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야 내려오라 (눅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개오 시리즈 세 번째입니다. 오늘은 “삭개오야 내려오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과거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소비에트연방 즉 소련이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소련은 한때 집단 농장 체제를 실시하였는데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험적으로 정치범으로 구성된 소련 인구의 1%를 선발하여 그들에게 가장 나쁜 땅을 사유지로 분배해 주었습니다.
농사하기 어려운 박토에서 자유롭게 농사를 지어 그것을 먹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결과를 조사했는데. 실로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소련의 전체 농업생산량의 27%가 그 박토에서 생산된 것입니다. 감자는 62%, 우유나 쇠고기는 34%, 달걀은 47% 등등 종합하여 27%가 불과 1%의 정치범 농민들의 손에 의해서 생산되었습니다. 방법을 바꾸니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가려왔습니다.
우리 영적생활도 그렇습니다.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고전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기 도(道)는 길인데 달리 표현하면 방법입니다. 이제까지 노력했지만 결과가 없습니까? 방법을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방법인가? 하나님의 방법인가?
우리는 그것을 본문의 삭개오에게서 봅니다.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키 작은 삭개오에게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이걸 보신 예수님께서 쳐다보시고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돌무화과나무는 삭개오를 예수 만나게 해준 나무였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돌무화과나무의 양면성을 봅니다.
1. 돌무화과나무는 예수님을 보게 해준 나무였습니다.
3-4절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고 싶습니까? 그러려면 삭개오처럼 돌감람나무에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비유적 의미에서 돌무화과나무는 무엇일까요? 율법입니다. 왜 율법입니까? 돌무화과나무는 열매는 생산해 내지 못하지만 삭개오를 예수 만나게 해준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그렇습니다. 갈3:24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을 알게 합니다.
히1:1-2에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구약 성경은 모두 장차 임하실 메시아 예수를 증거하는 책입니다. 이 핵심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지 핵심 놓치면 수박 겉핥는 것입니다. 이 핵심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성경이 열립니다. 모세오경이 열립니다. 역사서 시가서 지혜서 선지서가 열립니다. 요한계시록이 열립니다. 우리가 답을 알면서도 성경을 보는 것은 더 구체적인 진리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정직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월감과 교만 때문에 영광의 메시아만 추구한 나머지 시편이라든지 사 53장의 고난의 종으로 오실 예수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회피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심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직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매일 함께 성경을 읽었더니 천주교에서 졸업한 이야기했었지요. 정직한 마음으로 읽으면 천주교 神천지 통일교 기타 모든 이단을 다 떨쳐버릴 수가 있습니다. 진정 성경이 말씀한 예수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빌립과 나다나엘도 그렇게 예수를 만났습니다. 요1:45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려면 신구약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문서설 편집설과 같은 터무니없는 가설을 주장하는 고등비평학은 성경의 오묘한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의심입니다. 그러므로 삭개오처럼 좀 더 자세히 예수가 누군지 봐야겠다는 그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다각도로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돌감람나무는 이런 의미 외에도 부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2. 돌무화과나무는 속히 내려와야 할 나무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5-6절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여리고가 종려나무의 성이라는 이름이듯 여리고는 오아시스 성읍입니다. 그래서 여기엔 종려나무도 많고 참 무화과나무도 감람나무도 많은데 하필 왜 쓸모없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을까요?
돌무화과나무가 갖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돌감람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데 그것은 믿음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신 책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매를 맺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참 믿음을 버리고 율법적인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삭개오가 올라간 열매 없는 나무를 율법의 나무로 본다면 그 율법 안에서는 참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교훈을 발견합니다. 즉 열매 없는 나무는 삭개오가 예수 만나기 전의 영적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나무를 잘못 올라간 것입니다. 예수 없는 삶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슷한 예로 롬 11장에서 돌감람나무를 이방인으로 보았습니다. 예수 없으니 돌감람나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기름을 내지 못합니다. 성령은 어디서 발출하는가?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라는 것이 정통신학의 입장입니다.
이 말은 예수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늘 경외하는 자에게서 성령이 임하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 믿는 자의 마음에 성령이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 믿어 성령이 계시지만 넘치지 않는다면 왜 그럴까요? 성령이 성부에게서도 나오시듯 늘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걸 모르기 때문에 신비주의나 관상기도 같은 이상한 방법으로 성령을 추구하다가 시험에 빠집니다. 다윗처럼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 받는 길입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인해 악신 받으면 사람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 ‘순결하다. 의롭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예수 없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율법으로만 의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더 악해질 뿐이었습니다. 불신자는 죽은 후에야 죄를 깨닫고 비참해지지만 율법에만 눈이 열리면 살아서부터 그 심령은 비참해집니다.
나무를 바꾸어야 합니다. 율법의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 그리스도의 참 감람나무에 올라가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성령 받으면 끝날 것을 불교에서는 성불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삼아승기백대겁’이라.
불교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삼아승기’란 3☓10의 59승이며, ‘백대겁’은 8천겁과 같은데, 1겁은 43억 2천만년이므로 ‘삼아승기백대겁’은 약 1조년의 10의 61승입니다. 이건 컴퓨터도 계산해낼 수 없는 영원을 말하는 햇수입니다. 불승들도 더 이상 속아 중생들을 잘못된 대로 이끌지 말고 속히 예수 앞에 나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리고를 들어가 나오시던 예수님은 나무 위의 삭개오를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유리는 율법의 나무에서 예수를 봅니다. 그와 동시에 율법에는 성령 또한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율법의 나무에서 예수를 발견했다면 더 이상 머물지 말고 속히 내려와 예수님 모시고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겨 구원 받고 변화 받고 사랑 받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