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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동원목사
우리는 문화를 초월하여 다른 문화권에 가서 전도하는 분들을 가르쳐 선교사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missionary'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본래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missionary의 어원인 mission은 본래 라틴어 missio의 “보낸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성경에는 선교사라는 말이 직접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선교사와 정확하게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가 있는데 사도라고 합니다. 본래 희랍어에서는 ’아포스톨로스‘(apostolos)라고 하는데 그 뜻이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는 좁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12제자와 같은 분들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다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을 다시 세상으로 보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17:18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요한17:20에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예수님의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인데 이 제자들은 비단 예수님 당시의 12제자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전도 받을 후대의 모든 제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갈라디아서는 본래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를 상대로 당신이 진정한 주님의 사도임을 변호하기 위하여 쓰여진 편지였습니다. 본문에서는 특히 사도의 우선순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를 넓은 의미로 적용하자면 보냄받은 그리스도인 전체이기 때문에 사도의 우선순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 순위라고도 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할 일이 많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적 사역은 무엇일까요?
1. 불신자에게 가서 전도하는 선교사역입니다.
성경에서 믿지 않는 자의 구원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면 “오라”는 단어입니다. 구약을 보겠습니다. 이사야1:18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야 55:1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신약에서 보겠습니다. 마태11:28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계22:17의 말씀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의 소명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가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명령을 기억하십니까?
마태28:19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주고”라고 했습니다. 그 단어 “가라‘가 본문에도 등장합니다. 본문 9절 하반부에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바울 사도는 선교의 대상은 은사와 부르심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저들의 동족인 유대인 선교에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인 선교에 헌신할 것을 고백합니다.
8-9절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8절에서는 베드로를 할례자인 유대인들의 사도(선교사)로 삼으신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선교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은사)를 따라 된 일이기에 유대인 선교로 부르심 받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과 이방인 선교로 부르심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피차에 협력의 필요가 있음을 피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사역하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부르심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2:7을 읽어보십시오. 나는 무 할례자에게 베드로는 할례자에게 복음 전할 책임이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넓은 의미에서 선교사가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모두가 선교사요,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마음들이 바로 선교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고 언제쯤 전도를 시작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어떤 분들은 좀 영적으로 성장하고 훈련을 받은 후에 전도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숙하고 훈련된 사람이 전도하면 더 잘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미성숙과 훈련 부족을 구실로 전도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도대체 언제 여러분의 성숙과 훈련이 완성된단 말입니까?
신약성경에 보면 모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만난 즉시 전도를 시작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거라사 지방에 귀신들려 무덤을 배회하던 사람이 예수님 만나고 치유를 얻자 예수님을 좇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네가 먼저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고 하십니다. 전도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또 사마리아 여인의 케이스를 보십시오.
그녀가 예수님 만나고 언제 전도를 시작했습니까? 그녀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깨닫자마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전도를 시작합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그리고 그 결과를 요한4:39을 보십시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함으로 그 동네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제 경험에 의하면 예수 믿는분들이 성장 못하는 원인이 전도안하는 때문입니다. 전도하면 기도하게 되고 전도하면 성경공부하게 됩니다. 전도하면 인생이 변화됩니다. 금년한해 얼마나 전도사역에 헌신하셨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전도의 헌신으로 새해를 여시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우선순위인 것입니다.
