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집안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의례 무당이 와서 굿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내 나이가 올해 70인데, 사실 우리 어렸을 때는 집집마다 굿을 많이 하였다. 학교 다닐 때는 백모(백모)댁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약을 드셔도 낫질 않다가 굿만 하면 거든히 일어나셨다.
그 외에도 여러 기적같은 일이 있었지만, 그저 그러려니 했을 뿐 큰 관심을 없었다. 그런데 해방 후에, 43세 되셨던 사촌 형님께서 그만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신 후 부작용으로 돌아가셨다. 인천에서 학교 교사로 봉직하시던 형님은 아주 멋쟁이었고, 춤 잘 추고 놀기도 잘 하셨다. 당시 나는 32세였는데, 역시 무당이 와서 굿을 하게 되었다.
한바탕 춤을 추던 모당은 쌀에 꽂아 두었던 소나무를 뽑아 들더니 인연있는 식구를 찾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분의 어머니, 친형님 등에 나무를 갖다 대는데 아무런 감응이 없었고, 한 시간 동안 가까운 친척을 번갈아 대보아도 별로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먼 친척되는 어느 청년한테 감응되기 시작했다. 평소 왕래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한 사람이었는데, 사람이 죽었다니까 그저 참석한 입장인 청년이었다.
그는 사촌 형님처럼 행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미 무당은 뒷전이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자식을 5형제나 남겨놓고 돌아가신 사촌형님의 심정을 토로하기 시작하는데 너무나 표정, 말투 등이 똑같아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마침 형수에겐 유복자가 있는 상황이였는데 그 아이의 부탁까지 간곡히 친척들에 하는 바람에 모두 눈물을 흘렸다. 결코 무당이 시키는 것이 아니였고, 망자의 영혼이 깃든 것이 분명하였다.
예전과는 달리 성인이 된 다음에 겪은 일이기에, 아직까지도 그 모든 장면들을 똑똑히 그려 볼 수 있다. 나중에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망자의 영혼은 생모(生母)부터 불러서 상에 앉히고는 만일 수저가 상에 앉은 사람의 것이 아니면 호통을 치곤 하였다. 식사가 끝나자 춤을 추는데, 생시의 형님이 쓰던 모자를 찾아 쓰고는 마냥 노니는 것이었다.
나무 가지를 가진 사람은 완전히 자신의 의지를 상실한 채 움직이고 있었고, 무당이 그만 물러가시라고 진땀을 빼며 애원해도 쉽사리 멈춰지지 않았다. 한 시간여 후에 영혼이 떠났는데, 무당과 청년은 지쳐 나가 떨어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청년이 휘두르던 소나무는 가지가 다 떨어져 나가 앙상하게 조금만 남았고, 가지를 꼭 잡았던 손바닥에서는 피가 흘렀다.
청년이 깨어난 후에 물어 보았는데,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때의 광경을 보고 나는 "아! 영혼이란 것이 있구나. 죽는다고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구나!"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이후로는 무당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물론 사이비 무당도 많겠지만, 어쨌든 무당의 본래 역할은 영혼을 다루는 것이라는 인상을 강렬하게 받았던 것이다.
2. 염불로 조상들의 은혜를 느끼다.
나는 뒤늦게 5년 전부터 불교에 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는데, 당시 내가 나가고 있던 불광동에 있는 한국불교거사림에서는 영혼의 천도에 관해 별관심이 없었다. 어찌보면 지식적인 교리 탐구에 몰두하였고, 참선 수행을 통한 출세간적 경지를 추구하였다. 다른 단체와는 달리, 내노라하는 경력을 지닌 남자들의 모임이기에 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3년전에 거사림 이사장의 부인께서 돌아가셨다. 당시 교화부장과 총무인 내가 빈소에 갔었는데, 의식을 잘 아는 교화부장의 인도에 따라 일심으로 독경, 염불하였다. 그러자 예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뭔가 천도 행위가 결코 헛되지 않다는 확신이 생겼다. 예전엔 염불 수행을 좀 소홀히 생각하다 염불에 정진하기 시작한 시기였는데, 이제는 지식으로만 공부하지 말고 종교적 체험을 실제로 얻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일심으로 염불 정진에 매진키로 하였다.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하다 보니, 눈물이 샘솟듯 흐르고 마음이 후련하였다. 몇개월이 지나니 웬지 자비심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하였다. 고통에 싸여 있는 사람들이 한없이 불쌍하고, 어떻게 해서든 행복의 길을 알려주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오늘의 내가 있게끔 인연을 지어주신 조상님들이 모두 간절히 고맙게 생각되었고, 그분들이 모두 진리에 의해 행복을 얻어야 이 세상이 평화로워진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느새 부처님과 함께 있다는 환희심이 우러나왔고, 작년 3월엔 나의 모든 것을 관세음보살님께 바치게 된 어떤 계기를 맞게 되었다. 남이 아프면 내가 아프고, 이웃이 좋으면 나도 좋은 심정을 맛볼 수 있었다.
차디찬 거사림 법당에서 한 겨울을 나기도 하였는데, 남들은 고생이 많다고 들 걱정하였지만, 사실상 조금도 고생스럽지 않았다. 고통이 곧 낙이고, 낙이 즉 고통이었다. 고와 낙이 둘이 아니었다. 염불삼매에서 지내던 중, 어느덧 남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울산으로 가정이 옮긴 후에도 매주 서울에 올라와 직책을 다하니, 노인네가 어찌 매주 천리길을 다니느냐고들 하였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신심을 어쩌지 못하여, 어려운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하든지 도와주고 싶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남이 보면 미친 사람같을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힘이 샘솟듯 솟아나서 전연 피곤한 줄을 몰랐고, 우주가 전체 내 세상만 같고 육식이 싫어졌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었고, 자연스럽고도 태평하면서도 마냥 즐거웠다.
