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픈 사람과 살고 있는 나의 상황이나 여건에 맞게 최대기간 6일씩의 국내여행을 선택해 혼자 다니곤 한다. 때때로 두려움이 엄습하고 고독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 또한 혼자로의 여행이 주는 거듭남과 성숙함의 통과의례라고 생각한다. 실로 깊은 사색과 함께 생생한 체험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혼자 겪어가는 과정들이 제대로 사는 재미를 더해준다.
2월 6일 월요일부터 11일 토요일까지 6일간 홀로 강릉바우길을 걷고 돌아왔다. 설 명절에 하지 말아야 할 정치 이야기는 끝내 아들들과의 좁힐 수 없는 입장 차이로 울끈불끈 울컥들 서로가 아팠다. 맞서 싸울 수는 없고, 타들어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는 배낭과 카메라를 들고 동서울 버스터미널에 몸을 실었다.
‘걸어서 지구를 진동시켜라.‘ 강릉 바우길 안내의 첫 메시지이다. 소설가 이순원님이 내놓으신 바우길 테마이다. 거창하게 지구까지야 진동시키지 않더라도 내 가슴 내 마음과 내 정신을 진동시켜 바로 잡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강원도 친숙한 말 ’바우‘의 마음으로 자연순례 ’바우길’에 서본다.
우연히 알게 된 강릉 바우길의 게스트하우스에 5박 6일을 예약했다. 하루에 2만 5천원씩 5박에 12만 5천원으로 저렴하다. 강릉 시내 한복판에 단정히 자리하고 있는 바우길 게스트하우스는 거대한 빌딩의 콘도형이 아닌 단아한 한옥 가정집이다. 따스한 정감이 있고, 시설도 아주 쾌적하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참 좋다. 무척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다. 원하는 것을 잘 얻을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도움도 준다.
바우길 20구간 중 이미 완주했던 해파랑길과 중첩이 되는 7개 코스를 제외하고, 8개 구간을 바우길 안내해주는 팀장과 일정을 정한다. 포근하고 아늑한 침대 공간에 여장을 풀고, 오전 11시 가벼운 배낭으로 첫날부터 신사임당 길에 들어선다. 파란 바탕에 하얀 솟대 문양의 바우길 표지판과 두 줄기 빨강 하양 꼬리 리본, 길바닥과 게시판, 전봇대 등에 부착된 바우길 안내표는 해파랑길때처럼 반갑다.
1. ‘신사임당길’ 엄마의 마음으로
(바우길 11구간, 16.3km, 7시간)
택시로 송양초교 도착, 소나무 숲길, 오솔길, 묘지길, 눈쌓인 언덕길을 아들 율곡의 손을 잡고 걷는 신사임당처럼 두 아들을 생각한다. 내 아들들도 어렸을 적엔 내 손을 잡고 어디든 다녔었다. 지금 엄마 손을 잡지 않는 다 성장한 아들들을 위해 엄마 노릇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꽁꽁 얼어붙은 죽헌저수지, 건너편의 송림과 팬션들, 하늘 향해 서있는 외로운 나무 하나, 다 내어주고 새하얀 눈밭에 밑둥만 남은 볏단들이 안쓰럽다. 눈이 녹아 질퍽거리는 길, 몇 번씩이나 오르내리는 언덕길과 산길, 숲길을 말없이 이어 걷는다. 파란 하늘빛에 유난히 단청이 빛나는 죽림사의 녹슨 종, 까만 대나무의 산실 오죽헌, 잿빛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사대부가의 전통가옥인 선교장의 활래정, 스쳐지나가며 보는 매월당 김시습기념관이 쓸쓸하다.
시루봉 산길로 접어들어서니 순간 어두워진다. 랜턴 빛에도 더럭 겁이 난다. 기도로 서둘러 내려와 야간 조명 속 경포대에 올라선다. 검푸른 경포호수, 허균난설원 유적지를 돌아 초당순부두를 먹는다. 겨울 끝자락의 또 하루가 간다.
*신사임당길 시작점의 송양초등학교
*꽁꽁 얼어붙은 죽헌저수지
*햇살에 빛나는 죽림사 녹슨 종
*신사임당과 율곡의 오죽헌
*전통가옥 선교장 가는 길
*선교장 박물관
*선교장 활래정
*야간 조명 속의 경포대
2. ‘모정의 탑길’ 더 아픈 엄마의 심정으로
(바우길 벗어난 길 4km, 2시간)
아들들에게 정치공세를 받고 답답한 마음에 훌쩍 떠나왔다는 말을 들은 게스트하우스 봉사자인 나의 코디는 노추산 자락 모정의 탑길을 추천해준다. 코디의 승용차 편으로 세월교 앞에서 내린다. 다리 밑으로 송천이 흐른다. 얼음들이 둥둥 떠다닌다. 물 위로 햇살 받아 윤슬이 반짝인다. 얼음판 위에 눈사람 둘이 서서 사뭇 그리움을 부른다.
마을 사람들과 노추산 등산객이 쌓은 돌탑들이 초입에서 길잡이를 하고, 비로소 3천개 모정의 탑들이 짜르르르 펼쳐진다. 전북 진안 마이산의 탑사를 방불케한다. 규모는 작아도 정성과 희생 가득한 공든 탑은 감동이 더한다. 차순옥 할머니라는 분이 사람 키보다 더 크게 3천개 탑을 쌓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까닭 모르게 두 아들이 죽고, 남편은 병들어 우환이 끊이질 않던 차순옥 할머니. 꿈에 산신령으로부터 돌탑 3천개를 쌓으면 우환이 사라진다는 말을 듣는다. 이곳 노추산 계곡에 1986년부터 작은 움막을 짓고 26년 동안 혼자 갖은 고초를 사서 겪으며 돌탑을 쌓기 시작한다. 오로지 죽은 아들의 혼을 위하는 마음과 남편의 병을 낫게 하려는 일념으로 기어코 3천개의 돌탑을 완성하고 2011년 68세로 생을 마감한다.
나의 가정 형편과 많이 흡사한 이 어머니. 나는 두 아들들을 위해서, 그리고 23년째 병든 남편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을 해 왔을까? 이 어머니 가족사랑의 마음을 받으며, 무거운 십자가 짐을 원망하지 않기로 마음 다잡는다.
*노추산 자락 세월교 모정의 탑길 입구
*차순옥 할머니 움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