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혀있던 바람은 산골물을 불러 일으키고 빛은 넘치는 어느 정적한 봄날,맑은 산 계곡 한 조그마한 절의 노스님이 명상에 잠겨 있을때, 한 시대의 명걸이라고 이름난 학자가 그 스님을 찾아왔다.
학자는 지식이 가득했었고 지위와 권세가 대단하여 그의 생각 속에는 오만과 자의식이 가득했다. 그래서 그는 이곳 노사(老師)께서 공부를 많이 했다는 소문을 듣고 지적논쟁을 벌려 그 노사를 꺾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암자를 찾게 됐던 것이다.
명상에 깊게 젖어 있던 노스님은 그를 맞이하여 작은 선실(禪室)에 들게 했다. 그리고 스님은 손수 샘물을 길어 솔물을 일구어서 차를 달이기 시작했다. 여느 때는 스님을 방문하는 손님에게는 언제나 나이어린 사미승에게차를 달이게 하여 대접했는데 그 날은 손수 차를 달여 그에게 찻잔을 들게하고는 차를 따랐다. 차가 잔에 가득찼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부었다.
그러자 학자는 보다 못해 "스님 차가 가득 담겼습니다. "하고 얘기했지만 스님은 묵묵히 차를 계속해서 따랐고, 드디어는 찻물이 방바닥과 방석 따위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더욱 당황한 학자가 "스님 차가 방까지 버리게 합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노스님은 크게 소리치셨다.
"네 자신 속 깊게 뿌리내린 아만과 독선이 가슴 밖으로 넘쳐 너를 버리게 하는 줄은 모르고 찻물이 넘치는 것만 보이느냐! 마치 찻잔처럼 너도 스스로의 지식에 의해 끝내는 넘쳐서 다른 것까지 못쓰게 만들 것이다. "
이렇게 얘기하며 "산은 비어 있는데에 그릇으로서의 생명이 있으며 빈 그릇으로 있을 때라야만 무한한 용기(用器)의 가능성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가득차 있는 그릇은그것을 비웠을 때 다른 물건을 담을 수 있듯 우리들 내부의 심혼(心魂)도 비워내는 작업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다. "라고 얘기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차가 넘치는 것이 아니고, 서구산업사회가 몰고온 온갖 가치구조와 흑백논리로 가득찬 인간의 사고방식과 자연을 상실케 한 공장지대의 공해와 넘치는 인구와 혼란한 논리구조가 우리들 가슴을 피폐케 하고 있다. 찻잔에 차가 넘치듯 황폐한 것들이 흘러서 번지고 있다. 폐쇄된 사상이 그렇고 건조한 이성이 그렇고, 교조주의와 형식주의가 넘쳐서 인간성이 매몰되어 버렸다. 각자가 자기것에만 밀착되어 비어있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것이다. ego로 가득찬 세계, 이런 때 우리 전통문화의 고유한 미덕인 차 마시는 일마저도 그릇되이 넘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민중에게 사치나 부리는 것으로 오해하게 하며, 인간과의 만남이 물량의 기준으로 번지고 있는 실정이다. 차는 인간이 바르게 살아가기 위한 생에 있어서의 깊은 덕목(德目)으로 이어지게 하는 길인 것이다. 차는 멋을 부리고 형식을 꾸미는 길이 아닌 것이다. 금가고 가장 못나고 삐뚤어진 하나의 찻그릇에 온 우주를 담아, 한순간이나마 피폐한 자기를 성찰하고 번뇌로운 영혼을 고요하게 다스리는 것으로써 차를 알아야 하는 것이나, 그리고 좀 더 나를 넓게 확대하여 내가 앉은 그 자리에서 달고 향기로운 차를 조용히 마시는 그 마음이 내 개인에 멈추지 않고 내 이웃과 가까운 민중에게 이어지도록 힘써야 되는 것이다.
넘쳐야 할 것은 차가 아니고 봄날의 풍요로운 햇살처럼 우리들 가난한 가슴속에 차마시는 마음이 너그러운 사랑이 되어 넘쳐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의 길이 되도록 우리들서로 만나고 힘쓰자.
우리들의 선인들이 완성하여 놓은 전통깊은 생활예술의 한부분인 다도(茶道)를, 현대에 어떻게 조명시키고 실제의 생활 속에 골고루 스미게 하여, 우리의 숨결 가까이 활용해야 하겠는가? 이러한 것은 먼저 저 차가 지니는 무한한 정신적 가치를 체득하는 것으로 차문화의 역사적 맥락을 공부하여, 그속에서 잃었던 우리들의 진정한 몸짓을 발견하고 또 그들이 걸었던 풍요롭고 슬기로운 명상의 세계를 통해 신혼이 화(和)해지는 근원을 체득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구체적으로 그러한 근원과의 만남의 진수(眞髓)는 차례(茶禮)를 통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 가야 할 인간으로서의 길'을 배우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차문화는 불과 물의 가장 적절한 만남의 조화로서 비롯된다. 불과 물은 차로써 성립되기 이전엔 서로가 어울릴 수 없는 가장 상극적 제성을 띄고 있는데, 일단 차라는 미묘한 매개체로 어울려 지면 가장 심오한 생활예술이 전개되는 것이다. 흩어진 잎가지들을 모아 불을 지펴서 물을 부드럽게 익혀, 한잔의 차를 점하는 차례, 그것은 참으로 인간이 살아나갈 생활의 기초인 것이다.
불은 지혜를 상징하는데, 서구철학의 기초가 되는 로고스(logos)와 파토스(pathos)의 의미인 사랑의 상징도 불이다. 인간의 본질을 밝혀내는 학문이 철학인데 '철학'이라는 어휘는 philosophy에서 온 말로 philo(지혜)와 sophy(사랑)의 복합어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들 인간의 본질을 터득하는 것일진대 불과 물은 가장 잘 다스리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차례, 그것이 바로 이 깊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차례는 예의를 통한 멋생활, 곧 범절이다. 첫째는 우리 개 개인이 직면한 현실에서의 일상생활을 바르게 영위하는 것, 다시 말해서 한 인간으로서 본래 지니고 있는 사명과 이 사명에 따르는 덕행을 이루어 가는 것이며, 둘째는 세련되고 고상한 취미예술로서 문화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며, 세 째로는 진리에 부합되며 인간생활의 순진무구한 진실함을 목표로 하는 인간형성의 길인 종교 면이 있는데, 바로 이점, 인간이 인간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은 선다일미(禪茶一味)의 사상에서 찾아야 될 것 같다.
