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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김상만 가옥(중요민속자료 150호)
사람은 자연환경이든 사회환경이든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집을 짓기 때문에 집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집은 그곳에 살 사람의 경제적인 형편과 신분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며 또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 집의 구조가 변화된다. 사회가 불안정하면 집의 구조는 매우 폐쇄적으로 변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김상만 가옥은 시대상황에 따라 집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김상만가옥은 1907년부터 인촌 김성수(1895-1955)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서 초가이다. 원래 초가였는지 또는 억새로 이었던 집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와집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김상만가옥은 1895년 안채와 사랑채 헛간채가 완성되고 1903년 안사랑채와 곳간채가 추가되었다. 문간채는 1984년에 중건되었다.
안채가 지어진 1895년도에 김씨 집안은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었다. 인촌이 태어난 고창의 생가도 기와집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또한 인촌의 부친 대에 이미 수 만석을 하는 거부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재산을 모은 집에서 초가를 지었다는 것은 당대의 가세와 비교하여볼 때 그리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 1895년도 처음 이곳에 집을 지을 때는 아마도 살림집으로 지은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이 시기에 즐포에서 새로운 사업을 하면서 임시거처 겸 사무실의 용도로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게 지어진 집에 김씨 집안이 모두 이사온 것은 1907년이었다. 당시 이곳으로 이사온 이유는 이전에 살던 고창의 집에 자꾸 도깨비불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집을 옮긴 것이 도깨비불 때문이었을까.
당시 조선은 왕권의 붕괴로 이미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던 시기였고 1905년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이후 일제에 반 예속상태에 있었던 때라 치안이 매우 불안하였을 것이다. 급속한 신분질서 와해와 정부에 대한 민심의 이반 그리고 가난으로 인한 화적들이 들끓던 시기이다보니 부자들이 보다 치안이 안정된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당연한 사회적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인촌 가문이 줄포로 이사할 때도 우선 사람만 빠져 나온 후 가산을 후에 옮겼다고 하니 상태가 매우 급박하였던 것 같다.
즐포는 당시 영광의 법성포와 함께 서남해안에서 손꼽히는 항구였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일본인이 일찍부터 거주하였고 일본 헌병대도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즐포의 사회 경제적 가치 때문에 일제는 적극적으로 치안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안정된 치안 때문에 이곳으로 살림을 이전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1895년 이곳에 처음 집을 지을 때도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가세를 고려한 집을 짓기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부자라고 하여도 대놓고 기와집을 지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거나 도적의 표적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이 집은 기와집을 사서 해체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당시 집을 짓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집을 헐고 한꺼번에 부재를 옮겨 짓다보면 남의 눈에 띠기 때문에 사람이 다니지 않는 밤에 인력으로 부재를 하나하나 옮기다 보니 늦어졌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하였을까하는 의문이 가지만 그만큼 당시의 사회상이 집을 짓는 것도 남의 눈을 의식하여야 하는 정도로 불안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상만 가옥은 초가이기는 하지만 집의 부재는 매우 고급스럽다. 안채와 사랑채는 요사이 시쳇말로 무늬만 초가이다. 지붕을 기와로 올리면 품격을 갖춘 기와집이 된다. 김상만가옥의 지붕이 현재는 볏짚으로 이어져있다. 그러나 문화재청의 사진을 보면 예전에는 지붕이 억새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재료는 어떤 분이 일본집같다는 지적에 의하여 고쳐졌다고 한다. 억새로 지은 집이 우리나라에 없는 것이 아닌데 어떠한 근거로 일본집 같다고 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붕의 볏짚은 매년 갈아주어야 하지만 억새는 내구성이 좋아 10년 정도는 갈아주지 않아도 되는 재료이다. 관리인의 말로는 지붕의 볏짚을 매년 갈아주지 않고 삼년 마다 한번갈이 주기 때문에 곳곳에서 비가 샌다고 한다.
김상만가옥의 안채는 배산背山하는 형국을 쫓아 북서향하였다. 안채는 6칸 반의 一자형집으로 남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의 형태이다. 방의 배치는 우측으로부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전후퇴집이다. 전후퇴집은 이러한 형식은 단칸의 방이 일렬로 배열되던 홑집이 조선후기에 들어 사회·경제적으로 발전되면서 다양한 기능을 수용하기 위하여 새롭게 발전된 구조이다. 이러한 집은 외견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들어가 살펴보면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진다. 전후퇴집과 양통집의 측면은 같은 두칸의 규모이지만 방이 단순히 두 줄로 배열되어 있는 양통집과는 달리 전후퇴집은 방의 앞뒤에 반 칸씩 마련되어 있는 전·후퇴를 이용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기능을 지닌 평면을 만들어낸다.
