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에 대한 추가사항
2002년에 발간된 대장경판전의 실측조사 보고서를 살펴보니 몇 가지 추가할 사항이 있어 새로 글을 올린다. 이 보고서에는 20세기초에 찍은 해인사의 사진과 정선과 김윤겸의 그림 사진이 잘 나와있어 몇 가지 사항을 검토할 수 있었다.

1915년에 찍은 삼층석탑 사진
우선 1905년에 찍은 삼층탑을 보면 현재와 상태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의 안내문과 현장의 안내문에는 "원래 기단은 2층이었으나 1926년 수리 시에 기단을 넓히고 한 층을 더 얹음으로써 통일신라 탑의 전형인 2층 기단의 모습을 깨뜨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수리 전에 찍은 듯한 1905년의 사진을 보면 기단이 4단으로 구성되었던 것 같다.
최하층기단의 형식은 면석과 갑석으로 짜여진 신라시대의 건물기단과 같은 형식으로 구성되어있고 그 바로 위층의 단은 기단이라기 보다는 그 위 단을 받치기 위한 괴임돌(일반 괴임돌보다는 훨씬 크다.)과 같은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즉 최하층과 그 바로 위층 기단부는 일반 신라계 탑의 지대석이 커져서 건물의 기단과 같은 형식으로 변형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진만으로 보았을 때 지대석이 확장된 구성 위에 전형적인 신라계 탑이 올라 서있는 구성이다.
또한 사진에서 보면 초층 기단 부분이 매우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었는데 후대 수리하면서 첫 번째, 두 번째 , 세 번째 층의 기단을 엉터리로 복원한 것 같다. 두 번째 층은 쇠시리가 들어갈 정도로 공들여 다듬은 돌로 둘렀는데 지금은 아무 장식도 없는 장대석으로만 올려놓았다.
특히 세 번째 층의 기단(신라계탑에서 보면 초층 기단에 해당되는 부분)을 보면 갑석이 지금과 같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갑석이 사진 정도만 돌출되었다면 지금과 같이 우습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1902년의 사진을 기준으로 다시 복원된다면 현재보다는 훨씬 좋게 보일 것이며 새로운 탑 형식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앞에 있는 석등을 보면 중대석이 없었다. 중대석은 후대에 새로이 끼워 넣은 것인데 아무리 보아도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신라계 일반석등처럼 중대석을 간주석 형식으로 만들어 놓았다면 조금 낫게 보이지 않았을까. 1929년 찍은 사진을 보면 석탑과 석등이 고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부분도 아마도 1926년에 같이 고쳐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석등과 대칭되는 곳에 석조유구가 남아 있었다. 어떠한 석조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꼭 찾아서 무엇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유구이다.

1915년에 찍은 구광루
앞의 해인사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구광루의 부분은 아무래도 아쉽다. 1915년 사진을 보면 헐리기 전보다는 훨씬 상태가 좋았으며, 단아하면서 정감이 가는 모습이었다. 2층의 창은 판장문으로 막힌 것이 아니라 뚫려있어 지금보다는 훨씬 편안하게 느껴진다. 특히 입구인 두 번째 칸의 2층 부분은 판자로 처리되지 않고 살창을 올려놓아 입구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은근하게 문임을 강조하는 모습이 정겹다.
정선과 김윤겸이 그린 해인사도를 보면 과거의 대적광전은 중층 건물로 그려져 있다. 두 그림 다 똑같이 중층으로 그려진 것을 보면 순조 때 화재로 전소하기 전의 대적광전은 중층건물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정선의 그림보다 후대에 그린 김윤겸(1711-1775)의 그림이 정선의 그림보다 사실적인데 김윤겸의 그림에는 지금보다는 건물이 더 많았다. 그리고 구광루 앞도 광장으로 된 것이 아니라 건물로 들어차 있었다.

