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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에서 찾은 선비정신
도(道)에 꽃이 피다
우수가 지나자 낙안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금정산 자락의 금둔사에는 일찌감치 만첩홍매가 굵은 눈발 속에서 꽃망울을 터트렸다. 겨울 한설, 그 긴 세한의 추위를 견디며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분홍 빛 홍매화는 눈보라 속에서 더욱 고고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옛 고사 속의 문인묵객들은 눈 속에 핀 설중매를 찾아 나귀를 타고 설산을 헤매며 탐매행각을 떠났던 모양이다. 심사정의 <파교심매도>(주1)에 나오는 맹호연(주2)은 매화가 필 때면 술과 지필묵을 가지고 파교를 건너 매화를 찾아 산을 헤매고 다녔으며, 김명국도 산 속에서 홀로 고즈넉하게 매화를 관상하는 <탐매도>란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가.
조선의 선비들도 매화를 화중군자(花中君子)로 은유하며 고결한 품격을 높이 샀다. 엄동설한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의 모습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은 강인한 기개와 인내를 초극하는 군자다운 면모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양화소록>을 쓴 강희안은 진작부터 매화를 화목구품 중에서 일품에 넣었으니 말이다.
조선의 선비 중에서 가장 매화를 좋아했던 사람은 역시 퇴계 이황이다. 퇴계의 매화사랑은 시각적 이미지의 감상을 넘어 매화와 자신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일체에 근간을 둔다. 퇴계는 매화의 청진함을 리(理)의 세계로 일체화 시키며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도덕적 덕성의 표본으로 삼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매화는 퇴계에게 원동자로서의 리(理)이며, 깨끗하고 맑은 리(理)이고 우주의 몸체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가 늘 주창해온 절대불변의 존재자로서의 표상인 셈이다.(주3) 그 만큼 그는 매화를 좋아했고 그래서 그는 매화 앞에서 늘 겸허했다. <매화시첩>에 나오는 91편의 매화시에서 매화를 매형, 매선, 매군, 은자로 은유하고 인격화 시켰으며 매화 본연의 품성을 순선무악(純善無惡)의 진(眞)으로까지 규정하기도 했다. 홍문관에 앉아서 쓴 <옥당에서 고향의 매화를 생각하며>라는 시를 보면 그는 구구절절 고향의 매화를 그리워하며 매화동심을 통해 성현의 도를 실천해 나간다.
뜰 앞에 매화나무 가지마다 눈 꽃 피니
풍진의 세상살이 꿈마저 어지럽다.
옥당(玉堂)에 홀로 앉아 봄밤에 달을 대하니
기러기 슬피 울제 그대 생각 애절하다.
도산서당에 칩거할 때도 퇴계는 서당 주변인 절우사와 매단에 매화를 많이 심고 매화가 피면 청자로 된 둥근 의자 밑에 불을 넣어두고 밤새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매화를 완상하곤 했다.
뜨락을 거니니 달이 나를 따라 오네
매화 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가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길 잊었더니
옷깃에는 향기 가득 달그림자 몸에 닿네
운명하는 순간에도 ‘저 분매에 물을 주어라’고 마지막 말을 남긴 퇴계는 매화를 통해 인간과 자연이 천부의 질서 속에 조화되는 천인합일의 성리학적 테제를 몸으로 실천한 진정한 선비였다.
그러나 퇴계가 그토록 사랑했던 매화는 애석하게도 지금 도산서원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두향이가 선물했다고 전해지는 녹악매도 이미 없어진지 오래이다. 지금 있는 것은 모두 새로 심은 것들인데 가장 오래된 것이 50년생 두 그루이다. 작년에 <茶人(차인)>지에 원고를 쓰기위해서 도산서원의 이오호 소장을 인터뷰 했을 때 그는 혈통매화를 찾기 위해 많은 애를 쓰고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마쓰시마(松都)의 조선매화이다.
강탈 당한 조선매
일본이 임진왜란을 통해 수많은 조선도공을 강제로 연행해 가고 많은 문화재를 수탈해 갔듯이 조선의 매화들도 그 당시 수난을 면치 못했다.
