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에 대한 자녀의 책임 (엡 6:1-3 )
이동원목사
본문 엡 6:1-3 성경본문보기
제목 어버이에 대한 자녀의 책임
미국에서 12살도 채 안된 소년이 아버지에게 가벼운 야단을 맞은 후, 총으로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정도가 아버지를 살해할 이유까지 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경찰이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였느냐?"고 물었을 때 이 소년의 대답은 "아빠가 보기 싫어요"였습니다. 아마 자기가 하는 일마다 잔소리하고 간섭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의 자유와 인생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아버지의 사냥총으로 잠든 아버지에게 총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던 것입니다. 물론 이 소년은 수감되었지만 미성년이어서 소년 감호소 같은 곳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교도소의 숙직간수는 소등한 이후의 어두워져 가는 저녁 복도를 지나다가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가까이 다가보니 이 소년이 감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가느다란 소리로 뜻밖에 이런 말을 반복하고 있더랍니다.--"아빠, 아빠가 보고 싶어요. 아빠, 미안해요. 그런데, 정말 보고 싶어요"
영어에 'love-hate relationship'이란 말이 있습니다. 애증의 관계라고 할까요. 사랑하면서 때로는 그 사랑의 요구가 자기식으로 충족되지 않았을 때 사랑이 오히려 미움으로 변해버리는 경우들이 오늘의 가정에서 그리 낯선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런 시대에서 또다시 부모를 향한 자녀들의 책임을 말한다는 것은 어쩐지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난 가부장적 시대의 도덕강론처럼 들려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믿는 성경이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변함없이 가르치는 이 시대 어버이들을 향한 자녀의 책임, 무엇입니까?
바울이 살고 있었던 시대도 오늘 이 시대 못지 않은 급격한 윤리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로마제국이 전 세계를 정복하며 가져온 '팍스-로마나'의 식민지 문화는 기존 전통윤리에서 사람들을 해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부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부모와 자녀사이의 전통윤리에도 상당한 의식과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돈을 찾아, 자유를 찾아 부모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떠나가는 일이 일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와 같았던 에베소에는 아테미의 신전을 중심으로 사회가 음행을 합법화해주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거대한 로마식 체육관은 젊은이들의 힘과 기예를 한껏 상품화하고 있었고, 노인들은 사회의 짐스러운 구성원으로 가정에서 사회에서 주변인간으로 소외되고 있었습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된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은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냐?"고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주후 60년대 초 그가 삼년여를 정성을 쏟아 양육하고 세웠던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이런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전달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사도는 어버이에 대한 그리스도인 자녀들의 결코 잊혀져서는 안될 두 가지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첫째는, 순종의 책임입니다.
6:1에"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부모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을 가르치는 말씀은 아닙니다.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부모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될 때에는 더 높은 권위이신 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예를 들어, 너 예수 믿지 말라 하면--)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심지어 잔소리처럼 들려지는 부모의 교훈 그 밑바탕에도 실상 자녀를 보호하려는 하나님이 주시는 본능 때문인 것을 안다면 부모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정당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1절 말미에 우리가 순종해야 할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이것이 옳으니라/자연의 명령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연법-Natural Law라고 하지요. 자연법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새긴 양심의 법입니다. 어떤 문화권에도 부모 순종을 가르치지 않는 문화는 없습니다. 부모에 대한 도리는 양심의 명령인 것입니다. 부모의 존재는 어쩌면 하나님의 마음과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모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 있어야 하고, 부모의 고통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느낄수 있어야 하고, 부모의 눈물에서 하나님의 눈물을 볼수 있어야하고, 부모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수 있어야 합니다.
국내 교도소에 수감된 어떤 분의 수형생활에 대한 참회의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목이 '어머니의 눈물'입니다.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작년 겨울 첫 면회를 오신 어머니께서는 창너머로 고개 숙인채 땅만 내려다 보고 있는 이 불효자식에게 한마디의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후 어머니께서는 '춥지?' 이 한마디를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 보셨습니다. 이 한마디를 하시고 억지로 눈물을 참으시느라고 어머니의 눈가는 붉어지더니 한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것은 그냥 눈물이 아닌 피눈물 이셨습니다. '춥지' 겨우 그 한마디하시고 접견시간을 다 보내버리신 어머니는 성경책 한 권을 남기시고 떠나가셨습니다." 그후 다시 면회가 없으신 어머니에 대하여 불평하고 있을무렵 형이 면회를 와서 형에게 어머니에 대한 불평을 하자, 형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야, 이놈아 아직도 정신 못차리니, 너 어머니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하고 말하더랍니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그가 다그쳐 묻자 그의 형은 어머니가 며칠 전화를 안받으셔서 찾아가 보니 엄동설한 추운계절에 자식의 죄가 내 죄 때문이라고 방에 불을 끊으시고 나도 감옥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며 자식의 죄와 어미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다가 몸져누우셨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고백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금수만도 못한 내 두눈에 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어머니의 눈물이 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눈물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를 거스림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일입니다. 부모를 순종함은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존재의 방식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옳은일'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 순종의 시작은 잔소리같은 부모의 말에 진지한 경청을 하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의 뜻이 본래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에서 사랑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의 소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둘째는, 공경의 책임입니다.