선(禪)은 궁극적으로 우리들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수행인 것이다. 미망(迷妄)에 허덕이는 자아의 혼돈에서 절대안정과 지극히 맑음으로 가득찬 세계와의 합일이다. 다도 또한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미와 고요와 조화와 소우주 속에서 서로 일체가 될 수 있는 분위기를 창조하려 한다. 이와 같이 선과 차에는 깊은 고독과 높은 존엄성이 함축되어 있어, 영혼의 청순한 희열을 가져온다.
그렇다면 선과 차의 행위가 어떻게 일치되어야만 선다일미인 즉 선과 차가 둘이 아닌 경지가 될 수 있는가? 차와 선과는 그 형상에 있어서나 그 작용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것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로 귀일(歸一)되는 것이다. 불법(佛法)에 있어서 상(相)과 용(用)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아와 마찬가지로 선과 차는 그 목표에 있어서 일치인 것이다. 차례, 그것이 형성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선 의 길과 통하는 것이다.
다사(茶事:차를 내는 일)는 선에 있어서의 선정삼매행(禪定三昧行)으로 나아가게 된다. 다사를 진행할 때 고요함과 엄숙 함 그리고 다실(茶室)의 소박함 속에서 물을 끓이고 투박한 찻그릇을 만지고 다스릴 때에 일체의 사념이 없는 삼매(三昧) 에 들어가서 본성을 관(觀)하는 일로 다사가 지속되어 지는 것이다. 여기서 삼매라 함은 범어(梵語)의 samadhi의 한자의 음역(音譯)이다. 구체적인 뜻은 마음을 한 가지에 집중하고 그 한 가지 일 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는 사념의 통일이다. 심경일여(心境一如), 물아불이(物我不二)의 의미이다.
우리들 인간은 누구나 모두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을 통해서 의식하게 되는데 그 외계 경계인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蜀), 법(法)을 의식하며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작용하면서 감각과 인식이 성립하게 된다. 이런 감각과 인식으로 조화된 우리들 정신과, 물질의 당체인 존재가 삼매에 의하여 통일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과 차가 둘이 아닌 일미(一味) 즉 일여(一如)가 되기 위해서는 다사를 점(點)하는 그것이 삼매라고 하는 행위에 의하여 개오(開悟)의 깊은 경계에 도달하여야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다 일미가 성립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삼매에 있는 것이다.
「어느 때에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땅에 머리를 붙여 거꾸로 나서 인류의 수요를 공급하는 것, 즉 식물은 그 종류가 많아 이루 헤아리기가 힘들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주림을 충족시켜 주는 곡식과 추위를 막아주는 솜과 삼 등이 일상에 필요한 물품인 것은 일반 사람들과 아이들까지도 다 알고 있다. 또한 그것들은 세시(歲時)의 평온함과 소란함으로 말미암아 쓰이거나 안 쓰이거나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차라고 하는 물건은 기후가 온화하고 어진 사람들이 사는 이 땅의 우수한 산물로써, 산천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집중되어 있어 가슴을 열며 답답한 기운을 씻으며 맑고 화창한 기분을 내게 한다는 것도 누구나가 아는 일 이다. 또한 그 담박하고 간결하며 높고 고요한 운치는 소란한 시기에 있어서도 더욱 숭상받아 온 것이다. 」
이 글은 송나라의 황제 휘종이 쓴 대관다론(大觀茶論) 서문의 일부이다. 이와같이 차는 시끄럽고 소란한 시기에 있어서도 우리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식량 의복과 더불어 오래 애용되어 온 것이다. 시끄럽다는 것은 비단 한시대의 번잡한 문화의 흐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 수없이 들끓는 번뇌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람처럼 늘 일어섰다 사라지는 마음의 물결을, 차생활의 실제에서 고요롭게 다스리는 작업을 하려면, 먼저 차가 지니는 여러가지 덕목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르는 일반지식을 익혀야 할 것이다.
차생활이 지니는 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차는 무엇 보다도 자연스럽고 간소하며 유현(幽玄)하면서 탈속하여 어느 것에더 얽매이지 않아 경계에 훤출히 뛰어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자연스럽고 유현한 차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겠는가. 차에는 아홉가지의 어려운 일이 있는 것이다. 당나라의 다성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 의하다면, 차를 만들 때에는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야 하고, 차를 분별하는 데에는 올바른 안목이 있어야 하고, 찻그릇은 사치한 것을 피하고 찻잔은 눈처럼 흰 것이 좋은데 이런 찻그릇을 얻기가 어렵고, 차를 끓일 때 물의 균작(均灼)이 힘들어 불의 높고 낮음이 문제이고, 좋은 물을 얻기가 힘들고, 찻잎을 적당히 넣는 일이 어렵고, 만든 차를 건조한 것을 헤아려 보존하기가 쉽지 않고, 차를 달여 중정(中正)의 지극한 맛을 얻기가 또한 힘들며, 더욱 청아한 고취로 마시기가 어렵다고 했다.
결국 이것은 다사를 행하는 가운데 하나 하나의 작법(作法)과 분별 제한과 주의를 통해 합당한 규범을 가져야 함을 말하는데, 흡사 마음을 수행하는 면밀한 자세와도 같아 그 속에는 높고 깊은 선다(禪茶)의 사상이 깃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의 초의(草衣)스님께서 쓰신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에는 육우의 다경보다 더욱 자세히 차의 스무가 지 절목이 소개되어 있다.
그 첫번은 차나무로 부터 찻잎을 따내는 일이다. 차나무는 하늘의 귤나무와 같은 덕을 갖게 하여 태어난 천성을 바꾸지 아니하며, 남쪽의 복된 곳에서만 자라는 것이다. 달콤한 잎은 찬 빛에 씻겨 가을 경치를 빛나게 한다. 고야산(姑倻山)에 사는 신선의 살결과 같이 깨끗하고 염부단금(閻浮檀金)같은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다.
