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 권위자' 전영애 교수, 선비들의 요람 '서원' 내달 열어
‘파우스트’에 나오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아픔 많은 청춘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글귀예요
동양 여성 최초 ‘괴테 금메달’
전세금 빼고 대출까지 받아 경기 여주에 書庫·정자마루…
다들 뜯어말렸지만 “남은 생, 서원지기로 살 것”
‘爲如白 爲後學 爲詩’
서원 대들보에 문장 적어 “맑음을 위해, 후학을 위해,
그리고 詩를 위해… 읽고쓰는 이들의 공간 되길”
아, 어머니!
“학교 문턱에도 못가보신 배움에 대한 한맺힌 설움이
딸에게 전해졌나 봐요 제 학문 열정의 근원이죠”
儒家에서 태어난 독문학자
“증조부와 고조부가 모두 서원을 지었어요
당시 영남 문객들의 사랑방 역할 했다 들었죠”
實用의 시대, 문학이란…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게 정말 實利 아닌가요?
다들 숨막히게 사는 시대 자신을 조금씩 돌아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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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영애 서울대 교수가 다음 달 문을 여는 경기도 여주 ‘여백서원’ 앞에 섰다. 주머니를 털어 서원을 지은 전 교수는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이 서원이 주변을 조용하고 따뜻하게 이끌어나가는 사람들의 공부터이자 쉼터가 되길 바란다. 글 읽어 세상을 한 치라도 밝히고 싶다”고 했다. /여주=이덕훈 기자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걸은리 논밭 한가운데에 최근 소나무와 황토벽돌로 지은 기와집 한 채가 우뚝 섰다. 다음 달 25일 문을 여는 이 건물의 이름은 '여백서원(如白書院)'. 조선시대 선비들이 모여 공부하던 그 '서원'이다. 전통적 정취를 담은 공간이지만, 정작 설립자는 조선시대와는 거리가 먼 괴테 연구자다. 전영애(63)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를 지난달 26일 여백서원에서 만났다. 150㎝의 작은 키, 화장기 없는 얼굴, 마디 굵은 손은 촌부(村婦)의 행색이었으나, 환한 미소와 노래하는 듯한 어조만은 소녀 같았다.◇전세금까지 털어 지은 서원초가을 푸른 하늘이 서원 처마 끝에 걸렸다. 조경 중인 뜰에 흙 더미가 쌓여 있었다. 서원 규모는 부지가 땅 3966㎡(1200평)에 산 6611㎡(2000평), 건물이 165㎡(50평) 정도이다. 강당과 서고(書庫), 정자마루 등을 갖췄고 강당에는 벽난로를 설치했다. 한옥(韓屋) 건물이지만 서고의 책은 대부분 독문학 관련 서적이다. 서원을 밝힐 등(燈)은 전 교수가 괴테의 주 활동지인 바이마르에서 가져왔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곳이다.서원의 이름 '여백(如白)'은 '흰빛과 같이 맑다'는 뜻. 2010년 작고한 전영애 교수 부친의 호(號)를 땄다. 85세에 킬리만자로 정상에 올라 화제를 모았던 '할아버지 등반가' 고(故) 전우순옹이 그의 부친이다. 땅값 2억, 집 짓는 데 4억. 6억원의 서원 건립 비용 중 1억원이 부친이 생전 "좋은 일에 쓰라"며 내놓은 돈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선 한 달에 20만~30만원밖에 안 쓰던 부친의 뜻이 귀중해 전 교수는 가진 돈을 몽땅 털고 대출까지 받아 서원 부지를 구입했다. 지난달엔 서울 아파트 전세금 2억원도 빼서 서원 짓는 데 쏟아부었다. 제자들이 "출퇴근은 어떻게 하실 거냐"며 뜯어말렸지만 소용없었다. 10여년 전부터 집필실로 쓰고 있던 여주의 폐농가로 아예 이사해 버렸다.지난 1월 11일 여백서원 상량식(上樑式) 때, 대들보에 이런 문장이 적혔다. '爲如白 爲後學 爲詩(위여백 위후학 위시).' 맑음을 위해, 후학을 위해, 그리고 시를 위해…. 시를 읽지 않는 시대, 이 공간 안에서만은 문학을 지켜나가겠노라는 다짐이다.―왜 하필 '서원' 지을 생각을 했나. 현대인에겐 낯선 공간이다."'선비'라는 것이 고리타분하게 여겨지는 시대가 됐다. 스스로를 닦기 위해 옷깃을 여밀 줄 안다는 것도, 선공후사(先公後私)의 당연한 도리도 개념조차 없어졌다. 사람의 '뿌리'를 만들어주는 미덕이 기억돼야 할 것 같았다. 다들 너무나도 숨 막히게 산다. 글을 읽고 쓰고, 자신을 돌아보고, 사람을 만나기도 할 장소가 필요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내 제자들이 너무 귀해서…. 그 사람들이 자기 분야에서 자리 잡으면서도 지나치게 마모되지 않았으면 했다. 주변을 조용하고 따뜻하게 이끌어가는 사람들의 공부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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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괴테 금메달 시상식장의 전영애 교수. /조선일보 DB
