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6:1~11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보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한 열댓 번은 본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실화입니다. 1906년에 마을 학교 교장의 아들로 남부 프랑스에서 태어난 “앙리 샤르에르”(Henry Charriere)는 베네주엘라(Venezuela)에서 처음 출간된 자전적인 소설 ‘빠삐용’(Papillon)을 통해 자기가 젊은 시절에 겪은 기구한 삶을 온 세상에 공개하였는데 이 영화는 바로 이 책을 그대로 각색하여 제작이 되었습니다. 해군에서 복무를 마친 후 파리로 올라간 앙리는 잠시 건달 세계에서 일을 한 적이 있는데 몸에 있는 나비문신 때문에, 그때부터 별명으로 ‘빠삐용’이라 불리게 됩니다. 그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1973년, 마드리드에서 죽었습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탈옥을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만 저는 그 집요한 탈옥의 장면보다는 그가 창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받아 감옥에서 잠을 자다 꿈을 꾸는 장면이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꿈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는 하나님께 억울하다고 호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합니다.
“너는 유죄다. 너는 네 인생을 탕진했다.”
건달로 술집과 사창가를 드나들던 그의 젊은 시절을 심판한 것입니다. 방탕한 그의 삶이 없었더라면 창녀를 죽였다는 누명도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게으르며 방탕하게 살아온 그의 삶이 유죄이며 그 유죄에 대한 심판이 종신형이었음을 하나님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우리는 때로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여기며 원통해 합니다만 사실 깊이 알고 보면 나 자신에게 보다 근원적인 이유가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한 예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잠 6:1~5의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타인을 위해 빚보증을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책임질 수 없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어 낭패를 본 적이 꽤 있습니다. 만약 억울하다면 지키지 못할 값싼 의리에서 비롯됩니다. 나는 그 돈을 본 적도 없는데 하고 억울해 할 것 없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신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빚보증은 타인의 빚을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것 아닙니까?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의 도덕적, 양심적 정당성이 있어야 합니다. 시인 이성선의 시에 <심복>이란 시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심복이 되오리까
사람들은 저마다 심복을 부리고 심복이 되어 사는데
나는 누구의 심복이 되오리까
세상에는 나를 심복으로 부릴 아무도 없습니다.
나 또한 누구의 심복이 될 수도 없습니다.
나를 심복으로 삼아줄 이 세상에 없고
나 또한 심복으로 일할 이를 찾지 못한
이것이 내 삶의 외로움이요 슬픔입니다.
그러나 날더러 꼭 심복이 되라 하신다면
나는 하늘의 심복이 되겠습니다.
하늘의 종이 되겠습니다.
바람으로 하늘 쓸어 맑게 하고 밤마다 가지에 별 이불을 펴며
해 뜨고 달 뜨는 시각이면 바다와 산에 사다리를 놓아
당신 뜨락으로 해와 달을 오르내리게 하겠습니다.
몸은 허공이 되어
나를 통한 당신 눈빛이 이 땅에 가득하게 하겠습니다.
당신이 지상을 내려다보시며 불쌍한 중생을 위해 눈물을 흘리신다면
나는 당신의 피리가 되어 마음 가난으로 우는 영혼을 찾아가고
잠 못 이루는 이의 문전에 서서 이들 온갖 귀가 하늘 향해
갈대꽃으로 피게 하겠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슬퍼하신다면
나는 헤매는 중생들을 당신 집으로 인도하는
영혼의 신발이 되겠습니다.
하늘이여, 나를 부리소서.
당신에게만은 심복이 되어 종이 되어
부서지도록 기꺼이 일하겠습니다.
