 달이 뜨기를 기다려 점화한다. 마을 노인회장이 먼저 술을 올리고 마을이 잘 되게 해 달라는 내용으로 축원하고 절한다. 이어서 마을 이장이 술을 올리고 절을 하고나면 소원을 빌거나 축원할 사람 아무나 약간의 돈을 올리고 두 번 절한다.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달집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면 소원을 빌기도 하고 헌옷을 태워 액을 물리기도 한다. 불이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하면 어전 풍물패 ‘얼쑤 우리가락’ 치배들이 치는 풍물가락에 맞춰 함께 달집주위를 돌며 논다. 이날의 경비는 고사 지낼 때 모아지는 돈 약 90여만 원 중 당일 경비로 40여만 원이 쓰이고 나머지는 동재(洞財)로 저축한다.
• 귀일제
자손 없이 죽은 최씨(이름모름)를 위해 노인 회장이 주관하여 음력9월9일 아침에 마을 회관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이 마을에 살던 최씨라는 사람이 자신의 전답 400평을 마을에 내 놓으며 자신이 죽은 후 제사밥이라도 먹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유언을 하고 죽었다. 최씨의 묘는 공동산에 있고 전답은 솔개고개와 갈벌에 있는데 이 땅의 경작자가 제수를 준비하여 마을 회관에 날라 오면 마을 노인회장과 노인회원들이 모두 모여 제사를 지낸다. 제수는 일반가정의 기제사처럼 준비하고 절차도 같다. 제사가 끝나고 나며 노인회원들 모두 음식을 함께 나눠 먹고 쉰다.
• 얼쑤가락과 어전 풍물
‘얼쑤가락’은 어전마을의 풍물패 이름인데 2002년에 20명으로 창단하였다. 계북풍물의 맥을 잇는다는 사명감으로 전라좌도 가락을 배워 농한기에는 주 2회씩, 농번기에는 월1회씩 주민자치센터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며 계북면의 대표적인 풍물단이 되었다. 상쇠는 김정식(남, 61세)씨가 맡고 있다. 어전마을의 대표적인 상쇠는 80년대 초반까지 성완수(작고)씨가 유명했다. 그러나 맥을 이어주지 못하고 작고하였으나 근래에 얼쑤가락이 계북 풍물의 불씨를 피우고 있다.
• 고사리인형극단 : 2005년 7월에 극단 누렁소의 서해자 단장과 남편 우경춘씨가 계북초등학교 아이들 10명을 데리고 만든 어린이인형극단이다. 마을순회공연과 자선공연 등 매년 8회 정도의 공연과 1-2회의 방송출연을 하고 있다.
■ 종교
• 기독교 : 1955년 설립했을 당시는 마을 가운데담(5반, 현재 정영대씨 집)에 있다가 1970년 초반에 현재 주유소자리로 옮겼다가 다시 계북면 어전리 589번지 면사무소 뒤 언덕위로 옮겼다. 지금의 교회는 대지 513평, 예배당 53평, 사택 17평에 신도수는 30여명 쯤 된다. 이 중 어전마을 신도수는 10여명이다.
• 불교 : 4월 초파일 연등행사와 음력 정초 시주불공을 드리는 사람이 10여명 되는데 주로 장계면 삼봉리 탑동 ‘세심사’나 장계면 금덕리 ‘성관사’에 간다.
■ 전설
• 효자 김선후(金善厚)
계북면에서 장계방향으로 19번 국도를 따라 700m 쯤 내려가다가 남쪽으로 한천 건너를 보면 산기슭에 잉어 모양을 한 독뫼(獨山)가 있고 양쪽 기슭으로 내가 흘러 마치 잉어가 마을로 헤엄쳐 오르는 형국을 하고 있다하여 마을에서는 잉어산이라고도 한다. 잉어산 건너 19번 국도 서쪽 도로변 산기슭을 ‘효자문거리’라고 하고 효자문거리에서 시작하는 골짜기를 효자문골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조선조 숙종때 김선후란 사람이 느랏(於田) 마을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했다. 그런데 유난히 추운 겨울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병이 나서 몸져눕게 되엇다. 효성이 지극한 선후는 좋다는 약은 다 구해다 병 구환을 했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던 과객이 선후 소년의 애타는 것을 보고 ‘너의 어머니 병환은 산 잉어를 잡아서 달여 드리면 낫는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그러나 엄동설한에 내(川)는 꽁꽁 얼어붙어 산 잉어를 구할 길이 막막했다. 그러나 효성 지극한 선후 소년은 그대로 있지 않았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잉어 모양을 한 독산 옆으로 흐르는 냇가에 가서 잉어를 얻게 해 달라고 10여일을 신명께 빌었다. 선후의 손발이 얼고 기진맥진한 어느 날 소년의 효심에 어신(魚神)이 감동했음인지 얼어붙은 얼음장을 메로 내리치자 쨍하고 얼음이 갈라지면서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얼음위로 뛰어올랐다. 이 기쁨을 어디다 비기랴! 소년은 얼음 속에서 얻은 잉어를 어머니께 달여 드렸더니 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후에 나라에서는 잉어산 맞은편 구치봉 산록에 효자문을 짓게 하고 김선후의 출천대효(出天大孝)를 기려서 세인의 사표가 되게 했으나 30여 년 전 가꾸는 이 없어 효자문은 없어지고 그 곳을 지금도 사람들은 효자문거리라고 한다.
