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讓寧大君 李禔 墓域과 孝寧大君 李補 墓域
2011.10.22(토) 上道洞에 있는 讓寧大君 李禔 墓域과 10.19(수) 方背洞에 있는
孝寧大君 李補 墓域을 다녀왔다.
원래의 명칭은 ‘至德祠 附 墓所’, ‘淸權祠 附 墓所’였으나 서울시에서 2010년 10월 각각
‘讓寧大君 李禔 墓域’과 ‘孝寧大君 李補 墓域’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至德과 淸權의 의미는 중국 周 나라 太王이 맏아들 泰伯과 둘째 아들 虞仲을 제치고
셋째 아들 季歷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 하자, 태백과 우중이 父王의 뜻을 알고
荊蠻으로 가 隱居하며 왕위를 사양했는데, 후일 孔子가 論語 泰伯篇에서
태백을 ‘至德’, 우중을 ‘淸權’이라고 칭찬했다는 古事를 緣由로 正祖는
양녕대군의 사당을 <知德祠>, 효령대군의 사당을 <淸權祠>라고 賜額하였다.
孝寧大君墓域은 개방되어 두루 관람할 수 있었으나 讓寧大君 墓域은 정문이 굳게 닫혀있고
토요일이라 사무실도 잠겨있어 길 건너 회관과 담 넘어 주택가에서만 사진을 찍었다.
生前에는 讓寧大君이 더 豪宕했었던 것 같은데 死後에는 孝寧大君이 더 개방적인 것 같다.
2012. 07. 06 孤 山 朴 春 慶
讓寧大君 李禔 墓域 -서울유형문화재 지12호-
양녕대군의 祠堂과 墓로 讓寧은 太宗 李芳遠과 元敬王后 閔氏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諱는 禔, 諡號는 剛靖이며 부인은 光山 金氏 金漢老의 딸이다. (*諱: 죽은 이 이름 휘/
왕이나 諸侯 등이 생전에 쓰던 이름, *禔: 편안할 제, *諡: 시호 시)
至德祠는 肅宗 元年(1675) 右議政 許穆의 奏請으로 양녕대군의 德望을 기리기 위하여
崇禮門 밖 桃洞에 건립했는데 1912년 지금의 장소로 이전하였다.
이곳에는 祠堂을 중심으로 書庫, 祭器庫, 四大奉祀孫 神位를 모신 祠宇 등이 있다.
<至德祠> 편액은 正祖 13년(1789) 孔子가 태백을 ‘泰伯其可謂至德也’라고 한데서 ‘至德’이라
下賜하고 글씨는 知中樞府事 尹東暹이 썼다. (*暹: 날 빛 오를 섬)
찾아가는 길은 전철 7호선 장승배기역 ②번 출구에서 상도지구대(파출소)를 지나
신상도초등학교 부근 네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상도근린공원 조금 못 가서 있다.
(*장승배기역에서 시내버스, 또는 노량진역에서 08번 마을버스를 타도 된다고 한다).
讓寧大君 李禔 墓域 사진
(01) 讓寧大君 墓 外三門과 지덕사 표석
(02) 讓名門
至德祠의 정문으로 讓名이란 ‘명예로움을 사양한다’는 뜻으로 讓寧大君의 行蹟을 의미한다.
(03) 至德祠 표석, 孔子가 태백을 ‘泰伯其可謂至德也’라고 한데서
正祖가 ‘至德’이라 下賜했다고 한다.
(04) ‘至德祠 附 墓所’ 안내 표석이 거창한데 ‘至德祠 附 墓所’는 2008년 10월
‘讓寧大君 李禔 墓域’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05) 讓寧大君 李禔 墓域을 길 건너에서 본 모습
(06) 讓寧大君 李禔 墓域 全景, 장승배기역 ②번 출구에서 상도지구대에 문의하여 20여분을
걸어 도착했는데 문은 굳게 잠겨있어 길 건너 讓寧會館 계단으로 올라가서 찍은 것이다.
중앙의 至德祠 뒤로 墓域이, 사진 오른쪽 지붕이 보이는 건물은 2005년에 건축한
齋室인 韜光齋이다.
*韜光이란 ‘빛을 감춘다’는 뜻으로 王位 사양은 물론 이후 양녕대군의 드러내지 않는 조심
스런 처신이 본받을 만 하다 하여 재실 이름을 도광재라 命名하였다고 한다.(*韜: 감출 도)
(07) 至德祠, 讓寧大君과 隨城府夫人 光州 金氏의 神位를 모신 祠堂과 書庫, 祭器庫,
內三門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당 뒤로 墓가 보인다.
