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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주 김씨 세계- 왕조사, 항렬, 분파,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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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주김씨 세계
1. 왕실 연대표
2. 신라김씨왕조사 1대 미추왕(味鄒王) ---미추이사금 : 신라왕 13대 시조 대보공 알지의 7세손인 미추이사금께서 왕위에 오르시니 신라김씨 왕조의 시작이다. 어머니는 이찬 갈문왕(葛文王)의 따님 박씨이고, 비는 조비왕의 따님 광명부인 석씨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75호 시 대 - 서기 284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황남동 89-2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 정면적 - 61,413m² 경주시내 평지고분군에 있으며 현재 신라 사적공원인 대릉원(大陵苑) 안에 위치하여 있다. 주변에 대형분이 밀집하여 있으며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은 그 북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다. 지름 56.7m, 높이 12.4m로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한다. 내부구조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일 것으로 추정된다. 능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남쪽에는 삼문이 있으며 이 삼문을 따라 담장이 돌려져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으나 모두 후대에 설치한 것이다. 또 능 전방 가까운 곳에 왕을 제사하기 위한 숭혜전(崇惠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조선 정조 18년(1794)에 다시 세운 것이다.
▶죽엽군(竹葉軍) 고사 2대 내물왕(奈勿王) ---내물이사금 : 신라왕 17대 이름은 내물이니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요 갈문왕 구도(仇道)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휴례부인 김씨이고, 김씨로서는 제2대왕이다. 비는 보반(保反)부인 김씨이니, 일설에는 내례길포(內禮吉怖)로서 미추왕의 따님이라고도 한다. 홀해왕이 훙하고 아들이 없으매 내물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병진 원년 (진 영화 12년 서기 356년) 4월에 즉위하였다.
지정번호 - 사적 제188호 시 대 - 서기 402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교동 14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 - 사적 제161호에
경주 반월성(半月城) 북서쪽 계림(鷄林)에 인접하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2m, 높이 5.3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 자연석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는데, 이는 경주시내 평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는 달리 호석에 자연석 받침돌을 받쳐 놓은 것으로 신라 횡혈식(橫穴式) 석실분(石室墳)의 호석(護石)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 고분의 봉분 규모도 적석목곽분보다는 횡혈식 석실분에 알맞은 것으로 평지고분(平地古墳)이지만 매장주체(埋葬主體)는 횡혈식 석실일 가능성이 많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는데 후대에 설치된 것이다. 한편 이 고분 주위로는 평면 장방형으로 이 고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터 흔적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이 고분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3대 실성왕(實聖王)---실성이사금 : 신라왕 18대 알지의 예손인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서기 402년 실성왕이 즉위하였다. 실성왕은 김알지의 후손으로 이찬 별슬에 있던 대서지의 아들이다. 실성왕은 키가 7척5촌이나 되고, 사람됨이 똑똑하고 빼어나서 미래를 볼 줄 알았다. 내물왕이 죽자 그 아들이 어리므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왕으로 세웠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4대 눌지왕(訥祗王)---눌지마립간 : 신라왕 19대 내물왕의 아들. 비는 실성왕의 딸.
서기 417년에 눌지가 즉위하였는데, 왕호를 마립간(통치자라는 뜻)이라 하였다. 5대 자비왕(慈悲王)---자비마립간 : 신라왕 20대 눌지왕의 장남. 비는 미사흔의 딸
서기 458년, 자비왕이 즉위하니 눌지왕의 큰아들이다. 6대 소지왕(炤智王)---소지마립간 : 신라왕 21대 자비왕의 장남. 비는 김내숙의 딸. 일설에는 보습의 딸.
소지왕은 신라 제21대 왕으로 자비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겸손하고 어질어 백성들이 잘 따른 덕있는 왕이었다. 7대 지증왕(智證王) : 신라왕 22대 이름은 지대로(지대로) 혹은 지도로(지도로)라 하며 또 지철로(지철로)라고도 하고, 64세에 왕위에 올랐다. 습보의 아들이요, 내물왕의 증손이며 어머니는 오생부인 김씨니 눌지와의 따님이다. 비는 모량부마을 상공의 딸 박씨이다. 신장이 8척이 넘었다 한다.
지증왕은 신라 제22대 왕으로 이름은 지도로 혹은 지철로 이다. 재종형인 소지왕이 후계자가 없이 죽자 64세의 늙은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 데 기골이 장대하고 담력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왕이 되었지만 지증왕은 신라사에서 큰 업적을 남긴 왕이다. 그는 503년 그 동안 성행하던 순장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려 노동력의 상실을 경계하였고 각 주와 군에 명하여 농업을 장려하였으며, 농사를 지을 때는 소를 이용하는 우경법을 보급하는 등 농업생산력 향사에 힘썼다. 지증왕 무렵부터 확대 보급되면서 당연히 수리사업도 활발해졌다. 지증왕은 노동력도 중요시 생각해 아이를 많이 낳은 여자들에게는 포상을 하기도 하였다. 쌍둥이를 낳은 사람에게도 포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처음에 결혼을 하기 힘들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말로는 지증왕의 음경이 너무 컸다고 한다. 그의 음경의 길이가 무려 1자5치 (약45cm)였다. 음경이 너무 큰 관계로 마땅한 신부감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각 지방에 사람을 보내어 자기의 음경에 맞는 여자를 구하려 다니기도 했다. 어느 날 신하들이 신부감을 구하려 가다가 우연히 모량부라는 마을에 도착했다가 큰 개 두 마리가 북크기의 똥덩어리를 같이 들고 가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본 신하들은 저 정도의 똥을 눈 사람이라면 분명히 모든 것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신하들은 마을로 내려가 그 똥의 주인이 누구인지 수소문했다. 그것은 모량부 상공이라는 자의 딸이 눈 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서 보니 처녀의 키가 7자 5치 (약 2m20cm) 나 되었다. 신하들은 빨리 이 사실을 지증왕에게 알리고 처녀를 데리고 입궁했다. 그리고 지증왕과 맞추어 보니 딱 맞아 왕비로 삼았다는 것이다. 지증왕은 이러한 사회적 생산력의 발달에 힘입어 일련의 정치적 개혁도 시도하였다. 그는 즉위 4년인 503년에 이제까지 다양하게 사용되던 사라, 사로, 신라 등의 국명을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왕의 칭호를 마립간에서 중국식 명칭인 '신라국왕'으로 바꿨다. 지증왕은 신라의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한 왕이었다. 지증왕이 이때 확정한 신라라는 이름의 의미는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지증왕은 즉위 6년에 국내의 지방을 주, 군, 현으로 나누어 조직하였다. 지방제도로서 주군현제도의 확립은 고구려, 백제, 가야 등과 전쟁에서 획득한 점령지의 원활한 통치와 영토의 확장수단이었다. 즉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확립을 위해 새롭게 신라 영토로 편입된 점령지를 행정차원에서 일사분란하게 감독하여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지증왕이 같은 해에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신라 최초의 군주로 임명한 것도 다 이런 목적에서이다. 지증왕이 확립한 군주제는 군사적 필요에 따라 수시로 이동할 수 있는 군정적 성격을 지녔으며,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실질적인 중간통치기구로서 기능하는 외직이었다. 군사기구와 행정기구를 겸한 이 군주제도는 이후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다. 관산성 전투의 승패를 가른 김무력도 바로 신주 군주였다. 지증왕은 또한 동북 방면의 국경에 12개의 성을 축조하여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였으며, 즉위 13년인 512년에는 이사부를 시켜우산국을 정복하였다. 또한 남쪽으로 손을 뻗어 신라가 아직 정복하지 못한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여 그곳 백성을 행정적으로 회유하기도 하였다. 지증왕은 이 밖에도 도성 동쪽에 시장을 설치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에 78세의 나이로 죽었는 데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다. 신라에서 시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지증왕이 처음이었다 8대 법흥왕(法興王) : 신라왕 23대 휘는 원종(原宗) 지중왕의 아들. 비는 보도부인 박씨.
지정번호 - 사적 제176호 시 대 - 서기 540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효현동 63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 - 72,817m² 경주의 서악이라 불리는 선도산(仙桃山) 서쪽 기슭에서 뻗은 낮은 구릉의 소나무 숲 속에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삼국시대 신라 왕릉으로서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봉분의 표면이나 주위에는 아무런 장식물이 없으나, 봉분 아래에 자연석의 일각이 드문드문 드러나 있다. 이것은 호석(護石)을 받쳤던 자연석 받침돌로, 선도산 동쪽 기슭의 무열왕릉(武烈王陵)과 같은 구조의 호석이 축조된 것이다. 이러한 호석 구조는 경주시내 평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보다 한 단계 발전한 것이며,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橫穴式) 석실일 것으로 추정된다. 9대 진흥왕(眞興王) : 신라왕 24대 휘는 삼맥종(三麥宗) 법흥왕의 아우이고,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으로 신라가 종전에 미약했던 시기를 벗어나 팽창기로 들어가는 과도기적 시대로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영왕(英王)
지정번호 - 사적 제177호 시 대 - 서기 576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 - 37,993m²
10대 진지왕(眞智王) : 신라왕 25대 휘는 사륜(舍輪), 진흥왕의 차자. 비는 지도부인 박씨.
지정번호 - 사적 제178호 시 대 - 서기 579년, 857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 - 사적 제 177호에 포함됨 경주의 서악 선도산(仙桃山) 동쪽 기슭에 진흥왕릉(眞興王陵)과 인접하여 있으며 무열왕릉(武烈王陵)의 북쪽에 해당된다. 11대 진평왕(眞平王) : 신라왕 26대 휘는 백정(白淨) 진흥왕 태자였던 동륜의 아들, 모는 만호부인 김씨. 비는 마야부인 김씨. 후비는 승만부인 손씨
지정번호 - 사적 제180호 시 대 - 서기 632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보문동 608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 - 43,722m² 경주 시가지 동쪽 보문동의 평지 가운데에 있다. 동쪽으로는 명활산(明活山), 서쪽으로는 낭산(狼山)을 대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보문사지(普門寺址)가 있다. 원형봉토분으로서 지름 36.4m, 높이 7.9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 호석(護石)의 받침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몇 개 보일 뿐 별다른 장식물은 없다. 12대 선덕여왕(善德女王) : 신라왕 27대 휘는 덕만(德曼), 진평왕의 맏딸로서, 모는 마야부인, 성품이 관인(寬仁)하고, 사리에 밝아 진평대왕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화백회의에서 왕위에 옹립되었다.
지정번호 - 사적 제182호 시 대 - 서기 647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보문동 산 79-2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 - 사적 제163호에 포함 경주 시가지 동쪽에 있는 낭산(狼山)에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3.6m, 높이 6.8m이다. 봉분 밑에는 30-60cm크기의 깬돌 2, 3단으로 호석(護石)을 둘렀고, 그 외부에 호석의 높이만한 크기의 돌을 기대어 받쳐놓아 무열왕릉(武烈王陵)과 같은 호석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나 난간 구조물은 보이지 않고, 기타 장식물도 배치되지 않았다. 전면에 보이는 석상(石像)은 후대에 설치한 것이다. 13대 진덕여왕(眞德女王) : 신라왕 28대 휘는 승만(勝曼) 진평왕의 모제(母弟)인 갈문왕 국반의 따님. 왕은 용모와 자질이 아름답고 키가 7척이고 손은 무릎밑까지 드리웠다.
지정번호 - 사적 제24호 시 대 - 서기 654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산48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 9,498m² 경주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의 중복(中腹)에 위치하고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4.4m, 높이 4m이다. 봉토 밑에는 판석(板石)으로 병풍 모양의 호석(護石)을 돌렸다. 호석의 면석 사이 탱석(撑石)에는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다른 왕릉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비교해 볼 때 조각수법이 뒤지고 있다. 면석 위에는 장대석(長臺石)으로 된 갑석(甲石)을 올려놓았으나 뒤에 보수하여 원래의 장대석이 아닌 것도 있다. 호석 밖으로는 판석을 깔고 석주(石柱)를 세워 돌난간을 설치했으나 지금은 그 부재(部材)가 거의 다 없어졌다. 이외에는 별다른 석조물이 없고, 최근에 와서 축대와 통로를 만들었다. 14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신라왕 29대 휘는 춘추(春秋)요 수(壽)는 59세였다.
지정번호 - 사적 제20호 시 대 - 서기 661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2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 지정면적 - 14,169m²
무열왕릉(武烈王陵)은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仙挑山)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끝부분에 일렬로 5기의 대형분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다. 원형의 봉토분(圓形 封土墳)으로 주위 둘레 110m에 높이가 11m이며, 매장주체(埋葬主體)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분구의 언저리에는 호석(護石)을 받치는 자연석 받침돌들이 나와 있다. 15대 문무대왕(文武大王) : 신라왕 30대 휘는 법민(法敏)이니 태종무열왕의 태자요 모는 문명(文明)이고, 비는 자의왕후(慈儀王后) 김씨이다. 왕은 자표(姿表)가 영특하고,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고, 삼국을 통일하고 당을 몰아내어 물리친 군주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58호 시 대 - 서기 681년경 소 재 지 - 지 정 일 - 1967년 7월 24일 지정 면적 - 123,951m²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수중릉(水中陵)으로 동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닷속에 있다. 봉길리(奉吉里) 앞 바다 물속에 솟은 바위가 있어 이 바위를 대왕 바위(大王岩)라고 불러왔다. 대왕암 위에 올라보면 가운데에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고, 그 동서남북 사방으로 수로(水路)를 내어 맑은 바닷물이 파도를 따라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로 들어오고 서쪽수로로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 공간은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대왕암 가운데 넓은 공간에는 넓적하고도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데, 길이 3.6m·너비 2.85m·두께 0.9m의 거북모양의 화강암석으로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문무왕이 왜침을 진압하고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는데 끝내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동해의 "용"이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고 2년에 완공하였는데 금당 섬돌밑에 동쪽으로 향한 큰 구멍이 나 있으니 곧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면서 맴돌다 가도록 꾸민 것이다. 이는 대왕의 유조로 유골을 모셔 둔 곳으로 이름을 대왕암이라 했고 절 이름은 감은사이다. 뒤에 용이 실제로 나타나 보였으니 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 16대 신문왕(神文王) : 신라왕 31대 휘는 정명(政明), 문무왕의 장자. 비는 김씨 흠운의 딸 신목왕후.
지정번호 - 사적 제181호 시 대 - 서기 688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배반동 453-1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 정면적 - 35,283m²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의 동쪽에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형봉토분으로서 지름 29.3m, 높이 7.6m인 이 왕릉의 호석(護石)은 무열왕릉(武烈王陵) 형식에서 한단계 발전한 모습이다. 봉토(封土)의 아래에 벽돌 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들을 5단 정도 돌려쌓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덮은 호석에 단면 사각형으로 가공한 석재를 수십개 돌려 받쳐주고 있다. 이와 같은 호석구조는 무열왕릉 형식에서 성덕왕릉(聖德王陵) 형식으로 발전하여 가는 중간 형식이다. 17대 효소왕(孝昭王) : 신라왕 32대 휘는 이홍(理洪), 신문왕의 태자 비는 김씨.
지정번호 - 사적 제184호 시 대 - 서기 702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 8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 - 15,385m² 성덕왕릉 서쪽에 인접하여 구릉상에 있으며 주위에 송림이 울창하다. 원형봉토분으로 지름 10.3m, 높이 4.3m이다. 봉분의 밑에는 호석(護石)의 자연석 받침돌이 몇 개 보이고,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보이지 않는다. 18대 성덕왕(聖德王) : 신라왕 33대 휘는 륭기(隆基) 효소왕의 아우, 비는 무정왕후김씨 원태의 딸 성정왕후, 차비는 소덕왕후김씨 순원의 딸.