또한 사람을 대하면 어떤 영감이 떠올라 그 사람의 일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다니다 보니 역시 세상 불행의 많은 경우가 조상이 천도되지 않았기 때문임을 절실히 느끼게 되엇다. 눈에 안 보이니까 없는 존재로 생각하고 소홀히 하기 때문에 현세의 처방으로는 개선할 수 없는 곤경이 생기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3. 아들에게 호소하는 영혼
지난해 5월엔 울산거사림의 김거사라는 회원이 법회가 끝난 후에 면담을 신청해 왔다. 얼굴에 수심이 차 있어 뭔가 문제가 있어 상담코자 한다는 것을 짐작하였다. 그리하여 다방에서 마주 앉았는데, 45세 가량된 그의 얼굴을 보니 영감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여보, 김거사! 당신 집안이 말이 아니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 하니,과연 집안 꼴이 요즘 말이 아니라며 부친은 10여년전에 객사하셨다는 것이었다. 돌아가신 분을 천도해 드렸냐 했더니, 천도에 대해서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부친을 천도하는 재를 지낼 것을 간곡히 권하였다. 그는 나의 말에 따라 재를 지내려 하였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 엄두를 못내겠다며 다시 하소연 하였다.
도리가 없어 스님은 아니지만 나라도 해봐야겠다 생각하곤 과일을 좀 마련하라 하였다. 조그만 영단(靈壇)을 그의 집에 마련하여 과일을 씻어 올리곤 의식에 따라 진행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성이니, 지극한 마음으로 부친을 공경하라 하였다.
≪천수경≫등을 독경한 다음엔 일심으로 '관음보살님!"하며 기원을 드리고 있자니, 눈에 어떤 형체가 나타나는 것이엇다. 하이칼라 머리에 양복을 쭉 빼 입은 신사인데,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옆모습의 멋쟁이였다. 물론 이 형체가 영가임을 직감하였지만, 나타나건 말건 오직 염불하여 천도를 기원하였다. 마치 친형제를 위하듯 간절히 정근하였다. 약 두시간반 가량 걸렸는데, 전연 피곤한 줄을 몰랐다. 재가 끝난 후에 김거사의 어머니인 망자(亡者)의 부인에게 물어보니, 정근시 보였던 영가의 형태는 생전의 남편의 모습과 똑같다 한다.
그러나 나에게 어떤 영적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관세음보살님이 필자의 조그만 정성을 가상히 여기시어 화신을 짐짓 보이신 것이리라.
어쨌거나 망자는 큰아들에게 와서 "나좀 어떻게 해다오."라고 하소연하고 있는형편이였다. 그러나 아들이 전혀 자기의 요구를 안 들어주니 계속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집안에 그늘이 지고, 어두운 분위기에 싸인 그에게는 매사가 꼬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죽는다고 그만이 아니므로, 가장 인연이 가까운 식구들이 천도케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필자와 모자와의 대화를 듣고 있는 사람들 또한 조상공경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4. 천도로 밝아진 대학생의 가정
위의 재에는 김용배라는 경상대학 학생이 참석했었는데, 어머니가 자궁수술 후의 후유증으로 자꾸 아프다며 어찌 해야 좋은지를 물어왔다.
아버지는 일본에 가 있는지 오래인데, 계속 약을 복용해도 어머니의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불공으로 어머니를 편케해 드리겠다는 효성에 감복하여 학생의 집을 방문하였다.
3일에 걸쳐 2시간여씩 염불을 하는데, 어쩐지 일본에 간 부친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친의 병은 차츰 나아지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천도 못한 조상령이 있는 것 같았다. 이때가 작년 6월이였는데, 천도 염불을 하다보니, 어떤 허름한 바지 저고리 차림의 젊은 농사꾼이 강가에서 있는 광경이 보였다. 그래서 물어보니 24살 때에 물에 빠져 돌아가신 학생의 할아버지(모친의 시아버지)임이 틀림없었다.
학생의 모친도 시집오기전의 옛날 사고여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시어머니 한테 들은 얘기가 있어 필자의 말을 듣고는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깜짝 놀라마지 않았다. 그 후엔 차차 병세가 호전되어 가더니, 한 달 후엔 몇 년만에 일본에서 부친이 찾아왔다. 그리하여 집안은 밝아지고 화기애애한 웃음 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많은 조상령들이 생전에 지녔던 집착과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장 정신적으로 파장이 같은 가까운 식구에게 고통을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어두운 염파(念波)에 싸여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따라서 육체만이 자기가 아님을 명심하고, 조상령에 진리를 알려주고 부처님 가피력을 입도록 하여 천도케 함으로써, 밝은 사회를 이루어야 하겠다.
나는 한국불교거사림(서울은평.불광동소재)에 거주하는 선용이란 거사입니다. 이억상총무님의 글을 여기서 보니 그때 생전의 모습이 생각나서 몇자 적습니다. 지금 계신다면 아흔이 넘으신 고령의 모습까지 그려 지네요. 인연은 예기치 못하게 오기도 하나 예기치 못하게 연을 끈는 우리의 일상사 속에서 그분의 글을 읽으니 사라실 때의 모습이 눈앞에 다가 오네요.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석가모니불~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나는 한국불교거사림(서울은평.불광동소재)에 거주하는 선용이란 거사입니다. 이억상총무님의 글을 여기서 보니 그때 생전의 모습이 생각나서 몇자 적습니다. 지금 계신다면 아흔이 넘으신 고령의 모습까지 그려 지네요. 인연은 예기치 못하게 오기도 하나 예기치 못하게 연을 끈는 우리의 일상사 속에서 그분의 글을 읽으니 사라실 때의 모습이 눈앞에 다가 오네요.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