차나무의 생김새는 과로(瓜蘆)와 같은데 그 잎은 치자와 같고 꽃은 하얀 산찔레와 같다. 꽃술은 금같이 누런데 가을에 피어 맑고 은은한 향기를 낸다. 또한 차나무는 깊은 밤중에 내리는 이슬이, 푸른 구슬같은 가지를 맑게 씻어 그 잎이 아침 안개를 듬뿍 머금어 마치 푸른 새의 혀와도 같다. 이와 같은 영아한 찻잎을 따는 시기가 중요하다. 너무 빠른 시기에 잎을 얻으면 향기가 온전치 못하여 맛이 비리고 색 또한 청하치 못하다. 반대로 늦으면 싱그러운 맛을 잃으며 동한 기운이 서려 고요한 정취를 잃어 버린다. 그 시기는 곡우 (穀雨) 5일 전이 제일 좋고 곡우 5일 후가 그 다음이고 다시 5일 후가 다음이 된다. 그런데 필자의 오랜 경험에 의하면, 곡우나 청명(淸明)같은 절기는 우리나라의 남쪽 지방에 있어서는 그 시기가 일러 입하(立夏)무렵이 적당한 듯 하다. 또 찻잎을 따는 시기는 빠르고 늦은 절기 즉 평소와 윤달이 드는 해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며, 차산지의 높고 낮음에 따라 서도 다르고 그 해의 습도나 우량에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 찻잎을 얻는 일
맑고 신선한 찻잎을 얻어 내기란 여간 마음을 내지 않고는 힘든 것이다. 그 해의 절서의 좋고 나쁨에 따라 차이가 있거니와, 찻잎을 채취하는 전날 밤새 구름이 끼지 않고 싱싱하게 하늘 기운이 뻗쳐 은빛 이슬이 흡족히 내린 후에 딴 것이 최상품이고, 한 낮에 딴 것이 다음이며, 습기가 서린 음산한 우기에 채취한 것은 좋은 차를 얻기에 적합치 않다.
차는 두툼하게 살찌고 자주빛 나는 것이 제일 좋은 잎이고, 쭈글쭈글한 것이 그 다음이고, 돌돌 말리고 푸성푸성한 것이 중간이고, 찻잎이 여위어서 광택이 나며 솜대처럼 풋풋한 것이 최하품이다. 찻잎은 또 계곡에 어리는 운무(雲霧)를 마시고 자란 것이 제일 귀한 것이고, 대밭 밑에서 맑은 이슬 기운으로 자란 것이 다음이고, 암석 사 이에서 어렵게 자라거나 황토에서 자란 것이 최하품이다.
옛날에 신이기(神異記)란 책에 의하면, 중국 절강성 여요 현에 사는 다인(茶人) 우홍이 차를 딸 적에 한 선인(仙人)을 만났는데, 그가 푸른 소 세 마리를 끌고 우홍을 유인하여 폭포산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단구자(丹邱子:한나라의 신선)니라. 듣건대 그대가 차를 좋아한다 하기에 항상 만나기를 바랐었노라. 이 산에 큰 차나무가 있는데, 그대가 공을 들이면 그 차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후일 간소한 제물을 갖추어 신선께 정성스레 축원하여 좋은 차를 얻게 되었다 한다. 또한 중국의 천목산(天目山)깊은 계곡엔 아름드리 차나무가 무성했는데, 그 살찌고 고운 찻잎들을 원숭이들이 따먹는 것을 보고, 다인들은 원숭이에게 돌을 던져 화를 돋구었다. 그러면 원숭이들은 성이 나서 사람들에게 던지는데, 그것들을 주워다가 참으로 귀중한 차를 얻었다는 기록이 천중기 (天中記)에 보인다. 이와같이 찻잎을 자연에서 얻어내기란 여간한 정성이 아니 면 어려운 것이다.
※ 차를 만드는 일
이렇게 하여 얻은 찻잎을 굽거나 쪄서 말리고 다시 불에 쬐어 완전한 차를 만드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생잎은 차의 깊고 그윽한 향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열을 빌어 향기를 내는 일이 차를 만드는 일이다. 또한 생잎으로는 오래 보존하며 마시기가 어렵기 때문에 불로써 차를 법제하는 것이다. 새로 딴 찻잎은 시든 잎 병든 잎 작년의 잎 그리고 줄기와 부스러기를 골라낸 다음 적당한 솥에 알맞게 생잎을 넣고 덖는다. 이때 한꺼번에 찻잎을 너무 많이 넣으면, 손으로 차를 주물러 혼합할 때 손의 힘이 골고루 미치지 못하게 된다. 차는 성질이 미묘하고 섬세하여 지극한 마음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좋은 차를 얻기가 어려운 것이다.
차를 덖는 그릇은 신철(新鐵)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차솥은 두껍고 폭이 넓을수록 법제하기가 좋다. 더구나 솥에 기름기가 있으면 차는 버리게 되며, 무엇보다도 쇠냄새가 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솥은 깨끗이 닦아서 사용하되 다른 용도로 써서는 안된다. 좋은 솥을 얻어 솥이 매우 더웠을 때 찻잎을 넣고 급하게 말려야 하며, 초벌 때에 완전히 익혀야 한다. 도중에 화력을 맞추면, 골고루 익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상하여 발효하기가 쉽상이다. 또한 솥안에 오래 두게 되면 차의 신기(神氣)가 죽어버리고, 너무 익어 향기와 색을 잃어 버린다.
찻잎이 충분하게 마른 다음 불을 죽이고 꺼내 식힌 후, 두손으로 힘과 정신을 모아 찻잎을 압축하여 비비고 마무는데, 너무 기운이 세게 되면 어리고 부드러운 잎들이 부쉬지고 으깨지기가 쉽다. 한편 힘이 약하고 집중되지 않으면 차맛과 향이 고루 스미지 않아 좋은 차가 되지 않는다. 찻잎을 적당히 비빈 다음 초벌보다 불을 낮게 하여 유념한 찻잎을 다시 솥에 넣고 덖어 말리는데, 이러한 작업을 몇번 되풀이 하게 된다. 그 횟수는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찻잎의 연하고 질긴 정도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초의선사의 다신전에도 적당히라는 것이 지극히 현미(玄黴)하여 말로써 형언키 어렵다고 했다.