지정번호 - 사적 제28호 시 대 - 서기 737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 8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 11,174m² 경주 시내에서 불국사 방향 동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의 송림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성덕왕(聖德王)의 형인 효소왕(孝昭王)의 능으로 전해지는 고분이 있다. 이 왕릉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신라 최초로 완비된 왕릉제도를 갖추고 있다. 능 하부에 두른 호석(護石)은 신문왕릉(神文王陵)의 호석 구조에서 한 단계 발전한 형식으로 높이 90cm 정도의 판석(板石)을 면석(面石)으로 세우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올렸다. 면석들 사이에는 탱주(撑柱)를 끼워 고정시켰고 탱주 바깥쪽에는 삼각형의 받침돌을 세워 보강하였다. 이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는 둥근 형태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배치되었는데, 모두 방형기단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나 심하게 파손당하였다. 호석 밖으로는 판석을 깔아 회랑(廻廊)을 설치하고 회랑 밖으로 석주를 세워 돌난간을 둘렀다. 난간의 석주에는 상하 2개소의 관석(貫石)을 끼우기 위한 원공(圓孔)이 있으나 관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19대 효성왕(孝成王) : 신라왕 34대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제2자 비는 김씨.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태자 중경(重慶)이 717년에 죽었으므로 724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성덕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20대 경덕왕(景德王) : 신라왕 35대 휘는 헌영(憲英), 효성왕의 친동생, 비는 의충의 딸 만월부인 김씨. 효성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태자에 책봉되어 왕위를 계승.
지정번호 - 사적 제23호 시 대 - 서기 765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 산 8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 9,498m² 경주 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의 중복(中腹)에 위치하고 있다. 외형상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약 22m, 높이 약 6m이며, 능 하부에는 판석조 호석(板石造 護石)이 돌려졌다. 21대 혜공왕(惠恭王) : 신라왕 36대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왕자, 모는 만월부인 비는 신보왕후 김씨, 차비는 김씨장군의 딸, 8세에 즉위하였으므로 앙후가 섭정하였는데 나라가 몹시 어지러웠다.
22대 선덕왕(宣德王) : 신라왕 37대 휘는 양상(良相), 해찬 효방의 아들, 내물왕의 10세손, 모는 성덕왕의 딸인 사소부인 김씨,비는 구족부인 김씨, 양품의 딸.
신라 제37대 왕. ?∼785(재위 780∼785). 성은 김씨. 이름은 양상(良相). 경덕왕 23년(764) 시중(侍中)에 임명되었고, 그 뒤 감찰기관인 숙정대(肅政臺)의 장관이 되었다. 혜공왕 10년(774)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776년에는 한화(漢化)된 관제의 복고작업을 주관하였다. 780년 왕당파이던 이찬(伊飡)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범하자, 상대등이던 양상은 김경신(金敬信)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김지정을 죽이고 혜공왕과 왕비를 죽인 뒤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선덕왕은 왕위에 오른 뒤 어룡성(御龍省)에 대한 개편을 실시하였으며, 패강진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781년 패강의 남쪽 주현을 안무(按撫)하였고, 782년 한주(漢州;지금의 서울지역)에 순행하여 민호(民戶)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783년에는 김체신(金體信)을 대곡진(大谷鎭) 군주, 즉 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사업을 완료하였다. 패강진 개척은 왕권을 옹호해 줄 배후세력의 양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당의 덕종(德宗)이 검교대위계림주자사영해군사신라왕(檢校大尉鷄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의 봉작을 주었다. 유언대로 불법에 따라 화장하고 뼈를 동해에 뿌렸다. 23대 원성왕(元聖王) : 신라왕 38대 휘는 경신(敬信)이니, 일길찬 효향의 아들로 내물왕 12세손이오 모는 계오부인 박씨니 창도의 딸이다. 비는 연화부인이라 하고 숙정부인이라고 하는데 김씨로 각간 신술의 따님이다. 혜공왕 말년에 역신반란을 평정한 공이 있엄 선덕왕때에 상대등으로 있었다가 선덕왕에 자손이 없어 군신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처음 군신들은 왕의 족자인 주원(周元)을 세우려 하였으나 군신회의때 큰 비가 있어 알천(閼川)의 물이 넘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를 하늘의 뜻이라고 군신들이 판단하였다.
신라 제38대 왕. ?∼798(재위 785∼798).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경신(敬信). 내물왕의 12세손으로 효양(孝讓)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朴氏)이고, 비(妃)는 김신술(金神述)의 딸 연화부인(蓮花夫人:淑貞夫人) 이다. 아들 인겸(仁謙)·의영(義英)·예영(禮英)과 딸 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을 두었다. 혜공왕 16년(780) 김양상(金良相;선덕왕)과 함께 김지정(金志貞)의 반란을 진압하여 선덕왕이 즉위하자 상대등에 올랐다.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태종무열왕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을 이기고 왕으로 추대되었다. 즉위하자 아버지 효양은 명덕대왕(明德大王), 조부 위문(魏文)은 흥평대왕(興平大王), 증조부 의관(義寬)은 신영대왕(神英大王), 고조부 법선(法宣)은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는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하였다. 원성왕 1년(785) 총관을 도독으로 바꾸었고, 786년 당나라에 조공(朝貢)을 하고 신라왕의 책봉을 청하였다. 788년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실력 위주로 관리를 임용하도록 하였다. 790년 김제(金堤) 벽골제(碧骨堤)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또한 태자로 책봉된 인겸이 죽자 792년 의영을, 794년 인겸의 맏아들 준옹(俊邕;소성왕)을 연이어 태자로 책봉하여 왕과 태자가 중심이 된 근친왕족이 권력을 장악케 하였다. 불교에 관심이 많아 승관(僧官)을 두었고, 795년 봉은사(奉恩寺)를 지었다. 한편 790년에는 김제의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여 농사를 장려하였으며, 발해(渤海)와 통교하였다.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24대 소성왕(昭聖王) : 신라왕 39대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손자, 비는 계화부인 김씨, 대아찬 숙명의 딸.
혹은 소성왕(昭成王)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준옹(俊邕). 원성왕의 큰아들인 인겸(仁謙, 惠忠太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 성목태후(聖穆太后)이다.
휘는 청명(淸明), 소성왕의 태자, 모는 계화부인, 비는 박씨. 13세에 즉위하여 아찬 병부령 언승이 섭정했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청명(淸明)인데 뒤에 중희(重熙)라 개명하였다. [참고문헌] 26대 헌덕왕(憲德王) : 신라왕 41대 휘는 언승(彦昇), 소성왕의 친동생, 비는 귀승부인 김씨, 각간 예영의 딸. 왕은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이 되었다. 악무를 좋아했고 숭례전에서 잔치를 배풀며 스스로 고금(鼓琴)을 탔다.
지정번호 - 사적 제29호 시 대 - 서기 826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동천동 80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 18,007m² 경주 북천변에 있는 이 능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6m, 높이 6m이다. 봉토(封土) 밑에 판석조(板石造) 호석(護石)을 둘렀는데 밑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판석(板石)으로 면석(面石)을 세웠으나, 현재 면석은 없어진 것이 많다. 27대 흥덕왕(興德王) : 신라왕 42대 휘는 수종(秀宗), 헌덕왕의 친동생, 비는 장화부인 김씨, 소성왕의 딸.
지정번호 - 사적 제30호 시 대 - 서기 836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 지 정 일 -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 61,983m² 흥덕왕릉(興德王陵)은 괘릉(掛陵)과 함께 능묘제도가 잘 갖추어진 신라 왕릉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왕과 왕비를 합장(合葬)하였다고 전한다. 능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며 봉토(封土) 밑에는 판석조(板石造) 호석(護石)을 둘렀다. 호석은 바닥에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판석(板石)으로 면석(面石)을 세우고 면석 사이에는 탱석(撑石)을 끼워 면석을 고정시켰다. 아울러 탱석에는 각각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는 갑석(甲石)을 올려 호석을 마무리하였다. 호석이나 십이지신상의 조각은 괘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 조각수법은 괘릉에 뒤진다. 호석의 주위로는 판석을 깔아 회랑(廻廊)을 설치하고 그 밖으로 돌난간을 세웠는데 난간(欄干) 석주(石柱)는 상하 두곳에 원공(圓孔)이 뚤려 관석(貫石)을 끼우는 형식이다. 현재 난간 석주는 없어진 것이 많다. 왕릉의 외부에는 네 모서리에 석사자(石獅子)가 배치되었는데 이는 성덕왕릉(聖德王陵)의 석사자 배치와 같다. 능 앞으로는 문인석(文人石) 한쌍과 무인석(武人石) 한쌍, 석화표(石華表) 한쌍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왕릉의 전방 좌측에는 능비(陵碑)를 세웠는데, 능비는 현재 귀부(龜趺)만 남아 있고 비신(碑身)과 이수는 없어졌다. 귀부의 조각 수법은 성덕왕릉(聖德王陵)의 귀부와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왕릉은 성덕왕릉과 괘릉의 형식을 모방하여 건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장자인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은 본명이 김수종(金秀宗, 또는 景徽)이고, 헌덕왕(憲德王)의 동생으로 왕비는 장화부인(章和夫人)이다. 재위기간에는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장보고(張保皐)를 대사로 삼아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으며, 당(唐)으로부터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하고 재배시켰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장지가 "안강북 비화양(安康北 碑火壤)"이라고 하여 현재의 위치와 대체로 부합되며, 특히 왕릉의 주위에서 "흥덕(興德)"이란 명문의 비편(碑片)이 발견되어 이 능이 흥덕왕릉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28대 희강왕(僖康王) : 신라왕 43대 휘는 제륭(悌隆), 원성왕의 손자, 이찬 헌정의 아들, 비는 문목부인 김씨, 대아찬 충공의 딸.
지정번호 - 사적 제220호 시 대 - 서기 838년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 34 지 정 일 - 1971년 4월 28일 지정 면적 - 9,488m² 경주 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에 있으며, 북쪽에 인접하여 민애왕릉(閔哀王陵)이 위치하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14m, 높이 3.4m이다. 봉분만 있을 뿐 다른 시설물은 보이지 않는다. 29대 민애왕(閔哀王) : 신라왕 44대 휘는 명(明), 원성왕의 증손 대아찬 충공의 아들. 비는 윤용왕후 김씨. 형정을 바로잡고 상대등으로 있다가 반란을 일으켜 왕으로 등극. 그러나 김양(金陽)이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의 장보고와 합세하여 달구벌(대구)에서 왕의 군사를 물리쳤고 왕은 도망하다가 김양의 군사에게 살해되었다.
지정번호 - 사적 제190호 시 대 - 서기 838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 산 40 지 정 일 - 1970년 2월 6일 지정 면적 - 11,302m² 경주 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능 남쪽 가까이에 희강왕릉(僖康王陵)이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2.5m, 높이 3.8m이다. 이 왕릉은 광복 이전에 두 차례나 도굴(盜掘)당하였고, 1981년에도 도굴 미수사건이 있었다. 1984년 9월에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봉분과 주변을 발굴조사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신라 제44대 민애왕(閔哀王, 敏哀王이라고도 한다. 재위 838-839)은 본명이 김명(金明)이고,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이다. 비(妃)는 김씨는 윤용왕후(允容王后). 이홍(利弘)과 더불어 희강왕(僖康王)을 협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도 역시 곧 피살되었다. 재위기간은 왕위쟁탈전의 혼란한 시기였으며, 별다른 치적도 남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의 피살사건과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는 사실만 전할 뿐 장지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또한 원화 십년명 골호가 이 능이 조성된 뒤에 묻혀, 이 능은 서기 815년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민애왕의 연대와는 맞지 않는다. 30대 신무왕(神武王) : 신라왕 45대 휘는 우징(祐徵)이니 상대등 균정의 아들이요 희강왕의 종제이니 어머니는 정교부인 박씨이다. 비는 진종부인 김씨니 명해의 따님이다. 31대 문성왕(文聖王) : 신라왕 46대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요 모는 진종부인이고 비는 소명부인 김씨니 시중 위흔의 따님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178호 시 대 - 서기 579년, 857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면적 - 사적 제 177호에 포함됨 경주의 서악 선도산(仙桃山) 동쪽 기슭에 진흥왕릉(眞興王陵)과 인접하여 있으며 무열왕릉(武烈王陵)의 북쪽에 해당된다. 32대 헌안왕(憲安王) : 신라왕 47대 휘는 의정(誼靖), 신무왕의 이복동생 모는 조명부인.
지정번호 - 사적 제179호 시 대 - 서기 861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면적 - 사적 제177호에 포함됨 선도산(仙桃山)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며 지름 15.3m, 높이 4.3m로 봉분(封墳)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봉분 아래에 호석(護石)의 받침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몇 개 나와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보이지 않는다.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33대 경문왕(景文王) : 신라왕 48대 휘는 응렴(膺廉), 아찬 계명의 아들, 희강왕의 손자, 모는 광화부인 비는 문의왕후 김씨(처음에는 영화부인 김씨 헌안왕의 딸).
성은 김씨, 이름은 응렴(膺廉), 혹은 의렴(疑廉)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버지는 계명(啓明)이며,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이며, 할머니는 충공(忠恭)의 딸인 문목부인(文穆夫人)김씨이다. 왕비는 헌안왕의 큰 딸인 영화부인(寧花夫人)김씨이고, 뒤에 헌안왕의 작은 딸도 왕비로 삼았다. 아들은 황(晃: 정강왕), 정(晸: 헌강왕), 윤(胤)이고, 딸은 만(曼: 진성여왕)이며, 동생으로 위홍(魏弘)이 있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국선(國仙)이 되었는데, 헌안왕이 불러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본 일을 묻자 선행을 행한 세 사람을 말하였는데, 첫째는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하나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부호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요, 셋째는 고귀한 세력가이면서 그 위엄을 보이지 아니한 사람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안왕이 어짐을 알고 사위로 삼고자 하여 왕의 두 딸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게 하였다. 이에 낭도인 범교사(範敎師: 삼국사기에는 興輪寺僧이라고 함.)의 조언을 받아들여 왕의 큰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경문왕은 불교에 비교적 관심이 많아 낭도 중에도 승려가 많았으며 864년에 감은사에 행차하였고, 866년에는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871년에는 황룡사구층탑을 개조하였다. 경문왕은 불교뿐 아니라 국학에도 관심이 있어 864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다. 즉위한 직후 나라를 잘 다스려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때 왕의 정치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국선출신이 많았는데, 곧 요원랑(邀元郎), 예흔랑(譽昕郎) 등이다. 이들은 국토를 유람하면서 왕을 위하여 치국의 뜻을 노래로 짓고, 이를 다시 사지(舍知)인 심필(心弼)을 시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내어 〈현금포곡 玄琴抱曲〉, 〈대도곡 大道曲〉, 〈문상곡 門詳曲〉 등 3수의 노래를 짓게 하였는데, 경문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가사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즉위 초 861년에 대사면을 실시하고 862년 이찬(伊飡) 김정(金正)을 상대등으로, 아찬(阿飡) 위진(魏珍)을 시중에 임명하였으며 866년에는 아버지 계명을 의공대왕(懿恭大王), 어머니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 왕비를 문의왕비(文懿王妃)로 봉하고 왕자 정을 태자로 삼는 등, 열의를 가지고 정치를 했지만, 진골귀족간의 오랜 분쟁은 일시에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중기 이후에는 반란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866년 이찬 윤흥(允興)과 그 동생 숙흥(叔興), 계흥(季興)의 모역과, 868년 이찬 김예(金銳), 김현(金鉉) 등의 모반, 874년 근종(近宗) 등의 모역이 있었다. 그리하여 경문왕은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죽었다. 한편, 경문왕은 산 뱀을 가슴에 덮고 자는 나쁜 습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당나귀 귀와 같은 큰 귀를 가졌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역시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34대 헌강왕(憲康王) : 신라왕 49대 휘는 정(晸), 경문왕의 태자로 모는 문의왕후 비는 의명부인. 왕의 성품이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하여 한번 눈으로 보면 모두 암송하였다.
지정번호 - 사적 제187호 시 대 - 서기 886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남산동 산 55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면적 - 69,626m² 경주 남산의 동록 통일전(統一殿) 북쪽 가까이에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바로 남쪽에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은 본명이 김정(金晸)이고 경문왕(景文王)의 큰 아들이며, 왕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35대 정강왕(定康王) : 신라왕 50대 휘는 황(晃), 헌강왕의 아우이고 경문왕의 제 2자로서, 조차인 요가 출생후 돌 전이라 임시로 나라를 다스렸다.
지정번호 - 사적 제186호 시 대 - 서기 887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남산동 산 53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면적 - 35,702m² 이 능은 신라 정강왕(886-887)의 무덤이다. 36대 진성여왕(眞聖女王) : 신라왕 51대 휘는 만(曼), 헌강왕의 여동생이며 정강왕의 누이. 각간인 위홍과 내통하며 정사를 의논했다.