하늘의 심복, 하늘의 종이 되어야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지금 하는 일이 내게는 일용할 양식을 주고 남에게는 위로가 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인지, 정말 선한 것인지를 되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니라는 울림이 있으면 아무리 그럴 듯하고 좋아 보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라고 하는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남을 해치게 되어 있습니다.』(기독교사상 2007년 7월호 최완택목사, ‘일거리가 있는 상놈’)
우리는 확실히 돈의 심복이 되는, 돈의 노예가 되는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을 잃은 한이 있어도 돈은 벌고, 잃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돈도 잃고 사람도 잃습니다. 생각해보면 편하고 적게 일하고 많이 벌겠다는 내 자신의 욕심이 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빠삐용의 억울함은 알고 보면 인생을 쉽게 탕진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못된 군인들이 한탕의 쿠데타로 나라를 집어 삼키더니 요즘에는 일반 사람들도 한탕주의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합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땀 흘려 스스로 일하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天職이란 하늘이 준 직업이라는 말입니다. 잠 12:1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쉬운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밭가는 사람은 배불리 먹지만 지각없는 사람은 헛된 꿈만 좇는다.”
땀 흘려 자기 밭을 가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일하는 사람은 배불리 먹지만 쉽게 벌어 한탕 하려는 지각없는 사람은 헛된 꿈만 좇는다는 것입니다. 천직이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목사를 성직이라고 하는 말도 다 그런 말입니다. 하늘이 주신 일이라는 말입니다. 『성직자는 목사만 성직자가 아니라 땀 흘리며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은 다 성직자입니다, 나 같은 목사들이 자기들만 성직자라고 독점의식을 가지고 연명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주신 일이면 함부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받들어서 해야지요. 왕궁의 시녀만 받들어야 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하늘이 내게 주신 일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게 거룩한 일입니다, 이것은 내 일이다, 나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좋아진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신선하게 걸어갈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자기 일을 볼 수 있게끔 해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직의식을 좀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성직의식을 갖지 않으면 하는 일을 통해서 사람들을 골탕 먹입니다.』(기독교사상 2007년 8월호, 최완택목사, ‘자기 밭을 가는 사람’) 그저 돈에만 눈이 어두워 먹을 것, 입을 것에까지 장난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세상에 성직이 아닌 게 없지요. 똥 푸는 아저씨가 제일 거룩한 성직자입니다. 제 아버지가 제가 공부 안할 때마다 “공부 안하면 너도 저 아저씨처럼 된다.”며 똥 푸는 아저씨를 가리켰습니다. 이것이 제 아버지가 잘못 가르쳐준 유일한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의도는 그게 아니기는 합니다. 똥 푸는 아저씨가 똥을 안 푸면 온 도시가 똥으로 범벅이 되겠지요? 먹으면 다 똥이 되는 겁니다.
『모모라는 동화 있습니다. 모모라는 아이가 원형극장 부서진 데서 사는데 아주 천진난만한 아이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만 만나면 사람들이 인간의 원형을 다시 찾습니다. 미카엘 엔데라고 하는 독일 사람이 쓴 동화입니다.
등장인물 중에 베포라고 하는 청소할아버지가 있는데 그 청소할아버지가 매일매일 그 끝도 없는 길을 쓸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쓸어가야 할 길을 내다보면 까마득한 그 길에 기가 질려서 못 쓴대요. 그래서 딱 한 발자국만 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 발자국, 그런 식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을 정성스럽게 쓸어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길을 쓸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주 맑은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쓸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한 십 분이고 이십분이고 쓴 다음에는 앞으로 쓸어 가야 할 그 긴 길을 보는 게 아니고 뒤로 돌아서서 내가 쓸고 온 길을 보는 겁니다. 얼마나 멋있겠어요. 아, 그렇게 지저분했던 길이 깨끗해지는구나. 그러다 보면 그 머나먼 길을 자기가 다 쓸어 낼 수 있다는 겁니다.』(기독교사상 2007년 8월호, 최완택목사, ‘자기 밭을 가는 사람’) 우리가 격주로 지역환경정리를 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시인 박노해의 시집 ‘사람만이 희망이다’ 중에 ‘길 잃은 날의 지혜’라는 시가 있습니다.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 주십시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 주십시오.
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인다고,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작은 것 속에 이미 큰 길로 나가는 빛이 있고,
큰 것은 작은 것들을 비추는 방편일 뿐입니다.
현실 속에 생활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세상을 앞서 사는 희망이 되십시오.