차를 덖을 때 쓰는 나무 또한 세심한 선택을 해야 한다. 명나라의 허차서의 다소(茶疏)에 의하면 「차를 덖을 때 쓰는 나무는 나뭇가지라야 하며 큰 장작이나 나뭇잎은 사용해서는 안된다. 큰 장작은 화력이 너무 세고, 잎은 잘 타지만 쉬이 꺼지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오늘날 차를 법제할 때에는 굳이 이렇게 나무를 골라 사용 할 필요는 없겠다. 예전에야 불의 재료가 나무 뿐이어서 그랬겠지만, 요즈음은 가스나 전기 등 여러가지 좋은 불을 이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차를 저장하는 일
낮에는 전원에 나가 노동하여 일상의 삶을 꾸리고, 밤에는 참선하며 설법하면서 온전히 생을 자유 자재했던 중국의 부대사는, 좋은 차를 얻고자 몽정산(蒙頂山)에 들어 가서 스스로 떳집을 엮고 차나무를 심으며 살았었다. 다도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차의 방편을 통해 끊임없이 들먹이는 인간의 심성을 정좌하여 다스리는 일이다. 우리의 초의스님이 산천도인(山泉道人)김명희 한테 보낸 글 가운데 "옛 성현들은 모두 차를 사랑했는데 차는 군 자와 같아서 그 성미가 사특하지 않느니라."하는 귀절이 보인다. 어디 이 세상 생명을 지니고 있는 사물 하나하나가 제각기 제모습 갖추어 곱고 맑은 것 아닌 게 있겠는 가마는, 차는 특히 조주스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가장 어여쁜 식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고운 차를 따서 만들고 이윽고 법제된 차를 분별하여 골고루 나누어 갈무리하는 일 또한 정절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차의 오묘한 것은 조다의 정갈스러움, 차저장의 적절함, 그리고 포법의 적의함, 이 세가지가 잘 어우러져 하나가 되어지는데 있다. 아무리 정성들여 만든 차라도 잘못 저장하면 다 버리는 낭패를 만나게 되는 것이 차의 까다로움이다. 무엇보다도 차는 습기와 찬 곳을 피해야 하며 음산한 곳을 가려야 한다. 좋은 곳을 찾아 수행하는 납자들이 거처를 선택하는 것이나, 사람들이 밝고 청결한 곳에 안주하여 지순한 삶을 얻고자 하는 것 처럼, 차 또한 좋은 장소를 얻어 머물러야 되는 것이다.
차를 저장하려면 먼저 만든 차를 깨끗한 함지나, 또는 좋은 문종이나 닥종이로 여러 겹의 자루를 만들어서, 그 속에 넣고 공기를 차단하여 품성이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될 수 있으면 오래도록 저장하는 것이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좋은 것 같았다. 부드럽고 연한 차가 뜨거운 물에 의하여 기운이 상하였으므로, 본디 가지고 있던 자연한 성품이 나 때깔을 회복하여 중화되려면, 아무래도 많은 차가 서로 어울려지기를 기다려야 미묘한 발향이 될 것이리라.
이리하여 중화된 차를 각각 조금씩 나누어 가지려면 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초의스님의 저서에서는, 청결한 병에 담아 대나무로 만든 피편으로 누르고, 또 몇 차례 종이와 댓잎(죽순껍질)으로 빈틈없이 쑤시고 봉한 후, 연와를 얹어 다실에 두는데, 이때 다실에는 바람이 스며 들거나 화기가 있으면 안된다고 했다. 바람이 차에 스미면 냉해지고 화기에 접하면 차색이 황색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다소에서는, 자기항아리에 넣고 역시 죽순껍질로 누르고 입구 또한 죽피로 꽉 채워 봉하고, 삼끈으로 매어 새로 구운 곱돌로 그 위를 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저장하는 길이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옛날에는 사실상 그릇들을 습기를 피하게 만들기는 어려운 것이었으리라. 오늘날도 차를 보관하는 용기를 선택하기는 여전히 힘들다. 오동나무나 피나무 그밖의 잡목들로 만든 차통이 있거니와, 특수코팅된 포장봉투도 일본 중국에서는 사용되고 있지만, 제일 완벽하고 무난한 것은 역시 캔(깡통)인 것 같다. 이런 것은 일본에서는 기계화되어 진공으로 잘 처리되고 있다.
※불을 다루는 일
차를 끓이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불이다. 초의스님도 이 불에 대해서는 여간한 주의를 기울인게 아닌 듯 하다. 불이 화로에서 완전히 달은 후, 다관을 얹어서 가볍게 빨리 끓여야 한다. 이것을 문무지후라 한다. 문이 과하면 수성, 곧 물이 지니는 성품이 유하게 되어 차가 뒤지고, 무가 지나치면 화성, 곧 불의 사나운 기운이 극력하여 져서 좋은 차가 물에 풀려 스미지를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찻물을 끓이는 숯은 단단하여 완전히 숯이 되어야 한다. 좋은 숯이 아니면 아직 나무 속에 남아 있는 성질이 연기를 내어 물의 품성을 상하게 한다.
이렇게 까다로운 불을 다루는 일 또한, 예전에는 편리하고 쉽게 다룰 수 있는 도구가 갖추어져 있지 않아 더욱 어려웠으리라. 오늘날은 물을 끓일 수 있는 포트나 전기주전자 등 여러가지 가전제품이 많이 있어서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굳이 전통이라는 틀에 걸려 어렵고 까다로운 일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개인의 취향이나 기호를 어떤 것에 맞추어 헤아릴 수 없는 것이겠으나, 멋과 품위 그리고 고상한 아취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리라. 참으로 깊고 너그러운 중화는 기술적인 꾸밈의 길이 아닌, 자연에 순응하고 사회에 순응하는 길인 것 같다.
※물의 선택과 저장
인간이 생을 영위해 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없어서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소중한 물은, 자연이 베풀어 주는 복덕 가운데 가장 신비스러운 조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물은 차의 근본인 체(體)가 되는 것이며, 차는 물에 있어서 신(神)이 되어지는 것이다. 다신전(茶神傳)에서는 진수(眞水)가 아니면, 그 신비스런 차의 영정(靈精)한 기(氣)가 나타나지 않고, 정미로운 차가 아니면 그늘에서 오는 것이며, 물빛의 품성은 현상적으로 탁하고 맑고 하지만, 물의 본성에 있어서는 분별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땅의 산천이 말고 고운 곳에는 반드시 물맛이 싱그럽고 감미로운 법인데, 거기에 더하여 어질고 순한 백성이 사는 우리의 땅은, 산천 어느 곳을 헤아려 봐도 물맛 가릴 곳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물을 더욱 섬세하게 선택했던 초의스님은 품천(品泉)의 절목(節目)에서 말하길, 산정(山頂)의 샘물은 맑으나 가볍고, 수하(水下)의 샘물은 맑으면서 무겁고, 석중(石中)의 샘물은 맑으며 달고, 사중(沙中)의 샘물은 맑고 차며, 토중(土中)의 샘물은 담백하며, 황석(黃石)으로 흐르는 물은 쓸만하나 청석(靑石)에서 나는 물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흐르는 물은 고여 있는 물보다 더 좋고, 그늘의 물은 햇빛을 받은 물보다 좋다고 하며, 순수한 물은 맛이 없고 향기가 나지 않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당나라 장우신(張又神)의 전다수기(前茶水記)에서는, 양자강 남영(南零)의 물을 제일로 하여, 혜산사(惠山寺)의 석수(石水), 소주(蘇洲)의 호구(虎丘), 단양 관음사(觀音寺)의 물, 양천(揚川)의 대명(大明), 오송강(吳松江), 회수(淮水)의 물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여러 등급으로 물을 분별하는 현란스러움을 비롯하여, 당나라 소익의 십륙탕품(十六湯品), 명나라 자천소품(煮泉小品)에는 별스런 물의 얘기가 쓰여져 있다. 일제때 출판된 가입일웅(家入一雄)의 저서「조선의 차와 선」에서도 우리나라 각 곳의 물과 우물물의 좋고 나쁨이 나오고 있다.
