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규선생 고택 전경
이남규선생고택(충남유형문화재 제 68호)
이남규(李南珪 1855∼1907/철종 6∼순종 1)선생은 1875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1894년 명성황후시해 등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후 의병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아들 충구(忠求)와 함께 일본군에게 피살된 애국지사이다. 이 집은 1911년 현재 주인인 이문원선생의 아버님께서 러시아로 잠시 들어간 동안 서울의 부자에게 넘어가기도 하였지만 후에 다시 매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작은 동산을 배경으로 단아하게 앉혀져 있는 이남규선생의 고택은 이문원선생의 10대조인 한림공 이구에 의하여 1637년에 초창되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상량문에 의하여 1846년에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문원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이 땅은 지금도 "새터"라고 불린다고 하였다. 이 집을 처음 지을 때 "새로 터를 잡았다."는 의미로 지금까지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이렇게 처음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예는 많이 있다. 서울에서도 신촌新村, 새문안, 은평구 신사동新寺洞 등이 그러하다. 이 곳에 터를 잡은 이유는 한산 이씨 집안의 큰 어른으로서 북인의 영수였던 이산해(李山海 1539∼1609/중종 34∼광해군 1) 선생의 묘소가 근처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얼마 전까지도 이 집에서는 이산해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문원선생의 말씀에 의하연 집은 한림공의 부인의 완산 이씨의 주도로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랑채보다는 안채가 더 튼실하게 지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안채와 사랑채 뒷쪽에 있는 것이 사랑채임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로만 이루어져 있고 앞에 문간채가 없는 특이한 구조이다. 이문원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어렸을 때도 문간채는 없었고 사랑채 앞에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문간채가 없었던 것은 꽤 오래 전부터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점 외에도 집의 배치는 다른 곳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집에서 사랑채는 안채보다 전면에 배치된다. 이것은 남녀유별의 관념 때문에 사랑채에서 안채의 출입을 제어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집은 사랑채보다 안채가 앞으로 돌출해 있고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도 사랑채에서 제어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안채가 사랑채보다 우위에 있는 배치이다. 이러한 배치를 볼 때 앞서 한림공의 부인인 완산 이씨의 주도로 집을 지었다는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만 하여도 여자에게 상속이 균등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때여서 여자의 권리가 많이 신장되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배치가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846년 이 집을 다시 지을 때도 한림공의 부인이 지었다는 초창의 배치는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 같다.

사랑채 전경
평원정(平遠亭)이라는 당호가 걸려있는 사랑채는 전후퇴집으로 정면 6칸 규모이다. 사랑채는 전후퇴집의 성격을 잘 살려 방의 효용성을 높였다. 다른 집과는 달리 사랑채의 대청 후면 반 칸은 한자정도 높여놓았고 미서기문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퇴칸에 단을 준 예는 거창의 정온선생댁의 안채에서도 볼 수 있다. 거창 정온선생댁은 제사를 위하여 단을 높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 목적이 불분명하다. 일단 벽장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생활에서는 다양하게 쓰였던 것 같다. 집주인의 증언에 의하면 예전 사랑채가 서당으로 이용되었을 때 선생님이 위에 앉아 가르치셨다고 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사용될 것이었다면 미서기 문을 설치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는 벽장으로 쓰였다가 나중에 그러한 목적으로 변화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랑채 대청에 단이 있음

사랑채 퇴칸의 보아지
사랑채는 매우 품격이 높게 지어졌다. 초석도 방형초석을 사용하였고 집의 구조가 굴도리집이지만 보아지를 초각함으로서 마치 익공집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하였다. 초각을 한 솜씨가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 민가에서 지을 수 없는 초각을 하였다는 것만으로도 파격적인 구조라고 생각된다. 당시에 이러한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집을 지을 때 이남규선생댁은 매우 권세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한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역시 멋들어진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사람이 지나 다니는 것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하인방을 휘어진 부재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나 상인방도 그렇게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상인방도 휘어진 부재로 사용하여 마치 원형의 문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도록 멋을 부렸다. 중문은 꺾어 들어가게 되어 있어 내외벽의 구실을 하고 있다. 안채는 중문간을 ㅡ자 형으로 전면에 배치하고 안채를 ㄷ자 형태로 감쌈으로서 전체적으로 튼 ㅁ자 형태를 하고 있다.

