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안스님
미국의 한국불교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이민 바람과 궤적을 같이한다. 이러한 불교를 이민자들이 가져온 짐보따리 속에 그들의 종교도 담아왔다고 하여 어느 사람은 수하물 불교라고 부르기도 하고 이민불교라고도 한다. 이민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시작한 미주한국불교는 1976년도에 이르러서는 미국 서부, 중부, 동부 그리고 카나다까지 전미주에 걸쳐 한국스님들에 의해 사찰이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미주한국불교는 이 시기에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삼우스님, 박성배, 이장수, 정정달, 고성, 숭산, 법안, 대원, 도안스님이 그들이다. 이들은 30년이 넘거나 가까이 미주한국불교계 현장을 지키며 오늘도 불교포교 일선에서 뛰고 있다. 스님으로는 숭산, 삼우스님이 미국인들을 포교하고 있고, 법안, 대원, 도안스님은 한국인 포교를 담당하고 있다. 한국인 포교를 담당한 스님중 법안스님은 1988년에 병이 생겨 이후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고 도안스님과 대원스님은 아직도 L.A.,와 하와이에서 사찰의 주지로서 포교와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호와 다음호에는 도안스님과 대원스님의 활동을 토대로 두 스님을 소개한다.
도안스님은 현재 미주한국불교계 최대사찰 중의 하나인 L.A 관음사 주지로 복무하며선 L.A 한국 불교계 나아가 미주한국불교계를 선도하고 있다. 전미주 100여개의 사찰에서 활동하고 있는 140여명의 한국스님중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스님 중 첫 번째에 손꼽히는 스님이다.
도안스님은 1952년 범어사에서 동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한국의 제방선원에서 수행을 마친 후 조계종단에서 부산 대각사 경우스님, 뉴욕 원각사 법안스님 등과 함께 일을 하였다. 스님이 한국에서 조계종 재정국장 직책을 맡고 있을 때 한국불교계로서는 중요한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4월 8일 “부처님 오신날”을 용태영 변호사등이 국경일로 제정하는 운동을 할 때 조계종 재정국장이란 직책으로 막후에서 이 사업을 적극 후원한 것이다.
그 결과 1975년 국경일로 제정되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오려고 재정국장을 사임하였다. 재정국장이라는 자리는 돈을 만지고 관리하는 실무자리인데 이런 자리는 대개 말썽과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도안스님의 경우는 이 경우에서 예외가 되었고 이런 도안스님의 자세와 인상은 후에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본국의 선배스님들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 도안스님의 이런 성실함과 꼼꼼함은 미국에 와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주지에 취임한 이후 지금까지 주보를 발행하면서 행사와 재정을 정확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도 상식적이고 쉬운 것 같지만 미주불교계에서는 드문 일이다.
남가주사원연합회 주최 우정의 종각에서 가진 망향 성묘제
당시 관음사는 설립자 정달스님(현 법보선원 선원장)이 부처님께 승복을 반납하는 환계식을 정식으로 하고 환속을 한 상태로 주지는 공석이었다. 그리하여 관음사 신도들은 조계종단에 관음사 신도들의 신행을 지도할 스님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의하여 도안스님은 조계종단으로부터 정식으로 임명장을 가지고 당초 ‘부처님 오신 날’에 맞춰 오려던 계획이 서울에서 행사 때문에 1975년 11월에 미국에 왔다. 미국에 오기 전에 주위 분들과 스님의 미국행에 대하여 상의하였다.
지금이야 한국에서 스님들이 한 해에 몇 백명이 오고 가지만 당시에는 미국을 방문하는 불교계 스님들은 극소수였다. 강석주 스님, 이서옹 스님, 서경보 스님 등이 스님에게 “꼭 미국에 가서 한국불교 포교에 힘쓰라”고 특별당부를 하였다. 이 분들은 ‘미국에 가서 한국불교를 문화적인 측면에서 널리 알리고 이 방향에서 활동하라고’ 조언을 하였다. 그래서 도안스님은 한국에서 이미 나름대로 탄탄한 기반을 다진 상태였지만 ‘외국에 가서 견문도 넓히고 한국불교를 펴보자’라고 속으로 결심을 하고 1975년 11월에 L.A에 도착하였다.