(08) 도광재 뒤쪽 담장 너머로 본 양녕대군 묘
(09) 讓寧大君 墓, 長明燈과 墓碑
合葬墓에 <讓寧大君 諡剛靖 諱禔之墓/隨城府夫人 光州 金氏之墓>라는 묘비는
純宗 4년(1910) 庚戌國恥日(8.29) 전날 밤에 落雷로 파손되어 보수하여 별도 보관하고
1988년 묘비를 複製하여 건립했다고 한다.
(10) 讓寧大君 墓, 齋室(韜光齋) 뒤 담장 밖에서 본 모습
(11) 齋室(韜光齋) 뒤 담장 밖에서 본 至德祠의 일부
(12) 담장 밖에서 본 至德祠의 일부, 오른쪽에 祠堂의 박공지붕 일부가 보인다
(13) 墓域 안의 造景
(14) <崇禮門> 표석, 讓寧大君의 글씨를 탁본하여 옮긴 碑로 <崇禮門> 현판의 크기와 글씨체가
같으며 拓本은 祠堂 안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大君이 妙香山에 올라 읊은 <題香山僧軸> 詩碑, 蘇東坡의 <後赤壁賦>를
草書體로 쓴 작품이 陰刻된 碑 등이 있으며, 讓寧大君의 16代孫 雩南 李承晩 대통령이
쓴, 후손에게 주는 교훈의 '訓筆' 詩碑가 있다고 한다.
(15) <崇禮門> 讓寧大君 親筆 懸板, 放火(2008.02.10)로 燒失되기 전인 2007.06.02에 찍은 사진
(16) 讓寧會館, 墓域 길 건너에 있으며 ‘財團法人 至德祠’, ‘全州李氏 讓寧大君派 宗中’,
‘獻陵奉香會’, ‘明陵奉香會’가 入住하였다.
사무실은 잠겼으나 현관문이 열려있어 계단으로 올라가 墓域全景을 찍었다.
(17) 도광루 담장 밖 빌라에 열린 감귤
孝寧大君 李補 墓域 -서울유형문화재 제12호-
효령대군의 祠堂과 墓로 太宗의 次男으로 諱는 補, 諡號는 靖孝이며 부인은 海州 鄭氏 鄭易의
딸로 蘂城府夫人이다. (*蘂: 꽃술 예)
독서를 즐기고 활쏘기에 능했으며 형인 讓寧이 世子에서 폐위되자 자신이 책봉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동생 忠寧이 세자로 책봉되자 불교에 심취하였다.
여러 儒臣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僧徒를 모아 佛經을 講論하도록 하고 1435년 檜巖寺 重修를
건의했으며, 世祖 10년(1464) 興福寺 터에 圓覺寺를 창건할 때 造成都監 提調가 되어 役事를
감독하고, <圓覺經>을 國譯하여 간행하였다.
성격이 원만하여 친족들과 우애가 깊었고 世宗, 文宗, 端宗, 世祖, 睿宗, 成宗까지 거치면서
91세까지 長壽하였으며, 冠岳山 戀主庵에 影幀이 봉안된 孝寧閣이 있다.
찾아 가는 길은 전철 2호선 方背驛 ④번 출구 바로 앞에 있다.
孝寧大君 李補 墓域 사진
(01) 孝寧大君 李補 墓域 前景
(02) <淸權祠> 표석
(03) 外三門
(04) 淸權祠 事務局
(05) 淸權祠 內三門
(06) 淸權祠, 補修공사 중이었다.
祠堂은 英祖 12년(1736) 勅命으로 京畿監營에서 건립하였으며, 1972년 有形文化財로
지정된 이후 1980년에 대대적으로 증수하였다.
正祖 13년(1789) <淸權祠 >라고 賜額하였다.
(07) 墓域의 향나무
(08) 孝寧大君의 8代孫 通訓大夫 李公과 淑人 豊讓 趙氏의 合葬墓
*淑人: 조선시대 정3품 堂下官과 從三品 文·武官의 嫡妻에게 내린 爵號
(*堂下官: 文臣은 정3품 通訓大夫, 武臣은 정3품 禦侮將軍 이하의 品階를 가진 자)
*淑夫人: 文·武官의 正三品 이상 堂上官의 嫡妻에게 내린 작호
(*堂上官: 문신은 정3품 通政大夫, 무신은 정3품 折衝將軍 이상의 품계를 가진 자)
(09) 孝寧大君의 7代孫 通訓大夫 李公과 淑人 靑松 沈氏의 合葬墓
(10) 孝寧大君 墓 전경
(11) 孝寧大君 墓, 雙墳으로 사진 왼쪽이 효령대군 묘, 오른쪽이 蘂城府夫人 海州 鄭氏의
묘이다. (*蘂: 꽃술 예)
墓碑는 풍화작용으로 磨耗가 심하여 훼손방지를 위하여 碑閣에 별도 봉안하고 1997년
복제품을 세웠으며 床石도 설치하였다.
