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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신학의 근황 박아론 박사 (총신대 교수)
1. 序論 - 원래 미국신학은 [한국선교의 신학]이었다.
오늘날에 와서 미국 개신교신학은 한국 선교 당시에 가졌던 보수주의적 사상성과 신앙자세를 완전히 팽개쳐 버리고 [사신신학], [세속화신학], [정치신학], [해방의 신학]등 일련의 급진적 신학 사상으로 대표되는 신학적 전위성을 추구하면서 불교와 같은 동양종교와 사상적 귀납점을 모색하는가 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서는 화해와 일치를 부르짓는 등 무신론적이며 탈 기독교적이고 범종교적이며 초이데올로기적 에큐메니칼주의를 부르짖고 있으니 이 얼마나 이해하기 어렵고 한마디로 어처구니 없는 사실로 우리 모두가 개탄해 마지 않을 일이겠는가
2. 舊 프린스톤 신학의 몰락과 자유주의의 팽배
[구 프린스톤 신학]은 우리가 아는대로 미국 북장로교회의 직영 신학교였던 프린스톤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가 19세기 초에 창설될 때로부터 시작하여 1929년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침투로 말미암아 동 신학교의 교수진이 완전히 자유주의 화하던 운영의 해인 1929년까지 동 신학교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연구하고 이끌어 온 바 [청교도적 개혁주의 정통신학]또는 일명 [북장로교 신학]을 의미한다.
[구 프린스톤 신학]의 몰락의 시기는 그레샴메이천 박사가 프린스톤 신학교를 사임하고 나오던 해, 즉 1929년으로 메이천 박사와 그의 동지들이 인근도시 필라델피아에 모여서 [구 프린스톤 신학]의 계속을 목적으로 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를 세웠고 거기서 메이천 박사의 제자들과 후배들이 현금에 이르기까지 보수주의 신학을 가르치며 발전시켜 나오고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메이천 박사가 프린스톤 신학교로부터 나온 후 [구 프린스톤 신학]은 미국 교회내에서 100여년간 장악했던 신학적 리더쉽을 놓쳐 버리게 됐을뿐 아니라 1937년에 메이천 박사가 사망하므로 그 마지막 대변인을 잃어버리게 된 결과 미국교회에 대해서 노도와 같이 밀려 닥치는 자유주의 신학사상 앞에서 완전 고립되었으며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미국신학계에서 이렇다 할 영향력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구 프린스톤 신학]의 역사적 계속으로 자처하고 있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훼이스 신학교 및 카버난트 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등에서 교수되고 있는 보수주의 신학은 너무나도 현 미국 개신교 신학계로부터 소외된 "다수의 횡포에 눈물을 삼키며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낙후적 존재"가 됐다는 것이다. 몰락의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19세기말에 독일 신학계를 대표했다고 볼수 있는 릿출(Albert Ritschl), 하르낙(A Harnack), 헤르만(J.W.Hermann)과 같은 신학자들의 윤리주의적 신학사상이 미국 내에서 다수의 유력한 추종자들을 얻어 [구 프린스톤 신학]에 의해서 대표되어 오던 [미국 보수주의 신학]에 대해서 일제히 총 공격의 포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미국교회 내에서 [프린스톤 신학]의 몰락을 가져오게 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단일 요인으로서 사회복음신학자 워터 라운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라우센부쉬의 신학은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사회를 거의 동일시하는 社會志向的 神學이었으며 성경의 권위보다 인간의 [사회적 진화]의 능력을 믿는 인본주의적 사고를 가진 신학이었기 때문에 라우센부쉬가 그 당시 확고한 보수주의적 노선을 걷던 프린스톤 신학에 대해서 크나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으며 라우센 부쉬와 그의 사회복음신학의 미국내에서 급속한 세력확장은 프린스톤 신학의 몰락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박사가 그래도 그레샴 메이천 박사를 계승해서 [미국보수주의 신학]의 기수격이 되어서 현대 미국 자유신학에 대하여, 특히 미국교회내에서 팽창일로에 있었던 [신정통주의 신학](Neo-Orthodox Theology)이라고 불리우는 칼 바르트의 신학에 대하여 맹렬한 투쟁을 벌인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수는 없다. 1919년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이 출판된 후로 10년도 되기전에 소위[신정통주의 신학]이 미국에 상륙했고 미국교회 안에서와 신학자들 사이에서 요원의 불처럼 번져가기 시작하여 1940년대와 1950년대 초반기까지 현대 미국신학계를 완전히 석권했던 것이다. 195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을 맹종했던 미국 개신교 신학자들이 또 다른 독일의 실존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의 신학사상에 매혹되어 사족을 못 쓰는가하면, 그 중에서 일부 신학자들은 폴 틸리히(PaulTillich)의 [철학적 신학]에 심취, 그의 제자들이 되므로 [불트만, 틸리히 시대]가 왔었다고 볼 수 있겠다. 1960년 경부터 미국 신학계에는 구주 신학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위 [후기 불트만 시대]가 도래 했으며 폴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은 1960년 중반기까지 그 인기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어떤 급진적으로 새로운 신학의 출현을 위한 서막"과 같다는 인상을 짙게 풍겼던 것이다.
