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의 유산 - 유주자사 진, 그리고 거란과 말갈(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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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자사 진
영토가 넓어야 행세하는 나라라는 단세포적 사고에 동의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작아도 잘난 나라라고 무조건 동의할 수도 없다. 지금은 한반도 안이 우리 영토임에 틀림없지만, 광개토 태왕의 정복로가 요하 동쪽에서 멈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증거들이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가는 것은 내가 한민족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1. 유주자사 진의 무덤 발굴
북한은 1976년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에서 한 고분을 발굴하였다. 무덤주인은 '幽州刺使 鎭'이었고 그 무덤 북쪽 벽에 14줄 154자로 우리나라 영토에 관한 중요한 글이 쓰여 있으며 모두 600여자의 묵서가 발견되었다.
무덤 정면에는 유주자사 진이 환갑을 맞이하여 잔치를 하는 장면을 그려 놓았다. 측면에는 유주자사 관할 아래에 있던 태수 13명이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그림이 있고 각 태수들 벼슬이름이 씌어있는데 광양, 조선, 광릉, 성양, 대방, 낙랑 등의 태수와 동양장군 매려왕 등의 설명이 붙어 있다.
이 13개 지역 태수 가운데 '왕'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재미있다. 유주는 지금의 북경일대로 유주에 낙랑과 대방이 있다는 기록은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지역에 있었다는 학설과 배치되는 것으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이 사람에 대해 망명한 중국인이라는 설과 광개토 태왕 때의 영토가 유주까지 미쳤다는 명백한 증거라는 설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2. 진은 누구인가?
1980년 9월 19일 동아일보 6면과 1981년 季刊美術 봄호에는 "1976년도에 발견된 덕흥리 벽화고분"이란 제목으로 한 고분 墓誌의 전모를 발표한 내용을 싣고 있다. 이 기사는 일본의 신문이나 학계에서 발표된 것을 옮긴 자료인데 최근 KBS 역사스페셜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다.
북벽에 씌여있는 글자가운데 □은 읽을 수 없는 상태의 글자를 표시한 것이며 한글로 기록된 부분은 한자지원이 안되는 글자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 해석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君信都彰都鄕□里 피장자는 고구려 신도창도향 □里 출신이며
釋迦文佛弟子□□氏鎭仕 불제자로서 봉사한 적이 있다.
位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벼슬과
龍壤將軍遼東太守使持節 용양장군요동태수사지절
東夷校尉幽州刺使鎭 동이교위유주자사 진은
年七七薨焉以永樂十八年 영락 18년(광개토태왕재위18년)되던 해 77살로 죽었다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二五日 무신년 12월(신유월) 25일(을유일)에
乙酉成遷移玉櫃周公相地 주공에 대한 예와 같이 귀한 관을 옮겨
孔子擇日武王選時歲一 공자가 무왕의 시를 뽑아준 예에 따라 날을 잡아
良葬送之後富及七世子孫 7대 후손까지 부를 누리는 좋은 땅에 옮겨 묻었다
番昌仕宦日遷位至侯王 벼슬에 나가 승진을 거듭하여 후왕에 이르렀다
造藏萬切日煞牛羊酒央米桀 오늘 소와 양을 잡고 쌀로 술을 빚어 저장해 놓으니
不可盡掃旦食鹽시養一량記 음식과 소금과 된장이 끊어지지 않음을 기록하여
之後世寓寄無絶 후세에도 끊어지지 않게 하라.
1981년 2월 월간자유(月刊自由)지에 임승국 교수(한국정사학회회장, 명지대교수)는 유주자사 진의 무덤에 그려놓은 태수들의 작위와 직책을 연구하여 당시 고구려영토가 어디까지인가를 밝혔다.
유주자사 진의 환갑을 맞이하여 유주 관할 아래 13태수들이 축하인사를 하는데 이들이 관할지역은 지금의 북경지역 일대이다. 관할지역과 이름들 또는 관직명을 보면
記
建威將軍八中侯 餘右
建威將軍 餘歷
建威將軍廣陽太守長史 高達
建威將軍朝鮮太守司馬 楊茂
建威將軍廣陵太守 楊茂
建威將軍城陽太守司馬 王茂
童壤將軍邁慮王 餘歷
龍壤將軍帶方太守 楊茂
龍壤將軍樂浪太守長史 慕遺
등이 나타나는데 한 군현의 지명으로 익숙한 대방, 낙랑 등이 유주지역의 지명으로 나온다.
13명의 태수
묵서명문
※ (주1)이 부분과 관련하여 최근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1986년 일본에서 발간된 "고구려벽화고분"(조선화보사)에 인명은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편 최근 완간된 북한의 손영종 박사가 지은 "고구려사"에도 지역명만 나오며 인명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방주인은 벽화그림을 보면서 13태수 머리 위에 각각 씌여있는 묵서가 태수의 관할지역과 성명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인용하였으나, 지역만 나오는 것으로 확인하였습니다. 단, 아직까지 방주인인 저는 위의 책자를 직접 확인하지 못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2000. 1. 18. 방주인)
(주2) 2000. 10. 2 통일부 북한자료원을 방문하여 "고구려벽화고분"(조선화보사)를 직접 열람하였습니다. 거기에 수록된 벽화에는 "□□太守 來朝時"라고만 나올 뿐 인명은 없었습니다. 임교수님의 태수명칭은 동성왕 대에 북위와 전쟁에 이긴 뒤, 남조에 작위를 요구한 사람들의 이름이거나 착각에 의한 인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2000. 11. 15 방주인)
3. 광개토태왕 시대의 동아시아
유주자사 진의 묘에서 발견된 이글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북위서가 있다. 북부 중국에 선비족이 세운 북위라는 나라의 역사서인 이 책에는 태조인 拓拔珪(척발규 또는 탁발규)가 서기 398년 정월에 수도를 업(業)에 정하고 종묘와 궁실을 설치했는데 고구려인 등 46만이 칩입하여 7월에 수도를 평성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이 전연을 공격하여 숙군성을 점령하고 연의 평주자사(평주는 북경 서북지역)모용씨를 축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은 북제 건국을 공작하였으며 당시 북제의 황제는 고구려사람 高雲이었다. 이러한 사항들은 고구려 최전성기의 영토로 동은 연해주, 서는 요하, 남은 죽령, 북은 남만주에 걸친 것으로 배운 일반인들에겐 또다른 흥미를 주고 있다.
