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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성경을 번역한 유대인 알렉산더 피터스
피터스는 히브리어에 능통했던 정통 유대인이었다
역사의 전환기에 전혀 예기치 않게 한 인물을 세우셔서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신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이 점은 한국의 기독교회사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인도선교를 준비하던 언더우드를 한국선교로 방향을 돌리신 것이나 일본 선교를 마음에 두던 아펜젤러를 한국으로 보내신 것은 많은 사례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의 정통유대인 마을에서 발견됨 | ||
필자에게 관심을 끄는 그 같은 또 한명은 유대계 러시아인 피득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알렉산더 앨버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이다. 피터스는 유대인으로 러시아에서 태어나 1895년 일본에서 극적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곧 바로 미국 성서공회 소속 권서인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전국을 다니며 성경을 반포하던 그는 한국 주재 선교사들로부터 어학적인 재능을 인정받고 미국에 건너가 신학공부를 한 후 선교사로 다시 내한했다. 그 이후 복음전도 사역을 통해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고 히브리어에 능통했던 정통 유대인으로 시편과 구약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글 성경번역의 중요한 초석을 놓았다. 이 모든 사실은 여느 선교사들과 다른 그만이 갖는 남다른 면들이다.
그가 평양대부흥운동을 전후하여 눈부신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처음 필자의 관심을 끄는 부분이었고,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사역을 학적으로 정리하여 한국교회에 내놓은 작업은 일종의 거룩한 부담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가 남긴 기록들이 많지 않고 그에 관한 저술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피득에 대한 학문적 평가가 쉽지 않겠지만 앞으로 그에 관한 좋은 저술이나 논문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여기 저기 흩어진 단편들과 남아 있는 자료들을 모아 그의 생애와 업적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그가 설립한 교회들이 100주년을 맞았거나 막 앞으로 맞을 예정이어서 피터스에 대한 조명의 의미는 더욱 크다 아니할 수 없다. 본고에서는 그의 전 생애 가운데 특별히 그가 한국에 권서로 입국하던 1895년부터 구약 번역이 완료되고 부흥운동이 널리 확산되던 1911년까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이후의 사역은 기회가 닿는 대로 추적하려고 한다.
피득의 성장배경과 극적인 회심
지 금까지 피득을 연구하는 이들은 회심 이전의 그의 성장 배경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의 본래 이름, 그의 출생지, 그의 가정 배경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지금부터 13년 전 1994년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신학교 도서관에서 발굴한 맥코믹신학교 출신 한국선교사들에 관한 한 석사학위 논문에서 그의 고향이 우연히 발견되어 약간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Robert Culver McCaughey가 1940년 B.D. 논문으로 쓴 "A Survey of the Literary Output of McCormick Alumni in Chosen,"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맥코믹신학교 출신 조선 선교사들의 간단한 전기적 기록과 그들이 남긴 저술과 논문들의 목록들이 제시되어 있는데 여기에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피터스의 배경에 대해 아주 간단하지만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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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피득의 고향 우크라이나의 정통 유대인 가정의 모습 | ||
“피터스는 1881(1871)년 12월 30일 러시아 Ecsterinoslav에서 유태계로 태어났다. 피터스는 본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세례를 받고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준 피터스 목사의 성을 따라 자신의 이름으로 피터스로 개명한 것이다.”
피 터스가 1881년 12월 30일 러시아에서 출생했다는 사실, 고향은 Ecsterinoslav고 피터스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 받은 후 개명한 이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에카데리노스라브는 1900년 당시 135,552명의 인구를 가진 러시아의 지방 수도로 오늘날 우크라이나(Ukraine)에 있다.
피터스는 남부 러시아 정통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출생하여 유대교 신앙으로 양육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짐나지움을 졸업했다. 짐나지움은 인문계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것으로 피터스가 일찍이 문과에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고향에서 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히브리어 라틴어 희랍어 러시아 독일어 불어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전어와 현대어에 정통한 것은 교육에 관심이 많은 유대가정에서 성장한데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일찍이 인문교육을 통해 언어 훈련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신이 고백한 대로 정통유대인 가정에 태어난 피터스는 어릴 때부터 구약성경을 암송하고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는 훈련을 쌓았다.
