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남신문 칼럼 213 (2016. 7. 6. 수)
한반도의 중추 백두대간 지리산 종주(縱走)를 하고
김 윤 호 논설위원, 행정학박사
계절의 여왕 오월도 아쉬움 속에 지나가고 온 산하에 푸르름이 더해가는 6월에 꽤 오랜 세월을 가슴 속에 품어온 꿈 하나를 실현하고자 집을 나섰다. 무엇이나 이것 저것 재고 생각하고 바쁘디고 머뭇거리고 미루다가는 어느새 무심한 세월만 덧없이 흘러가고 몸도 마음도 삭아가고 무력감에 빠지기 쉽다. 이것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가올 미래에도 변함없는 인간사다. 무식해야 용감하다는 말처럼, 백번의 생각이나 말 보다는 단 한 번의 행동과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지난 달 4일, 토요일 저녁 열시에 서울 노원구 공릉역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지리산을 종주하기 위해서 경남 함양을 향해서 달려갔다. 종주(縱走)라는 말은 많이 들었고 전국의 크고 작은 산을 안 올라본 산이 거의 없을 정도이지만, 종주, 그 중에서도 지리산 종주는 처음이다. 종주란 남북으로 뻗어내린 능선을 따라 산을 걸어서 많은 산봉우리를 넘어가는 산행이다. 어느 산의 정상을 향하여 올라서 다시 내려오는 일반적인 등산이나 산행과는 다르다.
특히 지리산은 남한에서 가장 높은 해발 1915m 천왕봉을 정상으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세 도를 아우르고 품어주고 있는 어머니 같은 산이다. 이 넓고 풍부한 지리산에서 얼마나 많은 식물과 동물, 사람들이 자리잡고 살고 있는가. 백두산, 묘향산, 금강산, 태백산, 한라산과 함께 우리 민족의 명산이다.
다음날 새벽 2시, 지리산 중턱 성삼재에서 나누어준 주먹밥 한 개를 먹으니 60여년 전,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이 지리산 산골짜기와 능선에서 서로 싸우면서 주먹밥을 먹던 빨치산과 국군이 생각났다. 영화 ‘남부군’과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장면들이 한참 동안 나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이 같은 하늘을 이고는 살 수가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철천지 원수가 되어서 총탄으로 죽창으로 서로 처참하게 죽이고 죽였던 민족의 비극이 지리산 종주 내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등산복을 입고 주먹밥을 먹고 어둠 속에서 말없이 산길을 오르는 함께 간 산악회 회원들은 모두들 동지요 전사같은 느낌이 들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에서는 얼마나 강렬한 전우애(戰友愛)가 형성될 것인가. 피 보다 진한 전우애일 것이다. 처음 참여하는지라 나는 한 밤중에 출발하는 종주인지를 모르고 손전등이나 지하 수백미터 어두운 갱도에 들어가서 석탄을 캐는 광부들처럼 머리에 다는 전등을 챙기지 못했다. 어느 분의 호의로 여분의 전등을 빌려서 머리에 달고 어둠이 덥힌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을 오르기 얼마 되지 않아서 물을 좋아하는 나는 지리산 깊은 산 속의 청정한 물을 내 몸 속에 넣으려고 약수터에 갔다가 어둠 속에서 미끄러저서 넘어저 손가락에서 피가 나고 팔목에 상처가 났다. 머리에 전등을 달지 안했다면 지리산 종주는 아예 포기하고,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처서 천왕봉을 바로 올라갔다가 그 길로 다시 내려오는 B코스를 택해야 했을 것이다. B코스를 택한 사람이 더 많았다. 내가 택한 A코스는 성삼재에서 출발하여 노고단(2.6km)→ 연하천(10.5km)→ 벽소령(3.5km)→ 세석(평전, 6.3km)→ 장터목(3.4km)→ 천왕봉(1.7km)→ 법계사(2,0km)→ 중산리(3.4km)로 내려오는 약 33.5km 거리로 약 14시간이 소요되는 최장코스이다.
나는 새벽 두 시 반에 성삼재를 출발하여 오후 네 시까지 열세 시간 반을 걸어서 중산리에 도착했다. 아쉽게도 천왕봉은 체력의 한계와 서울 출발 시간의 제약으로 가지 못했다. 세석휴게소에서 6km 거리에 있는 중산리로 바로 내려와야 했다. 내가 걸은 거리는 29km이다. 산길은 한 시간에 평균 2km를 간다고 한다. 열세 시간 반에 29km를 걸었으니 평균은 되는 셈이다. 천왕봉은 다음 기회에 가족과 함께 가기로 생각하고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중산리에서 막걸리 한 잔 걸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지리산 깊고 깊은 산 속에서 자연으로 자라고 있는 수 많은 나무들의 푸른 냄새며, 새벽 맑은 공기, 산골짜기에 이는 안개 바다며 이름모를 산새들의 노래소리, 너무나 아름다운 산라일락과 산벚꽃, 산목련꽃에 정신을 잃다시피 했다. 어느 대피소에서 라면을 나누어 먹고 쉴틈도 없이 걸어다닌 지리산은 위대했다. 지리산 종주를 노래한 나의 자작시 한 편을 여기에 소개한다.
지리산을 종주하고// 새벽 두 시 반 어둠 속에서/ 차가운 밤 공기를 마시며 나누어 준 주먹밥을 먹으니/ 육십여년 전 이 산등성이와 골짜기에서 싸우다가 뼈를 묻은/ 한 많은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지하 수천 미터 좁은 땅굴 속에서/ 검은 석탄을 캐던 광부들처럼/ 앞 머리에 불빛을 달고 비탈진 산길을 밝히며/ 성삼재 노루목을 거처서 높은 산봉우리를 오른다// 어둠에 잠긴 숲길을 땀에 젖어 걸으니/ 맑고 시원한 바람소리 물소리가 온몸을 흠뻑 적시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쏟아질듯한 초롱초롱한 크고 작은 별들이/ 머리 위에서 외로운 산길을 웃으며 따라오고 있다// 저 멀리 겹겹이 포개진 산등성이들 사이로/ 새벽 하늘 붉으스레한 빛이 동터오고/ 길 옆에 늘어선 산라일락 산벚꽃 산목련이/ 꽃봉오리로 맞아주며 하얀 꽃잎을 흩날려서/ 푸른 숲 속에 눈부신 꽃길을 만들어 주었다// 아침 안개와 길동무 되어 함께 걸으니/ 저 아래 흰 구름바다를 이룬 산들이 너무 정겹고/ 모두가 다리가 팍팍하고 주저앉고 싶어도/ 저마다 주어진 운명의 짐을 걸머지고/ 천왕봉을 바라보며 성자처럼 말없이 길을 가고 있다
첫댓글 힘든 어둠을 걸으며 60년전 전사들도 안타갑게 회상하시며 초롱초롱한 별들과 함께 산행하니
동트는 새벽 햇빛의 흰구름 바다를 이룬 정겨운 산들과 함께 푸른 숲속에 꽃봉오리를 마주한 꽃들이 피어
한폭의 수채화속 풍경을 이루는것 같으네요
위대한 지리산 산행 도전 수고하심과 지리산 종주하고 시 잘 읽고 공부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