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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展
나를 본다 - 파랑새, Looking at Myself
2013. 7. 20(토) ▶ 2013. 7. 28(일)
오프닝 및 작가와의 만남 | 2013. 7. 20(토) pm4
화-일 오후12:00-오후7:00 매주 월요일은 휴관 | 입장료 없음
대안공간 눈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232-3 3/2 | T.031-244-4519
www.spacenoon.co.kr | spacenoon@hanmail.net
수원문화재단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나를 본다_동파이프 산소용접_83x65x30cm_2013
미지의 수많은 나를 바라보는 나
이선영(미술평론가)
크고 작은 동관을 용접하여 일으켜 세운 안재홍의 인체 상들은 마치 대지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나무 같다. 묵직한 구조체를 지지하는 하체부분은 굵은 관들이, 머리를 포함한 상체부분은 분지하는 작은 관들의 구조가 부피를 만들어 그 안에 미세한 그물망을 형성한다. 그러나 나무처럼 대지 위에 우뚝 선 인체 상들은 밖으로 뻗어 나가기보다는 내향적이다. 그것들은 안으로 자라나며, 그 안에서 뒤얽힌다. 이러한 내향성은 자신을 바라본다는 전시 주제와 어울린다. 미술계 현장에서는 드문 존재인 40대 여성 조각가의 자화상이지만, 이 자소상의 성별은 불분명하고, 팔이 생략되어 있는 등 해부학적 구조도 모호하며, 선으로 만들어진 부피로 형성된 여러 개체들은 허상인지 실상인지도 확실치 않다. 선의 뭉치로 표현된 얼굴에 구체적 표정이 있을 리도 없다. 그러나 안재홍의 작품은 그 형태와 색채, 형식과 재료, 기법과 설치방식 그자체로 상기한 주제인 ‘looking at myself’(전시부제, 작품제목)를 표현한다.
조각의 기본질서를 이루어왔던 인체가 해체되지 않으면서, 형식과 방법이 가질 수 있는 언어가 최대한 발휘되면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품의 서사는 부가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말을 한다. 그래서 안재홍의 작품은 기계적인 복제나 과도한 표현주의와 연결되지 않고서도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는데 성공한다. 오랫동안 비슷한 주제를 견지해 온 안재홍의 작품들에서 자기에 대한 연민이 없지는 않지만, 전시가 계속되면서 진보해온 형식적 장치들은 작품의 언어를 개별이 아닌 보편으로 끌어올린다. 그녀에게 조각은 우선 나를 보는 행위이며, 이 과정을 공유할 수 있는 강력한 인터페이스를 구축함으로서 관객들에게 자기 스스로를 보도록 유도한다. 여기에서 인간, 또는 자신과의 닮음은 재현이 아니라, 구조적 유사성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인체가 무엇보다도 다양한 통과 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상징은 그 구조와 기능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나를본다_동파이프 산소용접_90x85x28cm_2013
나무가 자라는 것 같은 유기적 과정은 금속으로 단단하게 구조화 된다. 벽에 붙여 설치하는 부조에서도 드러나듯이, 안재홍의 조각은 드로잉으로부터 시작된다. 드로잉 역시 무엇인가를 재현했다기보다는, 누에가 실을 뽑듯이 작가의 몸에서 자라난 것이다. 물론 자연발생적으로 자라난 형상을 3차원 공간에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별개의 물리적 과정을 거쳐야 하는 문제이며, 그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점에 그 독특성이 있다. 다양한 굴곡 면을 가진 형태들은 일관된 매뉴얼을 불가능하게 하며, 자동화 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누가 도와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매번 시행착오와 기적이 발생한다. 작가가 작품에 나를 고집해 온 것은 그것이 자신만이 온전하게 할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머릿속에 떠도는 그 모호한 것들을 현실에 일으켜 세우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불발탄으로 끝나는 것들을 작가는 현실화함으로서, 그 누구와 소통하기 이전에 가장 먼저 창조의 희열이란 것을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작가에게 작품이란 공적인 소통이기 이전에, 우선 자신과 관련되는 문제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공허한 형식들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예술가는 어떤 내용으로 자신의 진정성을 확보하고자 하지만, 그 역시 내용을 객관적으로 보여야 하는 임무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온 몸으로 통과해야만 하는 시련의 시간들이 견디기 힘들기에, 평범한 작가들은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정치적 전략에 몰두하거나 제도 속에서 통용될 ‘객관적’ 자격 여건을 취득하기 위해 그렇게도 애를 쓰곤 한다. 그러나 그런 일에 시간과 돈, 정신 에너지를 투입해봤자 자신이 궁극적으로 돌파해야 하는 문제는 단지 지연될 뿐이다. 이때 예술은 이중적으로 자기 소외를 야기한다. 안재홍 역시 생활인으로서 한동안 조각을 쉴 수밖에 없었고, 10여년 만에 멈췄던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숨을 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깊은 소외를 경험했다. 이 전시를 비롯해서 요즘작품에 등장하는 인체 상 가슴 안쪽 부분에 자리한 파랑새는 작업하는 삶이라는, 되찾은 희망을 상징하는 듯하다.