김윤겸이 그린 해인사 전경
이러한 건물배치는 대적광전 앞 중정에 이르기까지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특히 구광루의 옆으로도 행랑채와 같은 건물이 늘어져 있어 중정으로의 진입은 구광루 앞에 있는 누마루하부를 반드시 지나게 되어 있어 더욱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그러다가 대적광전 앞에서 갑자기 확 트이게 되어 종교적인 환희감을 불러일으킬 배치이다. 그리고 해탈문을 들어서자 바로 우측에 있는 보경당 자리는 축대를 쌓아 레벨이 대적광전 앞마당과 같은 높이로 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
그림에서 보면 현재의 대장경판전 주변에 설치되어있는 담장이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미 수리보고서 상에서도 언급이 되어있지만 김윤겸의 그림에는 판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있으되 일각문과 담은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해인사에 대한 정선의 그림은 조금 다르다. 정선의 그림은 두 가지가 소개되었는데 하나는 해인사도이고 또 하나는 해인사를 부채에 그린 그림이다. 해인사도에는 판전 앞에 계단과 일각문이 그려져 있으나 부채그림에는 일각문이 표현되어있지 않다.
그림 상에 담이 없었다고 해서 원래 담이 없었다고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우리 그림의 속성상 집을 세세하게 표현한 예가 기록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전의 담장의 문제는 판전 안에 있는 대장경판의 보전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심사숙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담장은 공기의 흐름을 저해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전체적으로 정확도를 보면 김윤겸이 그린 해인사도가 보다 정확할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하여도 판전의 담장이 정확하게 표현되었을 것이라고 상정하기는 무리가 있다. 같은 정선의 해인사도에서도 장경판전의 표현이 다른 것처럼 김윤겸의 그림도 오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림을 기준으로 담이 있다 없다 논의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담이 있는 상태와 없는 상태를 가정하여 모형을 통한 풍동실험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을 하여 최적의 보존상태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세찬 골바람을 막기 위하여 일부러 담을 만들어 놓았을 수도 있다.

대장경판전 평면도(각동 전면에 서가가 배치되었음)
장경판전은 기존의 경사면의 일부는 절토하고 일부는 성토하여 지었다. 현재의 건물을 성종 19년인 1488년에 지어지고 수다라장은 1622년에 그리고 법보전은 1642년에 중수되었다고 한다.
실측조사보고서에서는 수다라장이 법보전보다 고식이긴 하지만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추정하는 것은 구조적 수법이 비슷하고 법보전에서 발견되는 일부 변경된 구조는 후대에 중수 시에 변경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43년 법보전 수리시 홍치원년(弘治元年 1488년)의 명문기와가 나왔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보고서에 있는 1902년 수다라장의 내부사진을 보면 대장경판을 올려놓은 판가가 전면 벽 쪽에는 설치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1915년 사진에 의하면 전면과 후면에만 판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1900년 이전에는 현재 판가를 설치해놓은 전면에는 판가를 설치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전면에 판가를 설치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들어온 공기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내부 전체로 퍼져서 순환되기 위한 조치로 보여진다.

1902년 수다라장 내부 사진
1902년 사진에는 천장에는 판재로 빗반자를 설치하였다. 천장을 지금과 같이 연등천정으로 하지 않고 빗반자로 한 것도 공기가 부드럽게 잘 순환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판가의 구조는 현재는 5단으로 내진 고주 아래까지만 설치하였는데 당시는 빗반자 아래까지 설치되었다. 이러한 판가 설치형식은 이덕무의 가야산기伽倻山記의 기록과도 일치한다고 한다고 한다.
전면에 있는 수다라장과 후면에 있는 법보전의 창은 전면의 아래창이 크고 후면의 위창이 큰 원칙은 같으나 각각의 창 크기는 다르다고 한다. 앞에 있는 수다라장의 창의 크기는 전면 아래창이 2.55*1.32=3.37㎡이고 위창은 1.52*0.725=1.14㎡로 비율이 2.96배이다. 후면 아래창은 1.5*1.5=2.25㎡이고 위창은 2.55*1.33=3.37㎡로서 비율이 1.49배이다.
법보전의 창은 전면 아래창이 3.16*1.354=4.28㎡이고 위창은 1.517*0.733=1.11㎡로 비율은 3.86배이다. 후면의 아래창은 2.236*1.224=2.74㎡이고 위창은 2.499*1.358=3.39㎡로 비율은 1.24배이다. 뒤에 배치되어 있는 법보전의 전면 창면적은 5.39㎡, 후면 창면적은 6.13㎡로서 전면창대 후면창의 비율은 1 : 1.137이다. 수다라장의 전면 창면적은 4.51㎡이고 후면 창면적은 5.62㎡로서 비율은 1 : 1.246이다.
창의 면적을 보면 앞에 있는 수다라장 보다는 뒤에 있는 법보전의 창이 넓다. 이것은 법보전의 공기의 흐름이 전면 수다라장에 의하여 지장을 받는 것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바람의 방향인 전면 아래창과 후면 윗창을 보면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앞에 있는 수다라장의 전면 아래창과 후면 윗창의 크기의 비율을 보면 완벽하게 1:1의 비율이다. 그러나 같은 창의 법보전의 비율을 보면 1: 0.79 이다. 이러한 비율은 뒷면의 창이 작아짐으로서 바람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흐르도록 유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방식은 역시 법보전 뒤쪽이 산으로 막혀 바람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을 고려한 것은 아닌가 한다.
마지막으로 수다라장과 법보전 사이에 있는 서사간판전은 1905년의 조사 때는 칠성각과 응징전으로 쓰였고 내부에는 마루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수다라장의 원형개구부도 후대에 설치된 것으로서 일제시대에는 판장문으로 설치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