여러분, 땀 흘리는 작은 일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면 천직, 성직처럼 소중한 작은 일을 소홀히 여겼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일에는 늘 함정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땀 흘려야 할 일이 많이 있음을 오히려 행복하게 여겨야 합니다. 잠 12:9의 말씀입니다. 역시 공동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먹을 것 없는 양반보다는 일거리가 있는 상놈이 낫다.”
일이 많은 것, 특히 땀 흘려야 할 일이 많은 것을 천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히려 그 속에 그 어느 누구도 빼앗지 못할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서양 수도원에 가면 서약을 합니다. 수도원에서는 항상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하니까 여러 가지 분야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탁발, 교육, 의료, 설교 같은 것들이 되겠지요. 요한이라는 수사가 있었습니다. 이 수사가 생각해보니까 자기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보니까 ‘수사들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이 밥은 내가 지을 수 있겠다.’ 그래서 부엌데기 수사를 지원했습니다. 밥을 하면서 늘 기도를 하는 겁니다. 밥을 맛있게 해서 동료 수사들이 먹고 힘을 얻어서 하느님을 더 잘 섬길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서 채소 가꾸는 일부터 해서 모든 일을 지극정성으로 했더니 그 수사가 해주는 밥만 먹으면 수사들이 힘을 얻고 얼굴에 웃음이 나오고, 그러다 보니까 세월이 많이 흘러가면서 밥과 자연과 그런 기도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까 아주 탁월한 수사가 된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수사에게 상담을 하러 오는 겁니다. 그 수사하고 얘기를 나누다 보면 문제가 다 풀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원장이 부엌에서 나오라고, 당신 얘기 들어보면 어디 가서 말씀을 전해도 충분한데 말씀을 전하셔야지 언제까지 거기서 그러실 거냐고. 그러나 요한 수사는 말하기를 나는 처음에 하느님께 부엌데기를 하겠다고 서약했으니까 다른 것은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그 수사를 원장으로 앉히려고 했는데도 여든 몇 살이 될 때까지 부엌데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바티칸에서 성자로 모셨다고 합니다.』 (기독교사상 2007년 8월호, 최완택목사, ‘자기 밭을 가는 사람’)
오늘 우리가 읽은 잠 6:6에서 잠언 기자는 말합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야말로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욕심 부리지 않고 자기 일에 충실하게 일하며 부지런히 미래를 위해 땀을 흘립니다. 사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저는 베짱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화가 다 그렇지만, 『동물들이 만약 인지능력이 있다면 뭉쳐가지고 사람들을 박멸하려고 그러지 않겠어요? 베짱이들이 궐기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자기는 하느님이 주신 자기 생리를 갖고 제 나름대로 즐기면서 한 세상 살다 가는데 웬 사람들이 게으른 놈의 상징으로 박아놔서 듣는 베짱이들이 몹시 기분이 나쁘겠어요. 개미들이 빨빨거리며 다니지만 밤엔 잠을 잡니다. 비 오기 전에는 작업을 아주 부지런히 하죠. 집도 보수하고, 대개 곤충들이 그렇게 바쁘게 사는 건 월동 양식 때문이라고 하죠. 1년밖에 못 사는 놈들이 웬 준비를 그리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개미로부터 배우자”는 말인데, 개미한테 배운다는 말이, 바지런 떨라는 말이겠어요? 나는 아니라고 봅니다. 개미들이 비 오기 전에, 집을 보수하고 옮기기 위해 바지런 떠는 것처럼, 일해야 할 때 일하는 모든 동물들처럼, 때를 따라 살라는 말입니다.』