그후 지금까지 도안스님은 이 분들의 조언대로 포교활동과 불교문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현재는 중단하였지만 신도들의 재에 필요한 과일과 절에 필요한 식품을 비롯한 물건도 수퍼마켓에서 직접사며 골프도 치지 않고, 윤리. 도덕적인 문제에 흠집없이 계율을 잘 지키고, 스님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미주불교계 현장에서 헌신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사회에서 사찰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모색하고 불교계의 대 사회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L.A.지역이 활동의 주무대이지만 라스베가스, 샌디에이고, 아리조나주에는 분원을 낸 적이 있다. 이들 지역과 타코마 지역에도 절이 없을 때는 도안스님이 직접 다니면서 설법을 하고 신행지도를 하였다. 현재는 아리조나 피닉스만이 관음사 분원인 열림원이 있다.
도안스님은 본국에서 20여년의 스님으로서의 활동을 접고 미국에서 다시 출발하였다. 언제나 맡은 일에 성심을 다하여 최선을 다하는 스님은 미국에 적응하면서 어려움을 하나 하나 헤쳐 나갔다. 도안스님이 한 첫 번째 일은 사찰 건물로 사용할 건물의 구입이었다. 미국온 지 6개월이 채 지나기 전에 세라노의 단독주택을 6만 8천달러에 구입하기로 하고 2만 5천 달러를 다운하고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1976년 4월 29일 이전을 완료하였다. 스님이 처음 부임하였을 당시 관음사는 월세 200달러를 내는 장소를 빌려 사용중이었는데 8개월분을 미납하고 있었다.
이 미납분을 해결하고 신도들이 장기적금도 들고 융자를 받는 등 전 신도가 도안스님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큰 문제중 하나를 해결한 것이다. 이렇게 어려움을 하나 하나 헤결해 나가던 중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7년 3월 신도 병문안 갔다 오던 밤중에 고속도로에서 Oil Tank 차가 스님이 운전하는 $250짜리 중고 Ford를 뒤에서 받아 스님이 정신을 잃어버리는 대형 사고가 났다. 스님은 병원에 실려가서 겨우 깨어났는데 퇴원 후에도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상태였다.
관음사 신도들 사이에서는 도안스님의 건강이 좋아지기는 힘들어 재기가 어려우니 서울로 가시게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렇게 되자 스님 자신도 세계여행이나 하면서 미국에서 계속 활동하던지 아니면 한국에 들어가던지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말이 세계여행이지 비용 때문에 직접 여행을 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별 같은 이야기였다.
스님은 일본에 살고 있는 속가 당숙에게 사정 설명을 하니 당숙이 흔쾌히 수락하고 비용을 지원하겠다고 하여 일본의 당숙에게 갔다. 당숙은 세계여행 비행기 값 $1,270을 포함하여 $7,000를 지원하였다. 1977년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다. 이렇게 하여 돌아보게된 일본 불교계 견학은 스님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본 불교계에서 훌륭한 포교 시스템을 보았습니다.
탁아소, 유치원, 학교, 병원, 납골당까지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그야말로 불교세계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나는 범어사에서 출가했기 때문에 범어사가 엄청나게 큰 절이라고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동대사 등 일본의 유명사찰들을 돌아보고 나서 범어사를 갔더니 범어사가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의 국민속의 생활불교에 비하여 한국 불교계의 왜소성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이 외에도 도안스님은 인도의 사성지, 동남아시아 불교, 유럽의 기독교 문화권을 둘러본 후 스님의 갈 길을 확고하게 정했다. “세계여행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구나”하고 결정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한국에 가서 살기보다는 미국에 왔으니 미국에서 뿌리 내리는 역할을 하자. 내가 하지 못하면 다음 세대에게라도 넘겨서 한국불교가 해외에서 뿌리를 내리는 일을 하자”고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77년도에 미국에 다시 들어와서 아주 본격적으로 포교를 시작하였다.
도안스님이 그 동안 L.A에서 한 행적을 살펴보면 불교와 문화라는 두 개의 보물을 관음사와 L.A.불교계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에 올려놓고 미국사회에 운반하였다. 관음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L.A.지역의 불교계 역량을 한데 모아 합동으로 한인사회 또는 미국사회에 불교를 알리고 불교사상을 심는데 주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성도재일 기념행사, 3.1절 기념행사, 창립기념행사, 부처님 오신날 봉축행사, 불교교양대학 등의 프로그램을 정례화하여 관음사 중심으로 꾸준하게 행사를 하는 한편 삼사합동법회, 추석 무렵의 망향성묘제, '세계평화 조국통일 국가안녕기원법회'등을 불교계 합동으로 하였다.
