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군 사령관 포티오렉은 곧 있을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황제의 생일 선물로 세르비아를 바치기 위해 조속히 전쟁을 끝낼 요량이었다. 오스트리아군이 가까운 북쪽에서 남하할 것으로 봤던 세르비아군 참모총장 푸트니크는 예상과 달리 오스트리아 제5군이 서쪽에서 등장하자 속임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공이 어디인지 확실해지자 이들을 막기 위해 세르비아 제2군이 급거 이동에 들어갔다.
세르비아가 전혀 예상치 못한 서쪽의 드리나 강을 일거에 도하한 오스트리아군 주력은 베오그라드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 샤바츠(Šabac)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처럼 세르비아가 예상 못한 곳을 돌파구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넘자마자 진격이 둔화되었다.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체르(Cer) 산 일대의 연속된 구릉지를 넘어 샤바츠로 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좌측 비옐리나(Bijeljina)에서 평지를 따라 돌파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진격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목지점인 체르 산을 먼저 점령하기로 했던 것이다. 러시아를 견제하느라 세르비아와 비슷한 전력만 투입할 수 있었던 오스트리아의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당연히 오스트리아는 압도적인 전력을 다양한 진격로에 일거에 투입해 세르비아군을 포위 섬멸하는 전략을 구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한 곳으로만 돌파해야 할 여건이었어도 아직 세르비아군이 배치되지 않았으므로 그냥 가장 평탄하고 짧은 공격로를 따라 신속히 전진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안이하게도 세르비아군의 동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습관적으로 고지를 점령하려 들었던 것이다. 제국 내에 산악 지대가 많다 보니 오스트리아군은 고지 확보와 산악전을 중요하게 생각해 이번에도 당연히 체르 산을 점령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최초의 승리
구릉지대의 산길 험로를 일렬종대로 넘어가다 보니 이동 속도가 정체되는 것은 당연했다. 별다른 교전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3일 동안 오스트리아 제5군은 겨우 10여 km만을 전진해 8월 15일 아침에 샤바츠를 감제할 수 있는 체르 산 동측 사면을 점령하는 데 그쳤다. 예상을 벗어난 곳에서 침공을 개시했지만 이렇게 지체된 시간은 동원이 늦었던 세르비아에겐 천금과도 같았다.
오스트리아의 주력인 제5군이 헤매는 동안 스테파노비치(Stepa Stepanović)가 이끄는 세르비아 제2군이 샤바츠를 선점하고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평지에서 교전을 벌인다면 아무래도 세르비아가 불리할 것이라 생각해 먼저 공세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날 밤 예하 부대 중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 제1복합사단이 체르 산 일대에 구축된 오스트리아군 진지를 기습하며 전투가 벌어졌다.
밤새 어둠 속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고 8월 16일 아침이 되었을 때 세르비아 제2군은 체르 산 서쪽으로 오스트리아 제5군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일 뿐이었다. 양측은 체르 산과 샤바츠 사이에 놓인 여러 마을을 옮겨 다니며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제2군과 세르비아 제1, 3군이 추가 투입되면서 어느덧 8월 20일이 넘었을 때 일대에 40여 만의 양측 병력이 모여서 이전투구를 벌이게 되었다.
오스트리아가 샤바츠를 일시 점령하기도 했지만 세르비아가 곧바로 탈환하는 등 혼전이 계속되었는데 인류 최초의 공중전도 이때 벌어졌다. 정찰 중이던 세르비아의 토미치(Miodrag Tomić)는 오스트리아 정찰기와 마주친 후 방해 비행을 실시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 조종사가 권총으로 예상치 못한 사격을 가한 것이었다. 토미치가 현장을 이탈하면서 교전은 막을 내렸지만 이는 전쟁사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피의 혈전
열흘간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는 8월 24일 홈코트의 이점을 바탕으로 끈질기게 저항한 세르비아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처음 출발지였던 보스니아와 시르미아로 밀려난 오스트리아는 5천의 전사자를 포함해 약 4만의 인명 피해를 입었으나 승자인 세르비아도 2만의 전사상자가 발생했을 만큼 힘든 싸움이었다. 체르 전투(Battle of Cer)는 제1차 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둔 최초의 교전으로 기록되었다.