(기독교사상 2005년 12월호, 최완택목사, ‘네 분복대로 살아라’) 그래 본문 8절은 말합니다.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그렇습니다. 일도 때가 있습니다. 겨울에 벼농사를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이 자다가 깰 때인지, 엎어져 잘 때인지, 때를 살피자는 이야깁니다. 『나는 야행성 동물들과 살면서 지옥 밑바닥까지 가는 기분입니다. 밤늦게까지 텔레비전 보고 컴퓨터 하고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해요. “지금이 어느 때냐” 이걸 살피자는 겁니다. 로마서에서는 “지금은 자다가 깰 때다”라고 못 박고 있어요. 자다가 깨면 옷을 입어야 합니다. 내가 우리 집 아이를 깨우잖아요, 그러면 이불 속에서 눈만 게슴츠레 뜨고는, “일어났어!” 그럽니다. 그 아이의 기준은 잠에서 깨어서 겨우겨우 눈이라도 뜬 상태가 일어난 상태입니다. 그땐 의식이 제대로 안 깨서 그때 한 말은 기억도 못해요. 진정으로 깨어났다는 것은 의식도 깨고 염치도 알고 부끄러워할 줄도 알아야 하고, 해야 할 일이 뭔지도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비 올 때 개미들은 아주 빠르게 이동하지만 평소 별일 없을 때는 느릿느릿합니다. 개미는 6,000만 년 전에 지구상에 나타났다고 해요. 현재 지구상에 5,000~10,000종이 있는데, 볼록 개미는 25cm까지 된다고 하죠. 열대 지방의 흰개미는 여왕개미의 다리털에 붙어 이동하는 데 여왕개미의 수천분의 일이라고 합니다. 개미는 보통 수캐미, 왕개미, 일개미로 나뉘는데, 수캐미들은 대개 놀고 사는 축들입니다. 때가 되어 여왕개미하고 교미 한 번 하고 나면 수명이 끝나요. 일개미들이 일은 다 하는데, 이놈들은 암컷이지만 번식능력이 없어서 일만 합니다. 여왕개미들 중에서 오래 사는 건 15년씩이나 살기도 한다죠. 일개미를 부려먹고 어루만져주면 되니깐 별로 힘쓸 일이 없는 겁니다. 생존계가 다 그래요. 장닭들도 아침에 노래 한 번 뽑고, 암탉이랑 교미나 해주고, 누가 오면 쪼기나 하고, 무척 편하게 살죠.
문제는 일을 해야 할 여름입니다. 하찮게 여기는 개미들도 때를 알아서 양식을 장만할 때와 추수할 때를 압니다. 옛날 사람들은 분명 지금과 달랐어요. 여름에는 수확을 기다리며 늘어지면 됩니다. 정자나무 아래에서 장기 두고 때 되면 밥 먹고 하면 됩니다. 이것은 게으른 것이 아닙니다. 봄 여름을 충실히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농업이 사라지고 있는 후기 산업사회인 오늘날에서는 전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요. 물러날 때를 모릅니다. 게임을 하기 시작하면 몇날 며칠을 해요. 사흘 내리 게임하다가 죽은 청년도 있다죠. 그게 게으른 겁니다.』 (기독교사상 2005년 12월호, 최완택목사, ‘네 분복대로 살아라’) 본문 10절의 말씀을 되새겨 봅시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좀 더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있자”
그러다가 세월 다 갑니다. 『시간에 대한 대단한 의식 전환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시간 이야기로 봅시다. 때를 안다는 건, 자기가 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지휘한다는 것이고, 그런다면 어찌 가난이 들어오겠어요.
옛날에 어떤 가난한 집이 있는데, 식구들 모조리 게으릅니다. 다들 워낙 가난하니까 부지런해봤자 뭐 달라질 게 있겠냐 싶었겠지요. 그런데 그 막내가 둘러보니까 게으른 게 문제다 싶어집니다. 아버지한테 단도직입적으로 요구를 해요. 내가 가장을 해서 3년 만에 가세를 일으킬 테니 언짢게 생각 말고 가장을 나한테 넘기십시오. 이건 뭐 완전히 이판사판 개판입니다. 그게 사실적으로 가능한지는 따지지 마시고, 들어보세요. 그 막내아들이 가장이 되어서 식구들에게 계엄령을 선포해요. 계엄령 수칙 1조,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날 것. 아침에 일어나서 별 수 없으니 마당이라도 쓸고, 넘어진 뭐라도 세우고 … 며칠새 집이 훤해집니다. 2조,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때는 뭐라도 하나 들고 올 것. 돌멩이, 소똥, 뭐든지 하나씩 집어왔더니 몇 달새 돌멩이도 한 산, 두엄더미도 한 산, 개똥도 한 산이 됩니다.