망향성묘제 행사는 관음사 단독으로 하다가 1988년 남가주사원연합회 출범이후 주최권을 남가주사원연합회로 넘겼다. 부천님 오신 날 기념행사는 미주의 사찰 대부분이 일요일날 하루를 정하여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관음사는 도안스님이 부임한 후 1977년부터 대개 일주일내지 8일을 <부처님 오신 날 주간> 으로 선포하고 봉축법요식, 경축음악회등으로 시작하여 점차 프로그램을 확대하여 꽃꽂이대회, 어린이미술실기 대회, 동요 콩콜대회, 관등기도회 등을 하였다. 8일을 매일하다가 후에는 한 달 동안 매주 일요일에 행사를 지금까지 하고 있다. 이것은 도안스님의 혜안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사실 L.A.나 뉴욕같은 지역에서 모든 사찰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참석하는 행사를 거의 같은 날에 딱 하루 부처님 오신날 행사를 하고 지나가 버린다는 것은 요식행위 처럼 흐를 위험이 많다. 부처님 오신 날을 음미하면서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부처님 오신 날 전후로 하는 것은 권장하고 싶다.
성도제일기념행사도 1978년 윤고암, 이능가 스님을 초청하여 수계법회와 불교사상 강연회, 1980년 박완일 서울신도회장 초청행사, 1981년과 1982, 1984년 칠보사 어린이 합창단 초청행사등 부임 초기부터 한국불교계가 부처님 오신 날을 위주로만 행사를 하던 경향이 많던 시절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성도제일을 간과하지 않은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창립기념행사는 1978년 3월 개원 5주년 기념행사로 김자운 스님, 윤현호스님, 최거해스님 초청행사, 1979년 3월에는 개원 6주년때는 손경산스님을 초청하여 가지는 등 매년 기념행사를 다양하게 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주로 본국에서 스님들을 초청행사를 가졌으나 후에는 신도들에게 감사패를 수여하거나 신도들이 참여하는 형식으로 하고 등 다양한 형태로 하고 있다.
도안스님은 관음사를 토대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불교계 역량을 한데 모으는 합동행사에도 앞장을 섰다. 예를 들어 미주한인불교계의 첫 번째 합동행사가 1976년 5월 9일 L.A.한국일보 소극장에서 열렸다. 당시 캘리포니아 지역의 한인 사찰의 카멜 삼보사와 L.A.지역의 달마사, 관음사 3개가 있었다. 이 3개 사찰이 공동주최하여 제1회 합동법회가 개최된 것이다. 이날 행사에는 숭산, 도안, 계정스님, 이한상 거사 등과 신도 4-5백명이 참석하였는데 이것은 도안스님이 제안하여 숭산스님과 이한상 거사가 찬동하여 이루어진 행사였다. 이후에도 수도사가 1976년 10월에 창립된 뒤에는 달마사, 관음사, 수도사 합동으로 역시 행사를 가졌다.
1979년 5월20일에 가진 부처님 오신 날 기념으로 관음사, 달마사, 수도사 3사 합동으로 '세계평화와 조국통일 기원 대법회'를 개최하였는데 약 800여명 참석하였다. 또 1984년 10월에는 개천절 기념하여 서부승가회(회장 도안스님) 주최로 세계평화 조국통일 국가안녕기원 법회를 L.A. 맥아더 공원 특설 광장에서 개최하였다. 앞서가는 도안스님은 1985년 9월 29일 1985년 9월 29일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L.A. 노스힐 메모리얼 공원에서 관음사 주최로 '제1회 불교인 망향성묘제' 행사를 가졌다. 70여명이 참석한 이 행사에 다른 사찰과 신도들도 함께 참석하였고. 이후 이 행사는 남가주사원연합회에서 주최하게 되었다.