예상치 못한 타격을 입고 후퇴하던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가 추격해올까 봐 전전긍긍했고, 포티오렉에게 이 패배는 씻기 힘든 치욕이 되었다. 즉시 반격을 결심한 그는 지난 작전에서 제외했던 제6군을 일선으로 배치해 부대를 재편한 후 9월 7일 공세를 재개했다. 최초 교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사기가 올랐던 세르비아 제2군은 국경인 드리나 강에서부터 오스트리아군을 강하게 막아내기 시작했다.
지난 전투에서 타격을 입고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오스트리아 제5군은 이번에도 고전했지만 새롭게 투입된 제6군이 반격을 개시하며 세르비아 제2군을 밀어붙였다. 이처럼 처음부터 양측 군대가 팽팽히 맞서면서 드리나 강 일대를 감제할 수 있는 자고드냐(Jagodnja) 고지를 놓고 혈전이 시작되었다. 포격을 피하기 위해 곳곳에 참호가 파이면서 이후 제1차 대전을 상징하게 되는 참호전이 세르비아 전역에서 벌어졌다.
양측 모두 예비대가 부족해 서부전선처럼 장기화되지 않고 4일간의 전투로 막을 내렸지만 각각 만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포티오렉은 기세를 살려 계속 전진하기 위해 AOK(오스트리아군 최고사령부)에 증원을 요청했지만 당장 갈리치아에서 러시아군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던 참모총장 회첸도르프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한 달간 벌어진 드리나 전투(Battle of Drina)는 오스트리아군이 몇몇 교두보를 확보하는 선에서 막을 내렸다.
세르비아의 용전분투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내부에 확보한 여러 교두보를 발판으로 진공을 계속했다. 기병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걸어서 진군하다 보니 속도는 느렸고 곳곳에서 세르비아군의 저항에 막혀 소규모 교전이 계속 벌어졌다. 비록 속전속결로 세르비아를 점령하려 한 오스트리아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11월 초가 되었을 때 어느덧 전선을 사바 강 남쪽의 콜루바라(Kolubara) 일대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11월 16일, 오스트리아군의 공세가 재개되자 세르비아군 참모총장 푸트니크는 일단 베오그라드를 포기하고 전선을 단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후퇴 명령을 내리자 신임 세르비아 제1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미시치(Živojin Mišić)가 그동안의 혈전으로 다들 지쳐 있어 현지에 남아 부대를 재편하겠다고 주장했다. 결국 제1군을 제외한 여타 부대는 지연전을 펼쳐 오스트리아군을 소모시키며 뒤로 물러났고 12월 2일 베오그라드는 함락되었다.
베오그라드는 수도이긴 하지만 세르비아 전체로 본다면 북쪽 일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동안 너무 고생이 심해서였는지 오스트리아는 이곳을 점령한 후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긴장이 풀어졌다. 후퇴하지 않고 뒤에 남은 세르비아 제1군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전투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고 방관했을 정도였다. 오스트리아군의 경계가 풀렸다고 판단한 푸트니크는 다음 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중앙이 순식간에 격파된 오스트리아군이 후퇴를 시도하자 세르비아 제1군이 길목을 막았다. 결국 20여 만이 전사상당하고 7만이 포로가 되는 망신을 당한 채 오스트리아는 12월 15일 베오그라드를 내주고 국경 밖으로 다시 밀려나야 했다. 그렇게 콜루바라 전투(Battle of Kolubara)를 끝으로 어느덧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부수적 전선이 되어버린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1914년 대결은 저물어 갔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첫댓글 발칸의 주역들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