5) 기타
• 효자문거리 : 면사무소 앞에서 북서쪽으로 약 700m 지점 작은 매골(효자문골)초입. 19번 국도변에 있다. 전에 효자 김선후(金善厚)를 기리는 비각이 있었다.
• 샘터 : 어전 3교 건너서 마을 쪽으로 진입하는 길 따라 약 100여 m 지점 골목으로 이어지는 삼거리에 있었다. 아랫담 사람들의 식수를 공급했다. 웃담은 어전 1교 아래 하천변에 있던 샘을 이용했다.
• 신사장터 : 마을 북동쪽 약 600m 지점 부산밭골과 중학교 사이 언덕을 이르는 말이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神社)가 있던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 디딜방아 : 큰장골, 가는장골, 독점들, 갈벌, 뒷들 등에서 생산된 벼를 찧던 방아였다. 아랫담 샘터에서 60여 m 올라가 현재 한석훈씨 집 뒤에 있었고, 한규철씨 집앞에 있었고, 성기수씨 집 옆에 있는 디딜방아는 지금도 있다.
• 물레방아 : 지금의 농협창고와 어전1교 사이 초등학교 정문에서 서쪽 70m 지점 냇가에 있었다.
• 매봉봉수
장수군 계북면 면사무소 북쪽에 우뚝 솟아 있는 매봉(635m)에 있다. 붓송골과 큰재안아랫골짜기의 정상이다. 솔개재에서 능선따라 1km지점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옛날에 봉화를 피웠었다고 전해진다.’ 라고 제보해 주었다. 그러나 현재 이곳은 산불감시 초소가 조성되어 있어 봉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유구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다만 산 정상부가 매운 편평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북쪽의 장수 깃대봉 봉수 등이 한눈에 잘 조망되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봉수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명덕봉수대, 혹은 법화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가지고 북상시킨 봉수대로 생각된다.
• 새청(세천 洗川) : 어전마을에서 문성으로 오르는 길, 고속도로 교량 아래 문성천에 보(洑)가 있었다. 반석으로 욕조처럼 만들어져 천연목욕탕으로 즐겨 이용했는데 이곳이 초등학교 바로 위에 있어 당시 초등학교 남학생들은 아래에서 여학생들은 바로 새청에서 선생님 지도 아래 때를 밀고 검사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 계북초등학교 느티나무
어전마을에서 솔개재로 향하다보면 오른편에 계북초등학교가 있다. 교문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에 느티나무가 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한눈에 볼 수 있을 만큼 크고 수려하다. 수령은 약 270여년, 수고는 약 20m로 장수군 보호수 2005. 19-9-35호로 지정되었다. 이 느티나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없으나 오랫동안 마을사람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 한병호 선생 시혜비
계북초등학교 설립에 부지를 희사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공이 컸던 한병호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폭31cm, 높이78cm, 두께9cm의 화강암 비석이다. 학교 남서쪽 느티나무 아래에 있다.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士人韓秉鎬施惠碑 / 損金恤窮 減稅施恩 仁聲四流 寬簿敦 / 한병호 선생님은 우리 학교 설립에 공이 컸으므로 선생님의 은혜를 못잊어 이 비를 세웁니다. / 一九六八년 十二월 일 중건 / 계북국민학교장 김종한 / 기성회장 김두봉>
• 개교 60주년기념비
계북초등학교 개교 60주년을 기념해서 학교 서편 울타리 옆에 폭78cm, 높이107cm, 두께22cmdml 오석으로 된 기념 비석이다. 돌 후면에는 후원해준 동문들의 명단이 있고 전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서기 1928년 6월 10일 덕유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계북국민학교가 이곳에 세워진지 60돐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 모교는 오랜 세월의 아픔과 기쁨을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 고장의 교육의 요람으로 그 명예와 긍지를 굳건히 지켜 왔으며 지금 사회의 각 분야에서 훌륭한 발자취를 남기면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 4000여 동창생 모두의 마음속에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 깃들어 있는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이다. 앞으로도 우리 모교는 꺼지지 않는 교육의 횃불을 높이 들어 우리 고장을 더욱 밝게 비쳐 줄 것임을 굳게 믿으며 모교의 60돐을 우리 함께 마음으로 기리면서 여기에 글을 남긴다. / 서기 1988년 6월 10일 / 계북초등학교 총동창회장 김두봉 / 계북초등학교 교장 김종한 >
• 계북면사무소
조선시대에는 임북면에 속하다가 1917년 면제(面制) 공포로 진안군 동향면 일부를 편입하여 계북면으로 개칭했다. 1987년 12월 5일에 현 청사를 준공한 계북면사무소는 현재 면장 아래 3개 계(系)에 0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계북면 역대 면장을 보면 1대 이병돈, 2대 한병호, 3대 한병태, 4대 정완조, 5대 한병태, 7대 정인관, 8대 정완조, 9대 이용조, 10대 김우성, 11대 한갑수, 12대 정태모, 13대 정인준, 14대 이인준, 15대 박영희, 16대 김진홍, 17대 박영희, 18대 전형수, 19대 윤중섭, 20대 한규용, 21대 마옥동, 22대 김흥섭, 23대 조종래, 24대 오덕모, 25대 김종렬, 26대 강건순, 27대 황원하, 28대 송덕선, 29대 한규하 면장에 이어 지금은 30대 신운철 면장이 재직중이다.