16세기 일본 혼슈의 동북지방 영주였던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해 많은 조선의 명매를 강탈해간 인물이다. 그중에서 도산서원의 녹악매는 미야기현(宮城縣) 센다이(仙台)시에 있는 미야기 형무소에 옮겨 심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도산서원에 있던 도산매와 산청의 정당매, 부여의 백강동매, 지천매, 진양 대곡매등은 효고현(兵庫縣)으로 오게된 정확한 경유는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최근 까지 효고현 히메지(姬路) 미쯔(御津町)의 세계매화공원에 있었으나 고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다만 진양 대곡매는 지금까지 현존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부여 규암면 백강마을의 동매는 백강 이경여가 청나라에서 가져온 것으로 12월 20일 이면 꽃이 핀다하여 마을 사람들은 한매(寒梅),또는 동매(冬梅)로 불렀던 매화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들이 삽목하기 위하여 가지를 무수히 쳐가는 바람에 원목은 결국 고사하고 말았으며 그때 삽목된 것이 효고현을 비롯해 일본 각지의 매화공원에 이식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뿐이다. 효고현의 세계매화공원은 지금 한.중.일 매화만 300여 종류가 있는 곳이며 이외에도 규슈 최남단인 가고시마현(鹿兒島縣)의 선암원(仙巖園)과 구마모토의 수전사(水前寺)공원에도 많은 종류의 매화를 심어놓았다.
다테 마사무네는 창덕궁 선정전에 있던 와룡홍매와 백매도 뿌리 채 뽑아 마쓰시마에 있는 서암사(瑞巖寺, 828년 건립)(주4)와 예전에 와카바야시성(若林城) 이었던 지금의 미야기 형무소 자리, 그리고 센다이 시민공원에 심어 놓았다. 용이 누워 있는 것 같은 미야기현의 명물인 이 서암사의 와룡홍,백매와 미야기 형무소 내에 있는 와룡백매는 바로 우리궁궐에 있었던 조선매인 것이다.
센다이시에 있는 가미농고는 한국으로부터 파견 근무 중인 교육자 임창순의 중재로 서암사에서 분양받은 와룡매 자목(子木)를 육종시키는데 성공하였고 1991년에 자매학교인 수원농생명과학고(전 수원농림고)에 서암사 와룡홍매 자목 2본을 기증하였다. 1999년3월 26일에는 안중근의사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림사(大林寺)의 사이또 주지가 조선 침략을 사죄하는 의미로 서암사 와룡홍.백매 자목을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에 기증하는 와룡매(주5) 환국식을 갖기도 했다. 이 와룡매는 지금 남산공원 식물원 앞 분수대에 심어졌으며, 도산서원은 매화공원 조성사업을 시작하면서 남산의 자목을 다시 기증 받아 2007년에 한 뼘 크기의 와룡백매 15본과 와룡홍매 8본을 서원 뒷밭에 접목 시켜 육종(育種)하고 있다.
이제 남도에는 또다시 매화가 찾아왔다. 섬진강의 백운산자락은 지금 은빛파도가 넘실대는 듯 산 구릉을 타고 넘는 향설해(香雪海)의 진풍경이 대단하다. 이제 북상하며 이어지는 매화의 절기에 다시 한 번 우리 선대들의 매화사랑을 되새겨 본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의 홍매, 산청군 단속사지의 정당매와 야매, 남사리의 분양매, 620년 된 선암사의 선암백매(주5)와 전통 참매화 군락, 전남대의 대명매와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창덕궁의 만첩홍매, 이 모두 수백년 동안 우리 선대들이 지키고 가꾸어온 고매이며 명매이다. 그리고 이 땅의 선비들이 지켜온 매화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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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화가로서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심의위원을 맡고 있다.
* 이 글은 인천일보 2008년 3월11일(화)자 10면에 실린 글을 필자가 더 보강하고 주까지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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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1) 현재 심사정(1707-1769)
<파교심매도>, 비단에 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타계하기 3년 전 작품으로 나귀를 타고 파교를 건너 설산으로 탐매를 떠나는 맹호연을 표현하고 있다. 현재의 그림은 대상을 보편화시키고 관념적으로 재인식하는 요소가 강하여 남종문인화풍의 특색을 갖추고 있다.