2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말합니다. 어버이 주일에 주일학교 학생에게 엡6:1-3 말씀 성경봉독을 하라고 하니까, 이 대목을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격하라"고 읽었더랍니다. 공격이 아니라 공경입니다. 순종이 의지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단어라면, 공경은 정서적 측면이 더욱 강조된 단어라고 할수 있습니다. 여기 '공경'이라는 말은 희랍어에 'timao'라는 단어가 씌어졌는데, '굉장한 가치를 지니는 대상에 대한 부드럽고도 친밀한 반응'을 뜻하는 말입니다.(영어성경에는 honor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순종이 외적행동을 강조하는 말이라면, 공경은 내적태도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행동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 부모님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본래 두 개의 돌판에 나뉘어 쓰여졌습니다. 첫 돌판에는 1-4계명이, 둘째 돌판에는 5-10계명이 기록 되었습니다. 둘째 돌판의 첫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공경은 신의 명령이요, 신의 법입니다. Divine Law라고 합니다. 신의 명령은 자연의 명령 혹은 양심의 명령을 넘어섭니다. 따라서 우리는 순종이상으로 공경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또한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따르는 이들에게 두가지 약속을 합니다 1)네가 잘되고, 2)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위의 두가지 약속을 일반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면 자동적으로 출세하고 장수가 보장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와의 건강한 관계를 맺고있는 사람이 사회생활에서도 성공하고, 심리적으로도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마음이 안정되어 있고, 내적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또한 장수할수 있다는 것은 아주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약속이라고 할만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비슷한 삶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면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질 높은 성공적 삶과 더 오래 장수의 가능성이 있는 건강한 삶을 보장하는 일반적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해전 미국 플로리다의 어느 미국 침례교회 선교대회에 강사로 다녀온 일이 있었습니다. 오전 집회후 점심에 해변가에 위치한 아주 근사한 식당에 초청을 받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그 식당주인에 대하여 소개하면서 자기교회 집사인데 신앙생활을 모범적으로 하는 분이라고 칭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들 식당에 들어올 때 식당 입구 현관에 걸린 여인의 사진을 보았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식당주인의 어머니라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후 타주에서 플로리다로 이사온후 해변가 도시에서 작은 식당을 경영했는데 정성껏 손님을 섬기다 보니까 식당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랜 노력과 계획 끝에 저축한 돈으로 드디어 아름답고 큰 식당을 바닷가에 열 준비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픈 직전에 어머니가 병으로 눕게 되어 그만 오픈되는 것을 보지못하고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는데 자기를 돕고 있었던 아들에게 두가지 유언을 남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1)식당을 잘 경영해 달라고 하면서 그러나 사업보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더 귀히 여기는 믿음의 삶을 살아달라. 2)이번에 오픈되는 식당에서는 술은 팔지 않았으면 좋겠다--아들은 어머니의 유언대로 순종했는데 처음에 술을 팔지 않는다고 해서 말썽이 있었는데--주류회사의 폭력배같은 사람들이 위협차 찾아왔을 때 아들은 식당입구에 걸린 어머니의 사진을 가르치며 '그것이 어머니의 유언이라'고 했더니 시비안하고 가더랍니다.
식당에서 나가다가 저는 그어머니의 사진을 보았는데 그 아래 무엇이라고 글이 써있었습니다. 다섯 줄의 글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미소는 저의 추억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저의 용기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저의 등불입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저의 능력입니다. 어머니의 주님은 저의 주님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모든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부모를 순종하라고 그리고 공경하라고 말입니다. 순종이 부모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면 공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모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입니다. 박은수라는 분이 쓴 어머니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좋은 옷이 필요치 않으신줄 알았습니다./예쁜 그릇도 갖고싶지 않으시고/맛있는 음식에도 마음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빛깔 고운 립스틱이나/꽃무늬 화려한 양산품/눈 여겨 보시지도 않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집와서 마흔 고개에 다다르며/이제사 깨달아 집니다./어머니도 여자이셨음을/어머니의 가슴에도 무지개가 있고 파랑새가 있고/사파이어 같은 꿈이 있음을/이제사 알아 봅니다.
어머니/언제나 귀한 이름입니다./언제나 우리맘속에 별처럼 살아있는/아름다운 이름입니다./이날에 어머니를 그리워 합니다.
첫댓글 좋은 글 잘 보고 갑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