돌더미로 돌담을 쌓았더니 집 전체가 그럴싸해집니다. 두엄더미로 두엄산을 쌓고, 개똥으로 개똥산을 쌓아 봄이 와서 밭에 두엄과 개똥을 깊이 깔아두었더니 땅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가을에 소출이 많아지고 그렇게 두 해를 더 살다보니 집안이 아주 넉넉해졌다는 이야깁니다.』 (기독교사상 2005년 12월호, 최완택목사, ‘네 분복대로 살아라’)
본문 11절에서 “궁핍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를 따르지 못하고 게으를 때 후회할 틈도 없이 궁핍과 곤핍이 몰려올 것입니다. 때를 따라 사는 지혜가 바로 부지런함입니다. 개미는 본문 7절이 말하듯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이 부지런합니다. 『자기가 지휘관이 되어 시간을 부리는 것이 부지런한 것입니다. 한 번 내일부터라도 일찍 일어나 오늘 살아갈 준비를 해보세요.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면서 하루를 어찌 살지 설계를 해보세요. 오늘 만날 이는 누구누구이고, 그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지 그려보세요. 갑자기 어떤 새로운 것이 일어나서 확 뒤집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지 마세요. 절대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오늘의 모습이 그대로 내일로 가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모여서 삶이 흘러갑니다. 의식이 깨어났으면 잠자리에서 뒹굴지 말고 옷을 입고 신을 신고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기독교사상 2005년 12월호, 최완택목사, ‘네 분복대로 살아라’)
어찌 개미한테서만 배울 것이 있겠습니까? 세상 모두가 스승입니다. 『선악이개오사(善惡而皆吾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악한 것도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니 선생이라는 거죠. 개똥도 내 선생입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강아지 똥에게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좀 보세요. 세상에 하느님이 만드신 창조의 빛나는 세계에 스승 아닌 것이 있겠어요? 지금은 밤이지만 해가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도 선생입니다. 무식한 것들은 밤에 해가 없다고 착각을 하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죠. 밤은 참으로 즐겁고 복된 휴식의 시간입니다. 나이트에서 사이키 돌리면서 정신없이 놀다보면 다음날 해가 뜨고 나서 정신이 없어지겠죠. 』(기독교사상 2007년 7월호 최완택목사, ‘일거리가 있는 상놈’)
여러분, 학교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물이 우리의 스승입니다. 앞서 말한 권정생 선생님은 대단한 분이십니다. 정말 그의 동화 그대로 그는 강아지 똥에게서도 스승의 채취를 느낀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1937년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청송으로 귀국했지만 빈곤으로 인해 가족들과 헤어져 어렸을 때부터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담배장수와 가게의 점원 등을 하였습니다. 결핵에 걸려 늑막염, 폐결핵, 방광결핵, 신장결핵 등을 앓으며 대구, 김천, 상주, 문경을 떠돌며 걸식을 하다가, 1967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에 정착하여 그 마을의 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종지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생들이 하나하나 선생님에게는 스승이었습니다. 마침내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 똥》을 발표하여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아동문학상을 받으며 동화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고,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초 교회 뒤 빌뱅이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짓고 살며 작품을 쓰시다 지난 해 5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삶과 작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자연과 생명, 어린이, 이웃, 북녘 형제에 대한 사랑을 주제로 깜둥 바가지, 벙어리, 바보, 거지, 장애인, 외로운 노인, 시궁창에 떨어져 썩어가는 똘배, 강아지 똥 등 그가 그려내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힘없고 약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죽여 남을 살려냄으로써 결국 자신이 영원히 사는 그리스도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에서 선생님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말하는 성공 실패가 아닙니다. 언제나 배우며 사는 것입니다. 삶의 여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열심히 살아와서가 아니라 게을러 후회가 되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령강림 후 열 째 주일 이 아침, 여름 땀을 흘리는 개미에게서 배운 지혜로 이 여름을 이기고 가을의 풍성한 추수를 거두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오늘 교회 못가서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