<매화와 새(梅鳥圖)>, 18c, 종이에 엷은 색, 30×29㎝, 북한소장작품, 「북녘의 문화유산」에 출품, 국보
이른 봄 매화가지에 앉아있는 새를 그린 것인데 물기를 많이 머금은 필치로 가지와 새를 그린다음 담채를 곁들였다. 간결한 구도에 부드러운 필치, 산뜻한 담채가 어우러져 봄날의 정취를 잘 표현하 고 있다. 심사정의 화조화는 중국에서 전래된 화보를 바탕으로 새롭게 구성한 것이 많은데 이 작 품도 그러하다.
(주2) 맹호연(689-740)은 당 호북의 앙양사람으로 40세 때 당 현종이 벼슬을 권유하였으나 거절하고 은둔생활을 함. 매화를 좋아하여 매화만 피면 술과 안주를 준비해 눈덮힌 산야를 헤집고 다님. 파교를 건너 산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파교심매’란 고사가 생김.
(주3) 퇴계 이황(1501-1570)
‘理와氣는 서로 섞이지 않는 不相雜임을 말하며 理氣二元論을 주장하고 理와氣는 같은 비중으로 상호작용 한다는 理氣互發設을 주장’
‘퇴계의 理는 原動者-절대정신-헤겔의 절대정신과 비슷한 개념.’ 성리학은 자연의 존재적 理와 인간의 당위적 理를 같이 보기에 계몽적이며 인본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매화시첩> : 매화만을 단일 품종으로 91편의 매화시가 수록된 시집이다. 중년이후인 주희의 성리학에 몰입하던 때에 매화에 대한 애정을 노래한 시이다. 퇴계의 매화와 성리학 사이에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덕성을 매화로 상징, 도덕적 심미성과 기개와 절조가 있는 사람, 고결한 기품의 소유자를 표현.
(주4) 서암사(瑞巖寺,즈이간지)의 와룡매
미야기현의 마쓰시마의 명찰로 서기 828년에 세워짐, 와룡매는 조선에서 강탈해와 1609년에 중창불사하며 옮겨 심은것이라고 전한다. 용이 누워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와룡매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서암사는 중심목을 많이 세워 와룡홍매와 백매를 세워 키우고 있다. 일본인은 이 와룡매를 다테 마사무네를 지키는 신목으로 여기고 있다. 다테 마사무네(1567-1636)는 27살에 조선을 침략하였다가 참패하면서 매화를 많이 가지고 일본으로 갔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임으로 센다이의 다이묘(大名)가 되어 와카바야시 성에서 은거하였다.
(주5) 선암사의 선암매
아도화상이 신라 법흥왕(514-540) 때 창건한 절로 신라 경문왕 원년(861)에 도선국사가 대가람을 일으켜 선암사라 이름 지었으며 고려 말에 와서 태고 보우의 임제선풍을 계승한 태고종이다.
*선암매 : 칠전선원과 원통전 사이에 있는 백매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이다. 높이가 10여m나 되어 매화가 만개하면 원통전 기와지붕을 뒤덮을 정도로 웅대하다. 족보로 치면 산청군 단속사지의 정당매와 남사마을의 분양매보다 앞선다.
고려 때 선암사를 중건하며 상량문에다 백매와 함께 선암사 명물인 누운 소나무와 차밭에 대해 기록해놓았다.
...............평화전문인터넷신문 '평화만들기'에세이/칼럼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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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梅花)
- 최규학(장기중학교 교감)
- 2011년 03월 30일 (수)
매화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는 교목으로 중국이 원산지인데 중국, 한국, 일본에 널리 분포한다.
꽃은 매화(梅花)라고 하며 이른 봄에 잎이 나오기 전 꽃대 없이 가지 위에 직접 핀다. 꽃잎은 다섯 장으로 되어 있으며 꽃이 희면 백매화 붉으면 홍매화라 한다.
눈 속에서 피는 경우는 설중매(雪中梅)가 된다. 꽃의 모습은 배꽃이나 벚꽃을 닮았는데 배꽃처럼 청승스럽지 않고 벚꽃처럼 소란스럽지 않아 더욱 품위가 있어 보인다.