김상만 가옥 역시 전퇴와 후퇴를 이용하여 다양한 평면을 만들어 내면서 또한 다양한 수장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이 집은 다른 집과는 달리 수장공간이 매우 다양하다. 다양한 수장공간은 안채, 사랑채할 것 없이 구석구석 공간이 나올 수 있는 모든 곳은 수장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안에 들어가 보면 아기자기 하다고 할만큼 다양한 수장공간이 보인다. 안사랑채의 전면에도 조그마한 수장공간을 위아래에 설치할 정도로 다양한 수장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수장공간이 다양한 것은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한 경제활동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안채의 대청은 전면 한 칸의 규모이다. 다른 부자집의 대청에 비하여는 형편없이 작은 규모이다. 아마도 처음에 살림집으로 계획한 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청의 규모가 작아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처음부터 살림집으로 계획한 것은 아니라는 흔적은 이곳 대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청에는 위패를 모시기 위한 벽장이 있다. 아마도 초기에 살림집으로 생각하여 지었다면 사당을 만들거나 또는 대청의 벽에 벽감을 만들어 위패를 모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살림집으로 변화되면서 위패를 모시는 자리를 마련할 수 없어 벽장을 짜 걸어 놓았을 것이다.
사랑채는 안사랑채와 바깥사랑채로 나뉘어있다. 바깥 사랑채가 먼저 지어지고 안사랑채가 나중에 지어졌다. 관리인의 말로는 바깥 사랑채는 사무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바깥 사랑채도 전후퇴집의 특징을 잘 활용하여 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바깥사랑채에도 안채와 같이 머릿방을 들였다. 조용하게 쉬거나 은밀한 이야기가 필요할 때 이용하였을 것이다. 안사랑채는 인촌이 주로 기거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육영사업에 대한 뜻을 세웠고 그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단식을 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안사랑채는 전면 3칸의 크지 않은 규모이다.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전후퇴집으로서 좌측 끝 방은 마루로 꾸며져 있다.
현재 이 집은 다른 집과는 달리 관리인을 두고 있다. 집안이 집안인지라 자신의 근거를 보존하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주인이 살고 있지 않을 경우 이처럼 관리인을 두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나마 나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마침 장마철이라 아궁이에 불을 때었는가 물어보았다. 관리비가 너무 적어 불을 땔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하였다. 관리비조로 받는 돈으로는 자신의 생활비는커녕 가끔 불을 때는 비용을 대기고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궁이를 막아버렸다고 한다. 인촌 가문의 재력에 비하여 자신의 터전을 보전하고 가꾸려는 노력이 너무 미약해 보인다.
관리인을 두었지만 관리하려는 개념이 잘못되었다. 도둑을 지키는 것만이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의 경우 일차적으로 국가가 관리해야할 의무가 있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결국 집주인에게 관리의 책임이 남는 것이다. 그러나 그나마 집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다 적극적으로 관리할 수는 없는 것일까. 마당에 덩그렇게 놓여있는 자신 집안 사람의 동상을 만들어 놓은 정성에 1/10이라고 집에 관심을 가진다면 이렇게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추가 :
인촌의 가문인 울산 김씨는 전남 장성이 근거지이다. 인촌 김성수는 장성 필암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하서 김인후의 13대 손이다. 인촌의 가문이 전북 고창으로 근거지를 옮긴 것은 인촌의 할아버지인 김요협이 고창에 자리잡고 있는 정씨 문중의 외동딸에 장가를 오면서부터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결혼당시 데릴사위가 아닌 근처에서 사는 것으로 하고 장가를 들었다고 하는데 현재 고창에 있는 인촌의 생가를 가보면 바로 옆에 정씨 가문의 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거의 데릴사위의 성격이 아니었나 한다.
김요협은 고창으로 장가를 온 후 재산을 증식하여 부자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처가의 재산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부인의 알뜰한 살림으로 재산 증식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좋게 말해서 알뜰한 살림 덕이지 처가의 도움이 재산 증식에 일조를 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근검절약하였다는 것은 집에서도 나타난다. 고창의 인촌생가를 가보면 어떠한 격식에 맞추어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집을 키워나간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목재를 사용하여 지은 것이 아니라 옛집의 목재를 적절하게 이용하였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이러한 재산을 바탕으로 아들 대에 이르러 큰 부자가 되었다. 관리인의 말로는 인촌의 양부인 김귀중이 만 오천석, 인촌의 생부인 김경중이 이 만석을 하는 거부였다고 한다. 둘은 이 곳에서 담을 끼고 옆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현재 안채의 담에 있는 문은 통하여 옆집에 살던 경중의 집과 통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라고 한다.
관리인의 말로는 이 집은 사대부집을 구입, 해체하여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과거의 집을 구입하여 목재를 다시 사용하여 집을 짓은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목재의 수급사정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조선 후기 목재의 부족은 심각한 상황에 이른다. 당시의 거부들의 집을 보아도 곧은 부재만을 사용해 집을 짓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서까래의 경우 휘거나 또는 눈으로 보기 안쓰러울 정도의 가는 부재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쓴 경우가 많이 있다. 이 집도 실제로 다른 집의 목재를 재활용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곳곳에서 새 목재가 아닌 흔적이 보인다. 관리인 말대로 다른 집을 사서 목재를 활용하였다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관리인이 집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고 있고 같은 김씨여서 집주인의 친척인가 하였더니 아니라고 한다. 관리인으로서 집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따로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간 여러 집을 돌아다녀 보았어도 이 관리인처럼 상세하게 알면서 열심히 설명해 주는 경우는 없었다. 작은 직분에도 최선을 다하는 관리인의 자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관리인의 설명을 들으려면 부안군청 문화재 담당에게 문의하여 전화번호를 알아 연락하면 된다.
첫댓글 불 때기도 어려워 아궁이를 막았다니요.... 안타깝습니다. 좋은 자료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