―제자들 아닌 일반인에게도 서원을 개방하나."아직 확정은 못했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는 분들께 개방할까 생각 중이다."―자칫하면 관광객들로 시끄러워질 수도 있을 텐데."이런 곳에 오는 분들이 서원을 단순히 구경거리로 생각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글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오시다 보면 차츰 운영 방침이 정해질 거다. 벽난로 앞에서 글 읽는 모임, 정자마루에서 시 읽는 모임 등을 정기적으로 열 예정이다. 장기적으로는 비영리 재단법인으로 운영하려고 생각 중이다."전영애 교수는 동양인 여성 최초의 '괴테 금메달' 수상자다. 바이마르 괴테학회가 1910년 제정한 괴테 금메달은 전 세계 괴테 연구자들이 최고의 영예로 여기는 상. 2011년 6월 시상식에서 전 교수는 이런 연설을 했다."오늘 제가 여러분이 자리하신 가운데 누리고 있는 이 큰 영예의 뜻은, 아마도 문학이, 우리를 형성해주는 문학이, 그 어디서든, 어떻게든, 그 누구에 의해서든, 반드시 돌보아져야 한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저는 충직하게 문학을 돌봄으로써 제 고마운 마음을 비로소 제대로 표현하려 합니다."그로부터 3년, '읽고 쓰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마련하면서 그는 괴테 금메달 수상 소감 때 밝혔던 "충직하게 문학을 돌보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있다.―사비를 털어 서원을 지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 처음 서원 부지를 계약할 땐 나 스스로도 '정신 나갔구나' 싶었지만 곧 '여러 사람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내 마지막 직분은 '서원지기'가 될 거다"―모델로 삼은 전통서원이 있나."없다. 다만 증조부와 고조부가 다 서원을 지었다. 증조부는 아주 잠깐이지만 도산서원과 소수서원 원장을 지내기도 했고, 고조부가 지은 정자엔 영남 문객들이 모여들었다고 들었다."◇"어머니 몫까지 산다"전영애는 경북 영주의 유가(儒家)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은 어머니에게 문자 그대로 '상처'가 됐다. 갓 해산한 어머니에게 전영애의 계(繼)증조모는 "딸을 낳고 무슨 염치로 방에 들어앉았느냐"며 일을 시켰다. "어머니가 밥을 지으려고 물을 길었는데, 기운이 없어 물동이를 머리에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보다 못한 머슴이 도와주자 못마땅한 계증조모가 돌멩이를 던져 물동이가 깨졌다. 사금파리가 어머니 이마에 박혀 상처를 남겼다. 1990년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임종을 못 지킨 나는 뒤늦게 그 상처를 어루만졌다."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어머니는 글씨 적힌 것이라면 모두 귀하게 여겼다. 평생 신문지 조각 하나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다. 서원에 보관된 괴테 '서동시집(西東詩集)' 초판본 곁에 비단보자기에 싸인 책 한 권이 놓여 있다. 소설책, 가사(歌辭) 등 읽은 것을 모두 필사해 간직했던 어머니의 유품이다. 전영애는 "배움에 대한 어머니의 한 맺힌 설움이, 어쩌면 학문에 대한 내 갈증과 열정의 근본일지 모른다. 나는 얼마만큼은 어머니를 대신해 산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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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여주 여백서원 서고에 앉은 전영애 교수. 책장의 장서(藏書) 규모를 묻자 그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본디 뭔가를 계산하는 성품이 아니다. /여주=이덕훈 기자
―왜 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나.