2.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는 구제사역입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바울사도에게 선교외에 한가지 더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한가지 사역이 그의 마음의 부담이 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읽어보실까요?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이것은 바울 사도의 개인적인 관심이 아니라 처음 사도들 모두 아니 초대 교인 모두의 공통적인 부담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도 이 사역을 힘써 행한다고 고백합니다. 무슨 사역입니까? 구제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6:1을 보십시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여기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이 구제 사역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 교회가 다시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구제 사역을 포기하자고 결의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초대 교회는 이 문제로 다툼이 일어날 정도로 구제 사역에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선교사역과 함께 구제 사역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목장 교회 사역의 두가지 목표를 설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 목장 사역의 비전은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목장 교회 비전“ 급속하게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지구촌 교회 안에서 마을별 혹은 특성별로 교우들에게 안정적인 가족구조를 제공하여 교회 정착과 영적 성숙, 공동체적 봉사 곧 선교와 구제를 실현하도록 섬기며 더 나아가 목장 재생산을 통한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하고자 합니다.”이것이 우리가 목장으로 모일 때마다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VIP 태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여름철 단기선교에 동참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목장들이 정기적으로 사회 봉사 기관들을 방문하고 주변에 고통받는 이웃들을 대상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해마다 년말년시에 목장 교회를 중심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선교와 구제의 실천은 중요한 우리 모두가 “빚진자”라는 성경적 정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누군가가 과거에 이 복음을 위해 희생하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만큼 살고 있는 것--하나님과 이웃들의 사랑, 그리고 이 사회에 빚진 때문이라는 자각-이것이 우리의 자비의 실천의 성경적인 모티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요한3:16은 잘 기억하지만 요일3:16의 교훈은 망각하는 때가 많습니다. 요일3:16은 요한3:16이 증언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평생에 붙들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다음 구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요일3:17입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그래서 신학자들은 전도의 명령을 위대한 사명(Great Commission)이라고 불렀는가 하면 사랑의 실천을 위대한 명령(Great commandment)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에 포함시키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서 이세상 모든 가난한 자들을 우리가 책임질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여리고 길에서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구제 사역에 헌신하기를 꺼리는 원인의 하나는 우리가 크게 도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교가 이웃에 대한 관심과 친절로 시작하듯이 사랑의 실천도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시작하시면 됩니다.
구제를 포함한 사랑의 실천 사역 중에는 물질이 아닌 우리의 시간과 몸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 교우들중 적지 않은 분들이 참여하는 호스피스 사역도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교도소 사역도 그런 경우라고 할만 합니다. 양로원 봉사도 그런 경우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는 장애인 교우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올수 있도록 차량 봉사를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교회가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 부모들이 일할수 있도록 그들의 어린 자녀들을 교회에서 무료나 실비로 돌보아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우들은 교회에 나와 자원봉사로 이런 어린이들을 돌보아 줍니다. 우리 교회가 연구해 볼수 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입니다. 우리의 사랑입니다. 혼자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세상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년전 치매로 고생하는 아내를 둔 남편 위스컨신주의 Mr.Stillwater씨의 이야기가 Moody Monthly라는 잡지에 실린 일이 있었습니다. 아내를 요양원에 맡긴 것이 마음에 걸린 남편은 하루를 마다 않고 거의 매일 저녁 요양원에 들려 한 두시간을 곁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양원을 찾을 때는 늘 아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갔다고 합니다. 하루는 자녀들이 함께 와서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가르키며 이분이 누구냐고 묻자 남편을 몰라보는 아내는 “아이스크림 사다주는 좋은 아저씨라”고 대답합니다. 하루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어느 날 남편이 아내 옆에 앉아 “내가 좋으냐”고 묻자 “아이스크림 사다 주니까 좋아”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편은 기다렸듯이 “그러면 나하고 결혼하자”고 하자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하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아이스크림 계속 사다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더랍니다. 남편은 요양원에서 봉사하시는 목사님께 특별한 도움을 요청하고 자녀들 그리고 요양원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탄절 오후 조촐한 결혼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주례가 치매걸린 아내에게 묻습니다. “옆에 있는 이분을 남편으로 맞이하시겠습니까?”고 아내는 또박 또박 “예”하고 대답합니다. 남편은 주례의 허락을 받아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인사 시간을 갖고 준비해온 메모지를 읽어내려 갔다고 합니다.
“오늘 저희들의 결혼식에 참여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저의 아내와 이런 번거로운 결혼식을 다시 준비한 것은 단 한번이라도 제 아내에게 ‘사랑하는 남편’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일 다시 제 아내가 저를 기억 못해도 저는 오늘만이라도 저의 사랑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저희들에게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이날 저는 저의 아내를 선물로 받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도 저의 아내에게 오늘 하루라도 다시 한번 남편이라고 부를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식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오늘을 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희에게 이 사랑이 가능하도록 도와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성탄절 우리 부부는 고귀한 사랑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분의 아내는 치매가 치유되지 못한채로 약 6년을 더 살았는데 그러나 한가지 자기 남편을 남편으로 부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남편은 아내의 장례식에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족합니다. 제 아내가 요양원 결혼식후 적어도 저를 남편이라고 불러준 것-그것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고 사랑의 기적이었습니다. 남은 저의 인생--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제 아내보다 더 외롭고 아픈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첫댓글 생명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