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집 <인천문단> 수필)
<토렴하다>
- 문하 정영인 -
어렸을 적, 내 고장 안중에는 5일장이 섰다. 매달 1일, 6일에 열리는 장이다. 안중장은 그 근방에서는 제법 커서 쇠전(牛市場)까지 있었다. 쇠전은 우리 동네에서 가면 장터 초입에 있었다.
쇠전 옆에는 장날마다 서는 국밥집이 있었다. 우리 고향에서는 ‘장국밥’이라 하였다. 밖의 커다란 무쇠가마솥에서는 장국밥 국물이 설렁설렁 끓고 있었다. 마치 밑에서 솟아오르는 온천수가 용솟음 치는 것처럼……. 국물은 장국밥 마는데 주로 쓰였다. 사방에서 일찌감치 몰려온 장사꾼들의 술국이 되기도 하였다.
그 고깃국 냄새는 소증(素症)을 앓고 있는 뱃속의 회를 동하게 만들었다.
국밥집 시렁에는 토기뚝배기가 엎어져 아파트처럼 층을 이루고 있었다.
쇠전의 소들의 울음소리, 워낭소리, 흥정하는 소리, 어미소와 헤어지는 송아지의 애처로운 울음소리 등이 뒤엉켜 시끌버끌하고 도떼기시장이 되었다.
추운 겨울철이면 가마솥에서 나오는 김과 소의 콧구멍에서 나오는 김은 장관이었다. 소의 입 주위에는 작은 고드름이 달리 정도로 추울 때도 있었다. 대개 아주 추운 날이면 소들은 덕석을 덮고 있고, 쇠똥냄새까지 쇠전을 구수하게 휘몰고 다녔다.
어쩌다가 엄마를 따라 장에 가는 날이면 나는 신이 난 송아지처럼 엄마 앞뒤를 쫓아다녔다. 우리 동네에서 장터까지는 먼 십리길이나 되었다. 신작로를 따라 가면 고개를 세 개나 넘어야 했다. 엄마는 머리에는 팔아 가용으로 쓸 곡식 몇 됫박이 똬리 위에 얹혀 있었다. 엄마 따라 발밤발밤 밟아가면 시끌시끌한 장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곡마단이라도 들어온 날이면 구슬픈 트럼펫 소리가 마음을 설레게 했다.
쇠전은 장터 초입에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고, 국밥집에는 벌써 촌로들이 삼사오오 모여 막걸리 한 대접씩 기울이고 있었다.
장마당에는 각종 난전이 펼쳐져 있고, 흥정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내 입에는 왕눈깔 사탕이 볼따구니를 볼록하게 만들었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들르는 곳이 장국밥집이었다. 구수한 냄새가 내 코를 벌름거리게 만들었고, 뱃속을 무두질하게 요동쳤다. 엄마는 장날은 주로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어릴 때부터 나는 병약하였다. 그 때부터 대학에 다닐 때까지 속앓이(우리 게에서는 소가리)를 앓았다. 그 소가리 때문에 무척이나 부모님 속을 썩여 드렸다. 소가리는 주로 소증 때문 일어났다. 소증은 고기를 못 먹어서 일으키는 일종의 육징(肉癥)이다. 이놈의 병은 일 년에도 서너 번 난리를 쳤다. 일종의 위경련인데, 사람의 진을 다 빼놓고서야 가라앉았다. 그래서 엄마는 나만 고깃국물을 먹이러 주로 나만 데리고 장에 오신 것이다. 그걸 알았을 때는 벌써 어머니는 내 곁에 계시지 않았다.
장터국밥집에서 엄마는 국밥을 달랑 한 그릇만 시키셨다. 우선 뚱땡이 국밥집 아줌마는 뚝배기를 뜨거운 물에 담가서 덥혔다. 마치 커피 잔을 뜨끈하게 하듯이……. 국밥집 주모는 그 뚝배기에다 찬밥을 퍼 담았다. 그리고선 커다란 국자로 설설 끓는 국물로 한두 번 국물을 떠서 토렴시켰다. 그러고 나서야 장국물을 정식으로 부은 다음 대파 썬 것을 담뿍 넣어 주었다.