신라 시대 3인의 여왕 중 마지막 여왕이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만(曼).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懿恭大王)에 봉해진 김계명(金啓明)이며, 할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으로 광의왕태후(光義王太后)로 봉해졌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장녀로 뒤에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해진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다. 형제로는 정(晸:헌강왕)·황(晃:정강왕)·윤(胤) 등이 있다.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皇龍寺)에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887년(진성여왕 2) 2월 숙부(叔父)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上大等) 위홍(魏弘)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대야주(大耶州)에 은거하던 왕거인(王巨人)의 국왕 비판 등이 있었으며, 888년부터는 주·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를 계기로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때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이를 토벌하지 못하였다. 이 난을 계기로 계속해서 적당(賊黨)의 난이 일어났다. 891년에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적수 양길(梁吉)이 부하인 궁예(弓裔)를 시켜 동쪽으로 원정하게 하여 명주(溟州:지금의 강릉)까지 함락시켰다. 그 다음해에는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에서 견훤(甄萱)이 스스로 후백제를 건국하니 무주(武州:지금의 光州)동남쪽의 군현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 895년에는 영주를 손에 넣은 궁예가 다시 저족(猪足)·생천(生川)을 거쳐 한주(漢州)·철원(鐵圓)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세력의 휘하에 들어갔다. 또,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赤袴賊)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진출하여 민가를 약탈하는 등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崔致遠)은 894년에 시무10조(時務十條)를 제시하였다.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 이 개혁이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지 못함으로써 신라의 붕괴는 막을 수 없었고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 897년 6월 조카인 헌강왕의 아들 요(嶢:뒤의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12월에 죽었다. 황산(黃山)에 장사 지냈다. 한편, 진성여왕 때에는 거타지(居陀知) 설화가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이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이하는 설화와 비슷하다. [참고문헌] 37대 효공왕(孝恭王) : 신라왕 52대 휘는 , 헌강왕의 서자, 모는 김씨 의명왕태후 비는 이찬예겸의 딸 박씨.
지정번호 - 사적 제183호 시 대 - 서기 912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배반동 산 14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면적 - 37,993m² 신문왕릉의 동쪽 얕은 구릉상에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형봉토분으로서 지름 21.2m, 높이 5m이다. 봉분 밑에 호석의 자연석 받침돌 몇 개가 보이고 있어 무열왕릉과 같은 형식의 호석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외의 장식물은 하나도 없다. 신라 제52대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은 본명이 요(嶢)이고, 헌강왕(憲康王)의 서자(庶子)이다. 재위기간은 국정이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며,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후고구려의 궁예(弓裔)에게 국토를 유린당하여 많은 국토를 빼앗겼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912년 왕이 죽자 시호를 효공(孝恭)이라 하고, 사자사(師子寺, 또는 獅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왕이 죽자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여 그 유골을 모아 구지제(仇知堤)의 동산 옆에 묻었다고 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왕릉의 남쪽에 사지가 있어 사자사터로 추정하고 있다. 38대 경순왕(敬順王) : 신라왕 56대 서기 927년, 경순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부(傅)이며 문성왕의 후손이다. 왕은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라 전 왕의 시신을 모시고 신하들과 함께 통곡한 후, 시호를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 지냈다.
경순왕(?-979)은 신라 56대 왕으로 927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승하한 뒤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정책과 신라의 민심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쪽으로 기울었다. 935년 후백제의 잦은 침공과 각처의 군웅 할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자 김봉휴로 하여금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여 재위 8년의 신라 마지막 왕이 되었다.경순왕은 태조로부터 유화궁을 하사 받고 태조의 딸 낙랑 공주를 아내로 맞았으며 정승에 봉해지는 한편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으며 경주의 사심관으로 고려 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신라왕릉으로는 경주를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왕릉이다.백성들을 위해 천 년 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경순왕이 잠드신 능은 백학면 고랑포리에 있다. 봉분 주위에는 보호석이 둘러 있으며, 주변에 나지막하게 둘러 쌓아놓은 담이 있다. 능 앞에 '신라 경순왕지능'이라는 비석이 있으며, 그외에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2. 경주김씨 왕조사 (慶州金氏 王朝史)
2. 김씨왕조(金氏王朝)에 대한 기 문 유사(記 文 遺事)
3. 중시조, 파조(中始祖, 派祖) 1. 김순웅(金順雄) 대장군공(大將軍公)
4. 항렬(行列)이란? 항열이란 같은 혈족사이에 세계(世系)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문중(門中)의 법을 말한다.
계림군파 항렬표
鷄林君派(계림군파) 파조 중조 경순왕 시조 孟派(맹파) 仲派(중파) 京派(경파) 稛 順雄 傅 閼智 희경공파 부제학공파 공절공파 송애공파 판윤공파 공호공파 부사공파 균 순웅 부 알지 泰태 ○○鎭진 星성 ○○ ○○ 星성 ○○ ○○ 16세 28세 30세 57세 ○○ 東동 ○○ ○○ ○○ ○○ ○○ 永영 ○○ 17세 29세 31세 58세 秉병 相상 ○○夏하 ○○ 敎교 敎교 載재 ○○ 敎교 敎교 相상 18세 30세 32세 59세 ○○ 燮섭 煥환 正정 正정 正정 正정 19세 31세 33세 60세 埈준 ○○ ○○ ○○ ○○ ○○ ○○ ○○ 20세 32세 34세 61세 ○○ 學학 知지 知지 學학 時시 冠관 知지 知지 ○○ 知지 ○○ 21세 33세 35세 62세 潣민 ○○ ○○ ○○ ○○ ○○銖수 ○○鍾종 鍾종 鐸탁 ○○ ○○ 丙병 ○○ ○○ 22세 34세 36세 63세 ○○ 鎭진 是시 是시 鎭진 ○○洪홍 ○○泳영 ○○ ○○ 是시 是시 時시 是시 鎭진 23세 35세 37세 64세 洛낙 ○○ ○○ ○○ 相상 東동 東동 柱주 ○○ ○○ ○○ ○○ ○○ 24세 36세 38세 65세 ○○ 相상 胄주 相상 ○○ ○○ ○○ ○○ 胄주 胄주 ○○ 胄주 ○○ 25세 37세 39세 66세 鍑복 ○○ ○○ 奎규 中중 奎규 致치 ○○ ○○ 相상 ○○ 相상 26세 38세 40세 67세 ○○ 奎규 奎규 ○○ ○○ 道도 道도 光광 道도 光광 27세 39세 41세 68세 楠남○○ ○○ ○○ 泳영 淳순 ○○ ○○ ○○ ○○ ○○ 28세 40세 42세 69세 ○○ 海해 海해 ○○ ○○ ○○ ○○ ○○ ○○ 29세 41세 43세 70세 奎규○○ ○○ ○○ 容용 恒항 洪홍 洪홍 30세 42세 44세 71세 ○○ 炳병 ○○ ○○ 根근 根근 31세 43세 45세 72세 滿만○○ ○○ 善선 商상 容용 容용 32세 44세 46세 73세 ○○ 錫석 ○○ ○○ ○○ ○○ 33세 45세 47세 74세 燉돈○○ ○○ 榮영 和화 鍾종 鍾종 34세 46세 48세 75세 ○○ 柱주 ○○ ○○ ○○ ○○ 35세 47세 49세 76세 두계공파 (휘 충유
수은공파 (휘 충한) )
밀직공파 (휘 충원)
월성부원군파 (휘 천서)
충선공파(휘혼) 忠宣公派(諱琿)
병판공파 (휘 덕재)
백촌공파 (휘 문기)
익화군파(휘인찬) 益和君派(諱仁贊)
태사공후(휘 인관) 전서공파(휘자정),재신공파(휘)
수은공파, 쌍향단파
태사공파, 상촌공파
병조판서공파
판도판서공파
두계공파
충선공파
월성부원군파
5. 경순왕의 자녀경주김씨 자손으로서 알아 두어야 할 유적이 있어 간단히 소개한다.
6. 사관(賜貫) 및 사성일람 (賜姓一覽)
7. 경주김씨 가훈
세상에 큰 용맹을 가진 사람이 있으니 그는 헐뜯어도 노여워하지 않고 덤벼들어도 놀라지 않고 욕을 하여도 편찮아하지 않는다. 대체로 용맹스런 사람은 의로운 일을 행하는데 용감한 것이다. 그러므로 분하고 성나는 생각을 마음속에 넣어두지 아니하고 다만 그런 점을 보아도 온공한 태도를 취할 따름이니라. 관후하고 포용력이 있으라. 마음가짐이 평탄하여 능히 마음이 너그럽고 큼으로써 남을 건져 주어라. 평생에 마음의 과실을 말하지 말라. 세상에서 말하는 헐어서 꾸짖음과 칭찬함과 얻고 잃음과 영광과 치욕과 재앙과 복을 일체 도의시하라. 대저 성현의 도리는 몸소행하여 헛된 의론을 숭상하지 않는데 있다. 진실한 것은 마땅히 구할 것이다. 허황한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어둡고 좁은 곳에서 매우 넓은 곳에 놓는다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없어서 본의를 완전히 상실할 것이므로 배우는 도리는 오로지 실사구시(사실에 토대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일)라는 한 말을 주로하여 실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8. 경주김씨 종가
9. 신라김씨同源分貫分姓(동원분관분성)
1991년 1월 발행 참고 : 경주김씨계림군파대동보(1991년 발행)
10. 가문의 역사속 인물
10-1. 신라시대
김가기(金可紀 / ?~859) 신라의 도교가(道敎家)·학자. 제38대 원성왕 때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빈공과(賓貢科)에 급제, 학식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때 사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도술(道術)을 닦고, 종남산 자오곡 (終南山子午谷)에 은둔하여 화초와 도리 (桃李)를 가꾸며 《선경 (仙經)》과 《도덕경(道德經)》을 즐겨 읽었다. 858년 당나라 황제에게 상소하여 자기가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영문대시랑(英文臺侍郞)이 되어 이듬해 2월 15일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황제가 이상하게 여겨 사자를 파견하여 동정을 살폈는데, 그 날이 되자 과연 오색구름이 영롱한 가운데 그가 홀연히 승천하였다고 한다. 김개원(金愷元) 신라의 왕족. 이름을 예원(禮元)이라고도 한다. 무열왕의 아들. 김유신(金庾信)의 생질. 655년 (무열왕 2) 이찬(伊2)이 되고, 667년 당나라 고종의 칙령으로 장군이 되어 요동 전역(戰役)에 참가하여 대아찬(大阿2)에 올랐으며, 이듬해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이 되었다. 683년 신문왕이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신목왕후(神穆王后)로 맞이하게 되자, 왕의 명으로 그 집에 가서 딸을 부인(夫人)으로 책봉하였다. 695년(효소왕 4) 상대등에 올랐다 혜공왕(惠恭王 / 756~780) 신라의 제36대 왕(재위 765∼780). 성명 김건운(金乾運). 경덕왕의 큰아들. 어머니는 서불한(舒弗) 의충(義忠)의 딸 만월부인(滿月夫人) 김씨(金氏). 8세에 즉위하여 한때 태후(太后)가 섭정을 하였고, 당나라와 친교를 맺고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768년 당나라 대종(代宗)으로부터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재위 중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였는데도, 사치와 음탕한 생활을 일삼아 궁중의 기강이 문란해졌다. 768년 일길찬(一吉2) 대공(大恭)의 모반을 비롯하여, 770년 대아찬(大阿2) 김융(金融)이 모반을 일으켰으며, 775년 이찬(伊2) 김은거(金隱居)가 모반을 일으켰다. 780년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하게 하였으나, 왕비와 함께 난군(亂軍)에게 피살되었다. 원성왕(元聖王 / ?~798) 신라 제38대 왕(재위 785∼798). 성명 김경신(金敬信). 비(妃)는 각간(角干) 김신술(金神述)의 딸 연화부인(蓮花夫人:淑貞夫人). 780년(혜공왕 16) 이찬(伊飡) 때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선덕왕)과 함께 김지정(金志貞)의 난을 평정, 그 공로로 선덕왕 즉위 뒤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을 계승, 왕위에 추대된 왕의 족자(族子) 주원(周元)이 홍수로 알천(閼川)을 건너오지 못하자, 이를 하늘의 뜻으로 믿은 대신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786년 당나라에 조공(朝貢)을 하고 신라왕의 책봉을 청하였으며, 788년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790년 김제(金堤) 벽골제(碧骨堤)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죽은 뒤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봉덕사(奉德寺) 남쪽에 묻혔다. 김관장(金官長) 통일신라 초기의 대신. 대아찬(大阿2)으로 680년(문무왕 20) 금마저(金馬渚:전북 익산)의 고구려 유민 안승(安勝)에게 가서 신라왕의 교지(敎旨)·교서(敎書)를 전하였으며, 687년(신문왕 7) 사벌주(沙伐州:경북 상주)의 총관(摠管)이 되었다 김구도(金仇道) 신라 초기의 장군. 미추왕(味鄒王)의 아버지. 172년(아달라왕 19)파진찬(波珍)에 오르고, 185년(벌휴왕 2) 좌군주(左軍主)가 되고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다. 188년 백제의 군대를 모산성(母山城)에서 막고 189년 백제군을 구양(狗壤)에서 격파하였다. 190년 백제의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했으나, 도리어 패하여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되었다. 아들 미추가 왕위에 오르게 되어 263년(미추왕 2) 갈문왕(葛文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김구리지(金仇梨知) 신라의 대신. 내물왕의 6대손이고, 사다함(斯多含)의 아버지. 급찬(級飡) 벼슬을 지냈다. 김군관(金軍官 / ?~681) 통일신라 초기의 장군·대신. 신문왕비(神文王妃)의 아버지. 김유신(金庾信)과 김인문(金仁問)을 도와 고구려 정벌에 큰 공을 세우고, 661년(문무왕 1) 남천주총관(摠管)이 되어 고구려 원정에 출정하였다. 663년 아찬(阿飡)이 되어 한천주(漢川州:경기 광주) 도독을 지내면서 삼국통일에 공을 세우고 상대등에 올랐다. 681년 김흠돌(金欽突)의 모반사건을 보고하지 않은 이유로 자결 명령을 받고 죽었다. 김 귀(金 貴) 통일신라 민애왕 때의 대신. 838년(희강왕 3) 이찬(伊飡)으로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
