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장경사
남한산성 안에 있는 절이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도성(서울)을 지키던 산성으로 장경사는 남한산성을 지을 당시인 조선 인조 16년(1638)에 세웠다. 전국8도의 승려들을 모집하여 산성 짓는 것을 도왔는데, 이때 승군(僧軍)들이 훈련을 받으며 머무르던 9개의 절 중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절이다.
절에 있는 건물로는 대웅전, 삼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조선시대 승병들이 나라를 위해 활동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장경사 진신사리탑
장경사 대웅전
대웅전은 조선 후기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된 3칸 동향(東向) 건물이다.
대웅전에 걸려있는 주련의 글
온 누리 티끌 세어 알고서 큰 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
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 부처님 공덕 말다 못하리
장경사 전경
망월사
장경사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9개 사찰중 가장 오래된 고찰로 망월암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이사찰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을 정할 때 한양에 있었던 장의사를 허물고 그 불상과 금자 화엄경 한벌, 금정 하나를 이리로 옮겨 창건하였다고 한다.
옛 망월사는 일제에 의하여 모두 소실되었고 4종의 복원된 건물의 규모가 옛터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대웅전, 금당, 요사체 2동, 13층 적멸보궁탑과 병풍석은 망월사의 자랑이다.
망월사지: 경기도 기념물 제111호
이 절터는 원래 남한산성 내에 있는 9개 절 중 가장 먼저 건립된 사찰.
망월사 극락보전
망월사 대웅보전
망월사 진신사리13층 석탑
거대하고 웅장하게 조성되었습니다.
극락보전 풍경과 남한산의 전경
개원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다. 장경사, 망월사와 더불어 국가문화재 사적 5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남한산성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인조 때 임진왜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새롭게 보수는 일이 있었다. 이때 인조는 선종 지도자 벽암 각성을 팔도 도총섭으로 임명하고 승군을 모아 남한산성을 보수하게 했다. 남한산성은 전적으로 승군에 의해 보수되게 되었고, 산성의 보수 및 방어의 역할 역시 승군에게 주어졌다. 이를 계기로 1624년에 개원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후 남한산성 안에는 승군이 주둔할 7개의 사찰을 더 창건하게 되었고, 이 모든 승군의 본영 사찰로 개원사가 활용되었다. 이로써 개원사는 한양을 지키는 호국사찰의 중심이 되었고, 폐사되기 이전까지 조선불교의 중심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1894년에 들어와 승번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는 1907년에 들어와 일제가 남한산성 안에 위치한 사찰들이 화약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찰들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장경사에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개원사는 이때 폐사가 된 듯하며, 1909년에 개원사의 루를 장경사로 이건했다.
현재 개원사는 경기도 시도기념물 11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경내에는 비록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으나, 매우 수준 높은 성보문화재들이 보존되어 전하고 있다. 개중에는 17세기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 역시 있어 인조 때 개원사가 건립되기 이전부터 이곳에 혹은 주위에 커다란 사찰이 경영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화현전에 모신 약사여래불, 불유각에 모신 석불, 또한 외부에 따로 불단을 조성하고 모신 석가모니불 등은 오랜 세월동안 승군의 중심사찰 역할을 해온 개원사의 역사를 조용히 얘기해주고 있다.
개원사 일주문
개원사 화현전
개원사 전경
개원사 불유각
개원사 불유각내 석불입상
개원사 대각전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남한산성 제2남옹성
남단사지
남장대를 중심으로 남옹성을 방어하며 남한산성 동남쪽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남한산성 수축 때 승군 총지휘관인 동총섭을 두어 성을 축성할 때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할 수 있는 군막사찰의 역할을 하였다.
남장대에서 북동쪽으로 228m 지점의 해발 397m 지점에 있다. 이곳은 개원사에서도 거의 같은 거리에 있으나 개원사에 비해 약 80m 정도 해발고도가 높아 남장대쪽에서 접근하기가 수월하다. 승군은 고종 때까지 유지되었고, 사찰은 1907년 8월 1일 일제가 조선인의 무기 및 화약 수거 때 폭파하였다. 현재 남단사에 관한 특별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남한산성 남단사지에서 독경및 참배
한흥사지
동쪽으로 315m 지점의 해발 4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남쪽성벽의 10암문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77m 지점으로 역시 남쪽성벽에서 접근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한흥사' 라는 이름에 대하여는 벽암대사가 처음 이름을 지을 때 우리나라가 크게 흥할 것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사찰은 1907년 8월 1일 일제가 조선인의 무기 및 화약 수거 때 푹파하였다.