한 그릇을 둘이 먹었다. 아줌마는 우리 사정을 눈치 챘는지 국물과 밥을 넉넉하게 담았다. 아마 한 그릇 반쯤 담은 것 같다. 사실, 그 당시 쇠고기 한 점 먹기는 참으로 드물었다. 그저 명절날이나 제삿날이 아니면 참으로 드문 하였다. 생일날도 미역국에 달걀찜이 고작였으니깐.
아마 내가 두 숟가락 뜨면 엄마는 한 숟가락 떴을 것이다. “어여 먹어, 어여 먹어!” 뜨거운 국물 때문에 훌쩍거리는 코를 앞치마로 닦아주시면서. 내가 얼마나 걸신들리듯이 먹었을까. 눈치 빠른 후덕한 국밥집 아줌마는 뜨거운 국물과 밥을 더 넣어 주었다. 대충 썬 섞박지와 깍두기를 얹어 먹던 장터국밥은 지금 어디 가서 먹는 국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금 생각을 하면 엄마는 얼마나 배고프셨을까.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유난히 보신탕을 맛있게 끓이셨다고 한다. 그 당시 단백질이나 기름기 보충은 보신탕, 삼계탕, 추어탕이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쇠고기는 서민이 먹기에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렇게 소가리 때문에 약골로 자라던 나를 애면글면 걱정하시던 엄마는 내가 여덟 살 때 하늘나라로 먼저 가셨다.
국밥은 우리나라 최초의 외식 메뉴일 것이다. 국밥은 서민들 음식이다. 소나 돼지를 잡으면 주로 그 부산물을 가지고 끓인 것이기 때문이다. 설렁탕, 곰탕, 해장국, 추어탕, 육개장 등 우리 탕문화의 원조는 국밥이다. 그때 먹던 국밥 한 그릇, 설설 끓던 가마솥, 인심이 후했던 쇠전의 워낭소리, 시끌벅적한 흥정소리, 국밥 아줌마의 큰 손, 국밥 한 그릇 시켜 놓고 막걸리 한 대접 넘기시던 할아버지들, 회가 요동치는 구수한 고깃국 냄새, 어미소와 송아지가 막무가내로 헤어지는 구슬픈 눈과 울음소리…….그리고 멀리 사라져가는 워낭소리.
나에겐 한 25년쯤 되가는 모임이 하나 있다. 이 모임은 창립부터 일요일 아침에 모여 거닐거닐하다가 해장국을 먹고 헤어지는 모임이다. 주로 국밥을 먹는다. 국밥 모임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이십여 년을 주로 국밥만 먹다보니 인천의 이름 있는 국밥집은 다 순례했을 정도이다. 설렁탕, 해장국은 물론 소머리국밥, 뽈테기탕, 순댓국, 추어탕 등.
요즘은 따로 국밥이라 하여 밥과 국을 따로 먹지만, 국밥의 참맛은 밥과 토렴한 것이 제 맛이다. 시골 동네 잔칫날, 으레 잔치국수를 먹게 된다. 채반에는 삶아서 한 사리씩 건져 놓은 국수에다 두어 번 설설 끓는 국물로 토렴하여 먹던 그 맛은 일명 ‘잔치국수’로 어디 가나 행세를 하고 있다. 지금도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면 뜨거운 국물에 토렴하여 준다.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자기 동네에 부산의 명물 ‘돼지국밥집’이 생겼으니 한번 먹으러 오라고. 아마 돼지국밥도 순댓국처럼 새우젓으로 간하는 것이 제격이리라.
요즈음 사람들은 너무나 급하게 서둘러 토렴을 하지 않는다. 허겁지겁 먹는 게 일쑤다. 뚝배기와 커피잔을 먼저 데우듯이 음식도 순서 있게 슬로우(slow)하게 먹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 건너뛰는 것을 좋아한다. 그 ‘빨리빨리’ 가 한국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세계적인 명품어기 되었으나 건너뛴 압축 성장은 우울증 같은 많은 정신적인 문제점을 탄생시키고 있다.
좀 인생을 토렴시키며 살고 싶다.
그때, 엄마는 막내동생을 뱃속에 품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