김균정(金均貞 / ?~836) 통일신라시대의 왕족. 원성왕의 손자. 신무왕·헌안왕의 아버지. 802년(애장왕 3) 대아찬(大阿飡)이 되고, 812년(헌덕왕 4) 시중(侍中)으로 승진하였다. 822년 이찬(伊飡)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웅천주도독 김헌창(金憲昌)을 성주에서 격파하였다. 835년(흥덕왕 10) 상대등이 되었으나, 이듬해 왕이 후사 없이 죽자 종질(從姪) 제륭(悌隆)과 왕위다툼을 하다가, 김이홍(金利弘) 등에게 살해되었다. 아들 우징(祐徵)이 신무왕이 되자 성덕대왕(成德大王)에 추봉되었다. 김 기(金 耆 / ?~758) 통일신라 시대의 정승. 이찬(伊飡)의 관등으로서, 755년(경덕왕 14) 7월 조량(朝良)의 후임으로 시중(侍中)이 되어 국정을 총찰하였다. 758년 정월 사망하여 시중 재임기간은 2년 6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나, 이 사이 관리 봉급을 토지로 분급하는 녹읍제(祿邑制)를 부활시켜 녹봉제의 개혁을 시도하고 전국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김대렴(金大廉)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에서 차(茶)를 가져온 사신. 828년(흥덕왕 3)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차의 종자를 가지고 왔으며, 흥덕왕이 이것을 지리산에 심어 재배하도록 명령하였다. 차는 이전부터 있었으나 대개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이며, 그가 차 종자를 가지고 온 이후부터 성하였다. 김대문(金大問) 통일신라시대의 유학자 저술가. 진골귀족 가문 출신. 704년(성덕왕 3)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을 지냈다. 저서로 《계림잡전(鷄林雜傳)》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한산기(漢山記)》 《악본(樂本)》 등이 있으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 《계림잡전》은 역대의 설화를 모아 놓은 책으로 《삼국사기》를 집필하는 데 많이 이용되었고, 《고승전》은 유명한 승려의 일생을 적은 저술이었다. 《악본》은 가무(歌舞)와 관계된 책이었고, 《화랑세기》는 신라 화랑의 전기였으며, 《한산기》는 한산주도독으로 있으면서 지방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저술들은 신라 중대의 문화 수준이 단순히 중국 것을 모방한 단계를 벗어나 신라의 독특한 문화전통과 생활경험을 토대로 하는 데까지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신라의 불교는 원효(元曉)·원측(圓測)·의상(義湘)을 거치면서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수립하였고, 아울러 유학도 통일기 이후 강수(强首)·설총(薛聰) 등을 거치면서 정치이념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신라인으로 하여금 문화형성에 대한 자신을 갖게 하였다. 김대문은 이 같은 신라의 문화적 능력에 대한 신뢰와 전통에 대한 확인을 통해 자기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함으로써 통일신라 문화의 토대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대비(金大悲)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722년(성덕왕 21) 당(唐)나라 홍주(鴻州) 개원사(開元寺)에서 역사(力士) 장정만(張淨滿)에게 돈 2,000냥을 주어 조계사(曹溪寺)의 육조(六祖)인 육조탑(六祖塔)에서 선종(禪宗) 혜능(慧能)의 두골(頭骨)을 훔치게 하여, 그 두골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현재 지리산 쌍계사(雙磎寺)의 탑전(塔殿)에 있는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이 그것이라고 전한다. 김대성(金大城 / 700~774) 신라 경덕왕 때의 정치가. 재상을 지낸 문량(文亮)의 아들. 745년(경덕왕 4) 집사부의 중시가 되었다가, 750년에 물러났다. 전세(前世)와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와 석불사(石佛寺:지금의 석굴암)를 창건하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그는 경주 모량리(牟梁里)의 가난한 집 여자 경조(慶祖)에게서 태어나 부잣집에서 품팔이를 하며 살았다. 하루는 ‘하나를 보시(布施)하면 만배의 이익을 얻는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서 그동안 품팔이하여 마련한 밭을 시주하고, 얼마 뒤에 죽었다. 죽은 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 다시 태어나서, 전세의 어머니 경조도 모셔다 살았다. 그는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 사냥 중에 곰을 잡고 나서 잠을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자기를 죽인 것을 원망하고 환생하여 대성을 잡아먹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대성이 용서를 청하자 곰이 자기를 위하여 절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김대성은 깨달은 바가 있어 사냥을 중단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리고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웠다 한다. 이 설화는 당시 신라인에게 불교의 업보윤회사상(業報輪廻思想)이 많이 받아들여진 사실을 보여준다. 이 업보윤회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과응보관(因果應報觀)에 근거를 두는데, 즉 현재의 모든 사람의 상태는 한결같이 과거에 했던 행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내세(來世)의 보다 좋은 삶을 위한 현세의 착한 행동을 고취시키는 취지를 내포하고 있다. 김덕지(金德摯) 울산김씨의 시조.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29세손이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라 여러 설이 있다. 경순왕의 별자(別子)로 935년(경순왕 9)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할 때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이를 말렸으나 듣지 않아, 처자를 버리고 개골산(皆骨山:겨울의 금강산)에 들어갔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는 해인사에 들어가 스스로 범공(梵空)이라 이름을 지었다고도 한다. 그는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해져 학성(지금의 울산)으로 수관(受貫)함으로써 울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자세하게 상고할 수 없으나, 그의 14세손인 환(環)이 고려 충숙왕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러 학성군에 봉해짐에 따라, 그의 후손이 본관을 울산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었다. 김도나(金道那) 통일신라시대의 사신(使臣). 벼슬은 급찬(級飡)이다. 689년(신문왕 9) 일본 왕 덴무[天武]의 조상(弔喪)을 위한 사신으로 갈 때, 명총(明聰)·관지(觀知) 등의 학승(學僧)과 함께 금동아미타상·금동관세음보살상 등을 가지고 가서 일본의 불교전파에 공헌하였다. 민애왕(閔哀王 / ?~83) 신라 제44대 왕(재위 838∼839). 성명 김명(金明). 원성왕의 증손.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 민애왕(敏哀王)이라고도 한다. 835년(흥덕왕 10) 대아찬으로 시중(侍中)이 되었다. 836년 제륭(悌隆)과 균정(均貞)이 왕위를 다툴 때, 제륭을 도와 왕(僖康王)이 되게 하고 자신은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838년 시중 이홍(利弘)·배훤백(裵萱伯) 등과 함께 희강왕을 협박, 자살하게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아버지 충공(忠恭)을 선강대왕(宣康大王), 어머니 박씨귀보부인(朴氏貴寶夫人)을 선의태후(宣懿太后)라 추시(追諡)하고, 처 김씨는 윤용왕후(允容王后)라고 하였다.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이 청해진(淸海鎭)으로 가서 진장(鎭將) 장보고(張保皐)에 의탁해 있었는데, 민애왕이 즉위하자 장보고의 힘을 빌려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민애왕은 같은 해 12월 김민주(金敏周) 등을 파견하여 싸우게 하였으나, 패하고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김무(金武) 신라의 의사. 호 한기(漢紀:旱岐). 관등 파진찬(波珍飡). 《니혼쇼키[日本書記]》에만 나오는 인물로, 414년(실성왕 13) 일본 민교왕[允恭王]의 초청을 받고 일본에 건너가, 약방문(藥方文)에 의하여 왕의 병을 고쳤다고 한다. 관등이 파진(波鎭)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파진찬의 약칭 파진(波珍)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김문량(金文亮(良) / ?~711) 신라 성덕왕 때의 중시(中侍). 대성(大城)의 아버지. 706년 중시에 임명되었다. 대성이 그의 명복과 국가의 안녕을 위하여, 불국사 석굴암 창건을 발원(發願)했다고 한다. 김문영(金文穎) 통일신라 초기의 장군. 일명 문영(文永). 660년(무열왕 7) 나당(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킬 때, 독군(督軍)으로 김유신(金庾信)의 막하(幕下)에서 공을 세웠다. 668년(문무왕 8) 대아찬(大阿)으로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이 되어 사천원(蛇川原)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평양으로 진격, 당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683년 이찬(伊), 694년(효소왕 3)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 김문왕(金文王 / ?~665) 신라 때의 왕족. 태종무열왕의 아들, 문무왕의 동생. 648년(진덕여왕 2) 아버지를 따라 당나라에 가서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이 되었다. 655년(태종무열왕 2) 귀국하여 이찬(伊飡)을 거쳐, 658년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661년 백제부흥군과 사비성(泗侁? 부근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는 문정(文正), 《책부원구(冊府元龜)》 《신당서》 《자치통감》 《삼국사기》 등에는 문왕(文王), 《동국통감》 《동사강목》 등에는 문왕(文汪)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무왕(文武王 / ?~681) 신라의 제30대 왕(재위 661∼681). 성 김씨. 이름 법민(法敏). 태종무열왕·문명왕후(文明王后)의 맏아들, 비(妃)는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 자의왕후(慈儀王后). 외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하며, 지략(智略)이 많았다. 650년( 진덕여왕 4)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대부경(大府卿)을 받았고, 654 년태종무열왕 1) 파진찬으로서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655년 태자로 책봉 되었으며, 660년 나,당(羅唐)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5만 군대를 거느리고 분전, 백제를 격멸하였다. 661년 태종무열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고, 이듬해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쳤으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그뒤 복신(福信), 도침(道琛) 등의 백제 부흥운동을 저지하였다. 668년 다시 나, 당연합군을 형성하여 고구려를 쳤는데, 왕제(王弟) 인문(仁問)은 당나라의 이적(李勣)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고구려는 멸망하였으나, 당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은 물론 백제의 옛 땅까지도 자국 영토로 삼으려 하자,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명하여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게 하였다. 고구려 유민(遺民)의 부흥운동을 원조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나라에 대항하여, 677년 그 세력을 몰아내고 대동강 원산만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을 완수하였다. 이때부터 한반도에 단일국가가 등장하였다. 문무왕은 당나라 문화를 수입하는 데 힘을 기울여 664년 부인들의 의복을 당제(唐制)에 따르게 하였고, 또 당악(唐樂)을 수입하였다. 674년 당나라의 역술(曆術)을 본떠 신력(新曆)을 제정하여 사용하였으며, 675년 동인(銅印)을 만들어 중앙 백관(百官)과 지방의 주군(州郡)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676년 의상(義湘)으로 하여금 경북 영주시 부석면(浮石面)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게 하였다. 681년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 경주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 대왕암에 안장(安葬)하였다. 김법선(金法宣) 통일신라의 왕족. 내물왕의 8대손. 벼슬은 대아찬(大阿飡)에 이르렀다. 현손(玄孫) 경신(敬信)이 원성왕에 오르자, 현성대왕(玄聖大王)에 추봉되었다. 김사공(金思恭) 통일신라 성덕왕(聖德王) 때의 대신. 파진찬(波珍飡)의 관등이던 718년(성덕왕 17) 효정(孝貞)의 후임으로 중시(中侍)가 되어 720년 퇴임하였다. 이찬(伊飡)이던 728년에는 노쇠한 배부(裴賦)의 후임으로 상대등(上大等)에 오르고, 732년 12월 각간(角干)으로 장군에 임명되었다. 김사양(金思讓) 신라의 관리. 703년(성덕왕 2) 아찬(阿飡)으로 사신이 되어 당나라에 갔다. 이듬해 3월 귀국할 때, 인도 의학의 대요(大要)가 들어 있는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을 가져와 왕에게 바쳐 의학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김사종(金嗣宗) 통일신라시대의 왕족. 신문왕(神文王)의 동생. 728년(성덕왕 27)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신라인의 당나라 국학(國學)에의 입학을 요청하는 국서를 전하였다. 당나라 현종은 이를 허락하고 그를 과의(果毅)라는 무관직에 임명하여 수도인 장안(長安)에서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김석(金錫) 의성김씨의 시조. 신라 마지막 왕인 제56대 경순왕의 아들. 고려 태조의 외손자. 경주김씨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28대손.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복속한 후 얻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이다 (다섯째 아들이라는 설도 있음). 고려에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져, 자손들이 의성을 관향으로 정하였다. 김수충(金守忠) 신라의 왕족. 성덕왕의 아들. 714년(성덕왕 13) 견당대감(遣唐大監)으로 당나라에 파견되어 숙위하였다. 당나라 현종(玄宗)의 총애를 받아 집·비단을 하사받았다. 717년 공자와 10철(哲) 및 72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돌아와 왕에게 바쳤다. 김숙흘종(金肅訖宗) 신라의 왕족. 제22대 지증왕(智證王)의 둘째 아들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둘째 아들. 진흥왕(眞興王)의 아우.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只召夫人)이다. 즉 지증왕의 큰아들인 법흥왕은 왕통을 이었으나 딸만 있어, 그 딸 지소부인이 법흥왕의 아우이며 숙부가 되는 입종갈문왕과 혼인하여 진흥왕과 숙흘종을 낳은 것이다. 숙흘종의 딸 만명(萬明)은 금관가야의 왕족인 김서현(金舒玄)과 혼인하여 김유신을 낳았으므로, 숙흘종은 김유신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김순원(金順元) 신라의 대신. 698년(효소왕 7) 대아찬(大阿飡)으로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700년 이찬(伊飡) 경영(慶永)의 반란에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720년(성덕왕 19) 딸 소덕(炤德)을 성덕왕의 후비로 보내고, 739년 딸 혜명(惠明)을 외손자인 효성왕에게 시집보냈는데, 이런 이중적 혼인관계로 큰 외척세력가로 성장하였다. 김알지(金閼智 / 65~?) 경주김씨의 시조. 65년 탈해왕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의 수풀 속에서 닭 울음 소리를 듣고서 신하 호공(瓠公)을 시켜 가보게 하였다. 금빛의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다고 호공이 보고하자, 왕이 직접 가서 함을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아이는 금함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삼국사기》 <미추왕조>에는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 아도가 수류(首留), 수류가 욱보(郁甫),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다고 함으로써, 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의 세보(世譜)를 소개하고 있다. 알지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알지라는 말은 어린아이, 즉 아기를 부를 때 쓰는 말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후대에 부친 해석이므로 당대에도 그렇게 쓰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또 신라의 시조왕인 박혁거세 설화에서 혁거세거서간(居西干)이 알에서 나와 처음 입을 열 적에 스스로 알지거서간이라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로써 알지는 곡물 또는 곡물에 들어있는 신령(神靈)을 나타내는 말이고 특정의 인명이 아닌 농업의 신 또는 그 대리자로서의 기능을 가지는 신라 초기 왕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는 알지의 알은 금(金)을 나타내는 말이고 지는 존장자(尊長者)에 붙이는 존칭어이므로 알지는 김씨 부족의 족장을 뜻한다고도 한다. 알지의 의미야 어쨌든 이 설화는 김씨 부족의 시조 출현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그가 석씨 시조인 탈해왕에 의해 발견되어 양육되었다는 것은 신라 왕위계승에서 김씨의 등장과 독점이 가장 늦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김 양(金 陽 / 808~857) 신라의 왕족. 자 위흔(魏昕). 828년(흥덕왕 3) 약관(弱冠)의 나이로 고성태수(固城太守)가 되고, 이어 중원대윤(中原大尹)무주도독(武州都督)을 역임하였다. 836년 흥덕왕이 죽은 뒤 균정(均貞)과 제륭(悌隆:僖康王)이 왕위 쟁탈전을 벌이자 균정을 돕다가 실패하여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839년(민애왕 2) 균정의 아들 우징(佑徵:神武王), 청해진(淸海鎭)의 장보고(張保皐) 등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대구(大丘:大邱)에서 왕을 시해하고 우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신무왕이 죽은 후 문성왕(文聖王:신무왕의 아들)을 옹립하였으며, 소판 겸 창부령(蘇判兼倉部令)시중 겸 병부령(侍中兼兵部令) 등을 지내고, 공검교위위경(公檢校衛尉卿)에 올랐다. 서발한 (舒發翰)에 추증되었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능렬(陵列)에 배장(陪葬)되었다. 김양도(金良圖 / ?~670) 신라 중기의 장군. 660년(태종무열왕 7) 백제 정벌에 공을 세워 대아찬(大阿2)이 되고,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으로부터 백제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661년(문무왕 1) 백제 잔민이 공격해오자 품일(品日)충상(忠常)과 함께 사비성(泗侁?扶餘)을 지켰다. 668년(문무왕 8)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김유신 등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종군하였으며,신라군은 이적(李勣)의 당나라군과 합세,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669년(문무왕 9) 백제의 토지와 유민을 함부로 다스린 데 대해 김흠순(金欽純)과 함께 당제(唐帝)에게 사실을 밝히러 갔다가 이듬해 당나라 서경(西京)에서 옥사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났다. 