세계평화 조국통일 국가안녕 기원 합동 대법에서 도안스님
1984년 LA맥아더 공원 특설 광장에서 가진 서부승가회 주최
세계평화 조국통일 국가안녕 기원 합동 대법에서 도안스님
앞에서도 이미 언급하였지만 도안스님은 일찍부터 본국에서 덕망있고 원력이 큰 스님들을 많이 초청하여 행사를 가졌다. 종정을 지낸 서옹, 고암스님을 비롯하여, 석주, 능가, 관응, 승찬, 서경보, 무진장, 인환, 경산, 자운, 법정, 김석옹, 고산, 도문, 거해스님등을 비롯하여 유명 무명의 수 많은 스님들을 초청하여 행사를 가졌다. 스님들을 초청하여 기념행사를 하면서 스님은 일회성 행사보다는 3일 혹은 일주일 혹은 몇 달에 걸쳐 매주 하루 또는 이틀을 하는 강좌가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면서 도안스님은 불교전파에 있어 소수종교계 관점에서 이 사회에 맞는 고정된 프로그램의 확보와 이벤트성 행사보다는 며칠간 계속되는 강의 같은 장기적인 내실을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를 일관되게 밀고 나가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면이고 스님이 미주한국불교계를 대표하는 스님으로 성장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유아원 운영, 로메리카대학 운영, 봉사단체 운영 등과 불교교리강좌등의 개설이다.
그래서 스님은 일찍부터 강좌를 많이 주최하였는데 1979년 11월 26일 전관응 스님을 초청하여 일주일에 걸쳐 <반야심경 특강>을 한 것을 비롯하여 1982년 3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3개월간 청장년을 위한 불교교리강좌 개최하였는데 강사에는 조계종 포교원장 무진장스님과 L.A. 동방대학 김구산 교수가 맡았다. 이때 청장년 26명이 수료를 하였다. 1986년에는 여름 불교교양대학을 개설하여 2개월간 강좌를 실시하였는데 1987년에는 7월부터 5주간 실시하였다.
도안스님은 본국에서 석주, 서옹, 경보스님등이 조언한대로 관음사가 어느 정도 괘도에 오르자 불교문화에 대한 방향으로도 시야를 넓혔다. 그리하여 문화활동을 위한 공간마련을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는데 이는 1980년 8월에 불교문화원 건림기금 서화전시회 준비모임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스님은 이를 위해 이해 9월 말에 한국 방문 시작으로 본국과 L.A.를 수 없이 드나들면서 본격화된다. 문화원 건립을 위한 첫 번째 모금행사는 1980년 10월 17일 L.A. 삼일당 화랑에서 관음사 주최로 열렸는데 서화전 개관식에 구산스님, 김철오, 김안수, 전영화, 전치환, 일본젠센터의 마스미노시, 나성 총영사관 및 각 사회단체장들이 참석하여 6만 2천달러 기금 모금을 하게 된다.
다음해 개원 7주년 기념법회때에는 문화회관 건립추진위원회 결성 준비회의에서 총재 강석주스님, 부총재 서경보, 이능가 스님, 건립위원장 배기생, 부위원장 이용호, 이한기 거사를 선출하였고 1981년 4월 10일 본국 칠보사에서 불교문화회관 건립자문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여기에 학계, 언론계, 문화계, 종교계 원로들이 참가하도록 하였다. 7월에는 현재 관음사 식당에 모셔져 있는 관음보살 대존상 이운법회를 조계종 총무원과 전국신도회 후원으로 조계사에서 가졌다.
불교문화회관에 봉안할 이 행사에 2,000여명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고 이 작품은 불교미술전에서 영예의 최고대상을 수상한 김흥복, 이명진씨의 역작이었는데 문화회관에 기증하였다. 그리고 L.A.에서도 인도 이인호선생 초청하여 불교문화원을 위한 기금모금을 했다. 그러나 미국의 한국불교계는 신도수도 적고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 모금이 어려웠다. 그리하여 1982년 10월 14일한국에 가서 모금행사를 종교계로서는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을 빌려서 합창제, 무용제, 판소리, 연예인 공연등으로 프로그램을 짰다.
여기에 출연한 사람만 해도 750명에 달하는 아주 대규모였다. 부산에서는 24일 부산시민회관 대강당에서 행사를 가졌다. 행사는 대 성황리에 끝났지만 행사와는 달리 경비를 제외하니 남는 것은 별로 없었다. 약 7만 달러가 남았다. 1983년부터는 문화회관 건립기금 마련을 위한 3천불 모시기 운동을 하였다. 한불당 봉안비는 300달러였다. 이후에도 모금행사는 여러 가지 형태로 계속되었다. 1985년에는 김태신화백 초청전시회를 하였다. 이렇게 1980년부터 시작한 문화원건립을 위한 준비와 모금으로 1986년 현재 입주한 건물을 매입하였다. 80만 달러에 계약을 하고 이외에 이 건물에 딸린 집기 15만 달러 등 총 95만 달러가 필요했다.