3. 거물신학자시대 -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시대
1920년대로부터 1940년대가 끝나기까지의 약 30년동안을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이 현대 신학계를 지배했고, 특히 미국에서는 칼 바르트가 신학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인기높은 신학자로 군림했던 것이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칼 바르트는 독일의 또 다른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소위 [실존주의 신학](existentialist theoiogy)이라는 새로운 신학사상 앞에서 고전하다가 완전히 궁지에 몰려 그 패색이 짙어가기만 했다.
4. 死神神學시대 - 미국신학의 소아병적 발작
사신신학시대는 1963년부터 시작해서 5,6년간의 전성기를 누리고 1970년대에 들어가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그 막이 내렸다고 할 수 있겠다.
5. 미국신학의 새로운 문제아들
[사신신학자 시대]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막을 내린 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현대 미국신학계에는 [정치신학],[디오니소스 신학],[흑인신학]등 새로운 신학적 문제아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6. 結論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선교의 신학]이었던 [미국신학]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급진적으로 좌경해서 오늘날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봤다. 우리는 현대 미국신학의 변천을 4기로 나누어서 살펴봤다. 제일 먼저는 그레샴 메이천 박사(Dr.J.Gresham Machen)가 이끌던 [프린스톤 신학]이 1920년대에 몰락하고 자유주의가 팽배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는 라우센부쉬등의 [사회복음신학]이 기승을 부려[미국 정통신학]이 수난당하는 울분과 후퇴의 시대였다.
다음으로 현대 미국신학의 제2기를 살펴봤다. 이 시기는 미국에서 정통신학을 고립시켜 놓고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와 불트만의 실존주의 및 폴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이 판을 치던 {거물신학자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시기는 "자유주의가 거보를 내딛는 시대"이기도 했다.
셋째로, 우리는 1960년대 초에 돌연 그 막을 올렸다가 10년도 못가서 막을 내려버린 [사신신학자 시대]를 살펴봤다. 이 시기는 로빈슨, 올타이저, 반 뷰렌등이 나타나서 "누가 더 사신적이냐?"를 겨루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현대 미국신학이 "사신병"을 앓는 처참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 "사신병"을 앓는 시기는 오래 갈 수가 없었다. "사신병"이라는 것은
[신학의 사망]을 필연적으로 가져올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는 1960년대 말로부터 사신신학 쇠퇴로 인한 신학적 공백을 메우기나 하려는 듯이 [정치신학], [디오니소스 신학], [흑인 신학]등 새로운 신학적 문제아들이 등장하는 이른바[신학적 문제아시대](An Age of having forgotten of God in the midst of American cultural creativity)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세 신학 즉 [정치신학], [디오니소스 신학], [흑인신학]을 각기 [칼 마르크스와 손잡자 신학]("Let's hold hands with Karl Marx" Theology)과 [히피와 도시 게릴라의 신학](Theology of hippies and city guerillas)과 [흑인이 제일이다](The "Black people are the chosen people" Theology)로 알기 쉽게 표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결론을 말하면 금세기 초에 미국에서 "프린스톤 신학의 몰락"을 계기로 팽창하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은 [거물신학자 시대]에서 거보를 내딛어 그 "좌경
성"을 확고히 했고, [사신신학자 시대]에 와서는 그 급진성이 폭로되었고, [새로운 신학적 문제아 시대]에 와서는 그 [동화] 또는 [수필문화]과 같은 허구성이 증명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현대 미국신학사상의 흐름과 변천을 살펴보면서 현대 미국신학이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는 절망감을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한바 있거니와 [현대 미국신학]은 헤어날 수 없는 미로에 빠져 들어가는 듯하며 "캄캄한 심연을 내려다 보는 벼랑을 서 있는듯"하다.
이와같은 절망감과 이와 같은 위기의식 속에서 방황하는 "현대 미국신학의 전망"은 어둡고 비판적인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지금까지 위기에서 위기로 치달려 왔고 앞으로의 전망이 어둡기만한 [현대 미국신학]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미국신학]은 한국교회를 선교해서 설립한[한국선교의 신학]이었건만 지금은 오히려 한국선교 당시에 가졌던 "순수한 보수주의 정통신학"을 상실하고 오늘의 신학적 위기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의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다"(고전 9:27)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 한국교회도 교훈으로 받아야할 것이다.
둘째로, 미국 신학이 금세기 초에 윌필드와 메이천을 마다하고 [신정통주의]와 타협했던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급진적 좌경]을 낳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떠나서 인간의 사고와 이론이 만들어 내는 모든 [신신학]과 [철학적 신학]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고 추호의 양보나 타협도 허용해서는 안될 줄로 확신한다(마5:37, 약2:10).
셋째로, [현대 미국 신학]이 미국교회의 평신도들의 신앙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상아탑 속에서의 [이론신학]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사신의 비극"과 "탈기독교와 친마르크스주의의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 한국교회는 신앙과 신학 사이에 어떤 갭(gap)을 두어서는 안되겠다. 우리 한국교회는 "신앙하는 신학"과 "신학하는 신앙"을 아울러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속에서 신학자와 평신도들이 혼연 일체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요3:18, 엡4:13).
그렇게 할때 우리 한국교회는 "미국 신학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제방으로서 든든히 설 수가 있을 것이고, 한걸음 나아가서는 [한국선교의 교회]였던 미국교회에 대해서 [복음주의 정통신학]을 역수출하는 새로운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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