선덕왕(宣德王) 신라 제37대 왕(재위 780∼785). 내물왕(奈勿王)의 10대손. 성 김(金), 휘(諱) 양상(良相). 해찬(海2) 효방(孝芳)의 아들이다. 성덕왕(聖德王)의 딸인 사소부인(四炤夫人) 김씨 소생. 비(妃)는 각간 양품(良品)의 딸 구족부인(具足夫人)이다. 780년 혜공왕(惠恭王)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상대등(上大等)으로 있던 양상이 김지정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 난중에 혜공왕이 죽자 양상이 즉위하였다. 당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며, 당의 덕종(德宗)이 검교대위계림주자사영해군사신라왕 (檢校大尉鷄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의 봉작을 주었다. 유언대로 불법에 따라 화장하고 뼈를 동해에 뿌렸다. 김양순(金良順(亮詢) / ?~847) 통일신라시대의 대신. 836년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은 후 왕위 다툼이 벌어져 김제륭(金悌隆)이 김균정(金均貞)을 죽이고 희강왕이 되자, 837년 이미 청해진(淸海鎭)의 장보고에게 의탁해 있던 김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을 찾아가 합세하였다. 839년 2월 우징이 장보고의 힘을 빌려 신무왕으로 즉위하였다가 5개월 만에 죽고 신무왕의 태자 문성왕이 즉위하자, 840년 이찬(伊飡:2등관)에 올랐다. 843년에는 시중(侍中)이 되었으나 이듬해에 해임되었으며, 847년 파진찬(波珍飡) 흥종(興宗) 등과 함께 모반하였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김언경(金彦卿) 신라의 서예가. 보조(普照)의 제자로 병부시랑(兵部侍郞)전중대감(殿中大監)을 역임하였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글씨를 잘 써서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났다. 특히 행서(行書)에 능하여,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의 머리에서 7행까지는 김원(金)이 해서(楷書)로 썼고, 7행의 선(禪)자 이하는 행서로 썼다. 헌덕왕(憲德王 / ?~826) 신라의 제41대 왕(재위 809∼826). 성명 김언승(金彦昇). 소성왕(昭聖王)의 동생. 비(妃)는 각간(角干) 예영(禮英)의 딸 귀승부인(貴勝夫人). 790년(원성왕 6) 당나라에 다녀와 대아찬(大阿2)이 되고, 이듬해 역신(逆臣) 제공(悌恭)을 죽인 공으로 잡찬(2)에 승진하였다. 794년 시중(侍中)을 거쳐, 이듬해 이찬 으로서 재상에 올랐다. 애장왕(哀莊王)이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으며, 801년(애장왕 2)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809년 난을 일으켜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한 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왕으로 책봉받고, 이듬해 제방(堤防)을 수리하여 농사를 장려하였다. 또한 왕자 헌장(憲章)을 당나라에 보내어 금,은으로 만든 불상(佛像)과 불경을 바치고, 당나라 순제(順帝)의 명복을 비는 등 친당(親唐)정책에 힘썼다. 819년 당나라 헌종(憲宗)의 청으로 운주(州:山東省)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 3만을 파견하였으며, 822년 웅주도독 김헌창(金憲昌)의 반란을 평정하고, 825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의 모반을 진압하였다. 이듬해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수(白水)에게 명하여, 한산(漢山) 북쪽의 군민(郡民) 1만을 동원하여 패강(浿江:大同江)에 장성(長城) 약 3백리를 쌓게 하였다. 능은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있다. 김 영(金 穎) 신라의 문신. 관등은 급찬(級飡)을 지냈다. 효공왕 때 창부시랑(倉部侍郞)으로 있으면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갔다. 이때 유학생 8명을 데리고 갔으며, 만기가 된 학생 김의선(金義先) 등 4명을 인솔하여 귀국하였다.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한 일도 있으며 문장이 뛰어나 보림사보조선사비(寶林寺普照禪師碑)·월광사원랑선사비(月光寺圓郞禪師碑) 등의 비명(碑銘)을 찬(撰)하였다. 김용춘(金龍春) 통일신라시대의 왕족. 일명 용수(龍樹). 진지왕의 아들.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622년(진평왕 44) 이찬(伊飡)으로 내성사신(內省私臣)이 되었다. 629년 대장군으로 부장(副將)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淸州)을 공격, 5,000여 명을 살해하고 성을 함락시켰다. 635년(선덕여왕 4) 왕명으로 주현(州縣)을 순무(巡撫)하고, 그 아들(태종무열왕)이 왕위에 오르자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되었다. 신무왕(神武王 / ?~839) 신라 제45대 왕. 성 김(金). 휘 우징(祐徵). 원성왕(元聖王)의 증손, 희강왕(僖康王)의 종제(從弟). 어머니는 진교부인(眞矯夫人) 박씨(朴氏), 비는 진종부인(眞從夫人). 828년(흥덕왕 3) 대아찬으로 시중(侍中)이 되었다가 831년 면직, 834년 다시 시중이 되었으나 이듬해 아버지 균정이 상대등이 되자 사임, 836년(희강왕 1) 흥덕왕이 죽어 희강왕이 왕위를 탐내자 아버지를 왕으로 추대하여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이듬해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에게로 가 은신, 839년(민애왕 2) 4월 장보고의 지원을 받아 대군을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가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같은해 7월에 병사하였다. 능은 경주시 동방동(東方洞)에 있다. 김운경(金雲卿) 통일신라시대의 문신. 신라의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821년(헌덕왕 13)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우감문위수부병조참군(右監門衛率府兵曹參軍)·연주도독부사마(州都督府司馬)를 지냈다. 841년(문성왕 3) 선위부사(宣慰副使)로 귀국하여 문성왕에 대한 책봉칙서를 전달하였다. 김웅원(金雄元) 통일신라시대의 장군. 이찬(伊2)으로 811년(헌덕왕 3) 완산주도독(完山州都督)이 되었으며, 819년 당나라 운주절도사(州節都使) 이사도(李師道)의 반란에 순천장군(順天將軍)으로 3만의 원군을 이끌고 당나라에 건너가서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822년(헌덕왕 14) 웅천도독(熊川都督)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키자, 잡찬(2)으로 균정(均貞)·우징(祐徵)과 함께 3군을 평정하였다. 김육진(金陸珍 / ?~?) 통일신라시대의 문신. 진골 출신이다. 관등이 대나마(大奈麻)이던 803년(애장왕 4) 왕명을 받들어 무장사(藏寺)에 세운 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阿彌陀如來造像事蹟碑)의 비문을 지었다. 그 뒤 대아찬(大阿飡)에 올라, 809년 당(唐)나라에서 소성왕(昭聖王)의 책봉조책(冊封詔冊)을 보내주고 왕의 숙부 언승(彦昇) 등에게 문극(門戟)을 내려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왕명에 의해 비문을 쓰거나 사신이 된 것으로 미루어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것으로 보이며, 그가 지은 비문의 글로 미루어 풍부한 지식과 뛰어난 문장력의 소유자인 것을 알 수 있다. 김은거(金隱居 / ?~775) 통일신라시대의 문신. 관등이 이찬(伊飡)에 이르러 767년(혜공왕 3) 사신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8세에 즉위하여 어머니 만월부인(滿月夫人)이 섭정하던 혜공왕에 대한 책명(冊名)을 청하여,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이듬해 7월 대공(大恭)·대렴(大廉)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고, 그해 10월 시중(侍中)에 올라 백관을 총관하였다. 그러나 770년 대아찬 김융(金融)의 난을 진압하고, 그해 12월 시중에서 물러나고 이찬 정문(正門)이 시중에 올랐다. 775년 6월에는 그 스스로 난을 일으켰다가 주살되었다. 그의 난은 모반이 아니라, 권신들에게 찬탈된 왕권을 되찾고자 권신들의 제거를 위하여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김의충(金義忠 / ?~739) 통일신라시대의 문신. 경덕왕의 장인. 서불한(舒弗)을 거쳐 735년(성덕왕 34) 사신으로 당(唐)나라에 가, 현종(玄宗)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영토점유에 대한 인정을 받고 귀국하였다. 737년(효성왕 1) 아찬(阿飡)으로 중시(中侍)가 되었으며, 이벌찬까지 승진하였다. 김인문(金仁問 / 629~694) 신라의 장군·외교가. 자 인수(仁壽).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 문무왕의 아우. 651년(진덕여왕 5)에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하여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이 되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이 되어 장산성(獐山城)을 쌓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뒤에 당나라에 파견되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조직에 성공했고, 660년(태종무열왕 7)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百濟)를 멸망시켰고, 파진찬(波珍)·각간(角干)으로 승진되어 당나라에 머물렀다. 665년(문무왕 5년) 숙위하던 김문왕(金文王)이 죽자, 제5차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66년에 당나라 고종(高宗)으로부터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에 임명되고, 668년(문무왕 8)에 귀국하여 20만 군사를 동원, 당군(唐軍)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9년(문무왕 19)에는 당경(唐京)에 머물면서, 진군대장군행우무위위대장군(鎭軍大將軍行右武威衛大將軍)이 되었다. 690년(신문왕 10) 보국대장군상주국임해군개국공좌우림군장군(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이 되고, 694년(효소왕 3) 당경(唐京)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영구는 신라에 호송되고 효소왕으로부터 태대각간(太大角干)이 추증(追贈)되었다. 유학의 대가로도 이름을 떨쳤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隸書)에도 능하였다. 김입지(金立之 / ?~?) 통일신라의 문장가. 825년(헌덕왕 17) 왕자 김흔(金昕)에 인솔되어 당(唐)나라에 들어간 12명의 숙위유학생(宿衛留學生)이다. 다른 유학생과 함께 당나라의 관청인 홍로시(鴻'A寺)에서 숙식을 제공받는 외국유학생으로서 수도에서 숙위를 하면서 국자감(國字監)에서 수업하였으며, 뒤에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885년에는 한림랑(翰林郞)으로 추성군태수(秋城君太守)에 있으면서 충남 보령시의 《성주사비문(聖住寺碑文)》을 썼다. 또 원(元)나라의 조자앙(趙子昻)이 찬탄한 <창림사무구정탑원기(昌林寺無垢淨塔願記)>의 찬자(撰者)이기도 하다. 김정종(金貞宗 / ?~?) 통일신라시대의 문신. 713년(성덕왕 12) 2월 조공사(朝貢使)로서 당나라에 갔다. 이때 당나라 현종(玄宗)은 누문까지 나와 그를 접견하였고, 귀국할 때 성덕왕을 ‘표기장군 특진 행좌위위 대장군 사지절대도독 계림주제군사 계림주자사 상주국 낙랑군공 신라왕(驃騎將軍特進行左威衛大將軍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鷄林州刺史上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봉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732년 이찬(伊飡)의 관등에 있으면서 장군에 임명되고, 효성왕이 즉위하자 737년 3월 최고관직인 상대등에 올랐다. 741년(효성왕 5) 왕이 참관한 노병(弩兵) 검열을 주관하였다. 희강왕(僖康王 / ?~838) 신라 제43대 왕(재위 836∼838). 성 김(金). 이름 제륭(悌隆)·제옹(悌). 원성왕의 손자이며, 이찬(伊2) 김헌정(金憲貞)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포도부인(包道夫人). 비는 대아찬(大阿2) 충공(忠恭)의 딸 문목부인(文穆夫人)이다. 흥덕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均貞)과 왕위 다툼을 하다가 시중(侍中) 김명(金明:민애왕), 아찬(阿2) 이홍(利弘) 등의 도움으로 균정을 살해하고 즉위하였다. 김명을 상대등(上大等), 이홍을 시중에 임명하여 정권을 맡겼으나, 838년 김명과 이홍이 반란을 일으켜 측근자를 살해하자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능은 경주의 소산(蘇山)에 있다. 김지성(金志誠 / 652~?) 통일신라의 문신. 그의 생애에 관하여는 아버지가 일길찬(一吉飡) 인장(仁章)이며, 어머니가 관초리부인(觀肖里夫人)이고, 67세에 집사부(執事部) 시랑(侍郞)에서 물러났다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은 없으나, 은퇴한 뒤 감산사(甘山寺)를 창건하고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81)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82)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 미륵상의 광배(光背)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의하면 그는 지략(智略)이 없어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다가 형벌을 받을 뻔하였다고 하는데, 이로 보아 시랑직에서 물러난 것도 개혁의 실패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미타상의 명문을 통하여 그가 감산사를 세우고 불상을 조성하게 된 동기가 부모의 은공을 갚고자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은퇴한 후에 미륵보살의 유가론(瑜伽論)을 연구하였으며, 노장사상(老莊思想)에도 심취하였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신라 중대의 귀족들 사이에서 노장사상이 널리 퍼진 것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헌장(金憲章 / ?~?) 신라 제41대 헌덕왕의 아들. 형제가 있다거나 태자로 책봉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809년 그의 아버지와 숙부, 즉 언승(彦昇)·옹제(邕悌) 형제가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권을 탈취하였을 때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이듬해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중국에 갔다. 이때 그는 금·은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가서 805년에 죽은 당나라의 선대 황제 순종(順宗)의 명복을 빌었다. 그에게 왕위는 돌아가지 않고 숙부 경징(景徵:흥덕왕)이 제42대 왕위를 계승하였다. 김헌정(金憲貞 / ?~?) 통일신라의 종실. 원성왕(元聖王)의 손자. 이찬 예영(禮英)의 아들. 희강왕(僖康王)의 아버지. 초노(草奴)라고도 한다. 807년(애장왕 8) 이찬(伊飡)으로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809년 7월 누이동생 귀승부인(貴勝夫人)의 남편 김언승(金彦昇)이 애장왕을 시해하고 헌덕왕(憲德王)으로 즉위함에 따라 이듬해 정월 시중에서 물러났다. 819년 병들어 나라 일을 집행하기가 어려워, 아직 70세가 되지 않았음에도 왕은 70세에 이르는 중신에게 내리는 금식자단장(金飾紫檀杖)을 하사하였다. 836년 그의 아들이 희강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이듬해 익성대왕(翼成大王)으로 추봉되었다. 그의 자손은 희강왕 이후 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효공왕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그의 형 균정(均貞)의 자손과 왕위계승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김효방(金孝芳 / ?~?) 통일신라 선덕왕(宣德王)의 아버지. 각간(角干) 원훈(元訓)의 아들. 내물왕의 9세손. 부인은 성덕왕(聖德王)의 딸 사소부인(四炤夫人) 김씨. 관등은 해찬(海飡:波珍飡)에 이르렀다. 780년 아들 양상(良相)이 선덕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개성대왕(開聖大王)으로 추존(追尊)되고, 그의 부인은 정의태후(貞懿太后)로 추봉되었다. 김효양(金孝讓 / ?~?) 통일신라 원성왕(元聖王)의 아버지. 내물왕의 12세손. 이찬(伊飡) 위문(魏文)의 아들. 부인은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 생전의 기록은 자세하지 않으나, 조종(祖宗)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간수하다가 아들에게 전하였다고 하며, 관등은 일길찬(一吉飡, 또는 대각간에 이르렀다. 아들 경신(敬信)이 후사 없이 죽은 선덕왕의 뒤를 이어 785년 원성왕으로 즉위하자, 그와 부인은 각각 명덕대왕(明德大王)과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되었다. 또한 시조대왕(始祖大王)·태종대왕·문무대왕 및 그의 부친 흥평대왕(興平大王:추존)과 함께 새로 정해진 오묘(五廟)에 향사되었다. 그의 후손은 번성하여 아들 원성왕을 포함한 이후의 신라 19명의 왕 중 16명(53·54대 왕은 제외)이 그의 자손이었다. 김후직(金后稷 / ?~?) 신라 진평왕 때의 충신. 지증왕의 증손. 진평왕을 섬겨 이찬(伊飡)으로 병부령(兵部令)을 지냈다. 왕이 사냥을 즐겨 정사를 소홀히 하므로 이를 염려하여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가 병들어 죽을 무렵 세 아들을 불러놓고, 신하로서 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죽게 되니 내가 죽거든 그 시체를 왕이 사냥을 다니는 길목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그 뒤 왕이 사냥을 갔는데, 길가에서 사냥을 하지 말라는 가냘픈 소리가 들리므로 시종에게 물어, 그의 유언임을 알았다. 왕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다시는 사냥을 가지 않고 국사에 힘썼다고 한다.