그러던 그가 극적인 회심을 한 것은 1895년 4월 일본에서 선교사들의 주일예배에 참석하면서부터다. 이것은 어려운 러시아 생활을 탈피하고 외국, 특히 미국에서 새로운 생을 개척하기 위해 일본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에 일어난 것이다. 19세기 말 러시아는 정치 경제적으로 전환기를 맞고 있다. 김중은 교수는 한 글에서 피터스가 나가사키에 머물게 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청년 피터스는 러시아에서 어려운 생활을 견디다 못해 아버지 집을 떠나 외국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먼저 호주로 가려고 수에즈 운하에 있는 지중해안의 포르트사이드까지 갔는데 거기서 호주로부터 되돌아오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곳도 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호주 행을 포기하고 이번에는 미국으로 가려고 홍콩에 왔으나 미국에 가도 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부 시베리아로 가서 막일이라도 하려고 나가사키에 도착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기선을 타기 위하여 며칠을 기다리는 사이에 주일예배에 참석하였던 것이다.
김중은의 위 기록은 기독교문사의 <기독교대백과사전>의 내용과 상당히 유사하다. 지중해 지역과 매우 가까운 오늘날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러시아를 고향으로 두고 있어 이 같은 기록은 지리적으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호주 행을 결심하고 지중해까지 갔다가 여의치 않자 홍콩에서 미국행을 시도하다 이것 역시 포기하고 나가사키에 왔다는 기록은 클라라 루미스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그 젊은이는 자신의 종족에 대한 제약을 피해 수년전에 러시아의 자기 집을 떠나 철도 노동자로 시베리아를 횡단했으며 그런 후에는 증기선의 승무원으로 일본에 건너왔다. 그는 미국을 자신의 목적지로 설정했다.” 클라라 루미스(Clara Loomis)의 아버지 헨리 루미스(Henry Loomis)가 피득과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피득에 관한 책자까지 출간한 것을 고려할 때 루미스의 기록은 신뢰할만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루미스의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시베리아로 다시 나가사키로 미국행을 염두에 두고 입항한 것이다.
1895년 4월 7일 나가사키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기선을 기다리는 동안 우연히 주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가 왜 개신교 주일예배를 참석했는지는 불확실하다. 김중은 교수는 피터스가 “유대교 신앙을 가졌으나 만족치 못하고 개신교를 통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자신의 생애에 대한 진로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지면서 잠시 종교적 혹은 영적 방황을 하게 된 것으로 풀이된다. 그가 개신교 주일예배에 참석하게 된 정확한 동기야 어떻든 돌이켜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가 아닐 수 없다. 예배 참석을 계기로 기독교 진리에 대해 더 알기를 원하던 피터스는 자신이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어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선교사를 찾기 시작했다. 마침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나가사키에 활동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 앨버터스 피터스(Albertus Pieters)를 만나 그를 통해 기독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 새로운 종교에 대한 갈망, 성령의 특별한 간섭에 의해 교리를 배우기 시작한지 불과 10일 만인 1895년 4월 19일 그는 알버터스 피터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자신의 이름을 피터스로 개명했다. 루미스는 피득의 회심에 대해 한 가지 결정적인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고대하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나가사키에 머무는 동안 발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가사키에서 그는 우연히 그로 하여금 신약성경 공부를 착수하도록 해준 선교사 모임에 참석했다가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고대하던 바로 그 메시야였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세례를 받고 자신의 신앙의 아버지의 성을 따라 개명했다.”
클라라 루미스의 증언대로 “그리스도의 수납은 그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바꾸어 주었다.” 약관 23살의 한 러시아계 유대인의 갑작스러운 회심 자체가 일본 주재 선교사들 가운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마치 이수정의 회심 사건이 일본 주재 선교사들의 중요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말이다. 흥미롭게도 피득에 대한 소식을 들은 미국성서공회 일본 책임자 헨리 루미스는 과거 이수정을 찾아갔던 것처럼 이 회심한 젊은 유태계 러시아인을 찾아가 한국의 권서인으로 일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것은 피득이 세례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클라라 루미스는 이렇게 이 부분을 기술한다:
"루 미스가 한국 사역에 배치시킨 가장 능력 있는 권서인은 의심할 바 없이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 Pieters)로 알려진 젊은 러시아계 유태인이다. 루미스는 이 젊은 유태인을 나가사키의 일본 주재 선교사 앨버트 피터스(Albertus Pieters)의 집에서 1895년에 처음 만났다. ... 아직 피터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불확실했지만 그는 자신에게 한국에서 성경반포 사역을 착수할 것을 권하는 헨리 루미스를 만났다.”
헨리 루미스와의 역사적 만남은 피득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주었다. 세상의 출세를 위해 미국으로 가려던 그가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어 은둔의 나라 조선으로 파송 받은 것이다. 한국으로 사업을 확장하려는 미국성서공회의 입장에서 볼 때 피득은 너무도 적격자였다.
- 박용규, 소논문,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1871-1958):성경번역자,찬송가,복음전도자(1895-1911)"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