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게 들고 간 감자탕이었지만, 현장을 지키고 계시던 마을분들이 맛있다고 하셔서,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 마을 이십대손이라는 손태익아재는 막걸리가 맛있다고 하시네요, 어쩐지 술술 잘 넘어 간다 싶었는데, 아재도 그 맛을 아시는 듯.
그 사이, 공사는 크게 진척된 게 없는 거 같았는데, 포크레인이 한 대 더 와서 나무들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다섯 시쯤 되자, 날이 쌀쌀해 지기 시작했는데, 땅을 파 구덩이를 만들고 이렇게 따뜻하게 불을 피워 주시네요, 생소나무가지 타들어 가는 게 꼭 불꽃놀이 같습니다. 혼자 밤을 지낼 아재가 무서워서 혼자 못자겠다는 엄살을 뒤로 하고 내려옵니다, 무섭긴 무섭더군요, 옛날 지리산종주 때 혼자 밤능선을 탄 적이 있는데, 뱀사골 갈림길에서 도깨비불에 시달려 혼비백산 했는데, 알고 보니, 인간이 든 손전등이더군요, 산에서 제일 무서운 게 인간, 이라는 말 실감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산을 내려 오는 길에 보니, 이렇게 들꽃들이 가을동화를 시작하고 있네요,
달빛 축제가 있다는 밀양 상동면 상동역에 도착했습니다, 밀양에는 밀양역과 삼량진역 둘 뿐인 줄 알았는데, 상동역이라는 곳이 있군요, <사평역에서>라는 詩가 생각이 났습니다, 시인이 사평역은 실제로 존재하는 역이 아니라 했다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서울에 사평역이라는 이름이 있네요.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詩 / 사평역에서
상동역에서는 어떤 시가 쓰여질 까요,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