이렇게 물에 있어서까지도 까다롭고 복잡한 것을 서구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을 단순히 대상 즉 사물을 구성하는 질료의 하나로서, 맥주나 포도주를 만드는 용수(用水) 정도로 밖에 받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코카콜라를 만드는 미국인들이 어떻게 우리가 자연을 우리의 생명과 일여하게 받아 들이며, 사물 하나 하나 까지도 전체화 하는 우주적 사고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 자연 속의 사물들을 포괄하여 인식하는 동양인의 자연관을 생각할 때, 자연을 단순히 대상으로 인식하고 분석하려는 이원론적인 가치구조, 즉 객관적으로 분별하여 자연을 획득하려 는 그들의 논리가 이 땅에 들어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사고와 의식을 혼란시키고, 그로 인해 생긴 갖가지 구조적 모순을 어찌 다 얘기 할 수 있겠는가! 각설하고 앞에서 얘기한 물의 그 미묘하고 신비스런 품성을 얻어 길러 저장하는 데에는 세심한 주의와 용기(用器)의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처럼 공해에 혼탁해진 우리의 산천, 특히 산업화로 모든 강물은 오염되어 상하고 썩어가며, 더구나 황폐해진 산과 숲들로 맑은 물들이 살지 못하는 수원(水源)을 본다면 더욱 좋은 물을 선택하고 여과하여서 저장하지 않으면 좋은 차를 마시기가 힘드는 것이다. 집안에 좋은 샘물이 있는 가정, 혹은 사찰처럼 맑고 고운 감천 (甘泉)이 있는 곳이라면, 찻물을 그때 그때 길어 쓸 수 있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 도시에서 수도물에 의지하여 살지 않으면 안되는 만큼, 먼저 물을 저장하는 적당한 그릇 즉 항아리나 물동 이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물의 성품은 까다로워서 금방 변하고 상하며 순수한 물을 만나기가 힘드니, 어린애처럼 잘 어루어 보살펴야 한다. 그래서 나무 그릇이나 플라스틱, 양은그릇은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고, 새로운 그릇도 냄새 때문에 물맛을 잃게 된다. 옛날에는 매우(梅雨)를 담는 항아리를 그늘진 뜰에 놓고 베로 덮어, 별빛과 이슬을 받아 찬물을 얻었으며, 또한 선인(先人)들은 더욱 신령스런 물을 만나기 위해 대추나무 밑에 항아리를 놓고 삼베로 덮어, 흐르는 성운의 눈물(정기)와 밤이 베푸는 온갖 어둠과 은하의 정경을 스며 젖게 했다지 않은가. 황하의 범람한 물을 건강산 여과하여 마시던 중국인들, 베나레스의 혼탁한 강물을 마시고자 했던 인도인들, 그리고 물이 귀한 몽고 유목민들의 어둡고 피로한 유랑의 목마른 삶 속에서는, 물은 여간한 주의로 선택되지 않으면 그들의 삶을 이끌어 갈 수 없었으리라.
이렇게 힘든 물의 선택은, 현실의 복잡하고 기계화된 생활 속에서는 너무나 사치스런 먼 환상이고 보면, 수도물이라도 잘 가라앉혀서 앙금을 제거하고 클로르칼키의 그 소독약 냄새를 없애주는게 좋겠다. 즉 물을 끓이는 포트나 주전자의 뚜껑을 비등점에서 열어 날아가게 하면, 그래도 쓸만한 찻물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물을 저 장한 수반에 맥반석이나 수정을 넣고 물을 맑힐 수도 있는 것이다. 차에 있어서 물만은 절대로 주의하지 않으면 차의 색과 향과 맛을 얻을 수가 없다. 아무렇게나 할 바에야 보리차를 펄펄 끓여 마시면 되지 않겠는가?
오늘날 차인(茶人)을은 말로 차를 마시려 들고, 차가 지니는 본질적 정신을 멀리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훤소(喧騷)하게 하여 차도의 모임을 여러 갈래로 조성하려 들고 있다. 아니해도 가난한 민중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는데, 개인의 맑은 삶이 전체로 통일될 수 있는 에너지를 축적해야 될 것 같다.
※ 물 끓이는 모양
게눈(蟹眼)이 지나더니 고기눈(魚眼)이 일어나고
소소히 솔바람소리 들려오네
몽즙출마(夢葺出磨)에 여린 구슬만 떨어지고
다시 어지러이 물 끓어 비설(飛雪)이 가볍네
은병에 탕을 끓여 제이(第二)를 자랑하니
옛 사람도 그 물끓임을 알아낼 수 없네
노공과 이생은 좋은 화로를 만들어 찻물을 끓이고,
홍옥(紅玉)을 쪼아 찻그릇을 만들었는데
나는 참으로 가난하여 세상의 쓴 고기만 맛보니,
아미(娥眉)를 거느리고 옥그릇을 나눠 갖지 못하였네
어찌 부호의 차마시는 사치를 배워
좋은 화로 값비싼 석조를 마련하여 그들을 따를소냐
뱃속에 쌓인 문자 5천권은 바라지도 않으나
오로지 차 한잔으로 중천에 해 뜨도록 잠이나 즐겼으면.
이 시는 소식(蘇軾)의 차노래(茶歌)로서 물이 끓는 정황을 잘 헤아릴 수 있으며, 한 생을 사치부리지 않고 허영스럽게 떠돌지 않는, 그야말로 한적하고 자연스런 차생활의 높은 경지를 읽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인간이 사는 마을에는 늘 떨쳐버릴 수 없는 시끄러움이 가득한 것 같다. 있는 자들의 저 과분한 사치는 가장 고요롭고 순연한 차 생활 마저도 값비싼 그릇들로 소란을 피우는 법석이 비단 옛 뿐이겠는가? 다신전에서는 탕의 끓은 상태를 분별하는 방법을 세 가지의 큰 것과 열 다섯 가지의 작은 것이 있다고 했다. 그 첫째는 물이 끓는 모양에 의하여 알아내는 형변(形辨)이고, 둘째는 물이 끓는 소리를 들어 알아 내는 성변(聲辨)이며, 다음은 탕물이 끓어 오르는 기세에 의하여 분별하는 첩변(捷辨)이 곧 세 가지 큰 것인데, 형(形)은 차관(茶罐)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성(聲)은 밖의 것이다.