10-2. 고려시대 김경손(金慶孫 / ?~1251) 고려시대의 장군. 초명 운래(雲來).1231년(고종 18)에 정주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이 되었다. 이때 몽골군이 침입하자 결사대 12명을 거느리고 분전 격퇴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적의 대군이 쳐들어오자 구주(龜州)에 가서 병마사 박서(朴犀)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우세한 병력으로 성을 포위하고 밤낮으로 공격하는 몽골군과 20일간의 분투 끝에 마침내 격퇴하였다. 33년 대장군·어사대지사(御史臺知事)를 거쳐 37년 전라도 지휘사(指揮使)가 되어 나주성(羅州城)에 있을 때, 적도(賊徒)들을 규합하여 백적도원수(百賊都元帥)라고 자칭하며 광주(光州) 등지의 주현(州縣)을 수중에 넣고 세력을 떨치던 이연년(李延年)에게 포위되었다. 그러나 이에 별초(別抄) 30명을 이끌고 그들과 싸워 이연년을 죽이고 패주시켰다. 뒤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어 더욱 민심을 얻게 되었다. 이에 권세를 잡은 최항(崔沆)의 시기를 받아 49년 백령도(白翎島)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최항이 계모와 계모의 아들 오승적(吳承績) 등을 죽일 때, 그들과 인척관계라고 트집잡아 바다에 던져 죽임을 당하였다. 김고(金沽 / ?~1123) 고려의 문신. 신라 종실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시랑평장사 상기(上琦)의 아들. 문하시중 인존(仁存)의 동생. 1104년(숙종 9) 밀진사(密進使)로 요나라에 다녀왔으며, 1109년(예종 4) 좌승선(左承宣)·이부지사(知事), 11년 예부시랑(侍郞)·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이듬해 어사대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13년 상서이부지사·연영전학사, 17년 대사성·보문각학사·문덕전학사 등을 지내고, 18년 예빈경(禮賓卿)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에 이르렀다. 이듬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고, 22년(인종 즉위) 추밀원지사를 거쳐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김군수(金君綏) 고려시대의 문신. 호 설당(雪堂). 부식(富軾)의 손자. 1194년(명종 24) 문과에 장원급제, 이듬해 명종이 문신을 모아 시부(詩賦)를 시험할 때 1위로 뽑혔다.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고종 초에 시랑(侍郞)으로서 각 도의 찰방사(察訪使)가 되어 민정을 시찰하였다. 1218년 거란병 침입 때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숙주(肅州:평남 평원)·영청(永靑:평남 평원) 등지에서 400여 명을 죽이고 말 50여 필을 빼앗았다. 이듬해 의주에서 한순(韓恂)·다지(多智) 등이 난을 일으키자, 금(金)나라 원수 우가하(于哥下)에게 서신을 보내 그들의 목을 베게 하여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병마사 김취려(金就礪)에게 알리지 않아서 체포되고, 한남(漢南:水原)에 유배되었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전남 순천 송광사의 <보조국사비명(普照國師碑銘)>을 찬하였으며, 묵죽을 잘 그렸다. 《동문선》에 시 몇 편이 전한다. 김극기(金克己) 고려 명종 때의 시인. 호 노봉(老峯). 어려서부터 문명(文名)이 높았고, 입을 열면 시가 나왔다고 한다. 문과(文科)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그대로 초야에 묻혀 시(詩)를 즐겼다. 명종 때 학행(學行)으로 한림원(翰林院)에 보직되었으나 얼마 후 죽었다. 고려 말엽에 간행된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의하면 그의 문집이 150권이나 된다고 한다. 저서에 《김거사집(金居士集)》이 있다. 김기손(金起孫 / ?~1268) 고려의 문신.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태서(台瑞)의 아들. 1251년(고종 38) 우복야(右僕射), 이어 문하성 지사(知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다. 59년 원종이 즉위하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겸임하고, 이어 이부판사를 거쳐 68년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러 물러났다. 김돈시(金敦時 / ?~1170) 고려시대의 문신. 중서령(中書令) 부식(富軾)의 아들. 돈중(敦中)의 동생. 의종 때 시랑(侍郞)을 거쳐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 등이 일으킨 무신의 난 때 살해되었다. 김돈중(金敦中 / ?~1170) 고려시대의 문신. 중서령(中書令) 부식(富軾)의 아들. 1144년(인종 22) 문과에 장원하고 내시직에 임명되었다. 촛불로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태웠는데, 부식이 도리어 정중부를 나무라므로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의종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으나, 환관 정함(鄭)을 합문지후에 임명하는 것을 반대하여 시랑(侍郞)으로 좌천되었다. 67년 좌승선(左承宣) 때 의종이 봉은사에서 연등행사를 마치고 환궁할 때 그의 말이 놀라 한 군사의 화살통에 부딪쳐 화살이 임금의 수레에 떨어졌는데, 이 사건으로 죄없는 군인들이 귀양가게 되어 김돈중에게 더욱 원한을 품게 되었다. 70년 정중부가 보현원(普賢院)에서 난을 일으켜 많은 문신들이 살해당하자, 도망하여 감악산(紺獄山)에 숨었으나 종자(從者)의 밀고에 의하여 잡혀 죽었다. 김부식(金富軾 / 1075~1151) 고려시대의 문신·학자. 자 입지(立之). 호 뇌천(雷川). 시호 문열(文烈).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경주의 주장(州長)인 위영(魏英)의 증손자. 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 근(覲)의 셋째 아들. 네 형제가 모두 과거로 진출하였으며, 그 가운데 부일(富佾)·부식·부철(富轍)은 문한(文翰)으로 이름을 날렸다.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에 임명되었다가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중서사인이 되었다. 인종 초에 이자겸이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마음대로 하자 이를 저지하였으며, 이자겸이 제거된 뒤 1126년(인종 4) 어사대부가 되었다가 호부상서 한림학사승지를 역임하였다. 30년 정당문학 겸 수국사로 승진하였고 이어 검교사공 참지정사가 되었으며, 32년에 수사공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당시에 묘청(妙淸) 등 서경세력이 천도를 주장하면서 난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삼군(三軍)을 지휘하였으며, 출정하기 전에 먼저 개경에 있던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백수한(白壽翰) 등을 죽였다. 장기전을 벌이면서 1년 2개월 만에 반란군을 진압하였고, 그 결과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록되고 검교태보·수태위·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감수국사·상주국 겸 태자태보(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事上柱國兼太子太保)에 승진하였다. 38년에 검교태사·집현전대학사·태자태사(檢校太師集賢殿太學士太子太師)를 더하였다. 이어 함께 전공을 세운 윤언이(尹彦)와 개인적인 불화가 생겨 그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한 것을 탄핵하여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쫓아냈다가 뒤에 사면되자,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42년에 사직하였다. 인종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면서 동덕찬화공신호(同德贊化功臣號)를 더하여 내렸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인종의 명령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체재를 작성하고 사론(史論)을 직접 썼으며, 45년에 완성하였다. 한림원에 있을 때에는 사륙변려문체(四六儷文體)에서 당·송 시대의 고문체(古文體)를 수용하려 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 서긍(徐兢)은 그를 고금에 밝고 글을 잘 짓는 박학강식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의종이 즉위한 뒤 낙랑군 개국후에 봉하고 《인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죽은 후 53년 중서령이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집 20여 권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는다. 김부의(金富儀 / 1079~1136) 고려 시대의 문신. 자 자유(子由). 초명 부철(富轍). 시호 문의(文懿). 부식(富軾)의 동생. 1097년(숙종 2) 19세로 문과에 급제,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1111년(예종 6) 서장관(書狀官)으로 추밀원부사 김연(金緣)을 따라 송나라에 가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돌아와 감찰어사가 되었다. 17년 금나라 사신이 와서 형제국(兄弟國)이 되기를 청하자, 금나라를 회유하기 위하여 화의하자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재상의 저지로 왕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첨사부사직(詹事府司直)이 되어 문학으로 우대를 받았고, 23년(인종 즉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특진하였다. 24년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성과 이부·호부·예부의 상서(尙書)를 거쳐 한림학사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34년 묘청(妙淸)의 주장을 김부식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였다. 이듬해 묘청이 난을 일으키자, 평서십책(平西十策)을 올리고 좌군수(左軍帥)·추밀원사가 되어 출정하였으며, 평정하고 돌아와 금대(金帶)를 하사받았다. 형부상서·보문각대학사·추밀원지사·지제고(知制誥)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수사공·상서좌복야·정당문학·판상서예부사·수국사·주국(守司空尙書左僕射政堂文學判尙書禮部事修國史柱國)이 추증되었다. 시문에 능하였다.시호는 문의(文懿) 김부일(金富佾 / 1071~1132) 고려시대의 학자. 자 천여(天與). 시호 문간(文簡).좌간의 대부 근(覲)의 아들. 김부식(金富軾)의 둘째형. 어려서 문과에 급제,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추밀원사 왕가(王")를 따라 송나라에 가서 명문(名文)으로써 송나라 철종의 찬사를 받았다. 숙종 때 습유(拾遺)·지제고(知制誥)를 거쳐 원주·상주의 지방관을 역임하여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예종 때 예부낭중(郞中)이 되었는데, 요나라가 여진을 치려고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모든 대신이 찬성했으나, 김부식과 함께 윤관(尹瓘)의 여진정벌 직후이므로 출병의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보문각대제(待制)를 거쳐 직학사(直學士)에 올라 왕과 보문각 유신들에게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다. 1122년 인종이 즉위하자 추밀원동지사·정당문학·한림원학사승지(樞密院同知事政堂文學翰林院學士承旨)가 되었다. 1127년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하였으며, 뒤에 수태위·개부의동삼사·비서성사·주국(守太尉開府儀同三司書省事柱國)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사람됨이 관후하고 문장에 능하였다. 김부필(金富弼) 고려시대의 문신. 김부식(金富軾)의 형. 1088년(선종 5) 문과에 급제, 1107년(예종 2) 윤관(尹瓘)의 여진정벌 때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척준경(拓俊京) 등과 함께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김약선(金若先) 고려시대의 문신. 평장사(平章事) 태서(台瑞)의 아들.최우(崔瑀)의 사위.원종비 경순왕후(경순왕후)의 아버지. 1225년(고종 12)에 내전을 수리할 때 그의 집을 임시거처로 사용할 만큼 고종의 사랑을 받았다. 35년 딸이 원종의 비가 되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올랐다. 최우의 부중(府中) 여자들을 망월루(望月樓) 모란방(牡丹房)에 모아놓고 음란한 짓을 자행하다가, 처의 밀고로 최우에 의하여 여자들은 유배되고 누방(樓房)은 철거되었다. 처도 종과 간통한 사실이 있었는데, 화를 두려워한 처의 무고(誣告)로 최우에게 살해되었다. 뒤에 사실이 밝혀져 장익공(莊翼公)에 추시되었다. 김원충(金元) 고려시대의 문신. 문종의 장인.시호는 정간(貞簡). 정종(靖宗)초 1036년(정종 2)에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풍랑을 만나 옹진(甕津)에서 되돌아왔다. 이듬해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연호의 반포를 청하고 돌아와 중추원지사에 올랐다. 40년 딸이 정종의 비가 되었으며, 47년(문종 1)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올랐다. 49년 작은딸이 문종의 비가 되자, 이듬해 문하시랑평장사·판상서형부사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정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김 의(金 義) 고려 말·조선 초의 무신. 공민왕(恭愍王) 때 좌우아 중랑장(左右衙中郞將)을 지낸 국보공(國寶公)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1374년(공민왕 23) 밀직사동지사(密直司同知事)가 되었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자 개국공신으로 추앙되어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나, 그보다 앞서 고려조 때 명나라 사신을 살해한 사실로 난처해진 조정에서는 변방(邊方)의 수비를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를 붙여 그를 정평(定平)으로 유배하였는데, 뒤에 영흥(永興)으로 옮겨 그곳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그가 호인(胡人) ‘야열가(也列哥)’로 기록이 되어 있으나 종문(宗門)에서는 이 사실이 조선조의 사관(史官)에 의하여 날조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김인경(金仁鏡 / ?~1235) 고려시대의 문신. 시호 정숙(貞肅). 초명 양경(良鏡).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직사관(直史館)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고종 초에 조충(趙?이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을 토벌할 때, 판관(判官)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예부낭중(郞中)·추밀원우승선(右承宣)을 거쳐, 1227년(고종 14) 수찬관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撰修)하였다. 그 해 동진(東眞)이 쳐들어오자, 중군병마지사가 되어 의주(宜州:德源)에서 싸우다 패전, 상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얼마 뒤 형부상서·한림학사에 오르고, 추밀원지사·상서좌복야(樞密院知事尙書左僕射) 등을 역임하였다. 32년 강화로 천도한 이듬해 왕경유수병마사(王京留守兵馬使)가 되고, 정당문학·이부상서·감수국사(政堂文學吏部尙書監修國史)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문무를 겸하였으며, 일반행정에도 뛰어났다. 특히 시에 능하고 예서(隸書)를 잘 썼다. 김자수(金自粹) 고려 말기의 문신. 자 순중(純仲). 호 상촌(桑村).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었다. 우왕 때 왜적 격퇴의 전공으로 포상을 받은 조민수(曺敏修)의 사은 편지에 대해 회교(回敎)를 작성하라는 왕명을 받고, 이를 거절한 죄로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전교부령(典校副令)·사재시판사(司宰寺判事)에 이르고, 공양왕 때 대사성·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숭불(崇佛)의 폐해를 지적하고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공사 중지를 상소하였다. 뒤에 전교시판사(典校寺判事)·좌상시(左常侍)·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조선 개국 후 태종 때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려가 망한 것을 비관하여 자결하였다. 김근(金覲) 고려시대의 문신. 학자 부식(富軾)의 아버지. 1080년(문종 34) 호부상서 유홍(柳洪), 예부시랑 박인량(朴寅亮)과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이때 그와 박인량이 지은 척독(尺牘)·표장(表狀)·제영(題? 등을 보고 감탄한 송나라 사람들이 두 사람의 시문집 《소화집(小華集)》을 간행하였다. 예부시랑으로 있던 86년(선종 3)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이자위(李子威)와 함께 성균시(成均試)를 관장하였고, 뒤에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에 이르렀다. 아들 넷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모두 등과하였으며, 예종은 부일(富佾)·부식·부의(富儀) 3형제가 모두 문한(文翰)에 시종하였다 하여 그의 부인을 대부인으로 책봉하고 늠속(稟粟)을 하사하게 하였으나, 이미 나라의 은혜를 크게 입었다 하여 받지 아니하였다. 김의(金義) 고려 말·조선 초의 무신. 공민왕(恭愍王) 때 좌우아 중랑장(左右衙中郞將)을 지낸 국보공(國寶公)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1374년(공민왕 23) 밀직사동지사(密直司同知事)가 되었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자 개국공신으로 추앙되어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나, 그보다 앞서 고려조 때 명나라 사신을 살해한 사실로 난처해진 조정에서는 변방(邊方)의 수비를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를 붙여 그를 정평(定平)으로 유배하였는데, 뒤에 영흥(永興)으로 옮겨 그곳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그가 호인(胡人) ‘야열가(也列哥)’로 기록이 되어 있으나 종문(宗門)에서는 이 사실이 조선조의 사관(史官)에 의하여 날조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김진양(金震陽 / ?~1392) 고려 말기의 문신. 자 자정(子靜). 호 초려(草廬).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학업에 힘써,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그 뒤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어 많은 치적을 올렸다. 문하사인(門下舍人)을 거쳐 좌사의(左司議)에 올랐다. 1390년(공양왕 2) 이초(初)의 옥(獄)이 일어나자 동료들에게 그 중대함을 논하다가, 경솔히 대역(大逆)을 논하고 정론(正論)을 저해시켰다는 헌사(憲司)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좌산기상시를 지냈다. 이확(李擴) 등과 함께 상소를 하여,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이 변란을 꾸며 민심이 흉흉하다고 탄핵하여 그들을 유배시켰다. 다시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이성계 일파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김태서(金台瑞 / ?~1257) 고려시대의 문신. 시호 문장(文莊).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봉모(鳳毛)의 아들. 추밀원부사 경손(慶孫)의 아버지. 