• 계북초등학교
1928년 4월 2일 계북공립보통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그해 6월 10일 계북공립보통학교 개교를 하여 1942년 4월 1일 계북공립학교로 이름을 바꿨다가 1950년 4월 1일 계북국민학교로 다시 변경하였다. 1954년 2월 1일 원촌분교장을 원촌국민학교로 승격 분리하고 1965년 3월 9일에는 백암분교장을 백암국민학교로 승격 분리하였다. 1965년 11월 10일 계북초등학교 월전분교장을 설립인가 했으며, 1981년 3월 10일 계북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을 개원했다. 1991년 2월 28일 월전분교장을 통・폐합하였다. 2007년 2월 16일 제75회 졸업생을 포함하여 총 4,060명을 배출하였으며, 1996년 3월 1일 백암국민학교를 계북국민학교백암분교장으로 개편했다. 1996년 3월 1일 계북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99년 9월 1일 백암분교장을 통폐합하였다. 2007년 3월 2일 현재 7학급 50명이 재학중이다. 역대교장은 1대 추길보기, 2대 장곡천헌, 3대 적목사랑, 4대 김각수, 5대 송영국, 6대 김상근, 7대 정철모, 8대 김기옥, 9대 정철모, 10대 김종한, 11대 박진수, 12대 김종한, 13대 서문종, 14대 김종한, 15대 최민숙, 16대 전우식, 17대 최종규, 18대 송호남, 19대 허인규, 20대 장일정 교장으로 이어지다가 지금은 21대 김흥중 교장이 부임하여 재임 중이다.
• 계북지서 : 한국전쟁 직후까지 635고지 계북쪽 하단부, 지금의 농협건너편에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지서에서 635고지까지 참호를 설치하여 635고지를 중심으로 향토방위대와 함께 지역을 지켰는데 1952년 12월16일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밤에 지역 빨치산들에 의해 지서가 함락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전쟁 후 1954년에 면사무소 아래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 계북우체국
1963년도에 강영문 초대국장이 사비로 설립하였다. 초창기에는 우편, 전화 업무를 주로 하다가 근래에는 금융, 보험, 택배사업까지 추가하여 종합금융서비스 기관으로 성장했다. 국장을 포함하여 4명이 근무하고 있다.
• 장계농업협동조합계북지소
지금의 장계농협은 장계를 비롯하여 계북, 계남, 천천의 4개 면이 합병을 한 대규모 농협이지만 예전에는 4개 면에 각각의 농협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였다. 우리 면에 있는 장계농협계북지소는 1969년 11월 17일 최초로 계북리조합으로 설립인가 되어 김두봉씨가 초대 조합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20년간 계북농업협동조합으로 이어오다가 1989년 11월 3일 장계농협에 합병되었다.
• 계북중학교
계북면 어전리 792번지에 있다. 1974년 설립인가를 받아 1977년 5월 20일에 개교하였다. 2007년 2월 9일 30회 11명의 졸업생을 포함하여 모두 2,71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역대교장을 보면 1대 박종민, 2대 김철주, 3대 홍완표, 4대 지종환, 5대, 김용문, 6대 이희정, 7대 강대식, 8대 이현진, 9대 최영희, 10대 김종철, 11대 김홍광, 12대 이복룡 교장에 이어 지금은 13대 황덕구 교장이 부임하여 재직 중이다.