이 당시에 부동산 가격이 아주 떨여져 있었다. 이 재원은 세라노에 있는 건물을 팔고(6만 8천달러) 신도들이 임시 모금을 하여 보태고 하였지만 그래도 약 15만 달러가 부족하여 신자들이 5천달러, 2만 혹은 3만달러를 급전하여 왔다. 그리하여 66만 달러는 융자를 받고 당시 유태인 교회당인 현재의 이 건물 구입을 마쳤다. 세라노에 있을때는 건물로 $400가 들어갔는데 이사하고부터는 $6,273를 모게지로 매달 내야했다. 이 모게지는 2007년에 끝나게 되어있다. 모게지 외에도 보험료, 유지비로 많은 돈이 들어가 이를 충당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 건물을 확보하고서 관음사는 먼저 신도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어렵기는 하지만 당초 큰 염려를 하던 건물 모게지도 신도수의 대폭적인 증가로 인하여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큰 모험이었지만 크게 시작을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때 건물 구입을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도안스님은 당시를 회상한다. "그때 기회를 잡지 않았더라면 큰 발전을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건물이 있었기 때문에 큰 행사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관음사에서 운영하는 연꽃 유아원
건물은 지상 1만 4천 5백 스퀘어피트 총 3만 4천 5백스퀘어피트로 대도시 중심가에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미주한국불교계로서는 큰 자산을 하나 확보한 셈이다. 문화, 사회, 종교계 할것없이 활동에 있어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공간이다. 일생을 공간을 마련하는데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도안스님은 40대에 웬만한 행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고 이 건물을 확보한 덕분에 의미있는 행사를 많이 유치할 수 있었다. 도안스님이 문화원건물을 마련한 과정을 살펴본 필자는 이 일은 부처님이 도운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옥스퍼드와 3가가 만나는 곳에 자리잡은 관음사는 현재까지도 아마도 미주한국불교계 사찰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건물가격도 높을 것이다. 절 규모에 걸맞게 관음사에서는 하는 프로그램도 많다. 연꽃 유아원, 한미불교테레비젼방송, 로메리카 불교대학, 한미불교봉사회, 묘지분양사업, 도서관 운영, 불교합창단 운영 등이 대표적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넓은 공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음은 도안스님의 활동을 토대로 활동성격을 분리해 본 것이다.
앞서가는 스님
한국 불교계는 미주이민사회에서는 말할것도 없고 본국에서도 사회를 선도하지 못하고 뒤쳐져 쫓아가는 인상을 준다. 타종교에 비해서도 일반적으로 모든 부분에서 뒤쳐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도안스님은 사회의 흐름을 잘파악하고 여기에 눈높이를 맞추고 함께가는 인상을 준다. 불교계로서는 한창 앞서가는 스님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1976년 부처님 오신날 행사로 달마사, 삼보사, 관음사의 삼사합동법회 제안하여 성립시켰고, 1979년에는 벌써 100기의 불교묘지를 마련하였다.
또 이 해부터 약 3년에 걸쳐 이 지역의 라디오 방송을 이용하여 불교를 알리는 불교방송을 운영하였는데 이것은 미주최초의 불교언론이고 본국 불교방송보다도 10여년이 빠르며, 한국불교사의 첫 번째 불교방송인 것이다. 또 1997년에는 한미불교테레비젼방송을 통하여 매주 일요일 30분씩 방송하다가 현재는 1시간 방송하고 있다. 1985년에는 추석무렵에 망향성묘제를 시작하였다. 불교합창단도 ________년에 창단하여 미주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합창단을 운영하고 있다. 도서관도 미주한국불교계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며 도서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도서관이다.
1984년 L.A.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이때 올림픽조직위원회 종교관에서 한인교계에서는 불교계에서만 유일하게 본국에서 온 무허스님과 도안스님이 종교관 관리하면서 선수들 격려하였고 이때 처음으로 한국불교를 알리는 영어로 된 안내책자를 발행하였는데 미주의 사찰주소록도 비교적 정확하게 수록하였다.
본국의 불교 포교에 크게 한 몫을 한 것으로 불교교양대학이 있다. 미주에서도 한국의 불교교양대학을 모델로하여 관음사와 하와이 대원사는 교양대학을 일찍부터 했다. 그러나 이런 교양대학은 대개 몇 주 혹은 몇 개월이었다. 도안스님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가 2년제 불교대학인 <동산불교대학>을 1998년 2월에 출범시켰다.