(12) 長明燈
(13) 文人石, 文∙武人石을 세우는 王陵과는 달리 문인석만 두 쌍을 설치하였다.
(14) 孝寧大君 墓의 坐向, 고층아파트에 가려 冠岳山이 겨우 보인다.
(15) 墓에서 碑閣으로 연결되는 계단
(16) 碑閣, 사진 왼쪽은 <獻樹碑>, 오른쪽은 ‘案內’ 표석이다.
(17) 碑閣 안의 墓表(墓碑)
孝寧大君과 蘂城府夫人의 묘에 있던 墓表石으로 더 이상의 磨耗를 방지하기 위하여
묘에는 복제품을 세우고 1997년 10월 비각을 건립하여 이전하였다.
(18) 獻樹碑, 1999년 8월 15일 社團法人 淸權祠에서 건립
全州 李氏의 象徵 오얏나무와 白松, 朱木 등 2,000여 구루의 觀賞樹를 植栽한 기념비이다.
(19) 孝寧大君 神道碑와 慕蓮齋
(20) 孝寧大君 神道碑와 神道碑 解說文
(21) 孝寧大君 神道碑(新碑),
大君의 品階에 맞지 않는다고 1991년(辛未) 10월 20일 ‘社團法人
淸權祠가 건립한 신도비로 碑文의 내용은 舊碑와 같다.
(22) 孝寧大君 神道碑(舊碑), 사무국과 淸權祠 사이에 있다.
從17代孫 輔國崇祿大夫 完順君 李載完이 碑銘을 짓고,
前任 宮內府特進官 15대손 嘉善大夫 李勝宇가 썼으며,
16대손 完城君 李鳳儀가 篆字하고,
18대 宗孫 前 德川郡守 李康準이 光武 6년(1902) 10월에 건립하였다.
(*篆: 전자 전)
(23) 慕蓮齋와 연못
(24) 慕蓮齋, 淸權祠의 齋室로 1991년(辛未) 10월 20일 竣工한 건물
(25) <慕蓮齋> 현판과 井字살창
(26) 慕蓮齋 앞의 연못, 天圓地方思想이 반영되었다.
(27) <崇祖惇宗> (*惇: 두터울 돈/힘쓸 돈);
조상을 崇尙하고 宗親間의 정을 敦篤하게 하자고 설치한 표석인 것 같은데,
솔 밭 사이에 있어 가깝게 가보지 않아 누구의 글씨인지도 모르겠으나
글씨 배열이 左→右인 것을 보니 近間에 쓴 것 같다.
(28) 外三門 안쪽 모습
(29) 冠岳山 頂上 戀主臺 아래 戀主庵에 있는 孝寧閣 -2007.04.17 촬영-
1995년에 건립한 효령각에는 孝寧大君 影幀(경기유형문화재 제81호)이 奉安되어있으나
문이 잠겨 영정은 촬영하지 못하였다.
*戀主臺;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관악산에 올라 王宮을 바라보며 王座를 그리워했다는
전설이, 또 다른 전설은 고려의 康得龍·徐甄·南乙珍 등 遺臣들이 開京 쪽을 바라보며
고려를 戀慕하며 痛歎했고 붙여졌다고도 전한다.
- 끝 -
첫댓글 아프다고 하더니 부지런도 하셔라 나도 그 근방에 있다고 들었는데 한번도 가보지 못 했네요 덕분에공부 잘하고잘보았네요 두분의 이야기는잘알고 있지만 그련데 그분들도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안했으면 평범한 이방원의 아들로 살았을텐데 왕은 못되었지만 부모를 잘 만나야되는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그리고 같은 아버지아들인데 효령파양영파 웃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태 그리고 좁은 땅에 왕이다 뭐다 해서 죽은 다음 넓은 땅 차지하는것 도 불만 죽으면 한줌의 흙으로 돌아 가는데 이조가 그대로 계속 되었다면 온나라가 왕과 왕족 그리고 그 떨거지들의 묘지로 우리아랫것들은 모두 산꼭대기로 올라 가야 될 뻔하지 않았을까
通政大夫와 通訓大夫의 작위는 어떻게 구분이 되는가요, 정3품에도 당상관이 있고 당하관이 있다는 것인지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