그의 손녀가 원종(元宗)의 비(妃)가 되어 충렬왕을 낳았다. 명종(明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뒤, 명종·신종(神宗)·희종(熙宗)·강종(康宗)·고종(高宗)의 5대왕을 섬기는 동안 관직이 누진되어 수태보(守太保)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러 연로하여 물러났다. 비록 유학(儒學)을 전업으로 하였으나 글을 좋아하지 않았고 성품이 탐욕스러워 남의 전답을 함부로 빼앗아 원성이 높았으나, 아들 약선(若先)이 집권자 최우(崔瑀)의 사위였기 때문에 관에서도 감히 탄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우가 죽고 그 아들 항(沆)이 정권을 쥐자, 1251년(고종 38) 항이 계모 대씨(大氏)와 계모의 아들 오승적(吳承績)을 죽이면서, 이들과 관계가 있다 하여 그의 집을 적몰(籍沒)하고 유배지에 있던 그의 아들 경손도 살해하였다. 김인관(金仁琯) 고려 문종때 명신으로 상서도성 좌사랑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 주국 개국자 경조현에 녹작되고 검교태자 태사로 치사하다. 그후 삼중대광상서도성령 숭록대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태사공파의 파조이다. 김장유(金將有) 신라 56대 경순왕의 넷째아들 은열(殷說)의 후손으로 고려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다가, 정국(政國)이 어지러워지자 충북보은에 은거 하였다. 김순웅(金順雄) 고려초 대장군(大將軍).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의 이군(二軍)을 거치고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0, 흥위위(興尉衛), 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등 육위의 장군을 거치고 대장군이되어 안주 홀성주 (황해도)병마사가 되었다. 김원정(金元鼎 / ? - 10630) 고려 (문종 17)때 문신으로 문종초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중추원사(中樞院使)를 거쳐 1063년 수태위.문하기중(守太尉門下侍中)이 되었다. 김의진(金義珍 / ?-1070) 고려(문종24)때 문신으로 1065년(문종19)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등을 역임하여 평자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신(良愼) 김후덕(金侯德) 고려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의 9세손(九世孫)이요. 자(字)는 상인(尙仁). 병부시랑(兵部時郞) 김양감(金良鑑)과 한림(翰林) 이용(李容)과 공부시랑(工部時郞) 박시중(朴時中)과 함께 1073년(문종27년) 침잠(沈潛)한 성리학을 일으켜 유림(儒林)의 종맹(宗盟)이 되었다. 김균(金 ) 고려말 密直副使(밀직부사)를 하시었고, 本朝(조선)에서는 大光補國崇綠大夫 (대광보국숭록대부).議政府春秋館 左贊成(의정부춘추관 좌찬성)을 지내셨고 忠馱議佐 命開國功臣(충헌의좌명개국공신)으로 鷄林君(계림군)칭호를 받았다. 충헌의 좌명개국공신 1등 15명, 2등 9명, 3등 15명중 제2차 좌목에 올라 있으며, 태종 대왕(太宗大王) 광주(廣州) 유릉신도비(猷陵神道碑) 뒷면에 공신범록 51명중 제28차에 올라있다. 시호는 재숙공(齋肅公)이다. 김원황(金元晃 / ? - 1062) 고려의 대신. 문종때 공부상서(工部尙書).병부상서(兵部尙書).중추원사(中樞院使)를 역임햇다. 시호는 의경(毅敬) 김상기(金上琦) 고려때 문신. 1084년(선종1)에 이부시랑(吏部時郞)을 거쳐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올랐고, 1085년 송나라에 다녀와 좌간의 대부(左諫議 大夫).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러 국사를 편찬했다. 숙종초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내고 다시 태부(太傅)에 승진하였으며 선종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 김경용(金景庸 / 1041-1125) 고려의 문신. 병부상서(兵部尙書) 원황(元晃)의 아들. 합문지후(閤門祗候) 광주판관(廣州判官).어사중승(御史中丞)등을 거쳐 1098년(숙종3) 상서이부시랑. 지어사대사(紙御史臺事)를 지내고 병부상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판상서공부사(判尙書工部事)를 역임햇다. 김일연(金一然 / 1206~1289) 고려시대의 승려·학자. 이름 견명(見明). 자 회연(晦然)·일연(一然). 호 무극(無極)·목암(睦庵). 시호 보각(普覺). 탑호 정조(靜照). 경북 경산(慶山) 출생. 언필(彦弼)의 아들. 1214년(고종 1) 9세에 전라도 해양(海陽:현 광주)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대웅(大雄) 밑에서 학문을 닦다가 19년 승려가 되었다. 27년 승과(僧科)에 급제, 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 46년 선사(禪師), 59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61년(원종 2) 왕명으로 선월사(禪月寺) 주지가 되어 목우(牧牛)의 법을 이었다. 68년 운해사(雲海寺)에서 대덕(大德) 100여 명을 모아 대장경 낙성회(大藏經落成會)를 조직, 그 맹주가 되었다. 77년(충렬왕 3) 72세에 운문사(雲門寺) 주지가 되어 왕에게 법을 강론, 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았다. 84년 경북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하고 궁궐에서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열었다. 탑과 비는 인각사에,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저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국 고대 신화와 설화 및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어록(語錄)》 《계승잡저(界乘雜著)》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조도(祖圖)》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제승법수(諸僧法數)》 《조정사원(祖庭事苑)》 《선문점송사원(禪門頌事苑)》 등이 있다. 김봉모(金鳳毛 / ?-1209) 고려 때 문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세린(世麟)의 아들.1176년(명종6) 남방에서 민란이일어나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외국의 방언, 속어에 능하여 금나라 사신이 오면 반드시 관반(館伴)이 되어 접대했고, 나라의 대사에는 항상 전례(典禮)가 되어 일을 보았다. 중서문하평장사 태자대부(中書門下平章事 太子大傅)에 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정평(靖平) 김승무(金承茂) 고려 고종때의 문신. 평장사(平章事) 인경(仁鏡)의 손자. 일찍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한(史翰)을 지냈고, 권신(權臣) 김준(金俊)의총애를 받아 시어사(侍御史)에 이르렀다. 이때 뇌물을 받은 승선(承宣) 허공(許珙)을 탄핵하여 그의 미움을 샀다. 김 혼(金 琿 / 1239 - 1311) 추밀원부사(樞密院部事) 경손(慶孫)의 아들. 1255년 (고종 42) 18세로 석릉직(碩陵直)이 되어 뒤에 감찰사(監察史)를 거쳐 충열왕때 경순왕후(敬順王后)의 종제(從弟)로써 총애를 받아 大將軍이 되었다. 김 미(金 米) 추밀부사(樞密副使) 약선(若先)의 아들. 권신 최우(崔瑀)의 덕으로 1236년 (고종 23)에 내급사(內給事)가 되고, 뒤에 장군(將軍)이 되었다. 최우의 아들 최항이 자기를 해하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기선을 제압하려고 숙부 김경손(金慶孫)과 상의 했으나, 경손은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이것을 최우에게 밀고하자 잡혀서 고란도에 유배 되었다. 김자흥(金子興 / 1264 - 1323) 고려 때 문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혼(琿)의 아들. 1303년(충열왕 29)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고 김원상(金元祥). 오현량(吳賢良)과 함께 간신 송방영(宋邦英)일파를 제거했다. 김효일(金孝一) 경순왕의 四子 은열공의 16세손으로 고려말기에 장사랑(將仕郞)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인찬(仁贊)이 조선개국공신(朝鮮開國功臣)으로 익화군(益和君)에 봉해지고 양근김씨(楊根金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는데, 인찬(仁贊)의 아들 가운데 일부는 양근김씨를 승계하고 일부는 경주김씨를 승계하였으므로 후손(後孫)들이 효일(孝一)을 파조(派祖)로 하고 있다. 김천서(金天瑞) 호(號)는 송은(松慇)으로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관악산(冠岳山)으로 은거(隱居)하였다. 김충한(金沖漢) 1고려 때 충신으로 예의판서(禮儀判書)까지 지냈고, 134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조선조(朝鮮朝)를 섬기지 않았으며, 후에 호남(湖南)에 은거하였다.
10-3. 이조시대 김정희(金正喜 / 1786~1856)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 자 원춘(元春). 호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예산 출생.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48년 풀려나왔고, 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석(考釋)하고, 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등이 있다. 김종순(金從舜 / 1405~1483) 조선 전기의 문신. 시호 공호(恭胡). 1437년(세종 19) 문음(門蔭)으로 충훈부사승(忠勳府司丞)이 되고, 39년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을 거쳐 한성부중부령(中部令)·감찰 등을 지냈다. 그 뒤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부사직(副司直) 이보흠(李甫欽)을 사직(司直)에 잘못 승진시킨 사건에 연루되어 논죄되었으나, 공신자손이라 하여 파직에 그쳤다. 그 뒤 복직되어 승문원교리(承文院敎理)·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63년(세조 9)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올랐으며 이어 대사헌·중추부동지사·경상도관찰사·중추부지사를 역임하였다. 세조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김종일(金宗一 / 1597~1675) 조선 중기의 문신. 자 관지(貫之). 호 노암(魯庵). 1624년(인조 2) 생원시·진사시에 합격, 2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30년 진주목사, 35년 정언(正言), 36년 병자호란 때 순찰사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듬해 10월 소현세자가 심양(潘陽)에 볼모로 잡혀갈 때, 사서(司書)로서 수행하였다. 당시 조선인으로서 청(淸)나라 벼슬에 올라 조선에 대해 갖은 횡포를 부리던 정명수(鄭命壽)·김돌(金突)의 죄상을 폭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송환되어 영덕에 귀양갔다. 43년 풀려났으며, 57년 울산부사를 지냈다. 60년(현종 1)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에, 허목(許穆)과 함께 3년설을 주장하다가 평해(平海)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문집에 《노암문집》이 있다. 김종표(金宗杓 / 1843~1937) 조선 후기의 가야금의 명인. 자 영조(永朝). 초명 종한(宗漢). 철종·고종 때 판소리의 명창인 창록(昌祿)의 셋째 아들이고, 고종 때의 가야금의 명수인 종남(宗南)의 아우이다. 1866년(고종 3) 전악(典樂)에 오른 기록이 있으며 특히 덕행을 겸비하고 지조가 굳어 모든 국악인들의 사표(師表)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그의 초상을 난계(蘭溪) 박연(朴堧)의 신실(神室)에 봉안하고 크게 제사지냈다. 김주신(金柱臣 / 1661~1721) 조선 후기의 문신. 자 하경(廈卿). 호 수곡(壽谷)·세심재(洗心齋). 시호 효간(孝簡). 숙종의 장인. 박세당(朴世堂)의 문인. 1686년(숙종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이 되었다. 1720년 순안현령으로,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仁元王后)가 되자 돈령부도정(都正), 이어 돈령부영사(領事)로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다. 도총관(都摠官)으로서 상의원(尙衣院)·장악원의 제조(提調) 및 호위대장을 겸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문장은 깊고 무게가 있었다. 저서에 《거가기문(居家紀問)》 《수사차록(隨事箚錄)》 《산언(散言)》, 문집에 《수곡집》 등이 있다. 김진수(金進洙 / 1797~1865) 조선 후기의 문신. 자 치고(稚高). 호 연파(蓮坡)·벽로재(碧蘆齋). 어려서부터 독서에 몰두하여 기대를 모았으며 자라면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자연을 벗삼았다. 이러한 것들을 문장으로 표현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여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일찍이 북경(北京)에 드나들면서, 그곳에서 접하는 인물·풍속·경치를 내용으로 한 《벽로집》 4권을 저술하였다. 문집에 《연파집》이 있다. 김창일(金昌一 / 1548~1631) 조선 중기의 문신. 자 형길(亨吉). 호 사한(四寒). 김근공(金謹恭)의 문인. 1595년(선조 28) 유일(遺逸)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가 되고 이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1601년 홍천현감(洪川縣監)으로 나간 뒤 고산(高山)·고창·금구(金溝)의 현감에 이어, 안락(安樂)·합천의 군수 등 외직을 지낸 뒤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등을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낮출 때 정온(鄭蘊)과 함께 극력 반대하는 소를 올렸고, 16년 형장(刑杖)의 남용 혐의로 체포된 해주목사 최기(崔沂)의 공술(供述) 초고를 이귀(李貴)와 함께 수정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청도군수(淸道郡守)로 재기용되고, 27년 정묘호란 때 원주에 돌아가 80의 나이에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난이 끝난 뒤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이 되고, 30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학문을 닦아 학식이 뛰어나고 서문에도 능하였다. 김창하(金昌河 / ?~?) 조선 후기의 가야금과 춤의 명인. 자 의선(義善). 서울 출신. 유명한 국악 가문 태생으로, 정조(正祖) 때의 국악사 김대건(金大建)의 아들이며, 철종·고종 때의 가야금 명인 김종남(金宗南)의 숙부이다. 정재(呈才)의 안무(按舞)에 뛰어났으며, 1827년 전악(典樂)이 된 뒤 순조의 세자 익종(翼宗)을 도와 악단 구후관(九官)을 조직하여 그 감관(監官)의 칭호를 받았고, 순조(純祖)의 망오(望五)에는 세자를 도와 축하진연(祝賀進宴)의 많은 정재를 지었다. 작품에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ont face="바탕체" size="2" color="navy">조선 후기의 문신. 자 자유(子有)·숙기(叔起). 호 급류정(急流亭). 시호 정헌(靖獻). 서산 출생. 1699년(숙종 2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檢閱)·주서(注書)·대사간 등을 지냈다. 경종 때 한성부우윤(右尹)으로,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도승지가 되고, 이듬해 우참찬(右參贊)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한성부판윤에서 쫓겨났다가, 이듬해 우참찬으로 복직되었다. 탕평책에 반대하여 다시 파직, 30년 좌참찬에 복직되었다.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영의정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중추부판사로 벼슬에서 물러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김종효(金從孝 / 1409~?) 초명은 달효(達孝), 개국공신 계림군(鷄林君) 균( )의 손자이며 공호공(恭胡公) 김종순(金從舜)의 아우이다. 태종(太宗) 때 출생하여 세종(世宗) 때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가 되어 세자익위사좌세마(世子翊衛司左洗馬)로 처은 관직에 나간 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 오위사직(五衛司直),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 세자시강원좌필선(世子侍講院左弼善), 훈련원도정겸군자감부정(訓練院都正兼軍資監副正), 군기시정(軍器寺正), 공조참의(工曹參議), 우림위장(羽林衛將)을 거쳐 문종(文宗) 때 병조참의(兵曹參議), 단종(端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후 왕위를 찬탈(簒奪)함에 반발하여 상왕(上王:단종) 복위를 기도하다 실패하자 관직을 버리고 뜻을 같이 하는 한성판윤(漢城判尹) 이지대(李之帶) 및 제(弟) 진사(進士) 종우(從禹)와 함께 경주부(慶州府) 남중리(南中里)에 은거(隱居)하였다. 김 수(金 需) 고려 말 천서(天瑞)의 아들로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를 역임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호공(靖胡公) 김의열(金義烈) 월성군 수(需)의 동생으로 효성이 지극했으며 참의(參議)를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김자온(金自溫) 1401년 (태종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진사과(進士科)로 급제,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냇다. 김인찬(金仁贊) 조선때 동지절제사(同知節制使)를 역임하고, 시호는 충밈(忠愍) 죽은ㄱ뒤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으로 익화군(益和君)에 추봉되었다. 김 타(金 陀) 1401년 (태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김덕재(金德載) 조선때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 은열공의 12세손으로 조선개국(朝鮮開國)의 보좌공신(補佐功臣)이며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다가 태조(太祖)를 따라 함흥(咸興)에 갔다가 중산(中山)에 은거하였다. 김위민(김爲民) 1401년(태종)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냈다. 김 작(金 綽) 1414년 (태종 14) 문과(文科)에 을과(乙科) 1등으로 급제하여,낙안군수(樂安郡守)를 지냇다. 김자양(金自養) 자(字)는 선군(善君). 호는 호연당(浩然堂), 정숙공(貞肅公) 인경(仁鏡)의 7세 손이다. 태종조에 문과(文科0에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통천군수(通川郡守)와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역임하여 치적이 잇었음에 그 지방 백성들이 청덕비(淸德碑)를 세웠다. 김계돈(金季敦) 자양(自養)의 아들로 세종, 문종, 단종조에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역임햇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 되었다. 김종연(金宗連) 1456년 (세조 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 교리(敎理)를 지냇다. 김인령(金引齡 / 1462 - 1504) 조선의 문신. 자는 수옹(壽翁). 봉상사정(奉常寺正) 치운(致運)의 아들. 1483년 (성종 14) 진사(進士)가 되고, 1497년(연산군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예조좌랑(禮曹佐郞). 문학(文學) 등을 역임, 1503년(연산군 9) 지평(持平)을 지내고 이듬해 박은(朴誾)의 일파라하여 이자건(李自健). 박의영(朴義榮) 등과 함께 관직을 삭탈 당한 후 임실(任實)에 부처(付處)되어 죽었다. 김장미(金長美) 조선때 문신(文臣)으로 시호는 양신(良愼), 계돈(季敦)의 장남이다. 