그리고 이 졸업생들 20명이 조계종 포교사 시험에 합격한 후 2000년 3월 5일 L.A.관음사에서 조계종 포교원장 정련스님이 참석한 가운데 포교사증을 수여하는 품수식을 갖고 미주포교사단을 출범시켰다. 이후 동산불교대학은 로메리카대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도 꾸준이 신입생을 받아 포교사를 배출하고 있다. 유아원도 관음사 옆에 독립된 건물을 한채 매입하여 2002년 3월에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이런 도안스님의 행적은 미주한국불교사에서 앞서가는 일들이다.
국제불교활동에 앞장서는 스님
도안스님은 미국에서 한국 이민자를 대상으로 포교를 하지만 국제불교활동에도 누구보다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L.A.지역 타민족 불교행사에도 많이 참여하고 있고 또 관음사 행사에 스리랑카 스님들이 자주 참석하고 있다. 도안스님의 국제활동을 간력하게 추려보면 1987년 4월 25일 남가주 승가회가 주최하는 부처님 오신 날 기념 대법회를 관음사에서 일본, 중국, 타이 스리랑카,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미얀마, 티벳 등 남방불교 5개국, 북방불교 5개국 등 10개국이 모여 연합대법회를 할 때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또 같은 해 11월 11일 미주불교협의회( America Buddhist Congress) 창립총회를 관음사에서 개최하고 3인 공동의장(수석의장에 스리랑카 라타나샤나 스님, 칼 스프링거, 도안스님)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면서 한국불교계 뿐만 아니라 전미주의 타민족불교계에도 이름을 알렸다. 현재는 이 단체의 고문이지만 이 단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사무실을 관음사에 두는 등 지원을 하였다. 1988년 9월 13일에는 WFB(세계불교도우회)행사가 서래사에서 끝나자 참석자들 전원 초청하여 리셉션을 열었다. 이 날 성운대사 등 세계 각국 불교대표들과 연방 상원의원, 탐 브래들리 L.A.시장 등이 참석하면서 한국사찰 관음사를 세계의 많은 불교지도자들에게 선보였다.
또 매년 WFB 행사에는 참석하고 있는데 1992년 10월에는 대만에서 열린 대회에서 미국지부 승인을 받아 한국불교계와 관계없이 도안스님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1989년에는 관음사에서 남가주승가회 초청으로 이 지역 5대 종교지도자들, 달라이 라마,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옹스님 등 150여명을 초청하여 라타나샤나 스님, 칼 스프링거 등과 주축이 되어 이 행사를 마쳤다. 또 1993년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불교전래 100주년 기념 행사에도 숭산스님, 홍선스님, 삼우스님, 명성스님, 이장수법사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위와 같이 도안스님은 국제적으로 의미있는 불교행사에 주최자가 되거나 회원으로 국제불교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커뮤니티 활동에 적극적인 스님
도안스님은 1977년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당하였는데 이때 상처가 머리에 많이 남아있어 이 사고 이후부터 모자를 쓰고 다닌다. L.A.한인사회의 여러 행사에 승복을 입고 모자를 쓴 도안스님은 많은 사람들속에서도 눈에 잘 띄고 신문지상에도 자주 보이는데 이것은 스님이 불교계를 대표하여 커뮤니티 행사에 많이 참석하기 때문이다. 관음사는 한인의 날 퍼레이드에 6회 이상 신도들과 청년들과 함께 참석하여 꽃차 경연대회에 4번에 걸쳐 대상을 받았다.
1992년 L.A.에서 4.29 폭동때 피해자 돕기위한 조직을 하여 관음사에서 약 3천 달러를 모금하였고 서울에서 5만달러 지원받아 재해대책 본부에 전달하고 불교피해자들에게도 지원하였다. 또 도안스님은 피해자들 위한 청문회 참석하였다. 이외에도 도안스님은 평통위원, 한인회 자문위원, 5.18 행사에 관한 직책을 맡았다.
사회활동과 남북화해에 적극적인 스님
황해도 사리원 금강국수 공장에서 국수 만드는 장면을 직접 살펴보는 도안스님
도안스님은 남북화해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미국의 유일한 스님이다. 스님은 1991년 4월 1일부터 19일까지 법타스님과 북한을 방문하여 여러 사찰을 참배하고 돌아왔다. 그해 11월에 남북해외불교지도자들이 처음으로 한데 모여 관음사에서 합동법회를 하였다. 이후 도안스님은 남북화해와 통일운동을 하던 L.A.지역의 선우학원 박사, 홍동근 목사, 윤상해목사, 김운하, 은호기씨 등과 만나면서 시야을 넓히고 이들과 뜻을 함께 하였다.