형변은 찻물이 끓으면서 생겨나는 작은 기포를 형용한 말인데 육우의 다경에서는 물고기의 작은 눈처럼 물방울이 맺히면서 솔바람 부는 그윽한 소리가 들이는 것을 일비(一沸), 물솥의 연변(緣邊)에 샘솟듯 탕이 끓기 시작하고 수기(水氣)가 서려서 물방울이 고운 구슬처럼 연이어 맺히게 되는 상태를 이비(二沸) 물이 펄펄 끓어 파도의 여린 무늬가 일어 나는 듯 물결치는 상태를 삼비(三沸)라 하였다. 삼비가 넘어가면 너무 탕이 짙어 노수(老水)가 되어 차맛을 잘 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또한 이 때 끓은 물 조금을 따로 떠 놓았다가, 대젓가락으로 물이 끓는 중심기류를 다듬어 주어 물의 강한 기세를 고요롭게 다스려 주는데, 다시 수기가 극렬해 지면 전에 떠 놓았던 물을 부어 물 기운을 순연케 하여 탕수의 화(華)를 육화(育化) 시킬 수 있다 하였다.
이렇게 물의 기운이 충만하여 잘 다스려 지는 것을 초의스님은 경숙(經熟)이라 다신전에 적고 있다. 그전의 결숙(結熟)이 있고 너무 끓여진 노수의 상태인 순숙(純熟)이 있는데, 물의 끓은 상태의 갖가지를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나 형상에 비유하고 있다. 가령 솔바람 부는 소리라던가 전나무에 비내리는 소리 따위의 표현은 우리의 가슴을 사무치게 한다. 그 밖의 기포에 따라 포말이 버끔버끔한 상태의 바닷게눈, 물방울이 또릿또릿한 모양의 새 우눈 등의 재미있는 표현도 쓰인다. 소리에 있어서는 맨처음 일어나는 초성(初聲)과, 물이 돌돌 말리면서 회전하는 상태의 전성(轉聲), 물이 맹렬하게 기세를 떨치는 정황의 진성(振聲), 물기운이 소용돌이 치면서 사납게 휘몰아 부치는 취성(驟聲) 등이 있는데, 그 네가지가 다 맹탕(萌湯)이라고 말하고 있다. 맹탕이라는 것은 곧 물이 덜 영글었다는 뜻으로 완전하지 못함 을 말한다. 우리가 일상 먹는 밥을 짓는 데에도 물의 뜸을 잘 다스려야 그 밥이 맛이 있듯이, 물이 영글지 않고 간(間)이 맞지 않으면 차맛을 잃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도 삼삼하고 담백하게 간을 맞추어 저 무한히 들끓는 내부의 생업을 잘 가꾸지 않으면, 참으로 소중한 우리의 생명이 덜익은 물처럼 맹탕 헛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시끄럽고 들뜬 자기의 영혼을 고요롭고 맑은 명상을 통해 평화의 간을 맞추고, 맹렬하게 휘몰아부치는 취성의 물기운처럼 열뇌(熱惱)하는 망상을 솔바람 불고 전나무에 가을비내리는 듯한 아늑한 정적의 간을 맞추고, 또한 구르고 돌돌 말려 회전하여 맹탕이 되는 전성처럼 채워도 채워도 가득차지 않는 욕망의 물기둥들을 보시하고 나눠갖는 따뜻한 사랑의 간을 맞추고, 덜 익어 소리내는 초성과 같이 어느 것에나 경박하게 부딪쳐 소리부터 내는 우리들의 얕은 지혜를,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이 현실을 좀더 깊게여과하는 지성의 간을 맞추어야 될 것 같다. 차생활의 다른 것은 다 버리고 모르더라도 물을 간에 맞추어 익히듯이, 우리가 처한 역사현실이 어떤상황에 놓여 있으며, 우리의 전통문화가 어떻게 여과되어 이 시대에 새롭게 조명되고 수용될 것인가 하는 것만은 알아야 할 것이다.
생활구조와 사고방식 까지도 서구화되어 참으로 곱고 여유있는 우리의 생활공간이 침식당한지 오래인 이런 상황에서, 우리 차인들은 좀더 바람직한 자기 여과를 통해 이 현실에 간을 맞추어서 긍지 높은 전통문화인으로 자부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예의 바르고 맑은 아침의 나라」로 칭송 들었던 우리의 옛 조상들에게는 결코 부끄럽지 않은 자손이 되고, 지금 자라는 세대들에게는 역사 속에서 변명하지 않는 지혜인이 되도록 노력하며, 생명의 실상에 바른 눈을 뜨도록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차생활의 바르고 참된 덕목인 것 같다.
※ 차 달이는 길
물결치는 꽃을 안고 여린 쪽빛 가루 내리어 솔바람 소리 들리고 전나무 잎새에 비내리는 소리 잦아든 뒤, 뜸이 온전히 든 탕으로 차를 달이는 것인데, 우리들의 현실이 이렇게 까다롭게 여유뷰리며 노닐때가 아닌 것 같다, 다만 정성들여 물을 익히고 맑은 마음으로 차를 달여 먹는다면 그리 크게 차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으리라. 순연한 차를 울궈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차관(차호)을 깨끗한 냉수로 군다음 그 속의 냄새나 앙금을 제거해야 한다. 다음은 차반(茶盤)에다가 찻잔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아 물이 다 끓으면 바로 차를 낼 수 있게끔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젖은 풀잎 위에 바람 드리듯 한적한 심경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요즈음 차인들은 대개 차를 그 깊고 무서운 선의 길에 비유하며 다선일여(茶禪一如)니 선다일미(禪茶一味)니 하여, 말로만 번지르르하게 떠들면서 실제로는 한 순간의 선수행은 고사하고 차생활마저도 시끄럽게 만들면서, 제 각기 자기의 차법(茶法)이 옳다고 갑론을박을 되풀이하니 걱정이 앞설 따름이다. 정작 우리가 이웃 일본처럼 차를 마시는 방법이나 법도가 있었던가! 그냥 일부 사대부들이나 수행하는 스님들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물을 바라보듯 마셨던 것이다. 요즈음도 흔히 쓰는 "다반사(茶飯事)"란 말도 이런 태도에서 유래된 것이다. 전통, 그것은 과거 속에 집착하여 과거의 모습이나 습관을 그대로 본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습이며 과거의 고유한 뿌리 속에서 미래로 행하는 새로운 생명, 숨결의 가지를 내리게 하여 얻는 싱그러운 열매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까다로운 법도에 서툴고 차가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고운 마음으로 차생활을 하다 보면, 차의 그 깊고넓은 공덕을 얻어 색(色), 향(香), 미(味)의 그윽한 조화의 세계를 맛보리라.
