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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행 20:24
1.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행20:24)
사도 바울이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복음을 접할 수 있었고 그 구원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구원의 길은 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행위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에 구원될 수 없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그 많은 은총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가지 금지 행위를 지킬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새롭게 되지 못하면, 선을 행할 수 없다.
성령으로 새롭게 되지 못한 사람들이 행하는 것들은
그것들이 아무리 의롭고 선해 봐야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옷’에 지나지 않는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64:6)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 그 피로 말미암아,
그 공로로, 그 은혜로, 그 사실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우리는 그 은혜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고, 그것을 믿을 수 있는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선하고 자랑할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믿어 주고, 교회에 나와 주고, 헌금을 해주고, 선심쓰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마음이 없고, 구원의 감격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억지요, 마지 못해서 함이요, 인색함으로 하는, 보이기 위한, 종교적인 행위일 뿐이다.
교회는 마땅히 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아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핵심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복 받고 잘 사는 방법을 전하는 곳이 교회가 아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잘 살고 출세하고 성공하였을지라도 그것은 다 잎사귀같이 시드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의 일생은 풀과 같다. 그 영광도 그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만다.
영원한 삶이 우리의 죽음 다음에 기다리고 있다.
지옥에서 고통과 슬픔 속에서 영원한 삶을 살 것인지,
천국에서 평안과 기쁨 속에서 영원한 삶을 살 것인지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우리의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사람들은 오직 이 땅에서의 행복하고 안전한 삶에만 관심이 있다.
예수를 오래 믿고 교회 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들도 대부분 그러하니 문제이다.
주님은 “먹을 것 입을 것 사는 것 염려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셔도, 그 일에는 아예 관심도 없다.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의한 것임을 아시기 바란다.
숨을 쉬고 있고, 먹을 것 입을 것이 족한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들이다.
돼지처럼 짐승처럼 먹고 배부르고 편하게 사는 일에만 관심을 쏟다가 일생을 마칠 것인가?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18-20)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은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받은 사명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위하여 목자와 함께 교회와 함께 헌신하고 수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다 자기의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21-22)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인데 그 지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그 사명을 위해 함께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이 없다면,
생을 마치고 하나님이 심판대 앞에서 도대체 어떤 결산을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이 그렇게 공허하고 빈 말이고
나와 상관 없는 일이 아닌 것을 깨닫기 바란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일은 바울만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아니고,
우리 각 사람도, 교회와 함께, 주 예수께 그 사명을 받은 사람인 것을 명심하자.
2. 그 사명은 달려갈 길이다.
“내가 달려갈 길----을 마치려 함에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 그의 달려갈 길이라는 것이다.
믿음생활은 우리 앞에 당한 경주이다.(히12:1)
각 사람이 달려야 할 경주가 믿음생활이다.
경주는 달려가서 마지막 지점까지 도달하고 마쳐야 끝나는 것이다.
믿음 생활은 달려가서 마쳐야 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하고 필요하다.
그 의식이 없으니까, 얼굴 보기 힘들어지고, 예배에도 늦는 것이 습관이 되고,
기도 모임에도, 말씀을 공부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고, 자기 일에만 바쁠 뿐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렇게 말씀했다.
“저의 목회 경험상, 하나님의 집에 정규적으로 참석하는 일에 가장 적게 순종하는 자들이
난제들과 당혹한 문제들로 말미암아 가장 큰 고통을 당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위해 준비하고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 달려갈 길을 마쳐야 상급이 있고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
바울의 고백이다. 우리도 죽기 전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6-8)
전제와 같이 부어지는 것은 내 생명의 피를 제단에 다 부어드리는 삶을 말한다.
이렇게 생명의 피를 다 쏟아 부어 생명을 마치는 것이 영광스러운 죽음이다.
피와 땀을 다 쏟아 붓고 이 땅을 떠나야 하지 않겠어요?