1995년 4월에 미주평불협 2대 회장으로 추대된 도안스님은 이해 8월에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왔고 이후 1997년 5월에는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본부 중앙회 회장자격으로 양현승 목사 김명균 장로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여 옥수수 1,000톤을 전달하고 돌아왔다. 1998년 7월에는 평불협이 사리원에 세운 금강국수 공장을 직접 보고 왔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2002년에는 현일, 현철, 도철, 도범스님 등 여러 스님들과 함께 방문하기도 하였다. 평양을 직접 방문하면서 남북화해의 길을 모색하던 스님은 U.C.L.A.에서 주최한 행사에 참석한 진월스님, 심재룡교수, 정병조교수, 길희성교수, 박성배 교수등을 관음사로 초청하여 1995년 9월 16일 미주평불협 주최로 '조국통일 기여를 위한 종교학자 대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미주평불협 회장으로 불교계에서만 활동하던 스님은 범위를 넓혀 타 종교인들과 공조를 모색하는 2003년에는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종교인 학술회의>를 동국로얄대학교에서 개최하였다. 이 행사에는 개신교에서 NCC 회장을 역임한 이승만 목사, 평불협 회장 법타스님, 캐나다 피터브르그 주임 최종수 신부, 원불교 김혜봉 교무등이 발제자로 나섰고 도안스님은 기조연설을 하였다. 이 모임은 불교,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가 합동으로 남북화해 운동에 나서는 <북미주 종교평화협의회>로 발전을 하였다. 종교평화협의회는 1997년 평양에서 있었던 8.15행사 직후부터 도안스님이 타종교인들에게 '종교계의 연대를 통한 평화운동'을 역설하여 결실을 맺었는데 현재 이 단체의 공동의장에는 도안스님, 이승만 목사, 박창득 신부이다.
도안스님의 남북화해와 평화를 위한 활동은 미주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 평화연구회> 전세계에 살고있는 한인들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모임이다. 이 단체는 매년 세계 각국을 순회하면서 정기적으로 행사를 하는데 이 단체 '통일연구분과위원장'이 도안스님이다. 이 단체에서는 미국의 L.A., 일본, 독일 프랑크프르트 , 호주 시드니, 오스트리아 비엔나, 베트남,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영국 런던 등에서 행사를 하였고 올해는 평양에서 모임을 갖는다. 이 행사에는 개최국의 주재국 정치학자, 통일운동지도자들, 종교지도자, 기업인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북에서도 영국 런던대회와 비엔나 대회 때는 참가하였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L.A.불교계가 관음사와 도안스님 중심으로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도안스님의 사회활동이 많아지자 이에 대한 반발도 형성되었고 관음사 위주로 모든 것을 한다는공격도 받았다. 이런 저런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1975년에 미국에 온 도안스님은 이제 미국활동 30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동안 L.A.지역의 사찰이 달마사와 관음사 2개에서 이제는 30개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사찰 숫자에 비례하여 신도수는 증가하지 않고 기존의 신도들이 여러 사찰로 분산되는 인상이다. 그리고 고령화 되었다. 관음사도 예외가 아니다. 도안 스님의 활동에 비례하여 신도들이 늘지 않고 고령화 문제는 다른 사찰과 같은 문제이다. 관음사 정도의 도량이면 정기법회에 최소 300명이상 참석해야 한다. 도안스님이 관음사가 안고 있는 이런 문제를 잘 해결하여 스님의 활동이 객관적으로 입증되고 스님의 활동이 좀터 탄력을 받는 날을 기대해 본다.
김 형근 글/ 2004년 3월호 미주현대불교
첫댓글 스님 가심이 안타깝습니다. 사진으로만 뵈어도 자비의 빛이 환하신데...겨우 세수 일흔에...아마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스님, 편히 가십시요. 아미타 정토에서 부처님 뵙고 큰 뜻 깨치어, 찬란한 빛으로 다시 오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普賢合掌
파란연꽃님, 저희 카페로 모셔갑니다...
광명의 나라 연꽃 봉우리에 태어 나시어 찬란한 빛으로 돌아 오소서...스님의 입적을 애도합니다..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