나를본다_동파이프 산소용접_200x90x20cm_2013
몸속에 자리한 이 희망의 상징은 허의 공간이 없는 온전한 실체를 이루면서, ‘자아 안의 타자로서의 영혼’(레비나스)처럼 보인다. 인체상은 파랑새의 둥지가 되어준다. 작가는 육아 때문에 작업을 쉬고 있을 즈음, 비바람이 몰려오기 직전 나무가 바람에 아우성을 치는 듯한 모습을 보고서 자신의 상황을 중첩시켰다. 꽁꽁 뭉쳐진 금속선과 나무 형태의 결합은 그런 한스러운 감정으로부터 태어났다. 안재홍에게 조각은 무슨 특이한 형식과 내용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나를 되돌아보는 행위였다. 그러나 그것이 주관적 영역에 머물지 않는 것은 조형 언어가 가질 수 있는 객관적 힘 때문이다. 작가는 그렇게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주/객 이원론에 바탕 한 재현이나 표현은 아니다. 조각을 전공한 안재홍은 학창시절 전통적 교육 과정을 충실하게 따라, 흙 작업을 열심히 했지만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는 재현의 방식에 불만을 느끼던 중, 91년에 고물상에서 동 선을 발견한다.
그것은 가는 구리선을 압축하여 쌓은 것인데, 꽉꽉 뭉쳐져 내 동댕이쳐진 그 폐기물(재활용품)이 마치 자신처럼 느껴졌다. 이 발견된 오브제는 그자체로 강력하게 형상을 구축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구구절절한 표정의 재현 없이도 표현적일 수 있었다. 이렇게 90년대 초반에 우연찮게 동을 발견한 후, 작가는 줄 곧 그것을 활용했다. 전선이나 보일러 관 등으로 사용하는 동선이나 동관은 에너지를 전달하는 재료로, 금속이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며 원하는 각도나 유연함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다. 무기질이면서 유기체적 느낌을 주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색이 변하는 것에서도 발견된다. 그것은 이 재료의 한계이면서 독특함이기도 하다. 번쩍거리는 황금색 도관은 어떤 마감처리를 거쳐도 거뭇하게 변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작가는 이 물리 화학적 과정도 작품에 포함시킨다. 그것은 나무처럼 자랄 뿐 아니라, 나무 같은 짙은 갈색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인간에서 나무로 변하는 신화처럼, 형태 뿐 아니라 색채도 나무화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용접한 선들도 일부러 지우지 않는다. 작품은 나무의 옹이나 나이테처럼 마디마디 자신이 겪은 일이 온몸에 새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는 작품의 시작인 드로잉 자체가 나무 같다. 몸과 무의식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이 종이 위에 발산되는 드로잉은, 안재홍에게 어떤 내용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처럼 통과시키는 것이다. 틈틈이 행해진 드로잉을 바탕으로 조각의 굵고 가늘기를 결정한다. 그러나 평면과는 다른 차원들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조각은 드로잉을 바탕으로는 하지만, 그것을 정확히 재현하지 않는다. 3차원에서 수행되는 공간 드로잉은 0.15mm에서 8cm 사이의 10개가 넘는 동선(관)의 계열로 이루어진다. 평소에 붓 펜으로 드로잉을 하지만, 붓 펜 드로잉과 실제 구리선 드로잉의 느낌은 다르다. 평면이 용접을 통해 입체화될 때는 부피가 생기면서 각도 등이 미묘하게 변화한다.
나를본다-파랑새_동파이프 산소용접_220x95x90cm_2013
입체화 될 때 선의 관계는 매우 복잡해진다. 벽에 붙이는 작업과 달리 입체화는 앞, 뒤, 옆선이 360도로 원하는 형상이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각을 맞추기 위해 수없이 눕혔다 세웠다를 반복하며, 큰 작품의 경우 하루에도 수백 번 사다리를 탄다. 전시된 작품은 규모가 크든 작든 간에 대지 위에 웅장하게 서있으면서도 웅크리는 듯한 느낌이다. 나무처럼 분지를 이루는 관다발로 얽혀 만들어진 인체상의 상체 부분은 다양한 굵기의 관으로 밀도가 높고, 하체 부분은 굵고 성글다. 균질하지 않은 밀도가 밑바닥에 발을 묻은 채 고정된 조각상에 잠재적 움직임을 만든다. 팔은 그 비슷한 실루엣만 보인다. 인체상이 걷는 모습일 때는 무게 중심이 아래에 있어서 그런지 뭔가 엉거주춤하다. 서있을 때는 물론, 움직일 때조차 외향적이지 않다. 밀도와 크기가 다른 여러 인체상이 함께 있을 때 남녀상이나 군상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한 사람(작가)이며, 그 주변의 비슷한 형상은 분신이거나 그림자이다. 재현의 기원이 되는 그림자나 분신에는 타자라는 주제가 뒤따른다.