연산(燕山)의 혼정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歸鄕)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후에ㅜ다시 부름을 받아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김자간(金自幹 / 1439~?) 초명은치간(致幹), 호는 우은(于隱), 세종(世宗) 때 출생하였으며 개국공신 계림군(鷄林君) 균( )의 증손이다.그 부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종효(從孝)는 세조(世祖)의 찬탈(簒奪)에 반대하여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도모하였으나 실패하고 낙향, 은거(隱居)하다 죽었는데 후일 성종(成宗)이 왕위에 올라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세조의 찬탈을 반대하며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신하들과 그 자손들을 사면(赦免)하면서 다시 관직에 등용하는 회유책(懷柔策)을 쓸 때 통훈대부(通訓大夫) 언양현감(彦陽縣監) 겸 경주진관병마절제도위(慶州鎭管兵馬節制都尉)의 벼슬을 받게 되자 은거지인 경주부(慶州府) 남중리(南中里)에서 언양현(彦陽縣) 명촌리(鳴村里)로 이주하여 본향(本鄕)으로 삼고 만정헌(晩定軒)을 건립하였다. 김천민(金天民) 1436년 (세종 18) 부사정(副司正)으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진사과로 급제하고,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역임, 통정(通政)에 이르럿다. 김천령(金千齡) 조선 문신, 자는 인로(仁老), 통판(通判) 치세(致世)의 아들. 1489년 (성종 20)진사(進士)가 되고 1495년(연산군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전적(典籍).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498년 사가독서(賜假讀書)했다. 김명해(金明海) 자는 문관(文觀) 호는 관재, 자양(自養)의 7세손으로, 일찍이 전시에 응하여 을과(乙科)에 뽑혀 예빈시(禮賓寺) 주서(注書)가 되었다. 김춘경(金春卿) 자는 명중(明仲). 조선조 개국공신(開國功臣)계림군 균의 증손이며 승의랑(承義郞)으로서 추장문과(秋場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고,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럿다. 김효정(金孝貞) 1475년 (성종 6)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김 함(金 緘) 자는 중묵(仲默), 호는 농은(農慇), 세종 무오(世宗戊午)년 초시(初試)에 급제하고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출사(出仕)하여 세조 6년에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었다. 김광수(金光粹) 1423(세종5) 문과(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 )에 이르렀다. 김신민(金新民) 전옥부승(典獄副承)으로서 개국공신(開國功臣) 계림군 균의 3세손. 1426(세종8) 문과(文科)에 진사과 (進士科) 로 급제하고, 검열(檢閱),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제학(提學) 동지중추 (同知中樞)가 되었다. 대사헌(大司憲) 승경(昇卿)의 부(父) 김 확(金 確) 1435년 (세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진사과(進士科)에급제하고 감찰(監擦)을 지냈다. 김안민(金安民)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계림군 균의 3세손. 부(父)는 증(贈) 병조판서(兵曹判書) 중성(仲誠). 정랑(正郞)으로서 1447년 (세종 2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정과(丁科) 3등으로 급제하고 통정(通政)에 판사제(判司帝) 감사(監事)가 되었다.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추증(追贈) 김인손(金麟孫 / 1479 ~1552) 조선의 문신. 자는 정서(呈瑞), 1501 년(연산군 7)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1509년(중종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1532년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시 유배중인 이종익(李宗翼)의 상소문을 전달하여 파면된 일이 있으며, 예조판서.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참찬(參贊)을 지냈다. 김 임(金 任) 자(字)는 중겸(重兼), 1480년(성종11) 무과(武科)에 급제하고1506년 (중종1)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냈다. 동년(同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冊錄)되고 계성군(鷄成君)에 봉해지고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올랐다. 김의동(金意同) 1428년 (성종13) 장사랑(將仕郞)으로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양보(金良輔) 1502(연산군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수찬(修撰)을 지냈다. 김 요(金 耀) 1496년(연산군) 문과(文科)에 올라 을과(乙科)로 급제,군수를 지냈다. 김가원(金可遠) 자(字)는 공망(公望),1510년(중종5) 교수(敎授)로서 식년문과에 병과 (丙科)로 급제,전적(典籍)을 지냈다. 김성구(金成九). 자(字)는 기수(奇搜),1522(중종17)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학정(學正)을 지냈다. 김세준(金世俊) 자(字)는군필(軍弼),1507년(중종2) 사용(司勇)으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 에 병과(丙科)로 급제,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 선(金 琁) 자(字) 는 온보(溫甫),1495 년(연산군 1) 진사(進士)가 되고 1507(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치운(金致雲) 자(字)는 종용(從龍),1524년(중종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교리(校理) 등을역임,참판(參判)에 일르렀다. 김 홍(金 泓) 자(字)는 홍지(泓之), 1528년(중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진주목사(晉州牧使) 등을 역임, 통정(通政)에 이르렀다. 김 저(1512 ~ 1547) .조선의 문신, 자는 학광(學光), 이조참판(吏曹參判) 세필(世弼)의 아들. 1539년 (중종 3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1545년(명종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심한 고문을 받고 삼수(三水)에 유배, 이듬해 사사(賜死)되엇다. 선조 초에 관작이 복구,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追贈),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김천우(金天宇) 자(字)는 대용(大容),. 1538년(중종3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장악원정(掌樂院正) 등을 역임했다. 김 완(1546~1607) 자(字)는 언수(彦粹), 호는 사성당(思誠堂), 자양(自養)의 현손(玄孫)인 공(公)은 일찍이 서경(書經)과 손오병서(孫吳兵書)에 통달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올라 사도(蛇渡) 첨사시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장군과 더불어 옥포(玉浦), 한산도(閑山島) 등지에서ㅜ대공(大功)을 세워 척후장(斥候將), 조방장(助防將) 정3품 절충(折衝)에 올랐다. 김용경(金龍慶 / 1678~1738) 조선의 문신, 자는 이견(而見), 두정(斗井)의 아들, 홍성(洪城)출신,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成均館) 유생으로 있다가 1718년숙종 4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경종 초에 정언(正言)을 지내고 영조 초 노론(老論)으로 3사의 벼슬을 거쳐 대사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역임했다. 김한철(金漢喆) 자는 사적(士迪). 1731년 (영조 7) 참봉(參奉)으로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역임.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효간(孝簡) 김한구(金漢耉 /? ~ 1769) 조선 영조의 장인.시호는 충헌(忠憲), 관찰사 홍욱(弘郁)의 아들, 1759년(영조35) 딸이 계비(繼妃: 정순왕후)가 되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금위대장(禁衛大將)을 거쳐 1763년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냇다.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김한록(金漢祿) 조선 문신(文臣), 자는 여수(汝綏), 호는 한간(寒澗), 영조의 장인 한구(漢耉)의 종제(從第), 충남 서산(瑞山)출신, 한원진(韓元震)의 문인. 가난한집 출신으로 학문에 힘쓰지 않다가 종형인 한구가 귀한 신분이 되자, 발분하여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벼슬은 세마로 지냇다. 10-4. 근대시대 김계선(金桂善/1891~1943) 대금의 명인. 초명 기선(基善). 호 죽농(竹濃). 서울 출생. 명적(名笛) 최학봉(崔鶴鳳)·정약대(鄭若大) 등에게 사사하였으며, 대금을 전공하여 스승을 능가하였다. 15세에 주전원(主殿院) 내취(內吹)가 되고, 1908년 장례원(掌禮院)으로 옮겼다가 11년 이왕직(李王職) 세악내취(細樂內吹), 13년 아악수(雅樂手), 15년 제사과(祭祀課)에 근무하였다. 31년 은퇴하기까지 여러 번 아악수장(雅樂手長)에 대한 교섭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그대로 악공직(樂工職)에 머물렀으며, 악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서 어려운 곡목과 소리를 잘 연주하였다. 특히 저음의 《평조회상(平調會相)》과 고음의 《청성곡(淸聲曲)》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대금 외에 생황(笙簧)에도 독보적이었으며 생전에 취입한 음반이 전한다. 김교준(金敎準/1884~1965) 한국 근대 양의학의 선구이며 대종교(大倧敎) 지도자. 자 계평(季平). 호 내원(萊園). 일명 준(準). 서울 출생. 1902년 한국 최초의 양의 양성기관인 대한의학교를 제1기생으로 졸업하였고, 그 후 육군부위(副尉)에 임관되었으며, 이듬해 모교의 교관이 되어 10년 국권피탈 때까지 군 의무사(醫務士)로 있으면서 정3품인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육군참령 3등군의장(陸軍參領三等軍醫長)까지 승진하였다. 나라를 잃은 후 관직에서 물러나 대종교 신자가 되어 11년 지교(知敎)로 특별임명을 받고 배천지사(白川支司)의 전사(典事)로 일하였다. 14년 상교(尙敎)가 되었는데, 17년에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총본사(總本司)가 동만주 지린성[吉林省] 삼도구(三道溝)로 옮길 때 맏형이자 제2대 교주 교헌(敎獻)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선교에 노력하는 한편, 재만(在滿) 동포들의 질병 치료에도 힘썼다. 38년 정교(正敎)가 된 후에 8·15광복을 맞게 되자 귀국하여 서울에 남도본사(南道本司)를 세우고 전리(典理)로서 활동하다가, 총본사가 환국해 오자 초대 전리 겸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교주 권한대행)가 되었고, 58년 사교로 승진하면서 도형(道兄) 호칭을 받았다. 62년 4월에는 제5대 총전교(總典敎:교주)에 선출되었다. 김돈희(金敦熙/1871~1936) 서예가. 자 공숙(公叔). 호 성당(惺堂). 어려서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배우다가 황정견(黃庭堅)의 행서(行書)를 배웠으며, 예서(隸書)에도 능하였다. 서화협회 회장·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서법 연구기관인 상서회(尙書會)를 설치하여 후진 지도에 힘썼다. 벼슬은 검사(檢事)를 거쳐 중추원(中樞院) 촉탁을 지냈다. 김동명(金東鳴/1900.6.4~1968.1.21) 시인·정치평론가. 호 초허(超虛). 강원 명주(溟州) 출생. 1920년 함흥 영생(永生)중학 졸업 후에 흥남, 평남 강서(江西) 등지에서 소학교 교원생활을 하였다. 25년 강기덕(康基德)의 원조로 일본에 건너가서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30년 첫 시집 《나의 거문고》를 간행하였다. 38년 제2시집 《파초(芭蕉)》를 간행하였는데, 이 중 <파초>는 남국을 떠나온 파초와 조국을 잃은 자신의 향수를 융합시켜 읊은 것이다. 47년 월남하여 60년까지 이화여대 교수, 참의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시는 전원적·목가적인 세계에서 점차 정치와 사회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한편 신문·잡지에 정치에 관한 평론도 많이 썼다. 시집 《삼팔선(38線)》 《하늘》 등을 발표하였고, 시집 《진주만(眞珠灣)》으로 54년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동아일보》 등에 발표한 정치평론을 모은 《적과 동지》는 55년에 발표되었다. 그 밖에 시집 《목격자(目擊者)》, 정치평론집 《역사의 배후에서》, 수필집 《세대의 삽화》, 그리고 사망 후에 김동명 문집 간행회에서 발간한 사화집 《내 마음》 등이 있다. 김석창(金錫昌/1876~1950) 독립운동가·종교가. 평북 철산(鐵山) 출생. 1910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 20년 선천(宣川)으로 이주, 같은 해 8월 미국 의원단이 선천을 통과할 때 한국의 독립의지를 알리기 위한 진정서를 제출하고 선천경찰서를 폭파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9월 당시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결사대원 박치의(朴治毅)·임용일(林龍日)·이학필(李學弼) 등이 선천에 잠입하자 이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도록 도왔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21년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28년 출옥하여 평북 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며 50년 6·25전쟁 때 공산당에게 총살당하였다.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용원(金庸源/1892~1934) 독립운동가. 자 중옥(仲玉). 호 강산(剛山). 충남 대덕(大德) 출생. 1914년 휘문의숙(徽文義塾)을 졸업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원이 되었다. 독립운동 및 외교후원회 자금의 조달을 위하여 20년 국내에 들어와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剛)과 접선,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하고 그를 상하이로 망명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 홀로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24년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독립공채(獨立公債)를 가지고 귀국, 활약하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중 이듬해 형집행이 정지되어 출옥하였다. 상하이로 망명하였다가 또다시 자금 모금을 위하여 입국하여 활약중 26년 충남 논산(論山)에서 체포하려는 일본경찰을 타살하고 피신하여 국내에서 활동하였다. 27년 안동(安東)에서 잡혀 무기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병으로 보석되었으나, 이튿날 병사하였다. 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김종남(金宗南/?~?) 한말의 가야금의 명인. 자 사극(士極). 호 해은(海隱). 유명한 국악 가문 출신으로 가야금의 명인 창록(昌祿)의 아들이며, 고종 때의 음악이론가로 제4대 아악사장을 지낸 영제(寧濟)의 양조부(養祖父)가 된다. 1859년 전악(典樂)에 오르고, 68년 이후 1902년까지의 각종 진연 때 집사악사(執事樂師)를 거쳐 초대 국악사장(國樂師長)을 지냈다. 김준현(金俊鉉/1918~1961) 피리의 명수. 호 가농(茄濃). 충남 연기(燕岐) 출생. 14세 때 이왕직 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 제4기생으로 입소, 최순영(崔淳永)에게 피리를 배우고, 김계선(金桂善)에게 대금을 배웠다. 1936년 아악수(雅樂手)가 되고, 광복 후에는 국립국악원의 국악사가 되었다. 목피리를 잘 불어 합주는 물론 독주에도 능하였으며 국악의 피리연주에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52년 국악진흥회(國樂振興會)로부터 제3회 국악상을 받았다. 김중건(金中建/1889.12.6~1933.3.23) 독립운동가. 호 소래(笑來)·불폐(不吠). 도호(道號) 마루진·원백(元伯). 함남 영흥(永興) 출생.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11세 때 이미 천재라 불렸고, 18세가 되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판하고 노장철학(老莊哲學)에 심취하였다. 1914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도학(道學)에 관한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16년 안도현(安圖縣)에 도전학원(道田學院)을 설립하였으며, 17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었다가 이듬해 가석방된 후 여러 곳에 학원을 설립하여 혁명가 양성에 노력하였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원종총사(元宗總司)·종우회(倧友會)·농우동맹(友同盟) 등을 조직, 항일투쟁을 벌이던 중 33년 조선공산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문집으로 《소래집》이 있으며, 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태석(金台錫/1875~1953 서예가. 호 성재(性齋). 일찍이 중국·일본 등지에 왕래하였고, 전서(篆書)·예서(隸書)·전각(篆刻)에 뛰어났으며 해서(楷書)는 안진경체(顔眞卿體)를 따랐다. 중국에 갔을 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옥새를 새겼고, 그의 서예고문을 지냈다. 해인사에 글씨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가 있다. 김태원(金泰源/1900.5.22~1951.3.21) 독립운동가. 호 심산(心山). 자 경중(景仲). 가명 성원(性源). 대전 출생.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의 황푸[黃a]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약하였다. 22년 동지들과 국내에 잠입하여 평북 삭주(朔州)의 대관(大館)주재소와 창성(昌城)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4명을 사살하였다. 동년 8월 국내에서 벽창의용단(碧昌義勇團)을 조직하고 평남북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및 친일파 숙청작업을 하였으며, 평남 대동(大同)의 금촌(金村)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3명을 사살하였다. 26년 다시 국내로 들어와 군자금 모금활동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탈옥에 성공하여 상하이로 탈출하였다. 8·15광복 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였다.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1. 김씨 분관 연원 계보도 (金氏 分貫 淵源 系譜圖) |
첫댓글 역시 이 곳 자료에도 우리 경순대왕께서 고려 왕 건에게 항복을 하였다고 잘못 나와 있네요. 안타깝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경순왕의 제8자 삼척군 휘 추공이 선산김씨(한충계)는 일선군으로 삼척김씨는 삼척군으로 진주김씨는 진성군으로......한 사람이 이렇게 세개의 군호를 받은일이 역사적으로 있나요? 고전고증문헌은 삼척군이 맞습니다. 그러나 일선군이라는 군호는 선산김시 측에서 시조를 날조하기 위하여 주장하는 일이고 진주김씨는 추공이 진성군이 아니라 偉의 장남 충신공이 진성군입니다. 그런데 이 역시 조상미화 차원에서 추공이 진성군으로 둔갑한 것입니다. 수정해 주셔야 합니다. 후손들은 의아해 합니다. 어느것이 옳은지?
많은 도움되었습니다. 수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