"영주에서 국민학교 5학년을 마쳤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부르더니 '서울 가서 공부하지 않을래?' 했다. '네' 했더니 다음 날 당장 서울로 전학시켰다. 경기여중에 진학했는데 서울 생활이 고달팠다. 집에서 용돈이 올라올 때마다 을유문화사며 정음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을 샀다. 외로워서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마구잡이 독서가 나중에 도움이 됐다. 40년쯤 지나 괴테의 서동시집 유고편을 읽는데 내가 중학교 때 봤던 시가 있는 거다. '나를 울게 두어라/ 끝없는 사막에서/ 그들에 에워싸여'라는."
―아버지가 깬 분이셨던 모양이다. 당시에 딸을 공부시키는 집은 흔치 않았을 텐데.
"어린 시절 내게 아버지는 없는 거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장손이라 집안을 챙기느라 항상 바빴다. 와세다대 법학부를 거쳐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아버지는 영주 고 교사로 계셨다. 어렵게 공부하신 분으로 허벅지가 상처투성이였다. 공부하며 졸지 않으려고 자전거 바퀴살로 때려서 그렇다고 했다. '천재는 노력하는 능력에 다름 아니다'는 게 아버지의 신조였다."
―표현은 안 했지만 딸을 무척 아끼셨던 것 같다.
"내 인생엔 딱 두 번 개입하셨다. 서울로 진학시킨 거랑 고3 때. 얼굴도 잘 기억 안 나는 아버지가 오셔서는 '대학은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서울대 독문과요' 했더니 '이화여대 약학과 가면 안 되겠느냐' 하시더라. 내가 '안 되겠는데요' 했더니 '그럼 너 좋은 대로 해라' 하셨다."
―원하던 공부를 하게 돼 행복했겠다.
"그렇지 않았다. 내가 69학번이다. 시대가 험해서 매일 경찰이 도서관에 난입했다. 수업이 열리지 않으니 배울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감옥 가는데 나는 회색분자라 참여하지 못했다. 앉아 있을 데가 없어 도서관에 있었다. 못 배웠다는 생각에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래서 성적이 좋았는데 그게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전과를 할까, 졸업하고 학사편입을 할까, 별생각을 다 했다. 어느 날 어렴풋이 알게 됐다. 뭘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거. 다른 걸 하면 쉬우리라 생각하는데 뭘 하든 어렵다는 거. 그래서 마음을 잡았다."
◇세계적 碩學 된 국내 박사
전영애 교수는 괴테의 '서동시집'을 비롯해 수많은 독일 문학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독일 학술 서적 출판사인 발슈타인사에서 펴낸 괴테 관련 연구서는 현지 학계에서 주목받았다. 괴테금메달 수상으로 세계적 석학(碩學)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해외 유학파가 아닌 국내 박사다. 1986년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부하는 여자에게 호의적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1973년 서울대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학과 조교로 일했다. '무급조교→유급조교→정부 장학금 유학'이 당시 관행이었다. 1년간의 무급조교 기간이 끝났으나 유급조교 기회는 남학생에게 대신 주어졌다.