각설하고, 맑게 헹군 차호에 찻잎과 물을 넣어 차를 얻는 데에는 여러가지 길이 있다. 이것을 초의스님은 다신전에서 투차(投茶)라고 부르고 있다. 차호에 먼저 찻잎을 넣고 탕을 부어 넣는 것을 하투(下投), 차호에 탕을 반쯤 붓고 찻 잎을 넣은 뒤 다시 탕을 붓는 것을 중투(中投), 그리고 하투와 반대로 탕을 붓고 찻잎을 넣는 것이 상투(上投)인데, 봄 가을에는 중투, 여름에는 상투, 겨울에는 하투를 하면 좋은 차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차를 내는데 주의해야 할 것은 음다(飮茶)하는 손님의 수에 맞추어 차의 분량을 알맞게 넣고 너무 빠르거나 또는 늦지 않게 울궈내는 일이다. 너무 빠르면 차의 향기가 온전치 못하고 맛도 싱거울 뿐만 아니라 빛깔도 선명치 못하다. 반대로 너무 늦으면 진하며 떫고 탁하며 차의 담박한 아취를 맛볼수 없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차가 맑고 고운 것일 수록 그 탕을 식혀야 된다는 것이다. 좋은 차 일때는 탕을 약 60℃ 가량 식혀서 부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차나 일본의 옥로(玉露)정도가 그 정도 물의 온도면 된다. 그리고 또하나, 차를 넣기 전 차호와 찻잔을 끓은 물로 덥혀서 그릇에 온화한 숨결이 젖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찻 그릇을 만질 때 살아있는 생명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많은 차인들이 아직도 사대주의 습속과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일본차나 중국차는 열심히 칭찬하면서 애써 만든 우리 산천의 차는 냉소하며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자기 산천의 산물에 애정을 갖지 못하면서 어찌 차를 마실 것이며, 전통이나 고유문화의 정신을 운위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국수주의에 빠져 좋지도 않은 우리의 차를 칭찬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필자도 해마다 봄이면 전라도의 깊은 산속에서 차를 만들어 차인들과 나눠 마시고 있고, 중국의 유명한 모봉 사봉 은침 또는 명전 우전 청천 벽라춘 등을 마셔 보았고, 일본의 시즈오까 구마모또 카마쿠라 우치 등의 유수한 차를 많이 마셔 보았으나 우리의 차만 못한 것 같았다. 물론 필자의 미각이 어줍고 풍미를 몰라 그렇겠지만 그것 말고도 우리가 우리의 것을 사랑하여 이웃나라에 알리는 것이 민족의 정신문화를 함양하는 한 길이 아니겠는가!
외래풍조의 물결이 비단 차에만 퍼져 있을 뿐이겠는가? 그야말로 외국의 것이라면 꼴깍하는 백치같은 세태이다. 이런 정신을 쇄신치 않고는 그 무엇을 해도 우리 민족의 길은 아득할 뿐 아니겠는가!
※ 차 마시는 아취(雅趣)
차를 마시는 데에는 청향(淸香)한 분위기와 한적한 정취를 가져야 한다. 음차는 무엇보다도 가장 고요롭고 맑은 차실의 분위기와 팽객(烹客:차를 마시는 손님)의 마음이 잘 어울러져야 한다. 적정한 기분으로 한 잔의 차를 홀로 즐기거나 지우(知友)와 청담을 즐기며 마시는 아취는 가없는 인생의 번뇌를 한 순간이나마 푸근히 가라 앉혀 주는 것이다. 근세 중국의 석학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가운데 차의 정결한 분위기가 애틋이 그려져 있으며 홀로 마시는 차를 이속(離俗)이라 말하고 있다. 그야말로 산정(山頂)의 새벽기운이 담담하고 이슬의 방향(芳香)이 아직 잎끝에 남은 맑게 개인 날의 이른 새벽에 드는 차맛은 참으로 현묘한 노적(露滴)의 내용과 청순을 연상케 한다고 적고 있다.
손님의 수에 따라 둘이서 마시면 한적(閑滴), 셋이나 넷이면 유쾌(愉快), 그 이상은 저속(低俗)이라 하여 많은 수의 손님이 차석(茶席)에 드는 것은 단아한 풍미를 잃게 된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다신전」에서도 많은 수의 손님을 경계하고 있다. 홀로 명월을 벗삼아 댓숲 스치는 고요한 바람소리 들으며 평상에 돗자리 깔고 희디 흰 백자 한 잔의 차를 신(神)이라 일컫고, 단란하게 둘이서 마시는 것을 승(勝)이라 하며, 셋이면 취(趣), 5-6인 이면 범(泛), 그 이상이면 찻잔을 돌려 가면서 그냥 베풀어 마시는 정도란 의미인 시(施)라 하고 있다.
아무래도 차는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떠들며 번잡하게 마시는 향연의 성격이 아니고, 맑은 사람들이 명상하며 영혼의 저 깊은 곳으로 도달하고저 하는 지순한 사람들의 기호인 것이다. 명대(明代)의 차에 관한 기록인 다소(茶疏)에서도 시끄럽게 차를 마시거나 금방 차를 데워 소란스럽거나 더욱 강하고 짙은 차를 따로이 요구하는 것은 격심한 노동뒤에 배를 채우려는 노동자의 짓이라고 얘기한다. 그렇다고 차가 사치부리고 고상하게 잘 사는 자나 권세가 있는 귀족들의 전유물은 분명 아니다. 설령 이조나 고려시대에 사대부들이나 왕실을 비호하는 승려들이 마셨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차가 모든 민중에게 골고루 나뉘어져 마셔지게 되어 차가 지니는 맑고 고요한 성품과 높은 경지의 숨결이 젖어들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뜩이나 벌어진 사회계층 간의 갈등을 온화하고 부드러운 차의 물로써 융화시켜야 될 것이다.
