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선병국가옥

그림) 선병국가옥 평면
보은 선병국가옥은 규모 면에서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집이다. 지금은 한국전쟁과 수해를 입어 규모가 많이 축소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그 당당함을 느낄 수 있다. 선씨가문은 원래 전라도 고흥군 금산면이 고향이었다. 선씨가문은 전라도 토박이로서 지금도 보성에는 선씨가문의 출신의 충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오충사(五忠祠)가 있다고 한다. 고흥에서 가문을 거부로 만드신 분은 현재 종손의 증조부인 선영홍(宣永鴻)공이다. 종부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는 소작료로만 벼 만석을 거두어들일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거부가 집을 지었으니 당당하고 거대한 장원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솟을대문밖에 있는 군부대도 이 집의 소유라고 하고 현재 담으로 둘러진 곳만도 3000여 평이 된다고 하니 예전의 집 규모를 감히 어림잡기도 힘들다.

선병국가옥 안채

사랑채전경
선씨 가문은 단지 돈을 버는 것에 집착한 것만은 아니었다. 증조부나 조부는 교육에 대한 투자는 남달랐다. 종부의 말로는 증조부가 이곳에 자리잡은 후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고 한다. 집 앞에 관선정(觀善亭)이라는 건물을 짓고 뛰어난 인재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한 교육에 대한 열의는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한학자로 유명한 임창순(任昌淳 1914∼1999)이 이곳 출신이다. 선씨 가문에서는 인재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후에 어떠한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인재로서 크기만을 바라면서 공부를 시킨 것이다. 과연 현재의 부자들 중에서 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인재를 육성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하다.
이 집터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하는 명당으로서 이곳으로 이사온 증조부인 영흥공이 터를 잡았다고 한다. 집은 1919년에서 1921년에 걸쳐 지어졌는데 당대 최고의 목수를 초빙하여 지었다고 한다. 종부의 말에 의하면 증조부가 이곳에 이사와서 잠시 기거할 집을 주변에 마련해 놓고 한꺼번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무 중에는 멀리 춘양에서 가져온 것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선씨가문이 지금의 삼성가에 비견될 만큼 대단한 거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선병국가옥의 구조는 매우 특이하다. 사랑채, 안채, 사당채가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되어 있어 담으로 둘러쳐 있고 집 전체를 다시 담으로 둘러놓았다. 아마도 외부로부터 집을 보전하기 위하여 이중으로 담을 두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채와 사랑채가 완벽하게 독립된 구성을 하고 있는 것도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외부를 둘러친 담만 없다면 두 채의 서로 다른 집이라고 착각할 정도이다. 이러한 구성은 안채와 사랑채간의 연결은 철저하게 하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남향하고 있는 사랑채와 서향하고 있는 안채의 평면은 모두 工자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러한 평면형태는 집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형태는 아니다. 일부에서는 工자 형태는 불길하다고 하여 금기시되는 형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맹씨행단이 이러한 형태의 평면을 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형식의 평면이다. 이러한 평면형식은 강한 대칭성을 보여주고 있어 일반 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강한 권위를 보여 준다. 사랑채는 남향을 안채는 서향을 하고 있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사랑채의 남향은 당연한 것이지만 안채의 서향은 여러모로 불편한 향이기 때문에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체적인 배치를 보았을 때 사랑채와의 연계를 생각하여 배치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지지만 이것이 정확한 답은 아닐 것이다.
이 집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집이다. 조선시대의 규범이 조선조 말에 와해되기 시작하여 이 집을 지을 즈음에는 새로운 규범들과 혼재되어 새로운 사회구조를 형성해나가던 시대이다. 건축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특징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던 시기이다. 평면의 구성, 공법, 재료, 규모 등에서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조선시대에 보여주었던 건축규제가 흐트러지고 새롭게 등장하는 공업화된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곳 선병국가옥에서도 여러 곳에서 그러한 모습이 보인다.