―갈망했던 독일 유학길이 막혀서 상심했겠다.
"앞이 캄캄해졌다. 아무런 전망 없이 집에 쭈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5년이 지났는데 미칠 것 같았다. 지독하게 배움에 목말랐다. 그래서 무작정 학교에 한번 가 봤다. 나를 본 한 교수가 웃지도 않고 말하더라. '너는 비극의 씨앗이다.' 여자가 공부하려 한다고 한 말이었다. 학과 사무실에 독일 정부 장학생 선발 공고가 붙어 있었다. 교수가 추천한 조교가 있었는데 내가 물불 안 가리고 신청해버렸다. 사흘간 시험 보면서 어찌나 애를 썼던지 살이 빠져 치마가 줄줄 흘러내렸다. 내가 붙고 조교가 떨어졌다. 1978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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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백서원의 상량문(上樑文). ‘爲如白 爲後學 爲詩(위여백 위후학 위시)’. /여주=이덕훈 기자
―어쨌든 장학금을 받게 되었으니 유학을 가면 되었을 텐데.
"몇 번의 유산 끝에도 생기지 않던 아이가 그때 생겼다. 출국 일정을 반년 연기하고, 몇 번 입원하면서 가까스로 아이를 낳았다. 두 달 된 아들을 한국에 두고 1979년 1월에 떠났다. 아이 때문에 자료 수집만 겨우 하고 1년 반 만에 돌아왔다. 그렇게 귀국했는데 모교에는 나타날 수 없었다. 교수에게 반역을 저질렀으니까. 새까만 후배들이 전임이 되는데, 나는 다시 집에서 캄캄한 상태로 있었다. 책 읽고 번역했지만 출판은 꿈도 못 꾸고 서랍에만 넣어놓았다. 몇 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다시 모교 박사과정에 원서를 낼 수 있었다. 학위 받고 경원대에서 11년간 교수로 근무했고, 1996년 모교에 임용이 됐다."
―독일 유학 경험 없이도 괴테금메달을 받았다. 어떻게 가능했나.
"책을 읽었다. 돈 없는 사람을 부자(富者)라 하지 않듯, 책을 읽지 않았으면 학자가 될 수 없다. 학문의 길로 갔으면 책을 읽어야 한다.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힘이라는 건 언어 지식과는 다른 문제다. 읽는 힘을 키워놓으면 경쟁력이 있다. 죽었다 깬들 독일 교수처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외국인의 시각에서 독일 교수들이 놓치는 것도 보곤 하니까 힘이 되기도 하더라."
―학자인 동시에 두 아이의 엄마다.
"형편없는 엄마다. 딸아이가 가까스로 말문이 트였을 무렵, 내가 논문을 쓰고 있으니 할금할금 돌아보더니 문을 닫아주고 나오면서 '엄마 공부해' 하더라. 독일어에 '열쇠 아이(Schl�sselkind)'란 말이 있다. 부모가 맞벌이라 목에 열쇠를 걸고 다니는 아이를 이르는 말이다. 나는 애들이 집에 못 들어갈까 봐 아예 문을 열어두고 다녔다. 그 이야기를 들은 독일 친구들이 '네 아이들은 열쇠 없는 열쇠 아이'라며 놀렸다. 아이들은 내가 키웠다기보다는 세상이 키웠다. 언제든 제 발로 걸을 때까지만 아주 조금 도와준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그 아이들 인생에 개입해서 그 애들한테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 이상 잘해줄 자신이 없었다."