차의 정신은 분별을 초월하는 것이어야 한다. 못살고 소외받은 가난한 우리 서민들이 더 많은 차를 마셔 사랑으로 적셔져야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자칫 잘못하면 모처럼 싹트고 있는 차인구의 저변확대가 한낱 공허하게 떠돌아 사라지는 유행의 낡은 부스러기가 되기 쉽다. 차는 어떤 구호나 유행어, 선전문구로써 확대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시정에 많은 차인들이 있으나, 진정 이러한 차 정신을 깊이 이해하여 음차의 깊은 뜻을 파헤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 차의 색과 향기
차에는 다른 일반 차에서 볼 수 없는 호수의 맑은 빛으로 가라 앉은 미묘한 색이 있다. 마치 비취의 색처럼 안으로 안으로 자꾸만 들여다 보면 그 깊이에 그대로 익사하고 말 것 같은 정적의 색깔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차의 향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안팎이 똑같은 것은 순향(純香)이라 하며, 설익거나 너무 지나친 것은 청향(淸香), 그리고 골고루 기운이 감돌아 익은 것은 란향(蘭香)이며, 곡우 전(前) 차신(茶神)의 숨결이 잘 중화되어 갖추어진 것을 진향(眞香)이라 한다. 이 모든 것이 골고루 조화된 것을 여향(余香) 이라 하는데 차가 지니는 향보다 인간이 지은 시방세계의 가득한 진향이 더욱 높은 것이다.
도덕과 규범 인간 삶의 어떤 영역에서도 순연한 질서에 귀합(歸合)하여 사랑이 넘치는 계향(戒香),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는 적정한 평온에 이르는 정향(定香), 그리고 끝없는 존재의 혼돈에서 밝은 우주의 훤출한 세계, 생사 자재한 주인을 현현케 해주는 혜향(慧香), 이런 세가지의 보배스런 향기 속에서 차의 향과 색과 맛의 조화로운 세계에 계합되는 인 간성의 참다운 진인(眞人)의 길로 나아가야 되지 않겠는가?
※차의 도구
차의 도구라고 한다면 찻잎을 딸 때 부터 한 잔 차를 마시기 까지에 필요한 모든 도구를 말하겠는데, 오늘날 우리의 고단한 삶 속에서는 찻잎을 따고 차를 만드는 따위의 여유가 허락되지 않으며,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자연 차의 도구도 꼭 필요한 몇가지를 갖춘다면 그런대로 우리의 들뜬 심성을 달래고 잃어가는 내면세계를 회복케 하는 차생활을 즐기기에 족하리라.
◎찻잔
찻잔은 말차(抹茶)를 마실 때 쓰이는 것과 엽차를 마실때 쓰이는 것으로 크게 나눌 수 있겠는데 형태에 관계없 이 여러가지 색깔이 있을 수 있다.예로부터 찻잔의 색깔은 흰 빛을 가장 좋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순백색의 찻잔 이 차의 빛깔을 그대로 받아들여, 간 맞게 된 차가 그 잔에 부어졌을 때 찻잔에 어리는 빛이 아름답고 황홀한 느낌조차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한사람 한사람의 개성이 다른 만큼 개인의 기호도 일정치 않으므로 자기의 기호에 맞는 색깔이나 모양의 잔을 선택하면 무리가 없을 줄로 안다.
◎차관(茶罐)
차관은 탕(湯)을 붓고 차를 넣어 우려내는 그릇이다. 요즈음은 대부분 찻잔과 한세트를 이루어 만들어 내는데, 이것도 너무 호사스럽지 않고 담박한 느낌을 주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차 자체가 담박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릇이 너무 요란한 경우 차의 정신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우려낸 차를 찻잔에 따를 경우 찻물이 주둥이를 따라 흘러 내리는 것을 골라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차통(茶桶)
차통은 만들어 진 차를 갈무리하는 그릇이다. 다도는 정(精), 조(燥), 결(潔)의 세가지를 갖춤으로 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곧 차를 만들 때 그 정성과 미묘함을 다하여야 하고(精), 습기가 스미지 않게 잘 보관되어야 하며(燥), 그리고 차를 낼 때에는 깨끗하고 청결함이 따라야 한다(潔)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볼 때 차를 담아 보관하는 차통의 구실은 매우 중요해서, 차가 지닌 고유한 향기를 잘 간직할 수 있는 용기(用器)여야 함은 물론, 밖으로부터의 습기를 철저히 막을 수 있어야 한다.
◎차반(茶盤)
차반은 찻잔을 보관하거나 차를 낼 때 찻잔을 여럿 올려 놓는 쟁반이다. 차반은 주로 목재류로 만들어 진 것을 사용 하는데, 밤나무 참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등을 이용해 나무의 무늬를 잘 살려 만든 것이면 아름답고 기품이 있다.
◎차수건(茶巾)
차수건은 찻잔이나 그밖의 차도구를 닦는데 쓰이는 행주이다. 무명이나 면 또는 마포(痲布)등으로 만들면 좋고, 빛깔은 휜색이 좋으며 천이 본디 지닌 자연스런 색도 괜찮다. 어느 것이든 물기를 잘 흡수하고 또 잘 마르며 깨끗해서 차를 마시는 맑은 격조에 어울려야 한다. 특히 위생에 주의하여 자주 빨거나 삶아서 쓰는 것이 중요하다.
이상에서 소개한 도구 이외에도 차를 마시다 보면 필요한 것이 생기게 마련이지만, 다른 것들은 차를 익히고 배워 가면서 장만해도 큰 무리가 없을 줄 안다.
※맺는 말
오늘날 사회 각계 각층에서 차를 즐기는 인구가 늘고 있으며, 사회 전체의 관심도 커가고 있다. 최근 몇년 사이에 이런 현상이 고조되자, 마치 한때의 유행처럼 갖가지 부작용과 잡음도 섞여 나오고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정신이 만들어 내는 문화를 일시에 이룩해 보려는 관료적 사고방식도 문제이며, 무슨 무슨 조직을 통해 이익과 이름을 취하려는 태도도 차의 높고 깊은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모처럼 일어난 차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풍토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서는, 차를 마시는 사람이나 차를 배우는 이들이나 문화정책을 펴나가는 관리들 까지라도 차에 깃든 정신을 되짚어 보고 서두르지 않는 여유가 필요할 것 같다. 그리하여 차를 통하여 누구나가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며 격조 높은 정신세계를 이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