그러나 태왕의 비문에는 이미 염수(지금의 시라무렌강(?)), 요하 상류로 짠물이 흐르는 강이며(무렌은 몽고말로 물이다) 여기에 사는 비려를 정복했다고 기록하였다.
우리가 중국 南宋人들이 만든 주자학의 교조적 정통주의를 신봉하면서 우리를 중국인인양 착각하는 소중화사상에 물들어 우리 민족과 혈통적으로 더 가까운 거란, 말갈(여진), 선비, 오환, 흉노 등을 오랑캐라고 멸시하였지만 그들은 중국인들보단 우리와 더 가까운 문화공동체였다.
생전에 광개토태왕이 남긴 말이라고 능비에 기록된 아래 글은 그가 단순한 정복자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으며 그가 세계의 주인을 지향하는 큰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선대 왕들께서는 본토민-고구려인-들에게만 왕릉을 지키도록 시켰다. 그러나 나는 우리 본토민들이 점차 쇠하게 될 것을 염려한다. 내가 죽은 뒤 1만년이 지나서 내 무덤을 수호할 자들은 내가 돌아다니며 직접 데리고 온 정복민들에게만 맡게 하라.......또 제도를 정비하여 무덤을 수호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부유한 자들이라도 함부로 사가지 못하도록 하고 팔아넘기지 못하도록 하라. 만일 이 법을 어기는 자는 형벌에 처하라"
4. 광개토태왕 이후
영토가 넓어야 강국인 시대는 지났다. 역사연구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교육에 있서서는 진정 그것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광개토태왕릉비를 연구하는 중국학자 왕건군은 1986년에 발표한 "호태왕비문 연구"에서 "호태왕이 정복한 비려(거란족)는 압록강 하류 태자하 유역에 살고 있었으며 서쪽경계가 요동에 이르지 못했고, 고구려는 칭왕, 칭세자했을뿐 칭제, 칭태자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광개토태왕릉비에 분명 염수(鹽水:소금강)가에 사는 비려족을 정복했다고 언급하였는데, 그 염수가 동몽골 땅 시라무렌강 상류지역 소금호수와 강이 있는 지역을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도 우리는 서쪽으로는 요하를 넘지 못한 것으로 배웠다.
元나라가 우리에게 강요하기 전까지 우리는 태자를 칭했고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고, 임금을 폐하(陛下)라 칭하며, 임금이 스스로를 짐(朕)이라고 부르던 국가였음에도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비려는 훗날 기타이(기단, 거란)로 불리던 유목민족으로 멀리 카스피해까지 진출하여 기라기타이(서요)를 건설하였다가 징키스칸이 보낸 제베에게 망한 민족이다.
우리가 오랑캐라 부르며 멸시하던 거란은 성종 황제때 영주 목엽산에 단군사당을 세워 개천홍성제로 받들었고, 1차 고려 침입 때 고려의 장군 서희에게 거란 장수 소손녕은 자기네가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 정통국가임을 주장하였다.
여진도 금나라(알탄킨, 캐세이)를 세운뒤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선언했다. 大震(발해)이 거란에게 망한 후(926년) 여진의 일부는 완옌부의 추장 아쿠타 때(1115년) 금을 세우고, 장백산맥을 북으로 돌아 연운 16주를 차지하였으며, 송나라 휘종, 흠종부자를 사로잡고(靖康之變) 송을 멸망시켰다.
아쿠타가 짓게 한 그들 역사(金史) 첫부분에 "우리 시조는 含普이며 그 분은 고려(혹은신라)에서 오셨다. 형님은 아고내라고 하는데 불교를 좋아해서 본국에 남으셨다'라고 분명히 고려인의 후예임을 밝혔다.
훗날 여진의 일부는 남으로 돌아 조선을 건국하였다. 강성한 금이 망하고 난 후 400년간 다시 흩어진 여진은 아쿠타의 16대 손인 누르하치대에 다시 힘을 회복하여 할아버지 나라를 쳐들어 온 왜적을 대신 쳐부수겠다고 조선의 선조임금에게 주청 했고 이를 거부하자 장백산맥을 북으로 돌아 마침내 1636년 태종 홍타시는 명을 제압하고 세종때 중원을 장악함으로써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의 정치체제가 파괴된 후에도 1,300여년 동안 여전히 동아시아의 패자였다.
광개토태왕이 남긴 말은 고구려에 속해있던 민족들에게 동질감과 자부심을 심어 주었고 그들의 정통성을 고구려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