그는 아들(36)과 딸(32)을 두고 있다. 아들은 요리사, 비교문학 전공인 딸은 미국 유학 중이다. 어머니를 '가장 친한 벗'이라 부르는 딸이 14세 때인 1996년 어버이날 편지에 이렇게 썼다. "세상의 나쁜 점만 눈에 띄곤 하는 저에게도, 세상이 계속 바른길로 나갈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지금 이곳에 계시고, 저는 어머니와 같은 삶의 방법을 선택하여 아마 같게 살아갈 거라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같은 선생님
그가 '오마토'와 '시마토'라 부르는 5월과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전영애 교수의 여주 집필실은 밤늦게까지 손님으로 북적댄다. 1년에 두 번 제자들이 모이는 날이다. 제자들은 사전 연락 없이 "선생님" 하며 한밤중까지 들이닥친다. '제자'라고 해서 독문학 전공자만 있는 게 아니다. 전공도, 직업도, 나이도 다양하다. 지난 '오마토' 땐 서울대에 교류학생으로 왔었던 계명대 졸업생이 대구에서 KTX를 타고 올라오기도 했다. 이는 그가 1996년 서울대 부임 이후부터 맡고 있는 교양강좌 '독일 명작의 이해'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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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애 교수의 '독일 명작의 이해'는 서울대생들 사이에서 명강의로 손꼽히는 수업 중 하나다. 수업은 카프카, 브레히트, 토마스 만, 헤세 등 독문학 거장들의 작품을 읽고 감상문을 쓴 후 토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수강생들은 자기 글과 다른 수강생들의 글을 엮어 학기말에 '책'을 만들어 제출한다. 대학생들이 '스펙 쌓기'에 목숨 걸지 않았던 시절엔 수업 부담이 만만치 않았지만 매번 수강 정원을 초과했었다. 수업에서 맺은 인연이 소중해 수강생들은 졸업 후에도 전 교수를 찾는다.2000년 수업을 들은 배석준(33·법학과 졸)씨는 지난 1월 결혼식 주례를 전 교수에게 부탁했다. 배씨는 "선생님은 내게 '어머니' 같은 분이다. 형편 어려운 지방 학생이었던 내게 당신 집 방 하나를 6년간 내어주셨다. 늘 어려운 학생들 장학금을 알아봐 주시고, 용돈을 주시곤 했다"고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수강한 윤소미(33·고고미술사학과 졸)씨는 "시험을 치는 요령을 터득해 좋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정작 '내 생각'이라는 걸 말해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 수업은 객관식 문답에만 갇혀 있던 사고의 틀을 깨고 나 스스로를 발견하게 해 줬다"고 했다. 가르침에 대한 열정을 인정받아 전 교수는 2011년 11월 학교로부터 교육상을 받았다.―이 실용(實用)의 시대에 여전히 학생들에게 문학을 읽히고 있다."책을 읽는다는 건 생각의 지평을 넓히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는 일이니까. '책 읽기'와 '글쓰기'에도 실리實利는 있다. 전공과 직업을 불문하고 대상을 정확히 보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훈련이 필요하지 않나."그는 매 수업시간 학생들에게 '파우스트'를 읽힌다. 괴테가 60년에 걸쳐 쓴 대작 '파우스트'는 "모든 걸 알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악마에게 영혼을 걸고 내기하는 파우스트 박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 앞머리에서 파우스트를 유혹하겠노라 자신하는 악마에게 신(神)은 말한다.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이는 전 교수가 학생들에게 짚어주는 '파우스트'의 핵심이자, 제자들이 살면서 역경에 부딪힐 때 한 번쯤 꺼내보며 의지하는 장면이다.―'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지금 방황하고 있는 건 어딘가로 가겠다는 '목표'가 자기 속에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파우스트는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어디든지 가본다. 많은 사람이 대개 '요만큼'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파우스트처럼 세계를 무한히 넓혀간다. 나는 학생들에게 우리가 아는 어떤 가능성 뒤에 뭔가 더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자아를 찾는다는 것엔 우리가 아는 선(線) 말고도 훨씬 넓은 지평이 있다는 걸…. '소망이란 건 자기 안에 있는 능력의 예감에 다름 아니다'라는 괴테의 말을 나는 자주 인용한다."이상(理想)의 공간인 서원 지붕 위로 별이 총총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곽아람 기자의 캔버스'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