이혜인 수녀님은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에서 매화를 우리나라 2월을 대표하는 꽃이라 했는데 3월에 절정을 이루며 매화 축제도 대체로 3월 중순경에 개최된다. 대표적인 매화 축제인 광양매화 축제는 올해에는 구제역 때문에 취소되었다.
조선 초 선비인 강희안은 손수 화초를 재배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라 할 수 있는 「양화소록」을 저술하였는데 화목9등품론에서 매화를 1품으로 평가하였다.
매화는 겨울의 추위를 이기고 이른 봄에 가장 먼저 피어 청아한 향기를 발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절개와 지조를 가진 군자의 상징으로 귀히 여겨왔다.
매화의 이런 모습을 의미 있게 읊은 것이 시경의 寒苦淸香 艱難顯氣 (한고청향 간난현기, 매화는 추운 겨울의 고통을 겪어야 맑은 향기를 내고 사람은 어려움을 겪어야 기개가 나타난다.)인데 풀어쓰면 梅經寒苦發淸香 (매경한고발청향) 人逢艱難顯氣節(인봉간난현기절)이다.
또한 매화는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추운 겨울을 함께 견디는 세한삼우(歲寒三友)라 칭했으며, 수묵화의 4가지 그림 소재를 4군자라 하는데 매(梅), 난(蘭), 국(菊), 죽(竹)이라 하여 매화를 으뜸으로 여겼다.
매화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조선후기의 민화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일부종사의 미덕으로 여인의 비녀에 그려 넣은 것이 매화잠(梅花簪)이다.
매화 열매는 매실인데 그 뛰어난 약효가 신농본초경이나 동의보감에 소개되어 있다. 동의보감에는 ‘매실은 매화열매로 성질은 평이하고 맛이 시고 독이 없으며, 갈증과 가슴의 열기를 없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살균, 정장작용, 해독작용, 전염병, 식중독 예방, 식욕증진, 노화방지, 정서안정, 구토, 설사, 변비, 해열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매실을 훈증한 오매는 면역증강, 항균, 자궁경부암억제 효과 까지 있다고 하니 대단하다.
요즘은 웰빙식품으로 매실장아찌, 매실엑기스, 매실주, 매실차 등 다양한 매실 식품이 각광받고 있고 후식으로 매실차를 제공하는 식당이 많다.
매화에 얽힌 이야기로는 퇴계 이황의 매화 사랑이 널리 알려져 있다. 퇴계는 매화를 좋아해서 매화시 110여수를 지었으며 매화시를 모은 매화시첩을 남겼다.
퇴계는 48세 때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풍기군수로 전근하기 전까지 9개월간 18세의 관기 두향이와 사랑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두향이가 준 매화분을 소중히 여겨 매형(梅兄)이라 불렀으며 죽는 날에도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할 정도였다.
두향이는 이별 후 관기를 그만두고 남한강가에 홀로 살다가 70세에 퇴계가 사망하자 4일 밤낮을 걸어 안동에 가서 조문한 뒤 남한강 장회나루에서 투신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매화라고 하는 평양기생이 평양감사와 가까웠는데 춘설이라는 기생을 감사가 좋아하자 지었다는 시조도 유명하다. “매화 넷 등걸에 춘절(春節)이 도라오니/녜 픠던 가지에 픠엄즉도 하다마는/춘설(春雪)이 난분분(亂紛紛)하니 필동 말동하여라." 이 사랑싸움에서 누가 이겼을까? 아무래도 춘설은 매화를 못 당했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춘설이 내리더라도 매화는 설중매로 피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동천년로항장곡 매일생한불매향)이라고 했다. ‘오동나무는 천년의 세월을 늙어가도 항상 거문고의 소리를 간직하고 매화는 한평생을 춥게 살아가더라도 결코 그 향기를 팔아 안락함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정말 대단한 기개와 자존심의 표현이다. 요즘같이 오염된 세상에서 매화 향기가 나는 사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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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다음카페 '프로사진작가와 사진교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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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좋은사진 모셔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