• 계북보건지소
60년대까지 현재의 우체국 뒤편에 민간 병원이 있었다. 보건지소는 지금 중대본부로 쓰고 있는 어전회관 아래건물에 잇었는데 2003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1973년 10월1일에 개소하여 내과 진료를 시작하였는데 1988년부터 1995년까지 7년 동안은 내과에 치과를 병행 개설하여 진료하였다. 2003년 4월 17일에 농촌특별세 정부지원금으로 4억3천만 원을 들여 어전리 865-14번지에 연건평 103평의 새 건물을 준공하여 이전하고 상주 의사 2명을 포함하여 4명의 직원이 내과 한방과를 진료하고 있다.
• 어전회관 : 어전 2교건너 30여m 지점에 있는 어전마을 회관 겸 노인정이다. 1998년에 방 세 칸, 주방 한 칸으로 지은 단층스라브 건물이다.
• 유전정(柳田亭) : 1998년에 어전마을 회관과 함께 지었다. 어전 2교 아래에 있다. 6각 누정 형태의 모정이다.
제보자
한규용(남, 82세) 전 계북면장 / 마을의 형성유래, 금석문화
박윤주(남, 82세) 전 노인회장 / 산과 지명
한규채(남, 81세) 어전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거주 / 산과 골짜기, 들판
김봉석(남, 78세) 전 어전마을 농지위원 / 민속, 산과 골짜기, 기타
박영석(남, 79세) 현 노인회장 / 지명, 들판, 민속
한규철(남, 78세) 어전에서 태어나 현재가지 거주 / 산과 골짜기, 주거지, 종교
박상정(남, 56세) 현 이장 / 마을의 역사, 산과 골짜기, 지명, 들판, 주거지, 민속
한규하(남, 53세) 전 계북면장, 현 장수군청 문화관광과장 / 마을의 역사, 형성유래
손봉렬(남, 53세) 현 계북면사무소 총무담당 / 1970년대 마을 사진
첫댓글 저의야 자리에 앉이 쉽게 어전 마을의 과거를 읽는것도 한참인데 ........어렵게 자료를 모으시어 알려주시는 "바우"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소중한 자료로 보존하겟습니다
역시 우리 초등학교가 자랑거리입니다 이렇게 자세한 학교의 무궁한 역사를 접하니 다시금 숙연해 지네요
635고지: 남북 전쟁당시 635(해발635m)고지는 주변의 주봉이이었고 동서남북 능선을 따라 방호 진지가 있었다. 지금도 숲을 헤치고 보면 흔적을 찾아 볼수가 있고 농협 건너편 산 마루에는 계북지서가 있었던 자리로 지금도 감호소로 추중되는 지하 시설물이 남아있다.
바로 계북 지서와 635고지로 이어지는 방공로(??)가 있었고 그것또한 흔적을 찾아볼 수있다. 이곳에서 군번없는 참전 용사들이 계북을 지켰고~~~이때 대장 박영석(현 노인회장)씨가 지금도 대장님으로 호칭되고 있다.
현재의 우체국 뒤편 김천수(현재는 없어졌지만)씨 집 부근에 민간 병원이 60년대까지 있었다. 현재의 보건지소는 현재 중대본부 자리~~~
세청: 문성으로 가는길에 지금의 고속도로 교량 아래 정도에 보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반석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목욕탕일수 밖에 없었다. 초등시절.... 남학생은 아래에서 여학생은 바로 새청에서 선생님 지도 아래 때를 밀고 검사를 받았던 곳...
早愰님의 좋은 보충 자료 다시 원본에 추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전이 제보력이 약해 좀 아쉬웠습니다.
마리들:마루들(??)
早愰님 초등시절 세청에서 이뤄졌던 때검사..... 엄청 궁금하네.....ㅎㅎㅎ
우리는 무루지라~~~ 초등 6학년 까지 그랬는데... 지금 들으면.. 나이든 친구들은 ㅎㅎㅎㅎ..거시기 했다만... 더구나 여자들은 생선님만 ...
북쪽 약 800m를... 서북쪽으로, 이어산 서쪽을.. 남쪽으로, 큰재안 북쪽을 서북쪽으로.. 교회는 1950년대 어전리 5반중앙(현재 정영대 집)에 위치하여 청소년들의 사회교육의 요람으로 있었음 1973년인가?? 현재 주유소 자리에 교회가 세워졌다가 19 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음
교회부분은 추가했는데 첫줄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디 지명을 말씀하시는건지 몰라서 일단 인쇄소 넘겼습니다. 알려주시면 나중에 교정볼 때 참고하겠습니다.
디딜방아.. 문금애를 한규철씨 집앞 으로, 계북초등학교 느티나무 장수군 보호수로 2005.1 9-9-35호로 지정되었고, 270년의 세월을 지킨 나무..
정말 훌륭한 분이세요. 누군가 정리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것, 힘들잖아요? 내가 남자라면 고향에서 맛있는 식사라도 대접해드리겠건만.. 존경하는 마음 남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