남한산성 한흥사지
남한산성 동문(좌익문)
영원사지
16암문에서 남쪽으로 210m, 큰골 굿 당에서 동쪽을 140m 정도거리의 해발 325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남한산성에는 북사사(北四寺)와 남오사(南五寺) 가 있었다고 하는데 북사사란 장경사, 망월사, 동림사, 옥정사를 말하고 남오사는 개원사, 한흥사, 남단사, 천주사, 국청사를 말한다.
영원사는 이 9사에 포함되지 않는다. 영원사는 성내의 9사와 마찬가지로 한봉성을 수어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 벌봉
동림사지
남한산성 동림사지는 동장대지에서 서북쪽으로 421m 거리의 해발 465m 지점에 위치한다.
동림사는 인조 2년(1624) 처음 세워졌으며, 남한산성 내 다른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산성
건설을 위해 모인 승군들의 거쳐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다산 정약용이 말년에 자주 찾던 사찰 이었다고 전한다
남한산성 동림사지
남한산성 옥정사지
옥정사지
남한산성에 옥정사가 있던 곳으로 산성 수축 이전부터 있었던 사찰이었으며 절 뒤에 가뭄에도 마르지 않은 우물이 옥 같은 샘물이 나온다 하여 옥정사라 했다는 말인데 산성 수축 때부터 징집된 승군(僧軍)의 숙식과 훈련을 할 수 있는 군막사찰(軍幕寺刹)의 역활을 했으며 승군은 고종 때까지 유지되었고 사찰은 일제(日帝)가 조선인의 무기와 화약 수거 때 폭파했다. 지금은 맷돌 하나만 남아있다.
남한산성 제1군포터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남한산성 서문(우익문)
남한산성 국청사
국청사 대웅전
국청사 천불전
국청사 전경
국청사지
서문에서 남동쪽으로 228m지점의 해발 44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절이 있는 곳은 사지에서 북쪽으로 140m 지점인데 이절은 한국전쟁 이후 새로 지은 절이다.
당초의 국청사는 누각 앞에 못이 있었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겹처마 지붕의 천장을 만들고, 그 천장안에서 화약을 제조하였다고 한다. 원래의 사찰은 을사보호조약 이후까지 의병의 군기고 쓰이다가 일제의 무기 및 화약수거 때인 1907년 8월 1일 폭파 되었다.
남한산성 국청사지
남한산성 수어장대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으로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 이곳인 청량산에있다. 성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 하게 지어졌으며 왼쪽에는 사당인 청량단이 있다.
뒤쪽에는 2개의 우물이 있어 병사들에게 물을 제공 하였고 인조 2년 (1624년) 남한산성 축성때 단층누각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1751년) 유수 이기진 이 왕명을 부하 2층 누각으로 다시 쌓고 수어장대라는 면액을 달았다.
특히 병자호란때에는 인조가 친히 군사들을 지위, 격려 하며 45일간 항쟁 하던 것이다. 수어장대는 아래층이 정면 5칸 측면 3칸 위층이 정면 3칸 측면 2칸이 팔각지붕 양식인 2층 누각 이다.
지붕은 위아래 모두 겹처마를 들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면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높이는 60cm의 팔각 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 일공식이다.
천주사지
천주사지(天柱寺址)는 남한산성 수축시 승군(僧軍) 총지휘관인 도총섭(都摠攝)을 두어 전국 승군을 징집 축성케 하므로 징집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할 수 있는 군막사찰(軍幕寺刹)의 역할을 하였으며, 승군은 고종 때 까지 유지되었고 사찰은 일제가 조선인의 무기 및 화약수거 때 폭파하였다고 한다.
남한산성 천주사지
절터 순례를 마지막으로 천주사지에서 회향하였습니다.
첫댓글 감상 잘했습니다!