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3:9절)
히말라야 등반을 하다가 조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구조대들이 무전기로 ‘응답하라 오버’ 하고 애타게 부를 것입니다. 만약 응답이 오면 어딘가에 살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절망입니다. 여호와 곧 구원의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와의 말을 듣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다음 수치를 느껴 무화과나무로 몸을 가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두려워 숨어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응답하라 오버! 그 대답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입니다.
아담은 벗었기 때문에 두려운 줄로만 알았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껍데기가 시원찮아서 부끄럽고 두려운 줄 압니다. 그래서 외식을 연습합니다. 외모를 숭상합니다. 미학입니다. 그 정도에 따라 우쭐대기도 하고 비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 소속과 장소를 물으십니다. 지금 아담은 선악의 독성에 의한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안고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 사이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그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가릴 수 없음을 스스로 시인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숨지 않고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불쑥 나타났을 겁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외양 때문이 아닙니다.
생명나무의 과일을 먹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그 분께 얼굴을 들이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악과 곧 율법 아래에서는 모세의 때처럼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엄두를 내질 못했습니다. 모세더러 당신이 우리 대신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에게는 선악 간에 할 일만 가르쳐 달라는 종이 됩니다. 지금도 종의 영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들이나 보고 우리를 축복해 주고, 선한 일을 시켜 도덕적 향락을 누리도록 해 주세요 합니다. 여기에 말려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얼씨구절씨구 기독교가 됩니다. 아무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각성할 생각이 없습니다. 음행의 포도주에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옮겨진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 하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어 그 의와 거룩으로 주의 영광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는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예, 제가 주 안에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비옵니다. 응답하라 오버! 예 제가 주님 앞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얼굴을 거울을 보듯 정면으로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십자가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영광으로 인해 아버지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아! 이 놀라운 복음, 놀라운 은혜의 말씀, 천국음악 같아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