무엇을 위해? 주께 받은 사명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주님은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여 주실 것이다.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공의로우신 판단으로, 심은 대로, 행한 대로, 상을 주실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칭찬과 상을 받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23)
그때 빈 손이 되어 이런 책망을 듣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란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5:26,30)
땅의 일만 좋아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좋아하던 땅의 감옥, 곧 지옥에 갇히고 말 것이다.
하늘의 일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결국 하늘의 나라, 곧 천국에서 살 것이다.
하늘의 일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을 받았으면, 마땅히 하늘의 것을 구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땅의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하늘을 위한 것에 있어야 한다.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자세를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달려갈려면, 목적지와 방향이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고 사는 일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고 푯대가 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가져 온다.
우리의 인격과 삶이 복음의 향기를 풍겨야 한다.
그 푯대가, 그 부름의 상이,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잡히지 말고, 나의 모든 소유와 재능이 그것을 위한 수단과 재료가 되어야 한다.
마치는 그 날까지 우리에게는 이미 얻었다 함도 없고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없다.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야 한다.
게을렀던 지난 날도 이미 지나갔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세월을 보내지 않도록 새롭게 결단하고 달려나가자.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엡5:14)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4:3)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1-12)
새로운 각오와 결단으로,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자.
부끄럽고 망신스런 그 날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3. 나의 생명을 걸어야 한다.
“내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왜? 우리가 우리 삶의 사명과 목적을 잃고, 달려가지를 않게 되느냐?
애시 당초 목숨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목숨을 걸지 않은 일에는 목적과 방향성을 잃고 게을러지게 마련이다.
목표를 상(上)에다 두는 사람은 중(中)에라도 도달하지만
처음부터 중(中)에다 목표를 두는 사람은 항상 하(下)에만 머무르는 법이다.
상(上)에다 목숨을 거는 사람만이 상(上)에 도달할 수 있다.
나는 앞서기도 싫고 뒤지기도 싫다 그래서 중간이 안전하고 좋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결과를 보면, 반드시 뒤쳐지고 낙오된 무리들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썩어질 승리자의 관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썩지 않을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다.(벧전1:4)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바울을 아끼는 사람들이 그래서 말렸다.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오늘 본문이다.
그에게는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해서라면 자기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귀하게 여겨서 생명을 아끼면 더 안전하고 유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결국은 썩고 마는 육신인 것이다.
내가 내 생명을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 이 생명을 어디에 쓸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어영부영 대충대충 인생을 산 사람에게 철퇴의 심판이 주어지는 날이 다가온다.
이 땅에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을 보내 주신 것은 사명을 감당하고 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결산을 하게 될 것이다.
교회와 함께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란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다.
그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의 지체들도 같은 사명을 가지고 있다.
한가족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한 가지는, 순전한 말씀을 찾고 연단 받느라 황폐해진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순전한 말씀으로 종들을 양육하는 신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가장 순전한 신학으로 세우고 산 이들이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다.
이 순전한 신학, 청교도신학으로 교회를 다시 세우고, 신학교를 세워야 한다.
스펄전처럼 오직 청교도신학만으로 가르치는 신학교, “청교도 아카데미”를 세워야 한다.
이 일이, 우리 교회에, 저에게, 여러분에게,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인 줄로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곳 멱우리 빈 집으로 빈 손으로 한가족교회를 보내 주시고
14년 동안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연단하셨다.
이제 우리의 사명이 분명해졌으니, 바울의 자세와 각오와 헌신을 본받아야 한다.
그 동안 하나님은 우리가 풍부에도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하셨다.
이제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고 기다리고 있다.
이 사명을, 우리의 푯대로 알고,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인 줄 알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위해,
이 길이 우리의 달려갈 길인 줄 알고 그 경주를 마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께 받은 사명을 위해 목숨과 소유를 걸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33)
주님께서 세 번이나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강조하셨다.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 가지이다.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이다.
첫댓글 목숨걸 사명 있음이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명은 목숨 걸고 달려가야 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감사해요.
아멘.
태평양을 건너오는 아멘의 울림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