안채 대들보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건물규모를 규제하였다. 규제 방법은 칸수의 제한하고 기둥높이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분사회가 와해되면서 이러한 규제가 무의미해졌다. 이제는 경제력만 있으면 크고 좋은 집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선병국가옥도 그러한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기단과 초석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하였고 기둥도 당당하게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도 높게 세워 집의 권위를 한껏 높였다. 이렇게 많은 부분에서 과거의 격식을 과감하게 벗어나고 있지만 그 나름대로 자제를 하려는 노력이었는지 처마만은 홑처마로 처리하였다.
선병국가옥은 이전의 집과 다른 점은 격식보다는 실용적인 부분에 보다 많은 배려를 하였다는 것이다. 안채와 사랑채에서 사용상의 편의를 위해 툇마루를 전후에 다 깔았다. 전면과 측면은 퇴칸으로 툇마루를 처리하였고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뒷부분은 쪽마루 형식으로 마루를 깔았다. 이렇게 마루를 깔아 놓았기 때문에 안채나 사랑채 어느 곳이든 편하게 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집이 실용적으로 꾸며진 모습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안채의 대청이 안채전체의 규모에 비하여 작고, 집의 규모에 비하여 안방의 크기도 그리 크지 않은 반면에 방을 많이 들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방을 많이 만든 것은 집을 다양하게 쓰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이층 다락을 많이 들여 수납공간을 충분하게 만들어 놓았다.

장독대 출입문
이러한 실용성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이 집은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적 가치가 아직은 공고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안채와 사랑채가 별채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안채로 가려면 대문에서 돌아들어 가도록 되어 있고 안채 입구에 별도의 중문을 따로 설치하였다. 중문에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다시 내외담을 돌아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대문에서 안채까지의 여정은 지그재그의 궤적을 그린다. 그만큼 내외의 성격이 더 깊어졌다. 이 집의 구조를 보면 20세기초 지방의 상류층에서는 남녀유별에 대한 의식이 사회의 일반적인 추세와는 달리 오히려 더 깊어졌던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선병국가옥의 여러 곳에서 솜씨가 좋은 목수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안채의 대들보는 자연적으로 휘어진 나무를 자연의 그대로의 모습을 살려 이용하였다. 이렇게 휘어진 나무를 다룰 수 있는 목수는 그렇게 흔치 않다. 그리고 문짝을 보면 어느 한곳 소홀한 곳이 없다. 안채의 곳간이나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 곳간의 광창까지 비례가 잘 맞게 짜여졌다. 곳간의 광창도 팔각형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형식의 창문은 다른 집에서는 안채의 중요한 방에만 설치되는 것이지만 이곳에서는 다락의 창문으로 사용되었다.

다락의 광창
무엇보다도 선병국가옥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집의 규모에 있다. 사랑채나 안채의 규모가 너무 커 집의 구조가 한눈에 읽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채의 마당이 웬만한 집의 대지 전체의 크기이다. 너무 넓어 축구장을 해도 될 것 같다. 안채의 대청에서 마당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진다. 이러한 시원함은 사랑채도 마찬가지이다. 워낙 대지가 넓다보니 집 주변을 돌아보는 것만도 한참 걸린다. 지금은 소나무가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운치가 있었다고 한다. 이 집을 지은 증조부도 소나무에 애착이 많아서 큰 소나무에는 소나무마다 관리인을 두어 관리할 정도였다고 한다.

안채 마당
현재 이 집의 사랑채에서는 전통찻집을 안채에서는 고시원을 운영하고 있다. 고시원은 16년 전 이 근처에서 고시원을 운영하던 분의 권유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전국에 알려진 고시원이 되어 대기하는 사람이 줄을 섰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은 어떻게든 활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집을 전면적으로 개조하지 않으면서도 활용할 수 있는 찻집이나 고시원으로 고택을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안주인의 말로는 고시원을 하기 전에는 저녁때 집에 들어오는 것이 매우 싫었다고 한다. 깊은 밤 불꺼진 집에 들어올 때는 섬뜩하기까지 했단다. 이제는 늘 사람들이 있어 그러한 느낌은 없다고 하였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빛이 난다. 예전에는 하인들이 있어 주인이 집을 비워도 사람사는 느낌이 있었지만 이제 하인들도 없는 집에 단 두 내외가 산다고 한다면 집은 적막하고 쓸쓸하기가 이를 데 없을 것이다. 선병국가옥도 너무 넓어서 관리가 하기 힘든 집이다. 만일 이렇게 라도 활용하지 않았다면 마당에는 잡초가 우거졌을 것이고, 불을 때지 않는 구들은 거북 등처럼 갈라졌을 것이며, 마루와 나무는 갈라지고 터져서 그야말로 흉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종부의 말에 의하면 대청에 아무리 기름칠을 해도 사람이 밟고 지나지 않으면 윤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만큼 사람의 손길이 집을 만드는 것이다
첫댓글 ^^! 잘 보았습니다. 최성호 선생님~! 집은 사람이 살아야 빛이 난다. 공감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옛집 한 번 가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