안재홍의 작품에서 실상과 허상 간의 질적 차이는 발견되지 않는다. 벽에 붙여 설치하는 작품의 경우, 작품 자체가 드로잉이기에 그림자에 의해 선이 배수로 늘어나는 것까지 고려한다. 공간에 그린 드로잉은 마음속에 떠오른 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그렸다는 기본적인 속성은, 그것이 자연의 외적인 모방이 아닌 자연적 과정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과정의 구조화를 통해, 조각예술의 기본인 인체 상을 부정하지 않고서도 재현주의를 벗어나는 현대적 어법을 획득한다. 여러 굵기와 밀도, 그리고 각도의 선이 나오지만, 어떤 해부학적 기관이나 얼굴표정을 결정짓는 선은 없다. 어떤 것은 잠재적이고 어떤 것은 현실적이다. 무수히 반복되는 선들은 잠재성과 현실성을 일치시키지 않는다. 또한 이 두 차원은 관객의 시선에 따라 자리를 수시로 바꾼다. 재현의 동일성을 부정하는 이러한 가변적 속성 때문에, 주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끝없이 변모한다. 이 변모의 과정 자체가 실체, 즉 그 인간의 정체성을 이룬다.
나를본다-파랑새(부분)
이 금속 뭉치들은 여러 매개 없이 무의식과 욕망을 표출하는 것이다. 이 무의식과 욕망은 다양한 분지의 체계를 통과하고, 작품 전체의 복잡한 굴곡 면으로 전달된다. 안재홍의 작품은 인체의 가장 표현적 부위인 얼굴과 팔(손)을 생략한다. 판토마임 배우나 웅변가들이 곧잘 이용하듯이, 뭔가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수단인 손과 얼굴은 안재홍의 작품에서 단지 몸통의 어느 위치에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얼굴은 얼굴이 아니라 단지 머리통이고, 수많은 갈래의 선들이 교차된 머리는 분열적이다. 게다가 팔은 몸통에 흡수되어 있어 마치 유령처럼 보인다. 이전 작품에서 몸통자체가 거의 팔인 작품도 발견되기는 하지만, 그렇게 과장된 팔 역시 통상적인 의미의 팔은 아니다. 대지로부터 자유로워진 손은 뇌의 용적률과 함께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즉 만물의 영장으로 만든 가장 강력한 동인이었는데, 그녀의 작품에서 그것은 대지에 묻혀있는 발과 함께 식물적 형상으로 응축된다. 재현과 표현, 노동과 이동을 통해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정복하는 인간의 속성이 축소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조각예술도 크게 기여해온 인간중심의 목적론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다.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의 일원으로 그것과 공존하려는 태도는 나무로 자라난 인간형상, 그리고 인간 중심의 목적론에 의해 타자화 된 자연을 품고 있는 모습에서 읽혀진다. 안재홍이 바라본 자신은 주체가 아닌 타자이다. 그것은 주체가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분열되어야 한다는 것, 더 나아가 주체 자체가 타자를 통해 확실시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주체와의 소통은 곧 타자와의 소통이다. 결정적이지 않은 수없는 선들의 흐름으로서의 인체상은 주체를 이루는 현실, 상상, 상징 사이의 메워질 수 없는 틈과 간극을 나타낸다. 변치 않음을 가정하는 동일성(sameness)은 주저하는 그렇지만 단호한 선들의 흐름에 의해 분열되고 분절화 된다. 폴 리꾀르가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서 말했듯이, 타자는 동일성 안에서 나를 결집시키고 나를 확고히 하며 나를 유지하도록 도와준다.
철학자가 물었듯이, 어떤 조건으로 이 타자는 나의 복제, 또 다른 나가 아니라 나와는 다른 진정한 타자가 될 것인가가 중요하다. 안재홍이 바라본 자기의 모습에는 타자들이 흔적처럼 새겨져 있으며, 그자체가 자신을 이룬다. 동일자가 아닌 타자로서의 자신은 현대철학의 중심주제이기도 하며, 그것은 재현주의로부터 멀어진 현대미술의 흐름과도 중첩된다. 폴 리꾀르에 의하면 근대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그 주체는 ‘나는 원하고 움직이고 행한다’를 말한다. 데카르트는 존재를 실체와 같은 것으로 보는 오래된 동일화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는데, 이 동일화는 시각적인 표상에 부여된 배타적 특권에 의거한다. 그러나 존재와 있음 대신에 부재와 결여를 통해 타자의 자리를 마련하는 안재홍의 작품은 인간을 세계의 주체로 격상시키는 유아론적 태도와 거리를 둔다. 자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처럼 바라봄은 20 여 년 전에 흙을 대신 할 금속선 뭉치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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