안채 전경
안채의 방의 배치는 일반적인 배치와는 다른 모습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서쪽에 안방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곳에서는 동쪽에 안방이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서쪽에 안방을 배치하는 것은 주로 주자가례에서 정침의 오른쪽에 사당을 배치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사당과 떨어져 안방을 배치하다보니 대부분 사당의 반대쪽인 서쪽에 안방을 배치를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랑채가 서쪽에 배치되었고, 그리고 사당을 만들지 않고 사랑채와 가까운 건넌방 쪽을 제실로 만들었기 때문에 안방을 동쪽에 배치한 것이다.
안채의 건넌방 쪽은 북쪽 한 칸을 제실로 사용하고 있고 그 앞에 제청으로 사용하는 마루가 두 칸 배치되었다. 대청을 중심으로 제실과 마주하여 건넌방이 배치되어 있다. 제실의 구조를 보면 제실의 북쪽 벽에 돌출된 벽장을 만들어 사대조의 위패를 모시게 하였으며 서쪽 벽에 별도로 벽장을 만들어 이산해선생의 영정을 모시도록 하였다. 지금은 이산해선생의 제사가 종가로 넘어갔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도 이산해 선생의 제사를 이곳에서 모셨다고 한다. 제실 앞의 대청과 사랑채의 전면 퇴칸과 직접 연결되도록 안채 외측 담에 일각문을 설치하였다. 일제시대 이 집이 서울의 부자집의 별장으로 쓰였을 때는 지붕을 씌운 회랑을 설치하여 비를 맞지 않고 다닐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 주인의 아버님이 다시 이 집을 사서 들어올 때 과거의 모습대로 만든다고 하여 해방 후 회랑을 철거하였다고 한다.

안채 제실 내부
이 일각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제청과 건넌방으로 들어설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건넌방 이외의 곳으로 다닐 수 없도록 다른 마당으로 통하는 곳은 모두 담으로 막아 놓았다. 이렇게 한 것은 제실이 신성한 곳이므로 아무나 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 생각된다. 안채 역시 기둥의 보아지를 초각으로 장식하였으며, 대청의 전면 지붕을 겹처마로 만들었다. 일반 사가에서 초각을 사용하는 것과 겹처마를 쓰는 것은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겹처마를 사용한 것은 사랑채와 함께 이 집의 권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대청은 여섯간으로서 그야말로 대가의 상징인 "육간대청"집이다. 사랑채도 그러하지만 안채도 기단을 높여 권위를 더하였다. 원기둥만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당시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사치를 다한 집이다.
현재 비어있는 안채 동쪽마당에는 원래는 찬광과 나무간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물도 원래는 없었다고 한다. 저수지가 세워지기 전에는 계곡 위에서 흐르는 물을 끌어들여 식수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주인의 말로는 예전에 400석 정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랑채에는 공부를 핑계로 늘 식객이 많아 생활이 넉넉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과연 지금 우리의 부자들은 어떠한가. 한 신문의 조사에 의하면 월수 400만원이 넘는 고소득자 중 일년 내내 한푼도 기부하지 않는 사람이 반의 넘는다고 한다. 과거의 양반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베푸는 것이 있었는데 이제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추신 :
이 곳에서 저수지 너머로 조금만 가면 충남유형문화재 83호로 지정된 이광임선생고택이 있다. 이 집보다 34년 후에 지어진 집으로서 여러모로 이 집과 비교되는 집이다. 배치는 이 집과 완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목재가 상대적으로 넉넉하지 못하여 품격은 떨어지지만 사랑채의 구성이 이 집과 비슷하고 구조의 기법 등도 비슷하여 찬찬히 비교하여 보면 집에 대한 안목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또한 이 집에서 저수지 쪽으로 있는 밭으로 조금 더 가면 저수지 댐 바로 아래쪽에 충남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는 예산 상항리 석불이 있다. 그야말로 지방의 촌부들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민속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꼭 들러볼 가치가 있는 석불이다.

상항리 석불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멋진 사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조정 부탁드립니다. *^^*
수정하였습니다.
사랑채에 있는 단이 제사때 사용했던 단이 맞을것입니다. 함양에서 어떤 고택에서도 이런 형태가 있었는데, 집주인께서 제사때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함양에서 본 모습은 단 뒤로 문이 열려지게 되어 있고, 왼쪽은 부엌 오른쪽은 방으로 통하도록 문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단의 북동쪽에는 사당이 있었구요. (선생님이 올리신 저 사진도 제사를 지냈던 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그런데 저기 어떻게 가나요? 저도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박현희님//찾아간 집이 함양의 어느 고택인지 알고 싶습니다. 본문에 소개한 바와 같이 함양 인근의 거창 정온선생댁도 같은 구조입니다. 종부의 증언으로 제사를 위해 단을 두었다고 합니다. 저도 단을 둔 것이 제사와 관계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곳도 반드시 그렇다고 추정하기에는 아직 애매합니다. 집주인의 말씀으로는 제사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니 최소한 현재 집주인이 어렸을 때인 1940년대부터는 제사를 드린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 주인의 아버님 대에도 제사용도로 사용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1900년 초부터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사의 용도라고 감히 말씀드리지 않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